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증권 재벌의 천재 손자가 되었다-38화 (38/477)

제38화 주거니 받거니 해야 하는데(5)

재준이 험한 놈 둘을 옆으로 밀자 슬금슬금 자리를 비켰다.

역시 이 시대는 안기부면 다 통한다.

“야, 너희들.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해.”

재준이 눈을 부라리며 말하자,

“아, 네. 걱정 마십시오.”

“그래. 든든하네. 든든해. 안에서 큰소리가 좀 나도 들어오지 말고. 아니다, 너희들은 가서 짜장면이나 먹고 와.”

“…….”

후다닥 뛰어가는 험한 놈 둘을 바라보며 천 실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도대체 저런 깡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재준은 홀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재준이 홀 안에 들어서자 세 명이 원탁에 둘러앉은 채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재준을 보고 벌떡 일어섰다.

“임재준!”

언뜻 봐도 재준과 비슷한 나이라 한승일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임재준?”

자리에 앉아있던 대한 그룹 박 회장이 못마땅하다는 듯 재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손자 박용주와 어울리며 친 사고 몇 개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리고 한승일을 한 번 보고는 만선증권 한 사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한 사장님이 불렀습니까?”

“아닙니다. 승일이 네가 불렀냐? 이 자리가 어떤 자린데, 저런 양아치를.”

“아닙니다. 아버지. 근래 연락한 적도 없습니다.”

박 회장의 시선이 다시 재준을 향했다.

“어쩐 일이냐? 여기 한 상무를 만나러 왔다면 밖에서 기다려라. 버릇없고 무례한 건 여전하구나. 어찌 제 애비 같은 짓만 골라서 할까.”

재준이 신기한 듯 박 회장을 보며 말했다.

“저, 제가 궁금해서 그러는데. 우리 아버지 아세요? 방금 말씀하신 것 보니까. 저랑 아주 비슷하게 행동하신 것 같은데. 맞나요?”

얼굴을 바짝 들이밀며 묻자 박 회장이 인상을 쓰며 뒤로 물러났다.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놈.”

재준이 쩝쩝 입맛을 다시며 뒤로 물러났다.

“그렇구나. 역시 아버지도 그리 신사는 아니었어. 근데 박 뭐시기 회장처럼 회사는 말아먹지 않은 것 같은데.”

“뭐? 박 머시기 회장?”

“왜요? 뭐 찔리세요?”

“이놈 당장 나가. 이놈이 임 회장 얼굴 봐서 참아 주려고 했더니. 너, 이놈.”

박 회장이 핸드폰을 꺼내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그랜드월과 선동방이 언제 손잡았는지 아세요?”

“뭐?”

“그게…… 한 2년은 된 것 같은데. 모르셨죠? 그게 아마 노원케이블TV 테이핑 할 때일 텐데. 아! 근데, 방직회사가 뭔 케이블TV? 방송 출연하시는 게 꿈이셨나요?”

“뭐라고? 이놈, 정말 보자 보자 하니까!”

“그럼 이건 아세요? 내가 미레도홀딩스 주식 10%를 가지고 있는데.”

“뭐? 네가?”

놀라는 거 봐라.

재준이 미레도홀딩스 주식 10%를 가지고 있다는 말에 박 회장뿐만 아니라 한 사장과 한승일도 놀랐다.

“저……. 정말이냐?”

“그럼, 내가 박 회장님하고 쓸데없이 농담이나 주고받을 사이는 아니잖아요. 명색이 대기업 회장님에게.”

“그래, 그렇다면…….”

‘내가 미안하구나’란 말은 들리지도 않게 작게 새어 나왔다.

박 회장은 머릿속에서 폭죽이 터지는 것 같았다.

그랜드월이 미레도홀딩스 주식을 거의 18% 매집했고 선동방이 10% 매집에 근접한다고 알고 있었다.

합쳐서 28%.

자신의 우호지분은 20%가 안 되었다.

하지만, 만선증권이 10%, 그리고 재준이 10%?

합이 40%이니 이건 이미 승리를 자축해도 될 만했다.

10% 정도는 주주총회 때 위임장대결로 충분히 만회할 수 있었다.

‘적대적 M&A를 충분히 방어할 수 있다.’

작은 방직회사로 시작해서 그룹으로 키우기 위해 발버둥 치며 노력했다.

남들이 다 한다는 건설부터 미디어 사업까지 진출해서 계열사를 25개까지 늘렸다.

처음부터 그룹을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선동방 그룹 선 회장이 자신의 속을 박박 긁어댄 게 시작이었다.

쌀겨나 털던 정미소로 시작해 식품 산업에 뛰어들 때만 해도 비슷한 위치라고 생각했다.

술도 자주 마시고 라운딩도 자주 돌며 친하게 지냈다.

그런데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선 회장 손녀딸이 전 대통령 장남과 턱 하니 결혼을 했다.

순식간에 계열사를 늘리더니 언제부턴가 선 사장이 아니라 선 회장으로 부르라는 게 아닌가.

어찌나 배알이 꼴리는지.

그때부터 자신도 계열사를 늘리기 시작했다.

기업이 조금 방만해도 계열사를 20개 이상은 거느려야 회장님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까.

계열사를 인수하면 그 계열사를 담보로 대출을 받아 또 다른 기업을 인수하고 또 대출받고 또 인수하는 걸 반복했더니 그룹이 되었다.

솔직히 몰랐다.

적대적 M&A가 뭔지.

자본시장육성법 때문에 기업을 인수하려면 자신에게서 주식을 사야 한다고만 알고 있었다.

이번에 이 사달이 나고서야 3년 전 1993년에 자본시장육성법이 사라졌다는 걸 알았다.

부랴부랴 회사 법무팀도 이번에 처음 만들었다.

이번 한 번만 위기를 극복하면 대한 그룹이 안정된다.

그래서 만선증권이 10%의 주식을 넘긴다고 했을 때 자신이 직접 달려왔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10%가 더 생기게 생겼다.

박 회장의 표정이 순간 온화하게 변했다.

“10%가 확실히 맞느냐?”

“그럼요. 근데, 저기 만선증권에서 얼마에 사라고 하던가요?”

“뭐? 만선증권이 미레도홀딩스 주식을 파는 건 어떻게 알았느냐?”

“그런 거야, 사람 풀면 금방 알아내지요. 혹시 4만 5천 원 부르지 않던가요?”

“그건 또 어떻게 알았느냐?”

이때 한승일이 벌떡 일어났다.

“야, 임재준!”

“왜?”

재준이 까칠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한승일은 재준의 눈을 피해 아버지 한 사장을 쳐다봤다.

한 사장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들이받아 버려.’

아버지의 허락을 받은 한승일이 재준에게 소리를 질렀다.

“여기가 어디라고 거짓말을 하는 거야. 네가 미레도홀딩스 주식이 어딨어? 얼마 전까지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던 놈이.”

재준이 신기하다는 듯 한승일을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승일아, 어른들이 이야기할 때는 조용히 듣고 있어야지. 응?”

우는 아이 달래듯 차분하게 재준이 말하자 한승일이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네가 무슨 어른이야?”

“회사를 대표하면 다 어른이란다. 그것도 몰라?”

“임재준, 내가 너를 아는데. 넌 절대 회사를 대표하지 못해. 증권에 대해 일자무식인 놈이 무슨.”

“그래, 그래. 맞아. 내가 좀 무식하지. 아, 너 만선증권 상무지. 그럼, 기업의 의무 이행 능력을 보는 방법은 알겠지?”

“무슨 소리야?”

“배당은 어떻게 하는지 알아? 이자보상배율이 적당한지 아닌지 구별은 하지? 계속 기업의 가능성을 보는 방법이나, 현금화할 유동자산은 어디에 나와 있는지 정도는 알지?”

“…….”

“설마 증권회사 상무라는 놈이 재무제표의 기본도 모르는 거야? 그럼, 가치 분석이니 기술적 분석이니 하는 것도 모르겠고, 거시 경제, 미시 경제도 모르겠네. 영어는 할 줄 아니? 한 사장님, 얘 왜 상무 시킨 거예요?”

한승일이 분노에 이글거리는 눈으로 낮고 굵은 목소리를 냈다.

“영어는 할 줄 알아.”

한승일의 대답에 한 사장은 고개를 돌리며 인상을 썼다.

‘아이고, 저 X신. 내 아들이지만, 참나.’

“한승일, 너 앉아.”

“아버지.”

“앉아.”

“아버지.”

“그냥 좀 앉아 있어!”

한승일은 주춤주춤 앉으며 재준을 향해 눈을 부라리며 중얼거렸다.

“임재준, 너 나중에 보자.”

재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글쎄, 나를 또 볼 날이 있을까 모르겠다.

한승일이 앉자 재준이 다시 말을 시작했다.

“자, 이거. 만선증권 상무 때문에 이야기가 잠시 중단됐습니다. 박 회장님. 제가 3만 5천 원에 미레도홀딩스 주식 10%를 모시겠습니다. 어떠십니까?”

“…….”

박 회장은 잠시 재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진 않은데.’

잠시 재준의 말에 흥분했다.

하지만 재준이 한승일을 몰아치는 사이 냉정을 찾았다.

‘저놈은 35,000원. 만선증권은 45,000원을 제시했다.’

현 주가는 23,500원.

거의 두 배에 가까운 돈을 지불해야 한다.

하지만 대한 그룹이 살아남으려면 제시한 주가에 매입해야 한다.

‘자그마치 20%.’

여기서 어설프게 가격을 조정하려 들면 선동방으로 가져갈 것이다.

“좋아, 제시한 금액에 사겠네. 한 푼도 깎지 않고 다 지불하지.”

“역시, 통이 크십니다. 이 정도는 돼야 회장 소리 듣는군요.”

만선증권의 한 사장은 재준을 노려보았다.

자신이 제시한 금액은 45,000원. 협상이 시작되어 42,000원까지 내려가는 것은 상정한 바였다.

다만 여기서 더 깎아 주는 건 안 된다.

대한 그룹 박 회장의 표정에선 다행히 값을 깎겠다는 의지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저놈, 임재준은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진짜 미레도홀딩스 주식을 10%나 가졌는지도 의문이었다.

그랜드월이 M&A를 발표하자마자 증권사를 돌아다니며 미레도홀딩스 주식을 시장가의 두 배에 해당하는 값으로 사들였다.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심지어 현재증권 펀드 매니저가 가지고 있는 미레도홀딩스 주식도 두 배에 해당하는 돈을 주고 사들였다.

근데 저놈이 10%나 되는 주식을 가지고 있다고?

거짓말.

궁금한 건 많지만, 일단은 침묵으로 일관하며 박 회장과 재준의 거래를 지켜봐야 한다.

박 회장이 재준에게 거래를 제시했다.

“돈은 현찰을 원하는가? 아니면 다른 증서를 원하는가?”

재준은 손으로 턱을 만지며 생각하는 척한 후 말했다.

“당연히 현찰을 주셔야죠. 역시 현찰이 제일 좋잖아요.”

“알았네. 당장 준비하라 하겠네.”

“그리고 하나 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나한테?”

“네.”

“일단 말해보게. 가능하면 팔겠네.”

“백화점을 파세요. 춘천백화점.”

“춘천백화점?”

“네.”

“얼마에?”

“25억이요.”

박 회장은 재준의 제안이 다소 의문스러웠다.

‘아니, 그 허름한 백화점을 왜 달라는 거지? 우리도 처리하지 못해 골치 아픈 백화점을. 하지만 25억은 너무 낮아.’

“춘천백화점은 부지만 100억이 넘네. 25억은 터무니없는 가격일세.”

“그런가요?”

“그렇다네.”

“생각이 너무 많으시네요. 제가 왜 35,000원을 제시했는지 모르시는 것 같은데. 그럼, 저도 45,000에 주식을 넘길게요. 음…… 그럼 최소한 160억 정도 추가 이익이 생기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협상된 가격을 그렇게 마음대로 바꿔도 되는가?”

“왜 안 돼요. 지금은 제가 갑이고 회장님이 을인데. 정 싫으시면 안 사셔도 돼요. 선동방도 있으니까.”

박 회장의 눈 밑이 파르르 떨렸다.

춘천백화점은 손실 폭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처분하긴 해야 하는데 그래도 최소한 200억은 받아야 했다.

하지만 지금 이런 사소한 문제로 서로 신경을 긁을 생각은 없었다.

35,000원에 주식을 사고 25억에 백화점을 파는 게 어쩌면 더 이득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하겠네.”

“감사합니다.”

재준은 한승일에게 시선을 돌렸다.

“승일아, 됐지? 이제 춘천백화점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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