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화 혹시 같은 업종이십니까(2)
재준이 핸드폰 문자를 들어 보였다.
배운학이 마른침을 넘기며 입술을 잘게 씹었다.
긴장하는 거야?
그럼, 아는 땅이라는 소리네.
부도 그룹 장 회장이 수서지구 개발을 노리고 사 놓았다가 급하게 누군가에게 판 땅.
물론 차명이겠지만 소유주는 뻔했다.
장 회장이 직접 소유하는 건 검찰한테 ‘나 잡아가쇼’하는 거고, 자신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관리를 맡겼을 것이다.
장 회장의 은인이자 참모인 역술인, 배운학.
아무도 몰라야 하는 땅의 주소가 재준의 입에서 나오자, 배운학은 슬며시 손을 탁자 아래로 내렸다.
떠는 손을 감추기 위해.
재준이 핸드폰을 탁자에 놓고 배운학을 향해 스윽 밀었다.
문자를 보는 배운학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는 있지만 시선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뭘 계속 봐. 아, 혹시 우리가 미처 찾아내지 못한 땅이 있나 보는 건가?”
“…….”
“에이, 그런 일은 없어. 사람이 한둘도 아닌데. 그리고 다 기록에 남아 있어서 흘리거나 하진 않아.”
배운학은 핸드폰에서 눈을 떼고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걸려들었네.
다그치지 말고 위로하듯.
“사실은, 음, 나도 장 회장과 연루되어 있어서 주식을 가지고 있기 부담스러워. 이게 할아버지가 내 개인 자산으로 물려주신 건데 일이 이 지경이 됐으니 어떡해. 곧 채권단이 나까지 들춰서 내 주식을 뺏어 갈 거야. 이거 참, 그냥 회사에 내버려 두라니까.”
“누구십니까?”
“누구? 나? 아니면 할아버지?”
“그쪽을 알고 싶습니다.”
“아, 나, 현재증권 손자 임재준. 아이고, 이거, 할아버지까지 다 말해 버렸네.”
“임재준 씨였군요.”
“날 알아?”
“얘기는 들었습니다.”
“그렇구나. 그럼 이야기는 쉽겠네.”
이 정도는 말해줘야, 믿겠지.
배운학에게 언젠가 부도 그룹 회장이 물은 적이 있었다.
부도철강에 추가 자금이 필요한데, 현재증권에서 주식을 담보로 2,000억을 대출을 받을 수 있냐고.
그때 점괘를 보고 당연히 가능하다고 말했다.
얼마 후 실제로 대출이 성사되었다고도 전해 들었다.
“저보고 부도철강 주식을 가지고 있으란 말이군요.”
“당연하지. 당신은 부도철강과 아무런 관련이 없잖아. 만약 추궁한다면 정당한 대가를 주고 산 주식이라고 하면 되는 거야. 그럼, 누가 건드리겠어. 아무리 채권단이라도 개인 재산을 맘대로 어쩌진 못해.”
“그래도 세상이 제가 장 회장과 친한 사이란 걸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한테 사면 딱이지. 그렇잖아. 장 회장이 당신에게 직접 줬다면 문제지만, 투자 목적으로 나한테 산 건데. 그게 뭐? 누가 뭐라 그래!”
“그렇지만, 정당한 대가를 어떻게 지불합니까? 전 그만한 돈이 없습니다.”
“이거 또 같은 말 하게 만드네. 아까 말했잖아. 당신이 관리하는 땅. 그거와 교환하는 거지.”
배운학은 한동안 고민했다.
당연히 이건 해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또한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제가 회장님에게 전화 한 통 해도 되겠습니까?”
“맘대로.”
배운학이 핸드폰을 꺼내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재준은 통화하는 배운학은 보며 온화하게 웃었다.
열심히 통화해.
어차피 결론은 똑같으니까.
지금 장 회장의 마음은 뻔했다.
금융부채만 5조 7천억 원, 탈세만 2천 225억 원.
2022년도에도 해결하기 힘든 금액이다.
우선 채권단에 부채 해결 의지를 보여야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지금쯤 채권단에 윽박지르고 난리를 치고 있을 것이다.
배운학이 장 회장에게 전한 내용은 다 사실이며 메마른 가슴에 단비와 같을 것이다.
장 회장은 분명 현재증권에 2,000억 주식 담보 대출을 했고, 현재증권의 망나니로 알려진 손자가 배운학을 찾아와 거래를 제안했다.
장 회장으로서도 숨겨 놓은 땅을 어찌 처리하나 고민했을 것이다.
근데 그걸 부도철강 주식과 바꿔 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장 회장이 1997년 1월 부도를 내며 마지막 뱉은 한마디가 ‘한 달만 시간이 있었으면 해결할 수 있었다’였다.
그는 마지막까지 부도철강에 대한 미련을 절대 포기하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2,000억에 상당하는 부도철강 주식이면 다시 일어설 수 있고 부도 그룹의 계열사를 다시 찾을 수 있다고 자신했다.
오죽했으면 부도 그룹이 주식 포기 각서를 끝끝내 제출하지 않아서 부도가 났을까.
부도철강은 잘 돌아갔다.
부도 이후 여기저기 팔려 다니긴 했지만, 2022년 현재 HD제철로 잘 운영될 정도로.
통화를 끊은 배운학은 재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봐, 잘 될 거라니까. 우리 장 회장이 그동안 9급부터 우리 VIP 자식까지 먹여 놓은 돈이 얼만데.”
“그런 말은 함부로 꺼내는 거 아닙니다.”
대통령 아들이 몸통, 전 대통령 총무수석비서관은 깃털.
‘몸통과 깃털’이란 용어의 시작이 여기서부터였다.
“괜찮아. 둘밖에 없는데.”
“그렇지 않은 거 같습니다만.”
배운학의 시선은 재준 뒤에 있는 천 실장에게로 향했다.
재준은 손을 들어 저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이고, 걱정도 팔자야. 장군님 모시는 분이 이렇게 간땡이가 작아서야.”
“이제 어떻게 하면 되는 겁니까?”
“천 실장님. 밖에 법무팀 와 있습니까?”
“네. 아까 도착했다고 연락받았습니다.”
재준은 배운학을 보고 빙글 웃었다.
후.
배운학은 숨을 크게 뱉고는 자신이 등 뒤에 있는 장군상 밑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 안엔 수십 장의 등기권리증이 들어있었다.
재준은 그것들을 보면서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거렸다.
땅이 있는 건 실제로 확인했고…….
“근데 문제가 있어.”
“어떤 문제입니까?”
재준은 탁자를 손가락을 톡톡 두드렸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주식이 2,000억인데, 땅이라고 해봐야. 1,000억이 조금 넘거든. 돈이 많이 모자란단 말이지.”
“그래도, 땅은 앞으로 오릅니다.”
“그건 아니지. 주식은 그럼 안 오르나? 마찬가지지. 누가 미래 가치로 거래를 하나. 또 뭐 없어?”
“지금은 저희가 가진 게 없습니다.”
이때, 천 실장이 재준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있네. 저 뒤에 장군상. 저거 금이잖아.”
“무례하십니다.”
배운학이 정말 노한 얼굴로 변했다.
“좋아, 그럼. 없던 일로 합시다. 뭐, 밑지고 팔아도 이만저만 밑져야지. 차라리 POSK에 가서 사달라고 해야지.”
“POSK라니요?”
POSK, 장 회장이 가장 싫어하는 회사.
장 회장이 POSK 박 회장에게 쓴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제철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니 당장 때려치우라고.
배운학은 핸드폰을 매만졌다.
다시 장 회장에게 전화해야 할 것처럼.
“POSK라면 부도철강 인수해서 잘 키울 수 있잖아. 거기면 2,000억보다 훨씬 좋은 가격을 쳐 줄 텐데. 괜히 헛걸음했네. 천 실장, 갑시다.”
툭, 툭.
재준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곧바로 반응이 왔다.
“잠시만요.”
재준은 고개를 숙이고 고민하는 배운학을 내려다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왜? 또 뭐 있어?”
“같이 가시죠.”
배운학은 일어서서 앞장섰다.
재준은 주먹을 불끈 쥐고 뒤따랐다.
신당 뒤로 돌아가자 작은 문이 보였고 배운학은 문을 살짝 잡아당겼다.
작은 방.
배운학이 불을 켜자 양문 냉장고만 한 금고가 보였다.
재준은 직감할 수 있었다.
무기명 채권이구나.
현금을 보관하기엔 작았다.
2022년처럼 5만 원권이 있다면 적당한 크기겠지만, 만 원권을 쌓아 놓기엔 금고의 크기가 영 모자랐다.
기껏해야 10억도 안 들어가게 생겼다.
배운학은 숫자 다이얼을 이리저리 돌리더니 손잡이를 돌려 금고문을 열었다.
솜씨가 능숙한 걸 보아 수시로 여닫은 것 같았다.
문이 열리고 탐욕스러운 빛이 환하게 새어 나왔다.
금이었다.
골드바가 대략 100개 정도.
1996년 금 시세가 골드바 한 개에 백만 원.
백 개 정도면 1억.
골드바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 옆에 놓인 종이.
딱 봐도 양도성예금증서가 수북이 쌓여있었다.
배운학은 그 종이 뭉치를 전부 들어내었다.
“여기, 500억입니다.”
“하 참, 이러면 안 되는데…….”
재준은 방안을 두리번거리더니 입을 삐쭉 내밀며 말했다.
“그래도 모자란데…….”
“이제 정말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 없어?
딱 좋은 게 있구만.
“이 집도 담보로 잡읍시다.”
“여길요?”
“뭐 어때요? 담본데. 내가 가지겠다는 것도 아니고.”
“담보라면.”
“맞아. 장 회장이 10년 안에 재기하지 못하면 내가 이 집을 가져가는 거로. 어때? 오케이?”
“…….”
“어, 이거 장 회장을 못 믿는 눈치인데. 그렇지. 못 믿는 거지. 나만 손해 보고 죽어라, 뭐, 이런 거네. 맞네. 맞아.”
“잠깐.”
배운학은 숨을 고르게 쉬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전 장 회장님을 믿습니다.”
“그럼, 그럼. 나도 믿는데. 믿어야지. 천 실장님, 법무팀 왔죠?”
“네.”
“지금까지 나와 배운학 도사님이 한 얘기도 전부 들었을 테고요.”
“네. 법무팀에 전달하겠습니다.”
“아니, 아니, 법무팀 일단 들어오라 하세요.”
“네.”
“좋다. 좋아. 자 배운학 도사님, 이제 마무리 지읍시다.”
배운학이 방을 빠져나가자 재준이 천 실장에게 속삭였다.
“금부터 차에 실으세요.”
재준은 천 실장의 어깨를 주무르고 배운학을 향해 갔다.
천 실장은 배운학과 같이 가는 재준을 바라보았다.
독한 놈.
재준은 천 실장과 법무팀을 통해 배운학에게 부도철강 주식 영장을 보여 주고 사실 여부를 확인해 주었다.
이제 누구든 주식 영장을 가지고 현재증권으로 찾아가면 부도철강 주식을 인도받을 수 있다.
배운학은 재준을 향해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왜 고맙지 않겠는가.
2,000억짜리 주식 영장을 대략 1,700억에 얻었는데.
재준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배운학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그럼, 잘하시고. 우린 나중에 또 봅시다. 가시죠. 천 실장님.”
“저기…….”
배운학이 가려는 재준에게 말을 건넸다.
“혹시…….”
“네?”
“궁금해서 그럽니다만…….”
“말해 보세요.”
“말투 때문에 그러는데.”
반말해서 그러나?
“제 말투가 왜요?”
“혹시 같은 업종이십니까?”
뭐? 나보고 역술인이냐고?
그래? 음…… 내가 역술인이라면…….
“장군, 지금 현금 좀 있어?”
“네, 얼마나?”
“만 원짜리 몇 장이면 되는데.”
배운학은 탁자 아래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뚜껑을 열자, 만 원짜리가 일렬로 쌓여있는 게 대충 천만 원쯤 되는 것 같았다.
“원하는 만큼 가져가시지요.”
재준은 상자를 통째로 들어 올렸다.
배운학이 이게 뭐 하는 짓이냐는 눈으로 쳐다봤다.
“복채.”
“복채라면. 복채는 제가 받아야 하는 거…….”
“물어봤잖아요. 같은 업종이냐고.”
“그렇긴 합니다만.”
“맞아. 오늘 내가 당신 미래를 점쳐 준 거잖아. 그러니 복채를 받아야지. 안 그래?”
“그, 그게 그렇게 되는 겁니까?”
재준은 상자를 찰랑찰랑 흔들어 보았다.
“대략 천만 원 정도 되겠네.”
“이달에 번 돈이 그게 다라서…….”
“에헤, 에헤이. 장군. 지금 2,000억짜리 주식을 꿀꺽했는데. 겨우 천만 원 가지고. 돌려드려?”
재준의 말에 배운학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아닙니다.”
“자, 그럼, 갑니다. 계약 잘하시고. 이제. 끝.”
재준은 천 실장에게 상자를 건네며 부르르 몸을 떨며 나갔다.
배운학은 그런 재준의 모습을 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신 내리셨나 보네. 재벌의 손자가 신내림이라니…….”
배운학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