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증권 재벌의 천재 손자가 되었다-27화 (27/477)

제27화 천억이면 수조는 벌 수 있습니다(4)

임병달의 눈빛도 광채로 빛났다.

‘천억 들고 협박하려고?’

단상 위 강호석의 눈도 커졌다.

‘재준, 인수가 그리 쉬운 줄 알아?’

재준은 자신의 의견을 덤덤히 이어갔다.

“상장된 주식 수로 추측해 볼 때, 시장에 깔린 주식을 매집하려면 2천억 이상이 들어갈 겁니다. 하지만 대한 그룹의 재무를 봐서는 자체적으로 천억 이상의 자금을 끌어모으기 힘듭니다. 그럼 은행 차입을 노리겠지요. 대한 그룹은 유통이 기반이라 신뢰도가 높은 기업입니다. 그 신뢰로 은행은 돈을 빌려줄 겁니다.”

여기까지는 당연한 이야기였다.

재준의 단단한 목소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점점 사로잡았다.

“자금이 없기는 그랜드월도 마찬가지입니다. 천억의 현금을 쌓아 놓는 기업은 없으니까요. 당연히 은행에서 돈을 빌릴 겁니다.”

직원들이 표정이 궁금함으로 변해갔다.

-맞아. 그렇긴 하지.

-양쪽이 대출로 전쟁을 치른다…… 음.

“그리고 M&A에서 누가 이기든 저희가 미레도홀딩스를 인수하는 데 전혀 문제없습니다. 전쟁 후엔 둘 다 빚더미에 앉아있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누가 이기든 무슨 상관입니까. 둘 다 은행 빚을 갚을 수가 없는데. 거기다 이런 급전은 은행도 외채를 끌어다 빌려줄 겁니다. 해외에서 급하게 끌어오는 돈들은 모두 단기차입금이고. 당장은 급해서 자금을 빌려 쓰겠지만, 전쟁이 끝나고 나면 급전을 상환할 수 없을 겁니다. 왜냐, 손에 남은 건 주식뿐이니까요. 저라면 투자할 천억을 이때 쓰겠습니다. 대한 그룹을 통째로 사버릴 기회니까요.”

재준의 말에 직원들은 너무 놀라 입이 쩍 벌어졌다.

-뭐라고?

-대한 그룹을 먹겠다고?

“둘 다 똑같지만, 만약 그랜드월이 이겨서 대한 그룹을 정리하는 절차에 들어가더라도 우린 채권단에게 그랜드월의 차입 채권을 사들이고 그랜드월을 압박할 수 있습니다. 그 후에, 피투성이가 된 그랜드월로부터 미레도홀딩스의 주식을 양도받습니다. 대한 그룹을 인수해서 24개의 계열사를 하나하나 다른 기업에 팔아버립니다. 이러면 천억으로 수조 원을 벌 수 있습니다.”

이게 바로 선진금융이라고 떠드는 미국 사모펀드들이 하는 짓거리다.

수조 원?

회의장에 정적이 일었고 아무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잠시 후 하나둘씩 옆 사람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저게 말이 되는 소린가?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데. 중요한 건 채권단이 정말 우리 뜻대로 움직여 줄까?

-가능성이 전혀 없지만은 않은데.

-그렇지, 단기 차입이라면 가능한 이야기야. 은행이 장기 차입으로 빌려준다면 물 건너가겠지만.

-이 사람들이 그러니까 말을 끝까지 들어봐야지. 신입이라고 무조건 무시하고 말야. 엉?

-서 실장, 오늘 이상해.

재준은 이만 말을 마무리해야겠다 생각했다.

“제 주장엔 많은 오류가 있는 건 압니다. 하지만 지금부터 푼돈을 벌려고 주식을 매입하기보단 오류가 일어나지 않도록 작업을 하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우선 두 세력이 단기 자금을 차입하도록 은행을 압박하고, 시장에 소문을 뿌려 주가를 계속 끌어 올려서 더 많은 돈을 쓰도록 유도하는 겁니다. 몇 가지 복안이 더 있지만, 오늘은 이상 마무리하겠습니다.”

-저게 맞는 말이긴 한데, 저러다 우리 업계에서 찍히는 거 아냐?

-하지만 해 볼 만한 건 사실이지.

임병달은 황당하고 기특하고, 당장 재준에게 달려가 뒤통수를 한 개 갈기고 싶을 정도로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였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하는 그 어떤 말도 손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야단을 치자니 내용이 아주 훌륭했다.

저대로 하면…….

정말 천억이면 대한 그룹을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저 일에 현재증권이 나서기에 너무 껄끄러웠다.

이건 꼭 싸우다 지친 동료를 뒤에서 다리 걸어 넘어뜨린 다음 신발 뺏어 달아나는 느낌이랄까.

선뜻 칭찬하기도 어려웠다.

이렇게 말하기 곤란할 때는 슬쩍 바통을 넘기는 게…….

“강 팀장, 어떤가?”

갑자기 훅 들어 온 회장의 말.

강호석은 시계를 보는 척하면서…….

“이만, 시간이 다 되어 가는 관계로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임병달도 옳다구나 맞받아쳤다.

“다음은 무슨, 임재준 사원 당장 내 방으로 올라와.”

“네.”

재준은 임병달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일어서며 할아버지를 노려봤다.

얘기해 주셔야죠.

그냥 가시면 안 되죠.

‘저놈, 저 눈 부라리는 거 봐라.’

임병달이 알고 있다는 듯 헛기침을 했다.

험, 험.

“이거 봐,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자니, 이런 일도 해 볼 만한 것 같아. 근데 우리에겐 이끌 팀이 없지. 해서 내 오늘 결심했어. 우리 경제정책연구실을 6층에 새로 오픈해야겠어.”

모두 웅성거리며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하는 눈으로 임병달 회장을 바라봤다.

“안팎으로 시끄러운 사안들이 너무 많아. 부도 그룹 사태도 있고. 다른 기업들도 쓰러지기 직전이야. 이대로 증권에만 매달릴 순 없는 것 같아. 여기 정 실장이 총대를 메고 경제정책연구실을 가동할 거니까 그리 알아. 그리고 경제정책연구실에서 연구원을 뽑기 위해 조만간 사내투자대회를 열 거니까, 한번 잘해 봐. 정 실장, 내용 정리해서 사내 게시판에 올려.”

“네. 회장님.”

“됐어. 이만 가서 일들 봐.”

네. 회장님.

모두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임병달이 먼저 정 실장과 함께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서형길 실장이 재준에게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사람들 눈치를 보며 엄지 척을 해 보였다.

‘훌륭하십니다. 도련님. 어떻게 그런 대단한 생각을 하시는지, 존경해 마지않습니다.’

풋,

재준은 실없이 웃어 보였다.

뭐, 이 정도 일을 가지고.

회의실에 직원들이 거의 다 빠져나가자, 뒤늦게 나이 지긋한 남자 하나가 주위에 보좌하는 직원들에게 나가라고 손짓하곤 재준에게 다가왔다.

아마, 체면 때문에 다른 직원들 앞에서 재준을 적대하기가 껄끄러운 직위를 가진 사람이 분명했다.

그리고 역시나,

“신입이라고? 패기가 쓸데없이 대단해.”

분명 빈정거리는 말투였다.

이때, 서형길 실장이 앞으로 나서며 남자를 말렸다.

“부사장님, 그만 돌아가시지요. 보는 눈이 있습니다.”

“다 나갔는데. 보는 눈이 어딨어?”

재준은 인사기록에 달랑 두 줄로 요약된 기록이 떠올랐다.

부동산 금융팀의 곽형택 부사장.

할아버지와 현재증권의 창업 공신 두 명 중 한 명.

“형길아, 너는 이런 녀석이 왜 설치게 만든 거냐?”

“부사장님?”

서형길 실장이 재준과 곽형택 부사장 사이에 끼어들며 입을 뻥긋거렸다.

안. 돼. 요.

곽형택 부사장은 서형길 실장을 옆으로 뿌리치며 혀를 찼다.

“안 되긴 뭐가 안 돼? 감히 회장님 앞에서 입을 나불거리다니.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도 신입은 신입이야.”

재준은 부사장을 그저 바라만 보았다.

서형길 실장이 부사장 옆으로 다가가 이빨을 깨물고 속삭였다.

“안 된다니까요.”

“뭐가 자꾸 안 된다는 거야?”

“이 분은…….”

흠.

재준이 헛기침을 하며 서형길 실장에게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 마.

다급하게 서형길 실장이 입을 다물었다.

그런 모습이 몹시 못마땅한 부사장.

“왜? 왜 자꾸 똥 마려운 강아지마냥 낑낑거려?”

할 수 없이 서형길 실장은 다시 이빨을 깨물며 속삭였다.

“부사장님. 5년 전, 12월 31일. 보신각.”

“응?”

“5년 전 연말 회식. 보신각 사건.”

“뭐?”

무언가 기억이 되살아난 부사장은 서형길 실장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뭔가 대단한 흑역사가 있는 모습이었다.

이에 굴하지 않고 서형길 실장이 단어 두 개를 나지막이 덧붙였다.

“백발 염색, 가죽 점퍼어.”

“어허, 그 얘기는 왜……?”

서형길 실장이 손가락을 가슴에 대고 재준을 작게 가리키며 다시 중얼거렸다.

“백발 염색, 가죽 점퍼어어어.”

“그러니까, 그때 일을 왜 지금…….”

부사장이 손가락으로 인중에 있는 작은 상처를 쓸어내렸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뜨더니 재준을 살펴봤다.

서형길 실장이 다시 머리와 어깨를 손짓하며,

“백발 염색에 가죽 점퍼어어어어.”

그제야 곽형택 부사장의 시야에서 재준의 모습 위로 백발 염색에 가죽 점퍼가 덧씌워졌다.

어, 어, 어.

입이 절로 벌어졌다.

“5년 전…… 보신각…… 서…, 설마. 백발에 가죽 점퍼…….”

재준이 눈을 부라리자 서형길이 고개를 푹 숙였다.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이었다.

곽형택 부사장이 떨리는 입을 열었다.

“너…… 너…… 너, 재준이냐?”

후.

재준은 채념한 듯 서형길 실장을 노려보고 곽형택 부사장에게 고개를 숙였다.

“네, 부사장님.”

“뭐? 부. 사. 장. 님?”

곽형택 부사장은 너무 놀라 턱이 쑥 빠졌다.

“지금 나한테 부사장님이라고 부른 거야?”

그럼 안 되는 건가?

너무 놀라는 거 아냐?

“네. 왜 그러시죠?”

“왜 그러시죠? 존댓말을? 맞다, 너 기억상실증에 걸렸다더니. 나를 못 알아보는구나. 그렇지? 너 나 기억 안 나지?”

기억이 안 나는 게 아니라 기억에 없습니다.

“네. 전혀 기억이 안 납니다.”

“이 녀석. 재준아.”

갑자기 곽형택 부사장이 재준을 껴안고 거세게 등을 때렸다.

이 불쌍한 녀석. 퍽.

이 불쌍한 녀석. 퍽.

이 불쌍한 녀석아. 퍽퍽퍽.

재준은 이 빌어먹을 상황을 정말 오래 하고 싶지 않았다.

“저, 실례지만, 제가 낯설어서 그러니 이것 좀.”

“이놈, 말하는 것 좀 봐라. 너 어쩌다 이렇게 불쌍하게 올바른 사람이 된 거냐?”

말이 이상하다.

내가 올바르게 된 게 불쌍하게 된 건가?

“아니, 이럴 게 아니라. 너 회장님한테 가야 하지 같이 가자.”

어질.

이러다 회사 사람들 다 알게 되는 거 아냐?

***

“형님. 아니 재준이가 왜 이 지경이 된 겁니까? 도시의 회색 늑대가 왜 양복을 입고 있느냐고요? 그리고 말투가 왜 쓸데없이 얌전해진 겁니까? 저보고 부사장님이라고 했다고요? 존댓말을 했어요?”

다짜고짜 회장실로 찾아온 곽형택 부사장은 재준이 어깨를 한 손으로 흔들며 임병달 회장에게 따졌다.

그 옆에서 서형길 실장은 고개가 땅을 파고 들어갈 정도로 숙였다.

후.

임병달은 곽형택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알았어?”

“아니, 어떻게 모를 수가 있습니까? 여기 이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는데.”

라고 말하며 자신의 인중에 난 상처를 가리켰다.

“그거 아문지 오래야.”

“이거 말고, 여기요 여기.”

곽형택이 자신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찔러댔다.

“내가 재준이 때문에 새 삶을 살게 되었는데, 어찌 저한테 재준이가 회사에 입사한다고 말을 하지 않은 겁니까? 왜요?”

아, 내가 뭔가 대단한 업적을 부사장한테 남겼구나.

임병달은 진정하라고 손을 들고는,

“그건 재준이가 원한 거야. 회사에서 아무도 모르게 사원으로 일하고 싶다고 했어.”

“그게 저까지 포함되는 겁니까? 그럼 저 쓸모없는 형길이는 어떻게 알았을까요?”

“거, 회사에서 이름 좀 부르지 마. 형길이가 뭐야. 형길이가. 아무리 쓸모없어도 그렇지. 에이. 회사 기강 떨어지게.”

‘쓸모없는’이란 말을 두 번 들은 서형길이 부르르 떨었다.

‘난 진정 쓸모없는 인간인가.’

“그리고 나도 몰랐어. 이봐, 서 실장. 자넨 재준인 줄 어떻게 알았어? 바로 알아볼 수 있었나?”

“아닙니다. 회장님. 저도 처음엔 몰랐는데. 어느 순간 도련님의 웃음소리를 듣고 제 몸이 반응했습니다. 그래서…….”

“웃음소리?”

“네, 도련님. 웃음소리가 하도 악귀…… 아니, 귀에 익숙해서.”

저 사람이.

재준이 서형길 실장을 째려보자 덩치에 안 맞게 몸을 움츠렸다.

“암튼, 곽 부사장, 재준이를 알았으니 앞으로 잘해주고. 절대 다른 사원들한테 말하지 말고.”

“효범이한테도요?”

“또, 또, 부사장 이름을 아무렇게나 부르고.”

구조화 투자팀의 최효범 부사장.

역시 할아버지와 함께 현재증권을 일군 창업 공신이다.

“최효범 부사장은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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