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증권 재벌의 천재 손자가 되었다-34화 (34/477)

제34화 주거니 받거니 해야 하는데(1)

삶에서 성취는 수많은 노력과 고난을 견딘 위에야 비로소 얻어지는 것이다.

설사 우연히 얻어지는 행운이라도,

길에서 황금을 줍는다고 해도 말이다.

적어도 집 밖으로 나가는 노력이라도 했어야 그런 행운이 오니까.

그래, 노력.

재준은 과제를 앞에 두고 초점을 잃어버린 동기들을 골똘히 바라보며 그들에게 의욕이란 기름을 부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활활 타올라라.

투자대회에서 보인 열정에 다시 불을 지피면?

적대적 M&A,

문제 될 것도,

어려울 것도 없지.

근데 어떻게 지핀다?

일단,

“자, 시작합시다.”

잠시, 침묵.

재준이 네 명의 얼굴을 살펴보니 모두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최진기가 손을 주춤거리며 자신 없는 동작으로 말했다.

“재준 씨, 그런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이무열도 거들었다.

“재준 씨, 계획이 있으세요?”

박승하가 따랐다.

“전 아는 게 별로 없는데.”

모두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이 사람들아, 얼굴 좀 펴.

썩었어. 완전 썩었다고.

특히 김혜림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만약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일이라도 시키면 얼른 도망가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정.

김혜림이 무거운 얼굴을 하며 입을 열었다.

“전 무얼 할까요?”

그나마 건설적인 질문이네.

이런 일도 처음이고 아직도 신입 딱지를 붙이고 있으니 어디서부터 손을 댈지 모르겠지.

서로 얼굴만 말똥말똥 쳐다보는데, ‘뭐든 닥치는 대로 시작하세요.’라고 말하면 다들 그 자리에서 드러누울 기세였다.

“자, 그럼, 큰 그림부터 봅시다.”

모두의 눈이 재준을 향하자 재준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간단하게, 경영권 방어 지분은 50%에서 한 주만 더 가지고 있으면 이깁니다.”

“그건 압니다.”

“전에 프레젠테이션에서 말했듯이 그랜드월과 대한 그룹이 치열하게 시장에서 매수에 나설 겁니다.”

“그것도 알고 있습니다. 재준 씨가 얘기했으니까. 은행에서 단기 대출을 받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오케이. 이대로 가면 그랜드월이 집니다. 이유를 아시는 분?”

이무열이 손을 들었다.

“외국인 매집 한도 18%에서 더 나가질 못합니다.”

“맞습니다. 해결 방법은?”

이번엔 박승하가 대답했다.

“파트너가 있어야겠군요. 추가 매집할 수 있는 기업이 필요합니다. 되도록 한국 기업으로.”

“왜 꼭 한국 기업이죠?”

“외국계 기업 둘보다는 한국 기업이 끼어 있는 게 여론몰이에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그 한국 기업은?”

선동방 그룹!

네 명이 일제히 하나의 이름을 내뱉었다.

재준의 눈이 반짝였다.

자신이 듣고 싶은 대답이 나왔다.

“맞습니다. 대한 그룹과 유통을 양분하고 있는 그룹. 선동방 그룹이 이 싸움에서 가장 많은 이득을 챙깁니다.”

재준은 잠깐 멈췄다가 말을 이었다.

“어때요? 이러면 다 해결됐습니까?”

재준의 눈빛이 ‘이제 너희들 차례야’라고 말하고 있었다.

풋,

심각한 분위기가 풀렸는지 최진기가 실없이 웃었다.

“하하하, 다 아는 건데. 재준 씨가 말해 주니 정리가 되는 건 뭘까요?”

“전 사례를 많이 알고 있어서 그런 겁니다.”

그럼, 그럼.

아예 결과까지 다 알고 있지.

재준은 최진기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최진기 씨, 숫자로 세계를 정복해서 영웅이 되고 싶다는 그 꿈, 저는 도전해 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그런 유치한 이야기를 제가 했다고요?”

“전에 술 취해서 동네방네 떠나가라고 소리 질렀어요.”

김혜림이 그때 창피했다는 듯 고개를 도리질했다.

최진기는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민망했다.

‘정복이니, 영웅이니 그런 말을 하다니.’

이 건물엔 쥐구멍도 없다.

꿈은 있었다.

어렴풋이 돈을 움직이고 싶었다.

돈을 버는 게 아니라 움직이는 것.

최고는 아니어도 거대한 사모펀드를 운영한다든지, 기업을 상대로 로비를 한다든지 하는 일들.

그게 정복이고, 영웅 아닌가.

그런 인생을 살고 싶었다.

그래서 증권회사에 들어왔는데 막상 해보지도 않고 겁부터 먹었다.

도망가고도 싶었지만 그건 쪽팔렸다.

일이 어려워 회사를 나가면 어떻게 될까?

그건 도망이다.

회계 공부를 더 해서 CPA 자격증을 따서 회계 사무실을 열 수도 있다.

근데 그건 쉬울까?

결론은 ‘아니다’였다.

증권.

회계의 숫자는 복잡하게 만들어야 하고,

증권의 숫자는 복잡한 걸 풀어야 한다.

숫자로 세상을 읽고 있는 자신의 모습.

재벌의 뒤에서 재벌을 움직이는 사람.

이 얼마나 멋진가.

그리고 그런 인간에 근접해 보이는 인물이 바로 재준이었다.

그런 재준이 최진기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최진기는 그 손을 잡고 싶었다.

아직 확신할 수는 없지만 재준이 이끄는 대로 가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기 오는 동안 경제 연구소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을 절반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저는 재무제표만 볼 줄 압니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정말 충분합니까?”

“그럼요. 기업의 분석은 재무제표에서 시작하잖아요. 대한 그룹 재무제표 보실 수 있으시죠?”

“그건 가능합니다.”

“그럼, 지금부터 그랜드월과 대한 그룹, 선동방 그룹의 지주 회사부터 계열사, 어쩌면 협력 업체까지 다 들춰 봅시다.”

“전부 다요?”

“네, 전부 다.”

“진짜 전부 다?”

“안 할 수 없잖아요.”

“그래도, 이건 양이 너무 많은 것 같은데…….”

“그러니까 재무제표 보는 능력만 있다면 가능한 겁니다. 전부 양이 많으니까.”

최진기의 얼굴에 다크서클이 벌써 턱밑까지 내려왔다.

“어렵지 않지요?”

그게…….

으르렁.

재준에게서 풍기는 특유의 존재감은 감히 거역하기 힘든 느낌을 주었다.

최진기가 자신의 의지와는 반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요. 하하.”

재준은 박승하를 돌아봤다.

이제 네 차례다.

“박승하 씨, 대한 그룹 및 신동양 그룹과 관련된 부동산 다 찾아보세요. 샀다가 판 것도 싹 다.”

“차라리 우리나라 부동산을 다 뒤지라고 하세요.”

“이무열 씨는 세 분이 발견한 오류에 법 조항을 대입시켜 주세요.”

“경제관련법령까지 찾으려면 저 죽을 수도 있어요.”

“김혜림 씨. 그랜드월 본사 자료와 뒤에 있는 사모펀드 알아봐 주세요. 그리고 홍콩에 투자사 하나 차렸을 겁니다. 뒤지세요. 지분구조부터 싹 다.”

“싹 다…….”

김혜림은 마른침을 삼켰다.

“근데, 신기하네요. 홍콩이요? 재준 씨는 이런 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예요?”

“조사하면 다 나옵니다.”

“벌써 조사를 다 하신 거예요?”

“그럼요.”

뭔 조사, 그거 다 책에 나와 있는 거지.

재준은 동기들에게 각자 할 일을 일러준 뒤 정 실장을 보필한다는 핑계를 대고 연구실을 나왔다.

하지만 엉뚱한 곳에서 일이 터졌다.

***

세계적 투자회사 J.스탠리 한국 지사.

로비에서 박민수는 한승일을 알아보고 말을 걸었다.

“웬일이야?”

만선증권 사장 아들 한승일이 J.스탠리 팀장 박민수를 찾아 왔다.

유학 시절 알게 된 게 인연이 되어 지금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한승일은 박민수를 별 볼 일 없는, 자신의 영어 과제를 대신 해 주던 하인? 뭐 그 정도로 취급했다.

“이거 받아.”

“뭔데?”

박민수는 J.스탠리에서 수익률 상위권을 놓치지 않을 정도로 발군의 실력을 갖췄지만, 만선증권의 재벌 2세 앞에서는 무시와 멸시를 피할 수 없었다.

‘소개해준 VIP만 아니면 들이받아도 벌써 들이받았다.’

박민수는 한승일보다 네 살이나 위였지만 그의 반말을 참아야 했다.

VVIP 고객 한승일은 갑이었고 박민수는 언제나 을이었으니까.

“일 하나 해줘.”

“알았다.”

딱, 끊으며 명령조로 말해도 기분 상한 티도 내지 못하는 박민수의 처지가 그들의 상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줬다.

‘까라면 까야지.’

근데 한승일 입에서 뜬금없이 이름 하나가 튀어나왔다.

“임재준이라고 기억나?”

‘네가 매일 씹어대던 놈을 모를 리 있냐.’

“임재준? 그 망나니?”

“기억하네.”

“임재준이 왜?”

“그놈이 나한테 25억을 맡겼어. 할아버지 회사를 사 버리겠다고.”

“언제?”

“몇 달 전에.”

“몇 달 전이면, 너 사고로 병원에 있을 때 아니야?”

“응. 같이 놀다 사고 났지. 퇴원해서 슬슬 연락하려고 했는데, 사라졌어.”

“그래서 주인 없는 돈이 됐다?”

“주인 말은 들어보고 처리해야 할 거 아냐. 네가 힘 좀 써.”

“알았다.”

“잘 안 되면 알지?”

“…….”

한승일은 박민수의 손에 계약서가 담긴 서류봉투를 넘겨주고 사무실을 나갔다.

‘비열한 새끼.’

네가 힘 좀 써라?

쉽게 말하면, 임재준의 돈을 꿀꺽할 묘책을 가져와라.

그냥 먹기에는 현재증권이 눈에 밟히니까.

‘진짜 돈만 아니면…….’

임재준의 돈을 갖지 못한다면 J.스탠리에 소개해준 VIP 고객과 재벌 자제들의 은밀한 돈이 빠져나가겠지.

처라리 그게 나을지도 모른다.

매일 한승일 똘마니들 술값을 대신 내주는 것도 지쳐가고 있었다.

‘남의 뒷담화나 까던 놈들.’

차마 앞에서 대놓고 할 용기는 없어서, 뒤에서만 임재준을 똥개라 칭하던 놈들의 대장이 한승일이었다.

-임재준 그 새끼 말야. 증권가 손자라는 놈이 아는 것도 없으면서 더러운 성질만 믿고 재벌인 양 거들먹거리는 거 꼴사납지 않냐.

그 꼴이 보기 싫어 언젠가는 임재준을 엿 먹일 거라 했다.

임재준의 반반한 얼굴을 꼭 짓밟겠다고.

‘한승일 너나 잘해라. 능력이라고는 남 못살게 구는 것밖에 없는 놈이 무슨.’

박민수는 짜증이 올라오는 걸 참으며 사무실로 올라왔다.

그리고 자신의 수첩을 꺼내 펼쳐 놓고 여기저기 전화를 했다.

인사하고 끊고, 인사하고 끊고를 계속 반복했다.

“재수 없는 새끼……. 내 처지가 이러니 세상 X같네.”

J.스탠리의 팀장이나 되어서는 한 개인의 신상이나 털고 있다는 게 한심했다.

경찰이나 사설탐정도 아닌데…….

생각할수록 짜증이 솟구쳤다.

“X팔.”

“팀장님, 그 욕 좀 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아, 미안! 짜증 나는 놈 비위 맞춰 주다가 성질 다 버려서 그래.”

박민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제 하다 하다 후배한테도 까이는구나.

인맥을 통해서가 아니라 내 진정한 실력을 발휘하며 일하고 싶다.

내가 왜 한국으로 돌아왔을까?

박민수는 꽤 오랫동안 전화기 앞에서 떠나지 못했다.

***

박민수가 임재준을 조사한 바로, 그는 평범한 신입 사원이었다.

분명히 한승일이 임재준은 회장의 손자라 했는데.

재벌 손자가 임원도 아니고 단지 연구실 팀원?

평사원으로 시작해 승승장구하며 대표가 되는, 그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건가.

과거 답 없는 행동으로 추측해 본다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평사원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증권가 손자.

이 얼마나 드라마틱한 스토리인가.

실적 하나 제대로 터트린 후 짠, 하고 나타나면 그 감동은 열 배요, 그에 대한 신뢰는 평생 간다.

하지만…… 과연?

이제껏 놀면서 돈 쓸 줄만 알았는데 무슨 수로 실적을 내.

직원들 닦달하거나 아니면 가로채거나, 둘 중 하나겠지.

그리고,

한승일 말로는 성질도 더러워서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날아가는 놈이라지.

덕분에 당사자를 앞에 둔 박민수는, 재준이 움직일 때마다 그의 주먹을 보며 움찔했다.

‘괜히 온 것 같기도 하고.’

그런 그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임재준이 박민수의 명함을 들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재준은 J.스탠리 팀장이라는 명함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후 박민수를 쳐다봤다.

박민수.

전 세계 금융 인재들이 모인다는 J.스탠리 팀장이 나한테 무슨 볼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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