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화 한 푼도 못 건지고 떠나게 하겠습니다(2)
추가 대출에 격분한 전경련 손 회장은 급하게 기자회견을 열었다.
[저와 대한민국 재계는 선동방 그룹의 적대적 M&A를 반대합니다. 저희는 외국인 자본과 손잡고 대한민국 국부를 해외에 유출하려는 시도를 강력하게 규탄하는 바입니다. 전경련은 어떤 방법이라도 강구하여 강도 높은 대책을 마련할 것입니다.]
TV 화면 속의 전경련 손병수 회장은 죽음을 초월한 결연한 표정과 어조로 기자회견을 하고 있었다.
틱.
정 실장이 리모컨으로 TV를 끄자 임병달 회장이 재준을 돌아보았다.
“어찌 되겠느냐?”
“하하, 저렇게 손 회장님이 격분하면 국민 여론도 적대적 M&A를 안 좋게 볼 것 같은데요. 선동방 그룹과 그랜드월의 명분이 희석되고 있습니다. 손 회장님 시기를 잘 맞추셨는데요.”
“너는 손 회장이 일부러 기자회견을 열었다고 보는 게냐?”
“네. 여론을 잘 이용하신 것 같습니다. 선동방 그룹은 식품 회사가 모체입니다. 부동의 1위 상품인 ‘해범 식용유’가 대표적이잖아요. 그러니 부정적인 이미지가 생기면 그룹 전체가 흔들릴 가능성이 있어서 모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명분 없이는 불가능하겠죠.”
해범 식용유 아직도 나오는데.
기업은 망해도 상품은 영원한 법이다.
“그럼 이제 우리가 움직일 차례인가.”
“아직은 당분간 지켜봐야 합니다.”
“자금이 돌지 않는 기업들이 점점 많아져. 은행들도 더는 대출을 내주기 힘들 거야. 정말로 네 말대로 진행되고 있구나. 어쨌든 여기에 쐐기를 박자는 말이지?”
“네. 할아버지.”
“정 실장. 대담은 어찌 됐지?”
“내일부터 진행할 겁니다.”
“허, 거참. 재준이 네가 하라고 해서 한다만, 거, 영 껄끄러워.”
“이 기회에 건강한 할아버지 모습을 보여 줘야지요.”
“그러긴 하겠지만. 나, 이거 쑥스러워서 원.”
할아버지!!
그래야 국민이 현재증권을 기억한다니까요.
***
경제 학술지 주최로 현재증권 임병달 회장은 몇몇 권위 있는 경제학자와 대담을 하였다.
그 대담이 보도 자료로 쏟아지자 각계각층은 기다렸다는 듯이 기름을 부어댔고 대출에 대한 이슈는 활활 타올랐다.
[경제학자 000, 은행들의 무분별한 대출 전격 비판]
[서울 대학교 경영학과 교수 000, “외국 자본의 대한민국 진출, 국제 기준에 맞는 재무제표를 작성해야” 강조]
[시민 사회 대표 000, “인맥으로 사업성이 불투명한 투자를 하거나 이유 없는 대출이 있다면 주주총회를 열어 의문을 제기해야”]
[현재증권 임병달 회장, “분식회계는 사라져야 하고, 금융권 자체적으로 투자처를 찾아 공격적인 투자를 진행해야.. 기업들을 향한 불법 대출은 경제 위기를 초래할 뿐”]
이렇게 뉴스와 일간지로 넘어와 여운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동안 전전긍긍하던 금융계가 여론에 힘입어 ‘추가 대출 금지’ 결의를 다지는 계기까지 만들어 주었다.
***
“할아버지.”
“그래, 와서 앉아라. 정 실장도 앉고.”
임병달이 상석에 앉자 재준과 정 실장이 마주 보며 앉았다.
“손 회장은 10분 내로 도착한다더라.”
“그럼 시간이 있네요. 할아버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데. 말해 봐라.”
재준은 지난번 박 회장을 만나면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박 회장의 말.
-어찌 지 애비 같은 짓만 골라서 할까.
임재준의 아버지 임석훈.
재준이 정 실장에게 듣고 상상한 것은 곧고 바른 이미지였는데 박 회장의 한마디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혹시 재준의 아버지 임석훈도, 망나니?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네 애비 말이냐?”
“네.”
음.
임병달은 무척 난감한 듯 손으로 턱을 괴고 소파에 등을 기댔다.
“내 앞에서야 말 잘 듣고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었다. 회사에 나가서도 야근과 철야를 밥 먹듯 했고. 마흔도 안 돼서 사장 자리에 앉아 현재증권을 이만큼 일으켜 세웠지. 아주 훌륭했다.”
재준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할아버지 앞에서 아버지는 속내를 드러내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너무 반듯한 삶이잖아요. 화가 나거나 기쁠 때 슬플 때도 없는 인간 같아요. 맞나요? 정 실장님.”
재준이 정 실장을 바라봤다.
정 실장은 임석훈과 중학교부터 붙어 다닌 둘도 없는 친구라고 했다.
할아버지에게 보이지 않았던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까.
그 부분에 대해선 임병달도 궁금한지 정 실장에게 시선을 향했다.
그래, 넌 알 수 있겠네.
“정 실장. 재준이 말대로 내 아들 석훈이는 어땠는가?”
정 실장이 임병달을 덤덤하게 쳐다보았다.
“회장님이 모르시는 부분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가 모르는 부분…….’
지금은 재벌 소리 들으며 여러 사람을 아래에 두었다.
재준이의 일거수일투족을 관리하는 서형길 실장을 둘 정도로.
하지만 자신의 아들 임석훈에겐 그러지 못했다.
그때는 작은 사업체라 그럴 여유가 없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한국에 있지도 않았다.
1966년 작은 설비회사를 정리하고 함진상사를 따라 베트남으로 건너가 6년 만에 엄청난 달러를 들고 돌아왔다.
이제 행복한 가정을 꾸리나 싶었는데,
1969년 증권 금융 주식 파동으로 인해, 매수 진형과 매도 진형의 매매 공방으로 수십 개의 증권회사가 쓰러졌다.
임병달은 베트남에서 들었던 선진국의 실상을 보고 증권회사 하나를 사들였다.
임병달은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바빴다.
아들 임석훈은 아버지의 돌봄을 받지 못했다.
1972년 8월 3일 자정을 기해 대통령 긴급명령권을 발동하여 기업의 사채를 동결하고 금리를 인하하는 초법적인 조치가 내려졌다.
연이은 기업공개를 맡은 현재증권은 삽시간에 금융계에 두각을 드러냈다.
그러나 현재증권의 성공은 서른이 다 되어가는 임석훈을 미국 유학길로 떠밀었다.
7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서 치러진 정략결혼.
그리고 회사 사장에 취임.
그리고 낳은 아들.
그리고 교통사고로 인한 죽음.
임병달은 스쳐 지나가는 아들의 기억을 더듬었지만 생각나는 게 거의 없었다.
정 실장의 말이 이어졌다.
“석훈이는 싸움을 잘했습니다.”
아버지가 싸움을 잘했다고?
“하지만 시비를 걸고 다니는 동네 불량배는 아니었습니다. 꾸준히 여러 운동을 배웠습니다. 제가 보기엔 자신을 다스리는 수단으로 운동을 했습니다.”
“운동을 했구나…….”
뒷말은 말을 하지 않아도 들리는 듯했다.
‘정말 몰랐다.’라고.
“그리고 결혼을 빨리하고 싶어 했습니다. 10년을 사귄 여자가 있었거든요. 하지만 유학을 가면서 헤어졌습니다.”
아, 괜히 얘기 꺼냈어.
아버지 삶이 너무 아프다.
큰일인데. 할아버지 봐.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리실 것 같아.
어, 어. 정 실장님까지 왜 그러세요.
이쯤에서 화제를 돌려야겠다.
“실은 제가 대한 그룹 박 회장을 만났는데 제가 아버지처럼 행동한다고 했습니다. 정 실장님, 이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건 아마도 집요함 때문일 겁니다. 도련님의 아버지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반드시 이루어냈으니까요. 12층의 경제정책연구실을 만들 때도 전부 불가능하다 했는데 될 때까지 파고들었습니다.”
“혹시 제가 아버지를 닮았나요?”
재준의 말에 임병달과 정 실장은 둘 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많이 다르지.”
“반대 아닐까요?”
둘이 동시에 재준을 임석훈의 성격과 비교할 수도 없다는 듯 선을 그었다.
“그런가요?”
“하지만 요즘 도련님한테서 예전 석훈이 성격이 가끔 보이긴 합니다.”
“혹시, 아버지가 스캘핑도 잘하셨나요?”
정말, 혹시나 해서 물어봤다.
“잘하셨습니다. 지금의 강호석보다 훨씬.”
“네.”
무얼까…….
재준이 된 이후부터 일을 처리하는 데 여러 인격이 섞인 듯한 느낌.
임재준이 아버지 임석훈에게 물려받은 재능이 무의식적으로 발휘되는 건가.
그런 게 어딨어.
무의식의 발휘, 뭐야?
재준은 점점 과격하게 변해가는 성격이 재밌기는 했다.
전생의 강진은 감히 생각도 못 하는 언어와 행동.
그런데 강진의 지식과 재준의 막 나가는 성격이 뒤섞인다고 해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었다.
뭐랄까, 사업을 오래 해온 사람의 감각?
그래서 아버지 임석훈에 대해 알고 싶었다.
앞으로 천천히 더 알아보면 되겠지.
똑똑.
그때, 비서가 꿀꿀한 분위기를 날려줄 손님의 방문을 알렸다.
“전경련 손병수 회장님 오셨습니다.”
임병달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 회장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손 회장님.”
“요즘 정말 정신이 없습니다. 나라가 너무 시끄럽습니다.”
“앉으시죠.”
몇 차례 국내 이야기를 주고받던 손 회장이 재준에게 물었다.
“재준아.”
“네.”
“너도 전경련 입장 발표한 거 봤지?”
“네.”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전경련이 어떻게 대한 그룹을 도울 수 있겠느냐? 금융권 대출을 알선해 줄까?”
“아닙니다. 대출해준다고 해서 우호지분이 올라가는 건 아닙니다.”
“그럼, 미레도홀딩스 지분을 가진 기관과 이야기를 해 볼까?”
“지금 증권사가 가지고 있는 매물은 전부 시장에 풀렸다고 봅니다. 남아 있는 지분은 정부 기관에서 가지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이들은 누구의 편을 들어 주지는 못할 겁니다.”
“그렇겠지. 흠, 흠.”
회장님, 대충 헛기침으로 무마하려 하지 마십시오.
편을 들 수 없는 건 양쪽에게서 먹은 돈이 비슷하기 때문 아닙니까.
그렇다면 해결책은 하나.
“대한 그룹에 미레도홀딩스 BW, 신주인수권부사채 발행을 권하십시오.”
“신주인수권부사채?”
BW, 말 그대로 채권이다.
신주를 인수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채권.
주가가 오르면 ‘주식’을 달라고 하고 떨어지면 채권을 행사해 원금과 이자를 달라고 하면 된다.
여기서는 무조건 주식으로 전환할 목적이다.
“네. 공모가도 2만 원대로 낮추어서 발행하고 대한 그룹 존속을 원하는 기업에 팔면 대한 그룹의 우호지분이 늘어나서 경영권 방어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선동방이 가만히 있을까?”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소송을 걸겠지요. 그리고 선동방뿐만 아니라 대한 그룹 박 회장님도 BW 발행을 원치 않을 수 있습니다.”
“지분이 다른 곳으로 분산되어서 그렇구나.”
“네. 선동방과 같은 일이 언제 또 터질지 모르니 지금 잔뜩 겁을 먹은 상태입니다.”
“어쨌든 나중에 대한 그룹이 다시 사들이면 되는 것 아니냐.”
“그럴 생각이 있는지 알아보려면 저랑 같이 박 회장님을 만나셔야 합니다.”
“너와 같이?”
“네.”
“그래.”
손 회장은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 통화를 했다.
“약속 잡았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지금 가 보자.”
“네.”
박 회장도 어지간히 급했나 보다.
한창 여기저기 바쁠 텐데.
만나자는 말에 단번에 응하다니.
***
잠시 후.
대한 그룹 회장실.
재준은 손병수 회장과 대한 그룹 회장실에 들어섰다.
재준을 보는 박 회장의 눈 밑이 살짝 떨렸다.
재준은 살짝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서로 아는 척은 하지 맙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