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화 나 누구랑 대결한 거니?(1)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시장을 읽는 방법 중 하나거든. 요즘 애널리스트 보고서 보면 앞으로 인터넷의 시대가 열리고 선진 금융이 들어오고, 수출이 호조라는 등 개소리들만 하고 있잖아.”
“그게 왜 개소리예요?”
“개소리지. 일반 투자자에겐 그게 다 개소리야. 그런 이야긴 전부 저기 기업 사장한테 해야지. 우리한텐 전혀 도움이 안 돼. 도움이 안 되는 정도가 아니라 잘못 투자하게 만드는 악이야. 악. 우린 작은 변화를 봐야 하는 거야. 지금 쏟아지고 있는 심리는 뭔지, 사람들과 기관들이 어떻게 실시간으로 움직이는지 알아채야 한다고.”
드디어 잔소리 시작인가.
강호석은 술잔을 단숨에 털어 넣고 진지 모드로 말을 이었다.
“증권맨이라면, 객장 분위기에 중독되는 건 당연지사. 승부욕이 없을 수가 없는 건 알아.”
자, 그럼 여기서 찬물을 확!
“그런데…….”
재준이 끼어들자, 강호석이 잠시 머뭇거렸다.
“그런데 뭐?”
“팀장님 수익률을 들었는데요.”
“네가 묻고 싶은 말은, 승부욕이 있는데 왜 수익률이 낮냐. 이 말이지?”
“네. 팀장님은 왜 돈을 벌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한순간 강호석의 눈매가 떨렸다.
“돈? 나도 벌고 싶어. 내 감각을 믿으며 아주 많이 벌고 싶지.”
강호석이 소주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그런데……. 임재준, 현실은 이상과 달라. 현실에선 증권맨에게 중요한 건 실력이 아니라 인맥이었어. 인맥.”
말을 마친 강호석은 소주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달았던 소주가 갑자기 쓰게 느껴졌다.
실력.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것이다.
특히 증권맨은 더더욱 높은 실력을 원한다.
돈의 흐름을 놓치면 바로 곤두박질치며 엄청난 손실을 끼치기 때문이다.
의사가 생명 앞에서 경건해야 한다면 증권맨은 돈 앞에 경건해야 한다.
증권맨.
사람들이 선망하는 직업이고,
눈 한 번 깜박이는 동안의 순간적 판단에서 수개월에 걸친 이성적인 분석만큼의 가치를 피부로 느끼는 직업이며,
세계 경제의 흐름을 읽어내 최전방에서 투자를 이끄는 직업이다.
증권맨이 앞서면 그 뒤로 사람들이 쭉 설 거라 믿었다.
하지만, 실상은.
VIP가 찍어 주는 종목을 사고팔며 수수료에만 집착하는 중개인일 뿐이었다.
증권맨에게 분석은 그저 돈 많은 고객을 유혹하기 위한 광고였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졌다.
가치투자를 부르짖으며 증권회사에 들어섰건만 영업에 지쳐버리고, 차명 계좌를 만들어 자신의 돈으로 주식을 사고팔게 되었다.
그다음은.
부모와 친인척에게 부탁하고, 점점 수익률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과연 제대로 된 수익률을 낼 수 있을까?
가파른 상승 곡선을 쫓아 물타기를 하다가 모든 돈을 날리는 것이 태반이었다.
그때는 이미 수익에 혈안이 된 도박꾼으로 변해있었다.
결국, 빚에 허덕이다 생존의 위기 끝에 사라지는 동료를 숱하게 보아 왔다.
‘지금까지 버틴 게 용하지.’
강호석이 쓴잔을 내려놓는데 옆에서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요즘 누가 증권사 가냐? 금융은 은행이지.
-아니야, 요즘 증권사 이슈던데.
-그래 봐야, 돈 모으려면 저축이 최고야.
-그럼, 그럼. 주식은 도박이지.
재준은 그 소리에 비릿하게 웃었다.
띵똥이 녀석들.
띵똥 소리에 맞춰 ‘안녕하십니까 고객님’이 튀어나오는 자동응답기 같은 놈들이 어디서 돈을 논해!
하긴 우리보단 너희가 덜 나쁜 놈이다.
은행은 원금은 까먹지 않지만, 증권은 깡통도 만들어주더라.
강호석이 옆자리 놈들을 향해 증오의 시선을 보내자 재준이 빈 잔에 술을 따랐다.
“강 선배, 틀린 말도 아닌데 왜 그래요?”
후.
강호석이 술잔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하긴, 나도 증권보다는 저축이 많다. 10%면 웬만한 펀드보다 낫지.”
1996년 수신 금리가 무려 10%가 넘었다.
1998년엔 거의 18%인 17.98%까지 치솟았고.
은행, 증권, 투자가 철저히 분리되어 있던 시절의 꿈같은 금리였다.
꿈 같은…… 금리?
가만있어 봐.
내 자산 판 돈 1,000억에, 연구실 배정된 6,000억 받고, 한보 주식 판 돈 2,000억도 달라고 해서 은행에 확 처박아 놓으면 1년에 900억을 주네.
주네. 주네. 주네.
900억……. 900억……. 900억…….
900억 주네. 900억 주네. 900억 주네.
어이, 잡귀야, 물러가라.
정신 차리자.
푼돈에 얽매이면 안 돼.
근데…… 900억이 푼돈은 아니지.
안 그래? 안 그래? 안 그래?
어이, 아니야. 아니야, 정신 차리자.
재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재준, 너 왜 그래. 오늘 술이 안 받아?”
“아니요. 강 선배님, 하나도 안 취했어요. 저 한 잔 주세요.”
재준이 술잔을 내밀자 강호석이 잔에 술을 따랐다.
쫄쫄쫄쫄.
재준은 술 따르는 소리에 이자에 대한 미련을 날려버렸다.
유혹이 만만치 않네.
하지만,
높은 금리가 왜 낮아졌을까 생각하니.
클린턴이 생각났다.
1996년 지금 대통령에 당선된.
X발 놈.
능력껏 살 수 있는 자본주의를 돈에 환장한 자본주의로 탈바꿈하게 만든 놈.
하긴, 미국 패권을 유지하려면 어쩔 수 없었겠지.
“선배, 클린턴 당선된 건 알죠.”
“그 사람 참 잘생겼더라. 젊고. 대통령 같지 않아.”
맞아요. 그래서 백악관에서 바람피우다 걸렸어요.
“클린턴이 ‘금융서비스현대화법’이란 걸 준비하는데 아세요?”
“글쎄…… 처음 들어 보는데.”
당연히 처음 들어 보겠지. 저건 그냥 내가 한국어로 부른 거고 본래 명칭은 ‘Gramm-Leach-Bliley-Act’다.
1999년에 제정된 이 법이 은행의 앞모습은 순진한 양으로, 뒷모습은 침을 질질 흘리는 늑대로 바꾸어 버린다.
이 법으로 미국 은행은 그동안 금지되어왔던 증권과 투자를 병행할 수 있게 되었다.
즉, 그동안 착실히 챙겨준 고객들의 이자를 투자로 바꿀 수 있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것.
이때부터 은행은 ‘정기적금’이 아닌 ‘수익률 좋은 투자 상품’을 추천하게 되었다.
나중엔 ELS, 방카슈랑스라는 별 거지 같은 상품도 날개 돋친 듯 팔렸다.
방카슈랑스, 정확히 말해 저축성 보험이라 부른다.
은행원은 ‘저축성’은 강조하고 ‘보험’은 슬쩍 숨긴다.
약관엔 저 구석에 쪼그맣게 10년이라고 적혀있을 것이다.
즉, 이 상품은 10년 안에 해약하면 적금보다 적은 금리에 과세 대상이 되고 만다.
한마디로 정기적금보다 좋다고 은행이 고객에게 사기를 친 거였다.
당연하지. 이거 팔면 수수료가 왕창 생기니까.
아니 왜 이야기가 산으로 가려는 거야.
흥분했네. 흥분했어.
어쨌든.
재준은 강호석에게 말했다.
“은행이 증권과 투자를 모두 소유할 수 있는 법안이에요.”
“가만, 지금 우린 투자는 가능하잖아. 은행은 꼭 필요 없을 것 같은데.”
“그렇군요.”
그렇긴 뭐가 그래.
증권은 당장 투자해 달라는 뜻으로 돈을 맡기기 때문에 남아도는 돈이 없다.
은행은 투자하지 말고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돌려 달라는 뜻으로 돈을 맡기기 때문에 돈이 넘쳐 난다.
그러니 은행과 증권이 합쳐지면 남아도는 돈을 끊임없이 굴릴 수 있다.
은행이 왜 필요가 없어.
그래서 미국에 도매은행을 인수하려는 건데.
소매은행과 달리 도매은행은 기업 간의 거래를 주로 한다.
기업의 일을 대신해 주니까 할 일이 엄청 많고 복잡하다.
당연하지, 기업 간의 일이란 법이 안 끼어드는 게 없으니까.
그것도 나라별로 법과 경제, 경영 모두 알아야 한다.
근데 왜 굳이 힘들게 도매은행이냐고?
굴리는 돈의 단위가 크니까.
큰돈을 굴리기에 최적화되어 있으니까.
그리고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도매은행에 대해 잘 모르니까.
또 산으로 가려고 하네.
강호석이 재준에게 말했다.
“근데 그 법이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미칠까?”
“우리나라도 당장 적용하지 않을까요? 아시잖아요. 매일 아침에 미국 증시 보시면서.”
“그렇지. 실시간으로 영향을 미치지.”
“그렇죠.”
“근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잖아. 은행을 차리자고 회장님께 건의를 드릴 수 있는 직위도 아니고, 정 실장님이나 부사장님처럼 경험이 많아서 인정을 받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이렇게 넋두리만 떨 뿐인데.”
재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그러네.
이런 거 보면 내가 참 잘났네.
당장 할아버지에게 은행 만들자고 말할 수도 있고, 경험도 없는데 인정도 받고.
재벌 손자 괜찮은데.
미레도홀딩스를 먹기 위해 준비할 게 많지만, 어쨌든 덩치도 커지고 내실도 단단해지는 느낌이었다.
가만, 미국에 투자사를 설립하면…….
강호석을 보낼까?
거시적인 경제관을 가진 사람과 함께.
딱인데.
펀드 매니저의 단점 중 하나가 시야 확보가 어렵다는 것이다.
분석을 할 땐 멀리 내다볼 줄 알면서 당장 눈앞만 보고 매매를 한다.
애널리스트도 분석에서는 미래를 이야기하면서 정작 추천하는 건 눈앞에 보이는 종목이다.
딱 까놓고 말해, 증권사는 정체성이 없다.
하긴 그러니까 지금까지 평균 수익률이 10% 넘는 펀드가 없지.
오죽했으면 펀드 매니저가 심사숙고한 종목보다 원숭이가 무작위로 뽑은 종목의 수익률이 높다는 말이 나올까.
강호석은 현실적인 시야를 가지고 있고 통제도 뛰어나다.
그럼, 미국 금융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을 찾아서 팀을 만들어주면 딱이네.
***
일주일 후.
현재증권에 도착한 재준은 빠르게 4층으로 올라가 탕비실에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겼다. 그러곤 자리에 돌아와 책상 위에 놓인 자료를 읽었다.
오전 7시 30분.
재준은 자료를 챙겨 1층 대회의장으로 갔다.
매일 오전 8시, 30분간 진행되는 있는 프레젠테이션에 참여하기 위해.
재준은 대회의장에 들어서며 사람들에게 깍듯하게 인사를 했고
사람들은 강호석 팀에 들어온 재준을 신기한 듯 쳐다봤다.
드디어 3개월을 버틴 신입이니까.
-저 신입은, 잘 버티고 있네.
-심심하지 않은가 봐.
-강 팀장님 밑에 있으면 답답해 죽을 텐데….
-저 서포터, 걔 아냐? 전에 회의실에서 있잖아.
-아, 미친놈. 회장님한테 대들던.
-대든 건 아니지.
-저 서포터. 수석이지.
-맞아, 맞아.
재준이 자리에 착석할 때 수다가 비아냥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저번에 그렇게 나댔구나.
-수석이라 이거지.
-그러니까 수석은 수석끼리 논다. 이거야?
그들의 비꼼은 감추지 않고 이어졌다.
-공부 잘한다고 실전을 잘하는 건 아니잖아.
-강 팀장님은 공부만 시키니까 딱이네.
-공부 못하는 사람이 증권사에 있긴 한가?
-수익률이 실력인 걸 강 팀장님은 언제 알려나.
오전 8시.
프레젠테이션이 막 시작되자 강호석이 헐레벌떡 나타나 재준의 옆에 앉았다.
사람들은 강호석의 지각에 눈살만 찌푸렸다.
지각한 것을 꼬투리 잡자니, 강호석은 다른 펀드 매니저와 달리 단 한 번도 프레젠테이션에 빠진 적이 없었다.
그들에겐 호석을 비판할 명분이 없었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격이니까.
8시 30분.
프레젠테이션이 끝나자 강호석과 재준은 펀드 5팀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휴. 오늘 내용은 알맹이가 없네. 자료 해석 없이 논문 그대로 가져왔고.”
“네가 보기엔 어때?”
“프레젠테이션을 제대로 하는 분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
“맞는 말이야.”
“그런데 왜 불필요하게 계속하죠?”
“일정 기간 참여하지 않거나 발표를 하지 않으면 연말 성과급이 반토막 나거든.”
“그래요?”
“그럼. 회장님은 무시무시한 분이야.”
재준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자,
“선배님도 성과급 때문에 참석하시는 겁니까?”
“아니, 아니.”
강호석이 손사래를 쳤다.
“아니야. 난 진짜 순수하게 참가해. 왜냐고? 그 제도 내가 제안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