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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권 재벌의 천재 손자가 되었다-43화 (43/477)

제43화 한 개라도 마이너스면 꽝입니다, 꽝(1)

오늘은 1996년 12월 31일.

1996년의 마지막 날이며 오후에 미레도홀딩스 BW에 대한 법원 판결이 있는 날이다.

톡톡톡.

탁탁탁.

팔랑.

사각사각사각.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적막한 경제정책연구실에서 들리는 몇 가지 소음.

톡톡톡, 탁탁탁, 파알랑, 사각사각사각.

톡톡톡, 탁탁탁, 파알랑, 사각사각사각.

마치 곡을 연주하듯이 들렸다.

그것참. 묘하게 안정이 되네.

재준은 그 소리가 참 좋아서 잠시 눈을 감았다.

계산기를 두드리는 소리.

키보드를 치는 소리.

책장 넘어가는 소리.

연필로 끼적이는 소리.

사무실에 울려 퍼지는 그 소리는 오케스트라의 선율처럼 서로 부딪치고 어울리며 신기하게 리듬감까지 실려 있었다.

소음도 때로는 음악이 되듯이 하찮은 우리의 능력이 하나하나 모이······.

“팀장님.”

헉, 깜짝이야.

재준은 살며시 실눈을 뜨자, 사무보조원이 신문 스크랩 파일을 들고 서 있었다.

밝고 묘한 미소를 지은 채로.

헛짓거리 그만하고 일이나 하라는 그 표정은 뭐냐!

재준은 손을 내밀어 스크랩 파일을 받았다.

살짝 고맙다는 미소도 잊지 않았고.

이제 갓 상고를 졸업한 직원.

마땅히 자신을 포함해 동기들에게 ‘누구누구 씨’라 해야 하는데 어린 나이가 쑥스러운지 모든 직원들에게 ‘팀장님’이라고 불렀다.

“부탁하신 미레도홀딩스 BW 관련 신문 기사는 모두 정리했습니다.”

“고마워요.”

“필요하신 일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해 주세요.”

싹싹하고 씩씩하고.

상업고등학교.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단어, 상고.

학교가 중요한 게 아니지.

중요한 건 저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원이 정직원이라는 거.

이 당시엔 비정규직이란 용어 자체가 없었으니까.

2022년에는 도저히 상상이 안 가는 일이다.

재준은 스크랩된 파일을 한 장, 한 장 살펴보았다.

[미레도홀딩스의 BW가 발행되자 일곱 군데 기업에서 선매.]

슬슬 전경련의 압박이 통했나 보네.

대한 그룹으로서도 BW 말고는 다른 길은 없을 테니까.

BW(신주인수권부사채).

이 채권을 취득한 기업은 평소엔 채권의 이자를 받을 수 있다.

BW 발행 기업의 주식 가치가 상승하고 있을 경우, 주식으로 전환을 요청하면 새로운 주식을 발행해서 받게 된다.

신주가 발행되면 기업으로선 지배력이 약화되긴 하지만 더는 이자를 주지 않는 장점도 있다.

어쨌든 채권이니까 대한 그룹에 큰돈이 들어간다.

서랍을 열자 돈이 차는 그림이다.

다음 뉴스는.

[선동방, BW 의결권 제한 소송.]

의결권 제한 소송은 당연히 각오했다.

날로 먹을 찰나에 초 치고 들어온 놈을 가만히 보고 있을 놈은 없으니까.

의결권을 제한하면 주식을 가지고 있어도 권리를 행사하지 못한다.

즉 지분 싸움에 들러리나 서야 한다.

대기업이 끼어들었으니 선동방은 대기업이 이익을 취하는 걸 막을 수 없다.

하지만 의결권 제한 소송은 ‘이익은 취하게 두되 권리는 줄 수 없다’는 선동방의 공격이자 방어였다.

1996년 대한민국 상법에는 신주인수권부사채에 관한 규정이 미비했다.

여의도에선 이번 일에 촉각을 세웠다.

신주인수권부사채를 알기는 아는데 이걸로 뭘 할 수 있지?

채권이긴 한데 이자를 좀 적게 주는 채권 아닌가?

이런 걸 왜 발행하는데?

뭐, 대한민국 법이라는 게 어느 나라 법을 그대로 차용하다 보니 있기는 있는데 거의 발행한 적이 없었다.

법정 공방이 벌어질 것이다.

그것도 12월 31일에.

법원도 껄끄러운 사건은 올해에 털고 가겠다는 생각인가 보다.

재준은 이무열을 불렀다.

재벌들의 공방전을 눈앞에서 보면, 법을 전공한 이무열에게 큰 도움이 될 테니까.

“우리보고 법정에 가라고요?”

“네. 거기 의외로 재밌어요.”

“설마?”

“진짜!”

“아니, 근데, 외부 일은 재준 씨가 다 처리하는 거 아니었나요?”

“외부 일을 다? 나 혼자? 내가 무슨 슈퍼맨입니까? 밖의 일을 혼자 다 처리하게.”

“아니었나요?”

“당연히 아니죠. 전 정 실장님과 회장님만 커버하기도 벅차요.”

“법정은 가기 좀 껄끄러운데…….”

“죄지었어요?”

“그런 건 아니고. 암튼 긴장되거든요.”

“무열 씨. 법학 전공했잖아요. 법원에 한 번도 안 가봤어요?”

“안 가봤는데요.”

“이거 민사라 재밌다니까.”

“민사인 건 저도 알아요. 하지만…….”

재준은 이무열을 멍하니 바라봤다.

히키코모리?

아닌가? 그럼 방구석 공붓벌레?

“저랑 같이 가시죠.”

차분한 성격의 부동산 전문 박승하가 나섰다.

“승하 씨는 경험 있어요?”

“저야 아주 많죠. 법원 경매는 제 놀이터고 민사 재판도 자주 가봤습니다.”

“아, 인재가 여기 있었네.”

“그래요? 승하 씨랑 같이 간다면 안심이 되네요. 전 혼자 가서 멍때리다 오면 어쩌나 했는데.”

“아니, 아니. 그래서 지금 둘이 자리를 비우겠다?”

“그럼, 안 되나요?”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저벅. 저벅. 저벅.

“그럼 우리도 갈래요.”

김혜림과 최진기도 나섰다.

헉!

이 사람들이 정말!

일은 안 해? 일!

“재판 끝나면 우리 술도 한잔해요. 올해 마지막 날이잖아요.”

“그거 좋은데요.”

“그동안 너무 일만 했어요.”

“좋은 생각입니다. 어때요? 재준 씨.”

이런 놀라운 인간들.

“전 할 일이 있는데.”

“무슨 일이요? 오늘 법원 판결 나면 다 끝나는 거 아닌가요?”

“맞아요. BW만 통과되면 선동방 쪽은 백긴데.”

“뉴월드는 그랜드월 때문에 조금 시간이 있고.”

너희들한테는 끝이지만.

나한테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있단다.

난 이제부터 대기업에 분할된 BW를 소리 소문 없이 인수하고, 팔아먹을 대한 그룹 계열사도 분석해야 하고, 미국에 법인 하나 만들 준비도 해야 하고, 천 실장이 찾은 도매은행 몇 군데 재무제표도 봐야 하고, 다른 그룹 먹을 준비도 해야 하거든.

뭐야, 그러고 보니 뭐가 이렇게 할 일이 많아.

“재준 씨, 정말 시간 못 내요? 오랜만에 다 같이 이야기도 좀 해요.”

하하하.

너희들끼리 재미나게 놀아.

난 일해야 한단다.

아, 갑자기 인생이 싫어진다.

재벌이 뭐 이래!

하여튼 재준을 남겨두고 네 명은 회사를 나가 법원으로 갔다.

***

서울중앙지방법원.

박승하와 이무열이 좌측 방청객에, 최진기와 김혜림은 우측에 앉았다.

박승하가 시작 전 이무열에게 속삭였다.

“대한 그룹이 20%, 선동방이 28%의 지분을 확보한 상태 맞죠? BW가 행사되면 20%의 주식이 추가로 발행될 테고. 아무래도 선동방이 대한을 이기기 힘들겠죠?”

“주식이 추가 발행돼서 지분율이 조정되겠지만 대략 40대 28이면 끝난 거죠.”

“이번 재판이 미레도홀딩스 이사회에서 BW 소유주가 의결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하는 가처분 재판이잖아요.”

“네. 의결권이 제한되면 선동방의 지분이 앞서겠지만, 재준 씨는 이기기 힘들다고 했어요.”

“재준 씨가 그렇다면. 뭐.”

주총에서 의결권이 제한되면 찬반 손들기에 참여하지 못한다.

그냥 멍때리다 기념품이나 챙겨 와야 한다.

여담이지만, 이 당시 주총에선 도자기 세트나 도기 세트 같은 꽤 비싼 기념품을 주었다.

하지만 1주만 들고 오는 주주가 늘어나면서 1999년부터 치약 세트로 질이 뚝 떨어졌다.

박승하와 이무열은 방청석에 앉아 재판을 기다렸다.

이무열의 손에는 재준이 적어준 메모가 있었다.

-이거 양측 변호인단의 주장을 예상해 본 겁니다. 혹시, 틀린 점이 있으면 나중에 알려주세요.

“승하 씨, 정말 재준 씨 예측대로 변호사들이 말할까요?”

“재준 씨가 틀린 적은 없잖아요. 무열 씨도 법을 전공했으니 한번 예측해 보세요.”

“그래 보려고요.”

이무열은 재준이 떠올랐다.

‘……재준 씨는 항상 확신에 차 있어. 법을 전공하면 뭐해. 적용한 적이 없는데.’

터벅터벅.

발소리가 법정의 적막을 깨자, 법원 경위가 일어났다.

그리고 절도 있는 목소리로 사람들에게 외쳤다.

“재판이 시작됩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서 주십시오.”

양측의 변호인단과 방청객이 모두 일어났고, 변호인들은 자세를 단정히 했다.

판사가 걸어와 자리에 앉았다.

흰머리가 드문드문 보였고, 범상치 않은 기가 흘러나와 법정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모두 착석해 주십시오.”

경의의 말에 사람들은 자리에 앉았다.

“지금부터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부 재판을 진행하겠습니다. 원고 측 대리인 나오셨나요?”

“원고 소송대리인 윤재수, 박경철 변호사 출석했습니다.”

“피고 소송대리인 나오셨나요?”

“피고 소송대리인 최판석, 김해수 변호사 출석했습니다.”

양측 변호인단을 보며 이무열이 박승하에게 소곤댔다.

“원고는 선동방 그룹이고 피고는 대한 그룹이지요?”

“네.”

“피고 측 변호사들이 SS전자와 HD자동차 법무팀에서 지원 나온 변호사라고 하던데.”

“맞아요. 법원에 들어올 때 기자들 엄청 붙던데. 굉장한 사람들인가 봐요.”

전경련 손 회장이 대기업의 법무팀에 에이스를 요청했고, 대한 그룹은 SS전자 법무팀의 최판석 변호사와 HD자동차의 김해수 변호사를 소송대리인으로 내세웠다.

“원고 신청취지를 말해보세요.”

판사의 말에 선동방 측 윤재수 변호사가 일어섰다.

“존경하는 재판관님, 피고 측인 미레도홀딩스 주식회사는 미비한 법의 허점을 노려 신주인수권부사채를 발행했습니다. 이는 시장에 존재하는 지분 비율을 역전시키고자 만들어낸 편법으로, 만약 신주인수권부사채가 주식으로 전환될 시 현존하는 지분이 역전될 것이 분명합니다. 또한, 기존 주주들에게 큰 타격을 입히게 됩니다. 이에 신주인수권부사채로 전환되는 주식에 대한 의결권 행사는 금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판사는 피고 측을 바라보며 말했다.

“피고 측 반론하세요.”

“네.”

피고 측, 대한 그룹 측 김해수 변호사가 일어났다.

“존경하는 재판관님. 원고 측은 미레도홀딩스가 발행한 신주인수권부사채의 목적을 잘못 인지하고 있습니다. 3월 15일 발행된 신주인수권부사채는 현재 타결 직전에 있는 카자흐스탄 밀의 수입을 위한 예수금 목적입니다. 자칫 예수금 부족으로 거래처에 불신을 주지 않기 위함입니다. 지금 원고 측이 말한 적대적 M&A를 위한 조치는 아닙니다. 실제로 현재증권의 위임으로 피고 측 우호지분이 원고 측 지분을 앞서고 있습니다. 이를 참작해 주셨으면 합니다.”

피고 측은 대한 그룹이 충분히 방어에 성공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판사는 자신 앞에 놓여있는 증거 자료들을 뒤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증권이 대한 그룹을 지지한다는 내용이었다.

“원고와 피고의 주장에 따르면, 대한 그룹의 신주인수권부사채 발행 목적이 시장 비율에 정당하게 작용하는가, 이것이 쟁점으로 보입니다. 원고 측, 피고 측, 동의하십니까?”

“동의합니다.”

“동의합니다.”

이야기를 괜히 시장이냐 투자자 어쩌고 하면서 산으로 끌고 가지 말라는 경고였다.

판사는 양쪽 변호인을 주시한 뒤 말했다.

“그럼 원고 측, 미레도홀딩스가 발행한 신주인수권부사채의 목적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하는 이유를 말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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