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화 주거니 받거니 해야 하는데(2)
그리고 박민수란 이름.
분명 어딘가에서 들어 본…… 아니, 읽어 본 이름이었다.
박민수.
박민수.
아, 설마?
같은 이름을 가진 유명인이 한 명 있었다.
3년 뒤인 1999년에 외국계 증권회사를 때려치우고 나온 5명이 모여 만든 회사 미리내증권의 대표이사가 박민수란 이름이었다.
후에 대한민국 증권계를 이끌어가는 인물.
설마, 그 박민수?
박민수란 이름도 흔하고 흔한 이름인데 동명이인이겠지.
근데, 아니면?
만약 진짜 박민수라면…….
천 실장 할 일이 하나 늘었네.
재준은 천 실장에게 조용히 문자를 남겼다.
-J.스탠리 박민수 말고 외국계 증권사에 박민수라고 또 있는지 알아봐 주세요.
-네.
핸드폰을 품 안에 넣은 재준은 박민수에게 다시 집중했다.
일단, 왜 이 사람이 여기 왔는지부터.
“용건이 뭡니까?”
“한승일 씨를 아시죠?”
“한승일?”
“네.”
“모릅니다.”
“그럼 혹시, 만선증권 상무는 아십니까?”
만선증권?
“모릅니다.”
“한승일 씨 정말 모르세요?”
“모릅니다.”
재준이 신기한 듯 눈을 깜박였다.
나를 아는 놈이 나타났다.
하필 적대적 M&A에서 박쥐 역할을 맡았던 만선증권 상무란다.
상무면 나이가 좀 되지 않나.
근데.
“한승일 씨는 임재준 씨를 친구라 했습니다.”
친구?
이거 또 기억상실증 코스프레해야 하네.
“글쎄요. 제가 병원에 입원한 후로 기억이 온전치 않아서요.”
“아, 병원. 얘기는 들었습니다. 기억상실증이시라고…….”
어쭈, 내 뒷조사를 했다.
어쨌든 J.스탠리라는 건가.
“제 병원 이야기 들으러 오신 건 아닐 거고 용건을 말해 보세요.”
“임재준 씨가 한승일 씨한테 25억을 맡기셨습니다.”
“…….”
25억?
아하, 탕진했다던 25억?
그게 한승일에게 흘러 들어간 거였어?
“문서 있습니까?”
“여기 있습니다.”
박민수가 문서를 꺼내 재준에게 내밀었다.
문서를 보자마자 웃음이 터져 나오는 걸 억지로 참았다.
이거 뭐 애들 장난도 아니고.
1. 목표 : 작전으로 25억을 250억으로 만들어 현재증권 주식을 사들인다.
2. 25억에 대한 권리는 임재준이 갖는다.
3. 할아버지를 호주로 내쫓고 자신이 왕좌에 앉는다.
뭐야 이게.
XXXXXXX.
너무 기가 차서 재준은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이게 뭡니까?”
“임재준 씨와 한승일 씨가 맺은 계약서입니다.”
풋.
임재준, 이 개또라이.
한승일이 임재준 똘마니였구나.
현재증권의 몰락이 여기서 시작된 거고.
기억에 의하면,
현재증권은 무리한 작전으로 금감원의 추징금과 고객들의 환매 요청이 겹치며 유동성 위기를 겪었다.
개입한 작전주만 해도 일곱 개가 넘었다.
오성타이어, 미래제철, 삼풍제작소, 세경포리머, 광섬제약, 봉신섬유, 미래의류 등.
재벌 3세의 무분별한 작전으로 망한 <현재증권>.
한승일의 탐욕과 임재준의 우둔함이 만들어낸 졸작.
재준이 문서를 보고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박민수가 말을 꺼냈다.
“작전 칠까요?”
뭘 쳐. 정신 나간 양반아.
박민수의 말에 재준이 미소를 지으며 박민수를 묘하게 쳐다봤다.
“이런 일은 불법 아닌가?”
‘반말?’
“맞습니다.”
“불법이면 거절하지 굳이 나를 찾아오신 이유가 뭐야? 돈 때문이야?”
“한승일 씨는 우리 회사 VVIP 고객입니다. 그리고 지금, 불법이 난무하는 시대 아닙니까.”
“다들 불법을 저지르니까 괜찮다?”
재준의 말에 박민수가 움찔했다.
“그리고 지금 한승일은 작전을 칠 상황이 아닌 것 같은데.”
“…….”
“M&A 신경 쓰기에도 바쁘지 않나? 미레도홀딩스 주식이 길바닥에 널려있는 것도 아니고. 삐딱하게 옆에서 작전 치다 들통나면 만선증권 사장한테 혼날 텐데. 그러다 쫓겨나지, 쫓겨나.”
박민수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어떻게 안 거지?’
만선증권이 미레도홀딩스 주식을 매입하는 건 아직까진 내부적으로도 쉬쉬하는 비밀이었다.
한승일한테 듣기론 어느 정도 매집 후에 그랜드월과 대한 그룹 중 어디에 팔 건지 저울질한다고 했다.
재준은 말이 없는 박민수에게 재차 물었다.
“작전 쳤다 치고 그다음은?”
“돈을 불려 대한 그룹의 박용주가 소유하고 있는 춘천백화점을 담보로 돈을 빌려줄 겁니다. 그다음은…….”
“잠깐. 스톱, 스톱.”
춘천백화점?
“대한 그룹 박용주?”
“네.”
“누굽니까?”
“대한 그룹 회장의 손자입니다.”
“이번엔 손자.”
한승일,
이놈 봐라.
친구 돈으로 친구 백화점을 뺏어 먹겠다?
작전이야, 만선증권 펀드 매니저 구워삶으면 될 것이고, 그 돈으로 백화점을 담보로 돈을 빌려준다.
그다음은?
어쩌는지 잠시 지켜봐야겠는데.
“그렇다고 치고,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네. 말씀해 보십시오.”
“J.스탠리면 만선증권과 비교할 바가 아닌데, 왜 한승일 뒤치다꺼리를 하는 겁니까?”
이게 무슨 인력 낭비야.
박민수, 당신이 그 박민수가 맞다면 엄청나게 잘나가는 사람이 될 텐데.
순간 파고든 말에 박민수가 입술을 굳게 닫았다.
후.
깊게 한숨을 내뱉고 입을 뗐다.
“펀드 매니저가 돈 말고 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
“한승일이 당신에게 꽂아 놓은 돈이 얼마나 됩니까?”
“대충 삼백억 정도 됩니다.”
“당신이 굴리는 총금액이 얼만데요?”
“한국에선 천억 정도. 미국에선 10억 달러까지 핸들링 했습니다.”
10억 달러까지 운영했었어?
근데 이 짓거리를 하고 있다고?
“한승일에게 약점 잡힌 거 있습니까?”
“…….”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고.”
“나중에 투자사를 차리면 이사 자리를 약속했습니다. 외국계 증권사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동양인은 없습니다. 실수 한 번이면 다음 날 책상 없어집니다.”
그래도 그렇지.
겨우 이사 자리에 끌려다니고 있다고?
아닌가? 나니까 이사가 별거 아니지만, 박민수로선 이사면 대단한 자리지.
그렇다 치고.
“한승일이 박민수 씨를 이사 자리에? 언제?”
“그건…… 아직 기약이 없습니다.”
“당신 한승일을 믿어? 아니면 한승일이 당신을 믿어?”
“고객인데 믿고 말고가 있습니까?”
뭐야? 아무 관계도 아니잖아.
진짜 박민수면 대박인데.
이때,
천 실장에게 문자가 왔다.
-J.스탠리 외에 없습니다.
오호, 이거 봐라.
진짜 박민수란 말이네.
2022년에 금융권 통틀어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 재준이 앞에 있다.
시대의 흐름을 정확히 읽고 과감한 결단력으로 증권계에 혜성과 같이 등장하여 뮤추얼 펀드의 돌풍을 일으킨 그 박민수가.
잘됐어.
미국 투자사 책임자로 딱이다.
앞으로 한국이 아니라 미국에서 활약 좀 하겠는데.
그래도 문제는 있다.
이 사람이 J.스탠리를 때려치울 가능성이 적다는 것.
3년 후엔 왜 때려치우고 증권사를 차렸는지 모르지만 일단 내 사람으로 만들고 볼 일이다.
재준은 일어나서 책상으로 갔다.
그리고 금고를 열어 통장을 꺼내 박민수에게 내밀었다.
“여기.”
통장을 집어 액수를 확인한 박민수의 눈이 흔들렸다.
“이백억?”
“거기에 삼백억 더.”
“왜…… 이러십니까?”
박민수는 충격을 받은 듯 말을 더듬어댔다.
박민수가 통장에 박힌 숫자를 다시 확인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좀 당황스럽습니다.”
“당황스럽긴, 저도 J.스탠리 힘을 빌릴까 하는데.”
박민수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계약서를 전달하려고 왔다가 계약하게 됐네요.”
박민수는 통장을 보며 고민을 했다.
‘이래도 되는 건가.’
박민수의 고민하는 모습에 재준이 쐐기를 박았다.
“오백억으로 지정한 종목을 사주면 됩니다. 차후 원금 빼고 수익은 다 본인이 드시면 되고.”
“수익을 다? 1%만 해도 5억입니다.”
“왜? 10% 정도는 수익을 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박민수는 나지막이 말했다.
“제가 뭘 해야 합니까?”
“이제부터 진지하게 이야기 좀 할까?”
한승일이 장난친다면 나도 보험 하난 들어놔야지.
재준이 탁자 위에 놓인 계약서에 시선을 옮기자 박민수는 그의 의도를 재빨리 알아챘다.
“일단 한승일 씨를 만나 상의를 하겠습니다.”
재준은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한승일하고 꼭 상의하고. 말을 바꿀지도 모르니까 증거도 잘 만들어 두시고.”
“증거라면…….”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떡하지?”
“아, 네.”
박민수가 빠르게 태세를 전환했다.
“임재준 씨 의견을 토대로 다시 계약서를 만들겠습니다.”
말귀는 잘 알아먹네.
박민수는 재준의 의도를 파악한 듯 계약서를 가방에 넣었다.
계약서를 다시 만들고 한승일에게 가서 도장을 받는다.
계약서에 갑은 임재준, 을은 한승일로 명시가 되어야 한다.
임재준은 돈의 주인이 누군지 분명하게 밝혀 친구에서 채무자와 채권자로 선을 그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는 재준.
박민수는 주의를 기울이며 재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오백억은 박 팀장님 개인 계좌로 넣어 드리겠습니다.”
재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박민수는 대답했다.
“아닙니다. J.스탠리 계좌로 입금해 주십시오.”
“그럼 수익금이 아니라 수수료만 먹을 텐데요?”
“회사와 임재준 씨가 계약하시고 옵션을 걸어 주시면 가능합니다.”
“그럼, 그건 그렇게 하면 되고. 박 팀장님이 해주실 일은…….”
역시 투자 이야기로 분위기가 바뀌자 J. 스탠리의 팀장다운 면모가 보였다.
“만선증권 주식을 사는 겁니다. 아무도 모르게 은밀하게.”
“최대한 매집하겠습니다.”
“일 좀 편하라고 내가 뉴스 하나 터뜨려 드릴게.”
“손 빠른 친구들을 붙이겠습니다.”
됐다.
이제 만선증권이 대한 그룹을 만나는 현장을 덮치면 끝.
“그리고, 제가 임병달 회장님의 손자라는 건 아무도 모릅니다. 그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됩니다.”
“그건 믿으십시오. 전 고객의 비밀은 철저하게 지킵니다.”
“한승일도 저의 신상을 알아선 안 됩니다.”
“알아서 둘러대겠습니다.”
재준은 박민수의 눈을 바라보았다.
눈동자가 흔들린다.
아직은 한승일에 대한 걱정이 있을 수 있다.
“비밀을 철저히 지키신다니, 제가 이야기 하나 해드리겠습니다.”
“…….”
“적대적 M&A 후, 현재증권이 전면에 등장할 겁니다. 한승일이 준비하고 있는 어린아이 코 묻은 돈 뺏는 것하고는 차원이 다르죠.”
또 뜸을 들이는 임재준.
“그래서 적임자를 찾는 중입니다.”
적대적 M&A 후.
적임자.
J.스탠리에서 팀장 자리에 있는 박민수가 재준의 말을 모를 리 없다.
현재증권이 대한 그룹을 상대로 전쟁을 걸려고 한다.
현재 한국에서 증권사 순위 1위는 현재증권이다.
그럼에도 덩치로 보면 대한 그룹이 현재증권의 몇 배는 크다.
하지만,
덩치가 크다고 다 이기는 건 아니다.
싸움에서 피투성이가 된 덩치라면 더욱더 쉽다.
돌볼 게 많은 적은 힘이 분산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번 전쟁은 돈이 많이 들 필요도 없다.
미국의 사모펀드들은 10조가 넘는 회사도 단돈 수천억에 먹어 치운다.
금융과 법을 잘 이용한다면 상대가 아무리 거대해도 먹지 못할 기업은 없다.
임재준.
한승일이 얕잡아 보던 망나니가 아니다·
자신의 앞에 있는 임재준은 망나니가 아니라 탁월한 협상가다.
“알겠습니다.”
박민수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일어섰다.
“오늘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런데 박 팀장님은 한승일하고는 친군가요?”
“아닙니다. 사실 제가 한승일 씨보다 나이가 더 많습니다. 유학 중에 만났고 그 인연이 계속 이어지고 있을 뿐입니다. 제 고객으로요.”
“이젠 형 대접을 받을 때도 된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