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증권 재벌의 천재 손자가 되었다-36화 (36/477)

제36화 주거니 받거니 해야 하는데(3)

서울 종로 모 룸살롱.

“한승일, 잠깐 나 좀 봐.”

박민수는 친구들과 술자리를 하고 있던 한승일을 따로 불러내 조용한 방으로 들어갔다.

한승일은 친구들 앞에서 자신을 부른 박민수의 태도에 인상을 팍 구겼지만, 일단 따라나섰다.

“뭐야?”

“계약서를 다시 만들래.”

“뭐…? 그놈이?”

“응. 그래야 원하는 대로 해 주겠대.”

박민수가 계약서에 들어갈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자 한승일은 듣지도 않고 손을 저었다.

“알았으니까. 그 자식 원하는 대로 해 줘. 25억만 있으면 돼.”

한승일은 중요한 일도 아니면서 자신을 오라 가라 한 박민수를 째려보며 일어섰다.

“어딜 가? 계약서에 도장 찍어야지.”

“아니 X발, 룸에 도장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도 있어? 그냥 네가 대충 내 도장 파서 찍어.”

“이거 계약서야. 저쪽도 읽어 보고 사인할 거라고.”

“그 멍청한 새끼가 뭘 알겠어. 꼴에 계약서가 뭔지는 아나 보다. 알아서 해.”

한승일은 일어서서 옷을 탁탁 털고 방을 나갔다.

후우.

한승일이 나가자 박민수가 품 안에서 녹음기를 꺼냈고 버튼을 눌러 재생했다.

-대충 내 도장 파서 찍어.

박민수는 빠르게 룸살롱을 나왔다.

***

현재증권 회장실.

“부르셨습니까?”

“그래, 이리 와. 앉아.”

임병달은 재준에게 자리를 권하고 자신은 상석에 앉았다.

“전경련 손 회장이 올 거다.”

“벌써요?”

벌써는 무슨.

예상 시나리오 던진 지 일주일이나 지났구만.

선동방 그룹 때문에 똥줄이 탔겠지.

예상대로 그랜드월 뒤로 선동방 그룹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대로 놔두면 대한 그룹은 그랜드월에 인수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싱거운 게임으로 마무리할 생각은 없었다.

서로 더 치고받고 싸워야 돈이 많이 들어간다.

대출을 팍팍 받아야 나중에 픽픽 쓰러지지.

그랜드월과 선동방 VS 대한 그룹.

둘을 상대하려니 대한 그룹이 심하게 기울었다.

체급을 맞춰주려면 대한 그룹 지원군을 만들어 줘야 했다.

지원군, 전경련.

원래 역사는 대한 그룹이 전경련을 찾아가 읍소해서 전경련이 나서서 대신 싸워주었다.

전경련 손 회장 어깨에 힘 왕창 들어갔지.

하지만 이번엔 그렇게 둘 수 없다.

현재증권 어깨에 뽕 좀 집어넣어야 했다.

유명세를 타면 탈수록 좋은 인식이 사람들 머리에 박힌다.

그래야 환매 요청이 줄어들고.

일주일 전, 대한 그룹이 나서기 전에 재준이 먼저 선수를 쳤다.

재준은 외국계 자본에 국내 기업이 다 먹힐 것이라며, 기획서에 경각심이라는 MSG를 통째로 들이부었다.

“일주일 전 네 기획서 전달하면서 뵙고 싶다 전했는데 말이 없다가, 갑자기 오늘 오시겠다지 뭐냐. 넌 뭐 짐작 가는 게 있느냐?”

“선동방 그룹 때문일 겁니다.”

사람들 모습엔 선동방이 갑자기 등장한 것처럼 보였다.

사실은 반대로 그랜드월을 앞세우고 이제야 나타났는데.

“선동방이 욕심이 과해.”

“손 회장님도 그냥 좌시하진 않을 겁니다. 국부 유출을 눈 뜨고 보실 분이 아니죠.”

“전경련의 손 회장은 박 대통령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사람이라 외국 기업이 한국 기업을 인수하는 건 절대적으로 반대하겠지.”

“국민 여론도 많이 안 좋아서 직접 나서신 것 같습니다.”

은행 자금 융통이 원활하지 않아 나라 곳곳에서 체불 임금으로 노동자들의 신음 소리가 거세지는 상황이다. 이럴 때 외국 자본에 의해 대한 그룹이 갈가리 찢어지고 노동자들이 대규모 해고된다면?

노동자들이 거리로 뛰쳐나올 것이다.

호시절이면 모를까, 나라 전체가 어려운 지금 전경련이 적대적 M&A를 결코 보고만 있을 리 없었다.

나라가 슬슬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정 실장도 요즘 네 말대로 점점 나라 안팎으로 이상한 기류가 포착되고 있다 하더라. 이게 다 달러가 부족해서 그런 것이라고?”

“맞습니다.”

“허 참. 난 네가 이걸 어떻게 알았을까 신통하게 느껴진단 말이다.”

“할아버지, 신문 열심히 보면 다 보입니다.”

물론 그럴 리는 없다.

신문에 대한민국의 위험 신호에 대한 기사가 실리긴 했던가.

“신문은 나도 매일 보는데.”

“우리나라 신문 말고 뉴욕 타임스요.”

설마 뉴욕 타임스를 보시는 건 아니죠?

“그것도 매일 정 실장이 정리해서 올려주는데?”

헐, 정 실장님 정말 열심히 사시는구나.

“그 외에도 미시건 타임스 같은 신문도 봐야 합니다.”

“그런 것도 보냐? 첨 들어보는데.”

저도 첨 말해 봅니다.

“저는 웬만해선 미국 신문들 다 참고하고 있습니다.”

“역시 그런 노력을 하고 있었구나.”

그럼요, 아침마다 명상을 하면서 책에서 본 내용을 떠올리는 게 보통 노력은 아니죠.

“할아버지만 하겠습니까?”

“녀석, 그럼 앞으로 한국은 어려워진다는 말이지.”

“이미 충분히 어렵지 않습니까? 곧 대기업들이 줄줄이 부도가 날 겁니다.”

“그럼 지금 정부는 왜 저렇게 대처하는 것이냐?”

“정부는 미국이나 일본이 도와줄 거라 생각하고 있겠죠.”

“글쎄. 나도 그 점은 미심쩍은데.”

“너무 안일하게 지금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외채가 늘고 외환 보유고가 줄어들고 있는데도 지금 정부는 아무 대책이 없습니다. 아니, 대책을 세울 생각조차 없습니다. 그저 기다릴 뿐입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대통령 비서실에 네 친구 아버지라도 일하는 거냐?”

“그걸 꼭 찍어서 먹어봐야 압니까?”

이때.

똑. 똑. 똑.

“전경련 손병수 회장님 오셨습니다.”

“안으로 모시세요.”

풍채 좋은 손 회장이 임병달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오랜만입니다. 임 회장님.”

“죄송합니다. 제가 회장님을 찾아뵈어야 하는데. 결례를 범했습니다.”

“아닙니다. 정 실장에게 설명을 듣고 바로 오고 싶었습니다. 일주일을 참기가 힘들 정도였습니다. 허허.”

입에 침이나 바르지.

일주일 동안 딴 세상에 있다가 왔으면서.

“감사합니다. 일단 앉으시죠.”

임병달은 손 회장에게 소파의 상석을 양보하고 자리에 앉았다.

손 회장이 임병달에게 고맙단 몸짓을 한 후.

“임 회장님. 혹시 정 실장이 작성한 기획서 좀 볼 수 있을까요?”

이거 봐라, 보지도 않았다.

“그러시죠.”

“제가 가져오겠습니다.”

재준은 임병달 책상에 있던 자신의 기획서를 손 회장에게 공손히 건넸다.

음.

미레도홀딩스,

적대적 M&A.

표지에 있는 제목만 보고도 손 회장의 표정이 굳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천천히 기획안을 살펴보았다.

손 회장이 기획서를 볼 동안 임병달과 재준은 침묵했다.

탁.

손 회장이 기획서를 다 읽고 책상에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임 회장님, 이 기획서 언제 작성된 것입니까?”

“정 실장이 전달했던 전날이니까 8일 전에 작성된 겁니다.”

“그렇군요. 현재증권 경제정책연구실의 정보력에 놀랐습니다.”

임병달은 민망한 듯 말을 건넸다.

“저희 경제정책연구실 기획서가 아닙니다. 여기 앞에 있는 임재준 사원이 혼자 작성한 겁니다.”

“네? 혼자서요?”

손 회장은 재준을 쳐다보며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직위가 뭔가?”

“사원입니다. 입사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손 회장은 안경 너머로 재준을 잠시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내 미간이 찌그러지며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음.

닮았다.

임석훈 사장을 빼다 박았어.

어쩐지 일개 사원이 임 회장 곁에 있는 게 신기했는데.

임병달 회장이 누군가.

아들이 죽은 뒤 차기 사장을 뽑지 않고 부사장 투 라인을 아직도 운영 중인 사람이었다.

정 실장 외에는 자신의 옆에 사람을 둔 적이 없었다.

“허허. 낯이 익어서 설마 했는데. 자네였구만. 망나니라고 소문난 임석훈의 아들.”

잠시 정적이 일었고.

하하하하.

임병달은 크게 웃었다.

“손 회장님, 알고 계셨습니까?”

“왜 모르겠습니까. 아드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는데요.”

임병달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분간은 회장님만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손자 녀석이 회사에 신입 사원으로 막 들어가서 일을 배우고 있는 상태거든요.”

“신입 사원으로요? 말단 말입니까?”

“네, 녀석이 그렇게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손 회장은 손으로 턱을 만지작거리며 재준을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일부러 망나니처럼 행동했나 보구나.”

“아닙니다. 회장님. 이제 철이 들었을 뿐입니다.”

손 회장은 기획서를 손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막 철이 든 사람은 이런 기획서를 만들지 못해. 아니, 이건 기획서라기보다는 예언서에 가깝던데.”

재준이 덤덤하게 말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가. 오늘 아침 선동방 그룹과 그랜드월이 서로 손을 잡았다는 정보를 입수했네. 그런데 자넨 8일 전에 이미 두 세력이 손을 잡을 걸 알았단 말일세. 앞으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보거든. 어떻게 생각해 낸 건지 말해 줄 수 있겠나?”

재준이 잠시 망설이자 임병달이 대신 입을 열었다.

“재준아, 괜찮다 말씀드려라.”

“알겠습니다.”

재준은 임 회장의 동의에 고개를 끄덕였다.

“대한과 선동방. 두 그룹은 각각 식품 유통과 의류 유통, 즉 유통을 기반으로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동안 건설, 골프장, 해운업, 미디어 사업으로 확장하며 이상한 경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 그렇지 않아도 전경련 모임에서 얼마나 자랑을 해대던지. 자네는 그 둘이 왜 싸운다고 생각하는가?”

“유통의 통합입니다.”

“그렇겠지. 식품은 소매점이고 의류는 백화점. 이 둘을 합치면 유통의 전체를 아우를 수 있을 거야. 욕심이 날 만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자연스러워. 이제까지 서로의 영역에 관심도 없던 기업들이 싸우다니.”

“네. 누군가 불씨를 던졌을 겁니다.”

“그게 누군데?”

“그랜드월입니다. 최근 대한 그룹이 미디어 사업으로 진출하자 선동방 그룹은 금융업에 진출하려고 증권 관계자를 자주 만났다고 합니다. 그때 선동방에게 적대적 M&A를 꺼냈을 겁니다.”

“자네가 그것까지 알아냈다는 말인가?”

“신문을 자세히 읽다 보면 다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 자잘한 정보를 조합하는 게 얼마나 대단한 능력인지 모르는 건가?”

“감사합니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호랑이라 불리는 전경련 손 회장의 입에서 감탄이 쏟아졌다.

“임병달 회장, 비룡을 숨기고 있었군요.”

***

“여기에 도장 찍으시면 됩니다.”

일주일 만에 다시 나타난 박민수는 임재준에게 자랑스럽게 계약서를 내밀었다.

[채무이행 계약서]

갑 : 현재증권 임재준을 ‘갑’으로 칭한다.

을 : 만선증권 한승일을 ‘을’로 칭한다.

제1조 【채무액】

“을”은 “갑”에게 총액 일금 이십오억원정의 채무를 부담함을 확인하며 변제방법은 다음에 따른다.

1) 현금 : 일금 이십오억원정

(중략)

제5조 【동산담보】

박용주 소유의 백화점 소유권을 “을”에게 이전하고 그에 상응하는 금액을 “갑”에게 돌려준다.

본 계약서에 기한 공정증서의 작성을 “갑”에게 위임하면서 이에 필요한 서류를 본 계약서 작성일에 “갑”에게 교부한다.

(중략)

제7조 【기타사항】

“을”은 본 계약의 내용을 신의성실에 의거하여 준수하도록 한다.

한마디로 한승일이 재준에게 돈을 빌렸다는 내용이다.

대충, 말로 오간 내용을 문서화했다.

그리고 작전에 관한 내용은 계약서에서 사라졌다.

한승일. 무식한 놈.

작전한다고 명시하는 놈이 어딨어?

박민수가 알아서 잘 뺐네.

이제 한승일이 작전을 하다 걸리면 혼자 뒤집어써야 한다. 그것도 친구에게 돈을 빌려서 한 꼴로 말이다.

만약 작전에 성공해서 돈을 마련하고 그 돈으로 춘천백화점을 담보로 돈을 빌려줬는데, 박용주가 돈을 갚지 못하면 백화점은 한승일 소유가 되는 그림이었다.

“좋군요.”

재준이 서류에 도장을 찍자 박민수는 한승일 대신 도장을 찍었다.

잠깐만.

위임장도 없이?

남의 도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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