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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권 재벌의 천재 손자가 되었다-30화 (30/477)

제30화 혹시 같은 업종이십니까(3)

다행이다.

재준은 세단의 뒷좌석에서 눈을 감고 머리를 뒤로 젖혔다.

큰일 날 뻔했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그야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현재증권이 어디에 대출을 해줬는지 하나하나 어떻게 알겠어.

부도 그룹의 부도와 현재증권은 전혀 관계없다고 생각했다.

자칫 부도의 여파에 휩쓸릴 뻔했다.

재준이 전생에 가장 혐오한 인물은 재벌가 자식들이었다.

2세, 3세들.

자신의 노력은 없고 타고난 운으로 재벌이 된 인간들.

하지만 자신을 보면서 약간의 오해는 풀 수 있었다.

최소한 재벌은 자신의 다음 세대에게 가혹하게 훈련 시켰다.

그건 재벌도 지켜야 할 선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욕심의 선을 넘지 말라.

선을 넘고 싶으면 스스로 담금질하라.

재벌은 후대가 선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냥 방치했다.

그들에게 미래가 없으니 버리는 것이다.

예전의 재준이 그랬다.

얘기를 들어 보니 아버지의 죽음 이후 방황했다는데 임병달은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간 기다리다,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면 버렸을 것이다.

할아버지 임병달의 성정이면 예전의 망나니 같은 임재준에게 현재증권을 물려줄 리 없으니까.

사회에 환원하면 환원했지 어림 없는 일이다.

그러나,

부도 그룹의 장 회장은 그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

이게 밑바닥부터 정도를 지키며 재벌까지 올라온 사람과의 차이였다.

운으로 만들어진 인생이었다.

-흙과 관련된 사업을 하세요.

배운학의 조언이었다.

그래서,

장 회장은 처음에 일본이 버리고 간 광산을 2만 엔이라는 헐값에 샀다. 그리고 거기서 스테인리스강의 재료로 쓰이는 몰리브덴이 채굴되었다.

광산이란 곳에서 무언가 가치 있는 걸 캐기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와 같은 것인데 그는 처음부터 운이 터졌다.

다음으로는 40억을 들고 대치동 아파트 분양을 시작했다. 처음엔 미분양으로 파산하나 했더니, 석유파동이 일어나 돈이 부동산으로 몰리면서 단번에 2,000억을 벌었다.

운의 연속이었다.

수서 사건으로 잠시 주춤했다.

-쇠와 관련된 사업을 하세요.

배운학의 조언이었다.

망해가는 철근 회사를 인수했는데 팔리지 않는 철근이 산처럼 쌓여있었단다.

그런데 엔고가 터지며 철근이 삽시간에 팔렸다.

역시 운빨 지렸다.

이러니 뭘 해도 될 것 같지 않았을까.

POSK를 능가하겠다고 부도철강을 세웠고, 신공법인 ‘코락스’까지 도입하면서 총력을 기울여 결국 냉연과 열연공장을 함께 갖춘 제철소를 만들어냈다.

운이 좋아도 이렇게 좋은 사람도 없을 것이다.

다른 재벌과 비교하면 노력이란 눈곱만큼도 하지 않고 재벌이 된 것이다.

그것도 재계 14위.

이게 말이나 되나?

운빨이 터져도 정도껏 터져야지.

그래서 지금 이 지경이 된 거지만.

재벌도 마냥 좋은 게 아닌 건 확실하다.

지금 당장 돈에 대한 걱정이 없다는 건 좋지만.

누군가 재벌이 되겠다면 말리고 싶다.

왜?

나를 보라고, 여기저기 싸울 일만 있잖아.

쉴 틈이 없어요. 쉴 틈이.

영화에서처럼 푸른 수평선을 바라보는 해변가에서 아리따운 여성과 인생을 즐길 줄 알았는데, 재벌이 되고 보니 푸른 수평선은 개뿔, 검은 양복들만 수두룩하다.

암튼 부도 그룹의 장 회장이 남긴 여파로 이제 외환위기 시작이다.

앞으로 재계 순위에 있는 기업들이 줄줄이 파산할 것이다. 그러니 현재증권이 어디에 코가 걸려있는지 파악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래도 휴지 조각이 될 주식으로 1,000억 상당의 땅과 골드바, 양도성예금증서, 10년 후에 얻을 집까지 얻었으니 다행이었다.

미국 가서 달러를 사야 하는데.

자꾸 원화만 벌어들이고 있다.

그렇다고 원화를 들고 가서 달러를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무역회사면 모를까 증권회사가 해외 투자도 아닌데 달러를 사겠다고 은행에 가봤자 줄 리가 없었다.

가뜩이나 외환 보유고가 말라가고 있는데.

방법은 미국으로 달러 사러 가는 것뿐.

재준은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미국 상황을 떠올려 봤다.

미국은 지금.

1996년 11월 미 대선에 클린턴 대통령 당선.

미국 대선 역사상 최초로 인터넷을 통한 유세전.

클린턴, 클린턴, 클린턴.

중요한가?

인터넷. 인터넷. 인터넷.

인터넷을 통한 유세전이라…….

외환위기까지 1년하고 좀 더 남았다.

아니지, 외환위기는 이미 시작되었다.

IMF에 구제 금융을 받는 시기가 1년하고도 좀 더 남은 것이지.

3개월 후 1997년 1월부터 기업들이 줄도산 하게 된다.

달러.

달러가 있어야 현재증권이 살아남을 수 있다.

그렇다면 우선.

“천 실장님, 미국에 투자 법인을 하나 만들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할아버지께 보고하실 건가요?”

“알려 주십시오.”

알려 달라.

나에게 조금 기울었단 말이지.

“할아버지께는 미국 IT 계열 주식을 사기 위한 거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미국에 있는 지사에도 그렇게 말해 두겠습니다.”

이 사람, 영어도 할 줄 아나?

“하는 김에, 미국 지방에 작은 투자은행도 알아봐 주세요.”

“도매은행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되도록 파산 직전에 있는, 헐값에도 사들일 수 있는 은행으로 부탁합니다.”

“회사의 도움을 받을까요?”

“아니요. 따로 진행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백미러로 재준을 바라보는 천 실장의 표정에 잔잔한 미소가 퍼졌다.

재준은 그 모습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천 실장님, 할아버지 말대로 일머리 좋네.

“출발하시죠.”

자동차가 움직이자 재준은 창밖을 쳐다보았다.

부를 소유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고층 빌딩들.

유리 성벽을 쌓은 채 철옹성을 뽐내고 있었다.

그 철옹성을 보며 재준은 자신만의 구조물을 세울 것이다.

또한 미국에도.

달러 매입을 시작으로 실리콘밸리까지 차곡차곡 쌓아서 거대하고 단단한 재준만의 캐슬이 지어질 것이다.

그 성의 기초를 다져줄 투자은행.

그곳에서 이루어질 크고 작은 투자를 위해 전문가의 지혜 역시 필요했다.

반도체, 의학, 인공지능 분야의 스타트업 컴퍼니 중 들어 본 것 같은 기업에 투자하면 되겠지만 그래도 놓치는 부분이 있으면 안 된다.

공학자가 필요했다.

과학 학술지, 네이처, 사이언스, 셀 등 많은 곳의 논문을 그들이 분석해 줘야 한다.

재준은 경제정책연구실을 시작으로 서서히 자신의 조직을 만들어야 갈 생각이었다.

지금은 9월. 현재증권을 살리는 데 시간이 부족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여유 부릴 상황도 아니었다.

“아, X발 머리 아파.”

나도 모르게…… 욕을 해버렸다.

천 실장이 죄송하다는 듯 고개를 까닥이고 라디오를 껐다.

***

“거, 되게 미안하네.”

재준은 차에서 내려 현재증권으로 걸어가면서 한참 전에 혼자 욕을 한 것이 못내 미안했다.

일 잘해 놓고 기분 꿀꿀하네.

“임재준.”

어디선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소리의 근원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돌아보니 강호석이었다.

“강 선배님.”

“어디 가나?”

“회사에요?”

“나 퇴근했는데?”

아, 나 강호석 서포터지.

“그럼, 저도 퇴근?”

“소주 한잔?”

“콜.”

“갈매기살 먹어봤어?”

“아니요?”

설마 진짜 갈매기는 아니겠지.

농담이다.

“좋아, 갈매기살 기가 막힌 집을 알려주지.”

둘은 환하게 웃으며 갈매기살 집으로 향했다.

“오늘 아침 프레젠테이션 시간에 말한 건 뭐야? 깜짝 놀랐잖아. 순간 박수 칠 뻔했어.”

“그 정도는 아닌데요.”

“아니야, 은행만 잘 컨트롤하면 둘 다 빅엿을 먹일 수 있을 것 같더라고. 그랜드월이 대한 그룹을 인수해도 시일 안에 은행에 돈을 갚지 못할 거야. 그럼 채무 조정을 신청하든가 미국에서 자금을 끌어와야겠지.”

채무 조정은 우리가 막으면 되고, 미국 자금은 사들인 도매은행이 막을 것이다.

“해외에서 자금을 못 끌어오게 할 방법이 있을까?”

“아직 6개월이나 남았으니 방법을 찾아야죠.”

“6개월? 그걸 어떻게 알아?”

그럼, 미래에서 날아왔는데 모를 리가 있나.

“보통 적대적 M&A는 6개월 정도 소요되니까요.”

“그래? 어디선가 봤던 것 같기도 하고 기억이 가물가물해.”

“우리나라도 선진국이 되려나 봐요. 적대적 M&A도 생기고.”

“선진국은 무슨, 저런 놈들은 선진국에서 장난 안 쳐.”

“그런가요?”

“그럼. 어, 다 왔다. 저기야.”

15평 남짓한 식당 안은 고기 굽는 연기로 자욱했다.

자리가 없어 야외에 드럼통을 개조한 원통형 간이 식탁 10여 개가 나와 있었는데, 그마저도 부족해서 주변으로 점점 확장하는 추세였다.

“여기 완전 상한간데요?”

“10년 동안 상한가지. 여기 있어 봐.”

끙.

강호석은 바쁜 사장을 대신해 자신이 원통 식탁을 끌고 왔다.

의자도 챙기고 주문도 알아서,

사장님. 소주 하나, 고기 둘.

사장이 강호석을 보자 90도로 인사를 했다.

“재준, 앉아.”

재준이 앉자마자 강호석이 물었다.

“회장님이 말한 사내투자대회 어떨 것 같아?”

거참, 소주나 한잔하고 말하지.

정말 성격 급하다니까.

“연구실 팀원 구하는 게 목적이니까. 인재 발굴 뭐 그런 거겠죠.”

“인재 발굴…… 너는 대회에서 뭐 할 거야?”

“급등주 하나 찾아 올인 해야죠.”

“…….”

그렇게 쳐다보지 말아요.

절대 그런 짓은 하지 않아.

강호석은 재준을 1분간 말없이 바라봤다.

술잔을 든 강호석의 손이 잠시 허공에서 정지했다.

그리고,

하하하하하!

강호석은 크게 웃었다가 돌연 탁 멈췄다.

“그게 인재야? 급등주 찾는 게 인재야? 급등주는 대부분 작전주 아냐?”

“재료주일 수도 있죠. 왜 있잖아요. 새로운 신소재 개발이나, 새로운 기술 같은 거…….”

재준의 목소리가 의도적으로 점점 작아졌다.

“그거 작전 아냐? 냉각 캔, 뭐? 플라스마 공법? 어디서 오리가 꼬꼬댁하는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럼, 어떻게 해야죠? 좋은 수 있습니까?”

자, 어서 스캘핑에 관해 이야기해.

날 가르쳐 주겠다고 말이야.

“임재준, 초단타 해봤어?”

옳거니.

“스캘핑이나 스윙을 말씀하시는 거죠?”

“맞아.”

당연히 안다.

스윙과 스캘핑은 수익률을 짧게 가져가면서 많은 거래를 하는 행위이다.

스윙은 매수 후 1% 정도 수익을 목표로 하루에서 길게는 일주일 안에 매도를 기본으로 하며, 스캘핑은 수수료 0.25% 이상만 나오면 짧게는 초 단위로 길어야 한 시간을 넘기지 않는 투자 기법이다.

“근데 실전 경험은 없습니다.”

이게 문제지.

머리로만 알고 있는 거.

“그럼, 나 하는 거 보고 내일부터 해봐.”

“정말요?”

“한 종목에 올인 해서 어떻게 1등을 해? 스캘핑으로 승부를 내야지.”

그럼, 그럼.

기분이 좋아진 재준이 잘 갈매기살을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었다.

강호석이 자신의 잔과 재준의 잔을 채운 후 들어 보였다.

건배!

“1등을 위해.”

“1등을 위해.”

스캘핑은 재준이 배우고 싶은 기술 중의 하나였다.

금융에 대한 지식은 머릿속에 있어서 언제든 꺼내기만(?) 하면 되고, 사람 상대하는 문제는 착한 재준과 성질머리 더러운 재준이 있으니 대충 해결됐는데, 하나 부족한 게 초단타 매매의 실전이었다.

“내가 왜 직접 스캘핑을 가르쳐주는지 알지?”

음.

도망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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