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화 주거니 받거니 해야 하는데(6)
한승일은 아버지 한 사장과 박 회장을 번갈아 본 후 재준을 향해 인상을 썼다.
‘저런 미친놈. 거기서 왜 날 끼워 넣는 거야?’
“이제 됐지? 승일이 넌 너무 복잡하게 생각했어. 어느 세월에 작전 치고 돈 불려서 박용주한테 춘천백화점 사냐? 네가 힘들 것 같아서 내가 빠르게 처리했다. 괜찮지?”
“…….”
“자, 이제 박 회장님에게 25억 드려. 너 돈 잘 가지고 있지?”
박 회장은 한 사장을 보며 물었다.
“한 사장, 이게 무슨 말입니까?”
한 사장은 한승일을 보고 윗입술을 꿈틀거렸다.
“이게 무슨 소리냐?”
“저도 모르는 소린데요.”
한승일이 대번에 오리발을 내밀었다.
“어, 저놈 봐라. 우리 같이하던 얘기잖아.”
“내…… 내가 언제 그런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했어!”
“저런 의리 없는 놈을 봤나. 저놈 내 돈 떼먹으려고 작정했네. 그럼 안 돼, 친구끼리. 천 실장님. 그거 주세요.”
천 실장이 재준에게 서류 봉투를 하나 건넸다.
“이거, 이거.”
재준은 봉투에서 박민수가 작성한 계약서를 내밀었다.
“자! 봐. 우리가 작성한 계약서.”
탁!
탁자에 계약서가 펼쳐지자, 박 회장은 인상을 쓰고 한 사장은 한승일을 노려봤다.
박 회장이 한승일을 매섭게 쳐다봤다.
“한 상무, 지금 내 손자한테서 춘천백화점을 강탈하려고 한 건가?”
“그게…….”
“그래, 사업이니까. 그럴 수 있어. 힘없는 놈은 당해도 싸. 그러면 얼마를 빌려주려 한 건가?”
“전 무슨 말씀이신지…….”
한 상무!
박 회장이 천둥같이 버럭 소리 질렀다.
한 사장은 고개를 돌려 눈을 질끈 같았다.
‘한심한 놈.’
아들이 전에 춘천백화점 이야기를 꺼내긴 했다.
대한 그룹에서 처분하고 싶은 백화점이라고 했다.
춘천백화점을 헐값에 사서 HD 그룹에 파는 게 어떠냐고.
괜찮은 생각이긴 한데 가격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너무 비싸. HD 그룹에서 사지 않을 거다.
-아버지, 제가 싸게 살 방법이 있습니다.
-어떻게?
-제가 알아서 해보겠습니다.
-얼마 밀어주면 되냐?
-돈은 필요 없습니다.
-그래?
‘이게 그 방법이냐? 이건 어려움에 처한 친구 등에 칼 꽂는 거 아니냐.’
박 회장의 노기는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주식을 사야 하는 처지라 누르고 눌러 참았다.
“한 사장, 빨리 끝냅시다. 춘천백화점, 드리리다.”
“박 회장님 죄송합니다. 제가 차후에 수습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춘천백화점 우리에겐 그리 크게 필요하지도 않아요.”
“죄송합니다.”
한 사장의 속도 아들 때문에 부글거렸다.
아무리 지금 미레도홀딩스 주식을 가지고 있다지만 대한 그룹이 누군가, 자그마치 재계 34위에 있는 그룹이다.
이번 위기를 넘기면 만선증권 정도는 맘 독하게 먹고 찍어 누를 수 있는 그룹이었다.
어쩌면 지금 당하고 있는 적대적 M&A도 가능했다.
‘빨리 끝내자.’
“회장님. 42,000원에 주식 전량 넘기겠습니다.”
후,
박 회장이 숨을 길게 내뱉었다.
“그럽시다.”
한 사장이 주식 영장 서류를 꺼내려는 찰나,
“에헤이, 에헤이. 그건 아니지요. 그거 내가 팔아야 하는 주식인데.”
재준이 한 사장이 꺼낸 주식 영장 위를 손바닥으로 눌렸다.
“이놈이!”
“뭐 하는 짓이지?”
“가만있어 봐요.”
재준이 거래 직전에 끼어들자 박 회장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자네, 지금 장난이 심해.”
“장난이라뇨. 여기 한 사장님이 내놓은 주식이 제가 박 회장님에게 팔려는 주식인데요.”
“뭐?”
재준은 손목시계를 톡톡 두드렸다.
“올 때가 됐는데…….”
이때,
벌컥.
문이 열리고 박민수가 들어왔다.
그리고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을 확인하고는 인상을 팍 썼다.
재준이 불러서 오긴 했는데 이런 자리인 줄 몰랐다는 눈치였다.
한승일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박민수.”
앉아!
한 사장이 한승일에게 버럭 소리쳤다.
한승일은 ‘너 두고 보자.’라고 뇌까리곤 자리에 앉으며 박민수를 노려봤다.
박민수는 재준에게 서류 봉투를 넘겼다.
“박 형. 괜찮아요. 제가 다 해결해 줄게요.”
어디 보자!
재준이 서류봉투에서 주식 영장을 꺼냈다.
“여기, 만선증권 10% 주식에 대한 주식 영장입니다.”
“이게 왜?”
“거기 미레도홀딩스 주식 영장이랑 바꾸시면 됩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한 사장은 놀란 눈으로 재준이 들고 있는 만선증권 주식 영장을 빼앗듯이 낚아챘다.
재준은 떨리는 손으로 주식 영장을 들고 있는 한 사장에게 혀를 찼다.
쯧쯧.
“남의 것 털어먹을 생각에 자기 게 털리는 줄은 몰랐어요?”
“이 비열한 놈.”
“어라? 정말 내가 비열하다고요? 내 돈 25억으로 200억짜리 백화점 털어먹으려는 아들에, 본인이 22,000으로 매집한 주식을 42,000에 팔아먹는 건 비열한 게 아닌가 봐요?”
한 사장은 재준의 말에 대꾸를 못 했지만 하고 싶은 말은 있었다.
“고작 10%야, 이걸로 만선증권을 어쩌진 못해.”
“알아요. 한 사장님을 해고할 정도는 아니죠.”
“내가 미레도홀딩스 주식을 매각하는 것도 방해할 수 없어.”
“안다니까요.”
“근데. 이걸로 무얼 할 수 있다고.”
“천 실장님. 애들 좀 들어오라 하세요.”
“네.”
천 실장이 문을 열자 우르르 십여 명의 덩치들이 들어왔다.
온몸에 피 칠갑을 하고 한 손엔 각목과 쇠파이프를 들었다.
“에이, 살살하라니까. 밖은 다 정리되었어요?”
“네. 도련님.”
재준은 박 회장을 보았다.
“회장님. 왜 아이들을 불러서 이 사단을 만드세요?”
허허,
박 회장은 어이가 없어서 허허 웃었다.
그럴 일은 없었지만 한 사장과 협상이 결렬되면 쓸 패로 남겨두었던 조폭들이 일거에 사라졌다.
“그리고 한 사장님.”
“이런 식으론 해결이 안 된다는 걸 알 텐데. 차라리 여기 있는 사람 다 죽여야 할 거야.”
“거, 무슨 살벌한 소리를 하세요.”
내려놔요!
재준이 천 실장에게 눈짓했다.
천 실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모두 장비를 뒤로 숨겼다.
“훨씬 낫네.”
재준이 한 사장을 보고 싱글 웃었다.
“이 사람들한테 만선증권 한 주씩 줄 건데. 그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
“어디 보자, 주총이 3월이니까 한 4개월 남았네. 그럼 임시주총부터 열어야겠네요.”
“…….”
“한 천 명 정도 동원하면 되려나. 재밌지 않겠어요? 주총꾼 천 명이면 어마어마한데.”
“주총꾼 천 명?”
주주총회에서 주식을 단 1주라도 들고 있으면 발언권이 있다.
그냥 손들고 마이크 받아서 말하면 된다.
이런 주총꾼으로 인해 SS전자는 13시간 17분이라는 대기록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얌전하게 이야기만 하는 사람도 있지만, 난리를 부리다 못해 난동 수준으로 민폐를 끼치는 사람도 있다.
쌍욕은 기본이고 기물 파손? 이러면 쫓겨나려나.
암튼 이유는 한 가지다. 돈 달라고.
이런 사람들에게 돈 몇 푼 쥐여 주면 깔끔하게 사라져 준다.
2018년 이후 볼 수 없는 주총꾼들이지만 지금은 1996년.
주총꾼들이 슬슬 자신들의 본연의 임무를 각성하기 시작할 때였다.
“어때요. 여기 이분들한테 주식을 맡길까 싶은데. 그리고 저기, 한승일 자료 좀 만들어 뿌리고. 멋질 것 같은데.”
“이놈.”
“그리고 그렇게 손해 아니에요. 미레도홀딩스 매집하느라 한 500억 정도 들었잖아요. 저도 만선증권 매집하는데 500억 들었어요. 쌤쌤이에요. 쌤쌤.”
“뭐 하러 돈도 안 되는 일을 벌이는 거지?”
“그야 제가 미레도홀딩스 주식이 필요하니까.”
“대한 그룹에 팔지 않는단 말인가?”
“당장은 안 팔아요.”
재준의 방금 말에 박 회장이 콧등을 찡그렸다.
“방금 뭐라고 한 건가? 안 팔다니.”
“음. 네. 지금 안 팔아요. 나중에 결정적인 순간에 팔 겁니다.”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고.”
“회장님. 회장님은 지금 선택권이 없습니다.”
“날 무시하는 건가?”
“진정하시고. 제가 약속 하나 하죠. 미레도홀딩스는 절대 외국 자본에 팔리지 않습니다.”
국내 자본에 팔립니다.
바로 현재증권에게.
“그게 무슨 소린가? 이미 저쪽은 28%나 매집했는데.”
“그러니까 지금 이러고 있으시면 안 되죠. 빨리 가서 시장에서 한 주라도 더 매수하세요. 여기 있어 봤자. 만선증권이 보유한 미레도홀딩스 주식은 한 주도 넘어가지 않아요.”
“약속할 수 있나?”
“뭘요?”
“선동방에 미레도홀딩스 주식을 팔지 않는다는 말.”
“그럼요. 걱정하지 마시라니까요.”
허허.
박 회장은 천천히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내 오늘은 그냥 가는데, 자네는 꼭 기억하겠네.”
“아 참, 제 얘기는 밖에서 하지 말아 주세요. 전 현재증권 신입 사원으로 좀 남아 있어야 하거든요.”
“그러지. 나도 창피한 일이니까.”
박 회장이 나가려 하자 한 사장이 벌떡 일어섰다.
“회장님. 그냥 가시면…….”
“한 사장.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요.”
“그럼, 미레도홀딩스 주식을 선동방에 넘겨도 괜찮으십니까?”
“한 사장. 10% 주식이면 당신 자리도 그리 안전하지 못해요. 내가 보기에 당신 우호지분도 그리 많아 보이지 않고. 내 생각엔 저 사람에게 미레도홀딩스 넘기는 게 제일 안전한 것 같은데. 잘 생각해 보세요. 이만 갑니다.”
박 회장이 멀어지자 재준이 한 사장에게 싱글 웃어 보였다.
“이제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해야 하는데.”
한 사장은 손에 들고 있는 미레도홀딩스 주식 영장을 재준에게 건넸다.
“나도 이 일은 절대 기억에서 지우지 않을 거야.”
재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셔야죠. 그래야 다시는 내 등은 안 처먹을 테니까요.”
흥!
한 사장이 거친 콧김을 내뿜으며 재준을 스쳐 지나가자 한승일이 뒤를 따랐다.
“아, 한 사장님. 한승일이 입 좀 막아주세요. 아까도 말했지만, 제가 아직 신입 사원이라서요. 괜히 시끄러워지면 할아버지한테 혼나거든요. 어쩌면 회사에서 잘릴 수도 있어요. 부탁합니다.”
한 사장은 듣는 둥 마는 둥 걸어가는데 한승일이 재준에게 말을 걸었다.
“야, 너. 임재준. 너.”
빡!
한 사장이 아들 한승일의 뒤통수를 후련하게 갈겼다.
“그만큼 당하고도. 멍청한 놈.”
“아버지.”
“당장 안 나가!”
한승일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재준을 힐끔거리며 방을 나갔다.
참나. 임재준, 나도 적응이 안 되네.
재준이 천 실장에게 미레도홀딩스 주식 영장을 넘기고 앞서갔다.
그동안 말없이 지켜보던 박민수가 재준의 옆에 붙었다.
“재준 씨. 미리 언질 좀 해 주시죠.”
“박 형. 이제 손 털어요. 한승일 같은 놈하고 엮이면 좋을 거 없습니다.”
“J.스탠리에서도 제 평판이 안 좋아 질 겁니다.”
“때려치우면 되죠.”
“네? 그럴 수는 없죠. 제가 어떻게 들어간 회사인데.”
“괜찮아요. 제가 자리 하나 알아봐 드릴게요.”
“설마, 현재증권이면 거절입니다.”
“에이, 현재증권에 박 형 자리 없어요.”
“그럼, 어딜 추천해 주시려고?”
재준이 가던 걸음을 멈추고 박민수를 바라봤다.
“미국 어때요?”
박민수도 자연히 멈춰 섰다.
“미국?”
“네. 제가 미국에 투자사 하나 차릴 건데.”
“임재준 씨가 직접 차린다고요?”
“네. 초기 자본으로 5,000억 정도 생각합니다.”
5,000억?
박민수는 다시 앞서가는 재준을 멍하니 바라보다 급히 쫓아갔다.
“같이 가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