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증권 재벌의 천재 손자가 되었다-40화 (40/477)

제40화 한 푼도 못 건지고 떠나게 하겠습니다(1)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재준은 일에 빠져 주변을 돌아볼 틈이 없었다.

육상선수 이봉준이 제50회 후쿠오카 국제마라톤대회에서 2시간 10분 48초 만에 우승했다는 소식도 신문을 보고서야 알 수 있었다.

HD 드래곤스가 ZBW 라이더스를 플레이오프에서 3승 2패로 꺾고 2년 만에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KBO 포스트시즌 사상 첫 리버스 스윕이었지만, 결국 TH 재규어스가 HD 드래곤스를 4승 2패로 꺾으며 8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을 거머쥐었다고 했다.

그렇다. 전부 어디서 결과만을 전해 들은 것이다.

재벌 손자가 프로 야구도 여유롭게 보지 못할 줄 몰랐다.

이렇게 일에 치여 살다니.

10월에 있었던 마이클 잭슨 공연도 못 봤다.

젠장, 정말 이게 진정한 재벌의 삶일까.

재준은 재무제표를 들고 다가오는 김혜림과 최진기를 바라보며 ‘지금까지 꿈이었습니다’라는 말을 들으면 어떨까 생각했다.

“뉴월드 재무제표예요. 현금 흐름 좀 봐주세요.”

꿈을 산산이 부수는 김혜림.

그래 내 꿈은 재무제표지.

근데 넌 아직도 현금의 흐름을 수월하게 읽어내지 못하는 거야?

“고정자산이 들쑥날쑥합니다.”

어라, 최진기, 너까지 왜 그래?

너도 모르는 거야?

너 회계학 아니니?

“진기 씨. 대차대조표상 장부가치는 의미가 없어요. 고정자산 평가는 늘었다 줄었다 하니까. 장부가치보단 실적 가치를 봐야 합니다. 여기.”

당연하다. 고정자산의 대표가 건물이다.

부동산 시세가 오른다고 직원 보너스 더 주는 거 아니다.

즉, 주가에 전혀 반영이 안 되는 자산이다.

가끔 가지고 있는 부동산에 그린벨트가 풀렸다면 모를까.

그래도 직원 보너스 더 주진 않겠지만. 주가에 아주 조금 반영은 된다.

최진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재준의 손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유동 자산이라……. 기업이 팔렸을 때의 가치는 유동 자산을 기준으로 보는 게 맞아요.”

유동 자산의 대표는 돈이다.

기업 활동을 잘해서 회사에 돈이 마구 쏟아져 들어왔다?

직원들 보너스 두둑이 준다.

주가도 마구 오른다.

“지금 뉴월드의 유동 자산이 크게 손실을 보고 있습니다. 선동방 그룹에 자금을 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미레도홀딩스 주가가 올라 꽤 건실한 투자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생각보다 관리를 잘했어요. 유동 부채가 많은데 만기가 분산되어 있고. 경기가 안 좋아도 위험에 빠질 우려는 별로 없어 보입니다.”

재준과 최진기가 대화를 이어가자 혜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조금씩 알아듣는 말들이 생겼다.

그래도 나서서 이야기하기엔 부족하지만.

“도대체 제가 들어갈 틈이 없어요.”

혜림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고 말을 이었다.

“두 분은 일 중독자들 같으세요.”

투정 같지 않은 투정을 부리는 혜림을 향해 최진기가 과장스럽게 어깨를 으쓱하며 혜림이 가장 자신 있는 부분을 건드렸다.

“제가 한 수 가르쳐 드려요? 영어로?”

“뭐라구요?”

“아무튼, 진기 씨 잘난 척은 못 당하겠어요.”

“타고나길 잘나게 태어난 걸 어쩌겠습니까? 재준 씨도 저랑 같은 천재과니까 잘 아시죠?”

최진기의 장난에 혜림이 갑자기 빠르게 영어로 말을 했다.

“Someone looks like you two are work addicts. Even if the team leader is like that, if Muyeol speaks English well, it would be a foul. I think my specialty has been stolen for some reason.”

최진기는 그녀의 원어민 발음에 와우 하며 요란스럽게 감탄을 했다.

“혜림 씨, 진짜 미국 사람 같아요.”

“진기 씨, 방금 제가 뭐라고 했죠?”

슬쩍 꼬리를 내리는 최진기, 재무제표를 보며 딴청을 피운다.

“확실히 뉴월드다 보니까 고정자산보다 유동 자산이 훨씬 많아서 현금 흐름은 좋게 보입니다.”

“제 앞에서 영어 운운하면 계속 이렇게 영어로 대화할 거예요.”

최진기는 어깨를 으쓱하며 “아임 쏘리.” 하자, 혜림이 “으이구.” 하며 누나 웃음을 지었다.

재준은 자신도 모르게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잘들 논다.

재준은 얼른 고개를 숙여 재무제표의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현금 흐름표를 살펴보는데.

어라.

“이거, 뉴월드도 헐값에 사들일 수 있겠는데요?”

뉴월드를 헐값에 사들일 수 있다는 재준의 말에 혜림과 최진기가 달려들었다.

재준은 현금 흐름표에서 ‘투자 활동으로 인한 현금 흐름’이란 항목을 가리켰고 최진기와 혜림은 그 항목에 시선을 고정했다.

“자기 자산과 비교했을 때 불필요한 현금 흐름이 보입니다.”

“현금 흐름이 점점 악화하고 있네요.”

회사에 있는 돈이 점점 줄어든다는 소리다.

유동 자산 관리를 잘했지만 어쨌든 돈이 줄어들고 있었다.

어떤 형태로든 회사에 돈을 입금해야 한다.

“그렇지요. ‘기말현금’란도 보세요. 현재 보유 현금이 뚜렷이 감소하고 있어요. 조만간 차입을 통해 뉴월드에 예산을 지원해야 할 겁니다.”

“지금 차입은 어렵지 않나요?”

돈 빌려야 하는데 안 빌려준단 소리다.

관리를 잘하는 건 뉴월드엔 훌륭한 인재가 있다는 소리지만, 돈이 줄줄 새고 있다는 건 그랜드월이 투자를 잘못하고 있다는 소리다.

투자한다고 계속 돈이 빠져나가면 추가로 대출을 받기 어렵다.

오히려 빌려준 돈도 달라고 할 판인데.

“어려우니까, 그랜드월이 움직일 겁니다.”

“그랜드월이 움직이면요?”

“주주의 이익을 위해 미레도홀딩스 주가를 던지겠지요. 아니면 대한 그룹과 딜을 하든가.”

“전쟁이 끝나는 건가요?”

“네. 전리품으로 뉴월드를 인수합시다.”

“뉴월드도요?”

“네. 규모가 작으니까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김혜림 씨, 영문 작업 맡아 주실 거죠?”

“당연하죠.”

혜림은 손을 올리며 자신의 의지를 보여 주었다.

“뉴월드가 가지고 있는 달러가 중요합니다. 달러가 있어야 현재증권이 파산하는 걸 막을 수 있어요.

“네? 파산이라뇨?”

최진기의 반응에 재준은 ‘아차’ 했다.

뭘 또 그렇게 민감하게 받아들여.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여기저기 부도설이 나돌고 있잖아요. 준비하지 않으면 우리도 파산할 수 있다 이 뜻입니다.”

“아, 네. 어쨌든, 미레도홀딩스와 뉴월드 두 개 다 공략하는 거죠?”

“맞습니다.”

후.

활기찬 분위기였는데 ‘두 개’라는 말에 모두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준비해 주세요.”

“인수하는 데 드는 예상 자금은요?”

“그것이…… 사실 생각보다 많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대한 그룹 인수에 1,000억~2,000억, 뉴월드 인수는 말만 잘하면 될 것 같은데.”

“뉴월드를 인수하면 선동방 그룹은 어떻게 나올까요?”

“자살?”

최진기는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대한민국 그룹을, 그것도 두 개나 먹겠다.”

짝짝짝, 박수를 요란하게 치는 최진기는 이어서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장군이 주군을 뵙는 것처럼.

연극을 하듯, 한 손은 가슴 언저리에 놓고 무릎을 꿇으며.

“도시 정벌을 감축드립니다.”

최진기의 말에 주변의 직원들은 참았던 웃음을 결국 빵 하고 터뜨렸다.

그렇게 한참 동안 재준은 무안해서 얼굴을 들지 못했고,

최진기의 장난으로 연구실의 웃음은 그치지 않았다.

***

주식시장을 시작으로 은행가를 비롯한 금융가에는 기업들의 부도설이 암암리에 퍼져나갔다.

미레도홀딩스 주가가 두 배 이상 튀어 오르는 바람에 자금 압박을 받던 선동방 그룹은 드디어 채권단 회의에 참석했다.

우리나라 대표 시중은행 빅5.

제이, 조화, 사업, 항상, 도시.

다섯 은행장과 선동방 그룹 선 회장, 그리고 또 한 사람, 전 대통령의 장남 노 상무가 한자리에 모였다.

은행장들의 굳은 표정과 달리, 도리어 채무자인 선동방 그룹 선 회장의 표정은 밝았다.

분명 노 상무의 아버지, 전직 대통령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여전히 은행장들은 전 대통령의 눈치를 보았다.

선 회장에게 노 상무는 천군만마나 마찬가지였다.

관치 금융의 전형적인 폐단.

제이 은행장이 먼저 어렵게 대화를 시작했다.

“선동방 그룹이 대한 그룹을 인수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대한 그룹 자체로도 부채가 상당합니다. 두 그룹이 하나가 되면 자칫 유동성 위기에 빠질 수 있습니다.”

선 회장은 어디서 개가 짖나 하는 표정이었다.

“허허, 별걱정을 다 하십니다. 두 그룹이 합쳐지면 재계 서열 10위 안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중복되는 계열사를 처리하면 유동성 위기는 쉽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조화 은행장이 선 회장에게 물었다.

“추가로 제공할 담보는 있습니까?”

“선동방 식품이 보유 중인 부동산을 담보로 제공하겠습니다.”

“그 담보로는 200억 대출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회장님은 1000억을 대출을 요청하시는 것 같은데요.”

이어서 사업 은행장도 덧붙였다.

“선동방 식품의 주식을 담보로 제공한다면 가능성이 있습니다.”

“안 됩니다. 선동방 식품은 저희 그룹의 모태입니다. 창업주이신 아버님이 절대 허락하지 않으실 겁니다. 이보세요들, 선동방 그룹의 신용이 이것밖에 안 되는 겁니까?”

선 회장의 언성에 항상 은행장이 나섰다.

“선 회장님, 지금 선동방 그룹의 대출은 적정선입니다. 추가 대출이 발생하면 이자 상환도 힘들 거란 저희 기획실의 보고가 있었습니다. 적정한 담보 없이는 추가 대출은 어렵습니다. 저희는…….”

난상토론을 듣고만 있던 노 상무가 손을 들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식품 사업으로 국민을 위해 열심히 일해 왔고, 이제 금융과 미디어로 진출해 보려고 하는데, 도움을 주지 않으시겠단 말씀이군요. 저희가 금융에 진출하는 것이 못마땅하신 겁니까? 아버지 때문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은행장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노 상무의 말을 부정했다.

“선진 금융시스템을 도입하기 위해 미국 그랜드월과 합작회사를 만드는 것이 그렇게 안 좋은 일입니까? 나라를 위해 좋은 일 아닙니까?”

“노 상무님, 선동방 그룹이 금융업에 진출하는 것은 이번 사안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일입니다. 왜 그쪽으로 진출하지 못하게 장벽을 친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노 상무가 잠시, 선 회장에게 귓속말을 했다.

선 회장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노 상무의 어깨를 기특하다는 듯 두드렸다.

“여러분의 의견이 정 그렇다면 저희 지분이 있는 뉴월드의 주식을 담보로 제공하겠습니다. 20%면 되겠습니까?”

“49% 다 내주셔야 합니다.”

“허. 누가 망하기를 바라는 모양입니다.”

“그럴 리가요.”

“알았습니다. 49% 다 담보로 잡으세요.”

선 회장의 말에 은행장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도시 은행장이 대표로 말을 꺼냈다.

“그러시다면 저희는 긍정적으로 검토하겠습니다.”

연이어 항상 은행장도 찬성했다.

“좋습니다. 국제 회계 기준에 맞춘 재무제표라면 검토해보겠습니다.”

채권단 회의가 끝난 얼마 후, 선동방 그룹의 추가 대출 소식이 전해지자, 미레도홀딩스 주가는 다시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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