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화 천억이면 수조는 벌 수 있습니다(2)
“그런 치사한 방법은 동원하지 않습니다. 제 실력으로 당당히 1등 할 겁니다. 저 할아버지 손자라니까요.”
임병달은 아리송했다.
1등은 한다고 하고 도움은 필요 없다고 하는데.
근데 이놈이, ‘손자’는 왜 자꾸 강조하는 걸까?
이게 도와달라는 거 아닌가?
강호석에게 슬쩍 재준이 이름으로 매수하게 할까?
아니, 아니지, 이건 강호석도 펄쩍 뛸 일이지.
당장 회사 그만둔다고 난리 칠 게 뻔해.
“할아버지.”
재준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임병달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왜······ 왜?”
“저랑 내기 하나 하시죠.”
이놈 목소리가 왜 갑자기 변하지?
음흉하기 짝이 없는데.
“무슨 내기 말이냐?”
“이번 대회에 1등 하면 제가 원하는 거 하나 들어 주시죠.”
말끝도 ‘다나까’가 아니라 ‘죠’?
“1등?”
“네, 제가 1등 하는 데 힘이 되어 줄 만한 일인데.”
“그래? 우선 들어보자.”
“이번에 재경기계에서 한 달에 500억씩 10개월간 5,000억이 들어오는 건 아시죠?”
“알지.”
불안하다.
정말 불안하다.
“제가 1등 하면 5,000억 전액을 미리 연구실에 배정해 주시는 건 어때요?”
“뭐? 5,000억을 한 번에 달라는 말이냐?”
“네, 아, 이자랑 배당 합쳐야 하니까, 6,000억으로.”
이자랑 배당금까지 싹 긁어 가려고?
“1등 못하면?”
“그럼, 현재증권에 귀속시키고 전 손도 안 댈게요.”
“정말이냐?”
“네. 어때요?”
음,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다.
1등을 하든 못하든 현재증권에 묶일 돈이니까.
근데 왜 불안할까······.
6,000억을 연구실에 배정하는 게 어려운 게 아니다.
손자 녀석이 돈으로 또 무슨 엄청난 일을 꾸밀지 그게 걱정이지.
정 실장이 ‘적당히 회사 생활하진 않을 겁니다’란 말이 계속 걸렸다.
황선달 한 번 잡았다고 명동 사채 시장으로 뛰어든다거나, 재경기계 같은 기업을 주식 매집 후 후려칠 것 같은 예감.
“설마, 돈놀이하려는 건 아니지?”
“할아버지, 달러.”
“아, 달러 사겠다고?
“달러 사기 위한 양념 좀 치려고요.”
믿어야 하나······.
근데 이놈이 1등을 할 수 있을까?
거의 내가 이긴 내기 같은데······.
“좋다. 하지만 1등을 못 하면 약속은 약속이니. 그 돈은 내가 다른 펀드 매니저에게 배정할 것이다.”
“감사링.”
“뭐라고?”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목소리가 다시 차분해졌다.
흐흐.
근데, 왜 웃는 것이냐?
어째 거 올라간 입꼬리가 무척 거슬린다, 재준아.
“할아버지.”
“그래.”
왜 자꾸 불러, 불안하게.
“오늘이 강호석 팀장님의 프레젠테이션 날입니다.”
“그렇긴 한데, 갑자기 그건 왜?”
“오늘 할아버지 참석하실 거 아닙니까?”
흐흐.
불안해.
재준은 쇠뿔도 단김에 빼자고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허허, 알았다. 내가 참석하니 다 모일 거다. 이말 아니냐.”
“네. 사내투자대회를 슬쩍 언급해주십시오.”
“슬쩍은 무슨, 대놓고 말해주마.”
“감사합니다.”
흐음.
임병달은 왠지 또 커다란 사고를 칠 것 같은 재준의 웃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천 실장에게 단단히 일러두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여차하면 패대기라도 치라고.
어허, 불안하다. 불안해.
***
재준은 할아버지와 대화를 마치고 회사로 출발했다.
평소보다 1시간 일찍 회사에 도착했다.
원래라면 열 명 미만의 직원들이 나와 있을까 말까 했는데, 오늘은 전 직원이 일찍 나와서 북새통을 이루었다.
바로 특별한 프레젠테이션이 있는 날이니까.
프레젠테이션은 매일 장이 열리기 1시간 전 30분 동안 진행되었다.
근데 이 귀한 프레젠테이션을 현재증권만 한다고 했다.
거참, 이 시대는 정말 주먹구구식이라니까.
2022년에 프레젠테이션은 모든 증권사에게 당연한 규칙이었다.
증권사에서는 향후 건설적인 투자를 위해 애널리스트의 리포트를 토대로 시장을 분석했고, 투자의 방향을 결정하는 오전 프레젠테이션은 필수 중의 필수였다.
그러나 지금은 1996년.
다른 증권사에는 오전 프레젠테이션이 없었다.
오직 현재증권만 임병달 회장의 신념과 재준의 아버지 임석훈 사장의 의리로 정착되어 있었다.
죽은 아들 때문일까, 임병달은 한 달에 한 번은 시간을 내서 참석했다.
임병달의 마음 한구석 서늘함과는 다르게 현재증권 직원들은 회장에게 잘못 보이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열정이 없는 자신을 회장님에게 들키는 순간 죽는다.
없는 열정도 억지로 지펴서 불살라야 했다.
프레젠테이션은 팀별로 진행하는데,
애널리스트 팀은 애널리스트 한 명과 RA 다섯 명,
펀드 매니저 팀은 펀드 매니저 한 명과 서포터 셋,
외환 딜러 팀은 외환 딜러 한 명과 브로커 다섯,
부동산 팀은 변호사 한 명과 회계사 한 명, 브로커 셋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애널리스트는 총 20팀, 펀드 매니저는 40팀, 외환 딜러는 20팀, 부동산은 10팀이 있었다.
애널리스트 팀은 종목이나 테마를 분석해서 발표하고, 펀드 매니저 팀은 종목이나 시장 상황을, 외환 딜러 팀은 세계 경제 상황을, 부동산 팀은 국내 부동산 현황과 돈의 흐름을 주로 발표했다.
매일 팀별로 돌아가면서 발표하니 최소한 석 달에 한 번 자신의 팀 차례가 돌아왔다.
그리고 오늘.
자그마치 쌈닭 펀드 매니저가 주제를 발표하는 날이었다.
재준은 가방을 들고 바로 회의실로 향했다.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하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지만, 마침 배정된 자리가 강병구 자리이다 보니 그냥 회의실로 갔다.
검찰로 압송된 놈의 빈자리에 궁상맞게 앉아있을 수는 없으니까.
회의실에 들어서자 역시 여기저기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회의실의 분위기는 평소와 달리 시끌벅적 도떼기시장이 따로 없었다.
프레젠테이션의 주제가 담긴 리포트를 점검하며 질문을 만들려고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이건 어떻게 생각해.”
“그 질문은 별론데요.”
“그럼, 이건.”
“······음, 좋은 질문이긴 한데 설명하실 수 있겠어요?”
“끙······.”
임병달 회장의 참관.
쌈닭 강호석 팀장 주제 발표.
그야말로 최악의 앙상블이었다.
발표자 강호석 펀드 매니저 팀장.
수석 입사를 할 정도의 뛰어난 머리.
하루도 빠짐없이 세계와 국내 시장을 분석하는 노력파.
한 번 터지면 끊임없이 질문과 대답을 유도하는 잔소리 대마왕.
그는 참석자들이 자신에게 질문하지 않으면 오히려 자신이 참석자들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강호석의 질책 같은 질문을 당하지 않으려면 그에게 먼저 질문을 해야 했다.
그 길만이 잠시라도 시간을 벌어주니까.
30분만 버티자.
그러나 자칫, 질문을 회피하거나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하면 회장님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 이후 산더미 같은 과제가 날아왔다.
-건설 및 중공업의 현황과 10년 치 예측 자료 가져와.
-코스피200 전 종목 재무제표 분석해.
-달러와 석유, 모든 현물 시장의 동향에 대해 알아와.
-전국을 뒤져서라도 가치 있는 부동산 2,000곳 시세 뽑아.
이건 일주일은 죽으라는 거다.
폭탄을 피하기 위해선 오늘은 직원들에게 살기가 느껴지기도 했다.
-강호석 단상에 오르기 전 죽었으면 좋겠다.
-오늘 출근할 때 차로 들이받으라고 했잖아.
-누가 강호석 혀에 마취제 좀 뿌려. 파스 말고 마취제.
점점 공포의 시간이 다가왔다.
중앙 긴 테이블에는 펀드 매니저와 애널리스트들이 착석해 있었고 신입은 벽을 따라 길게 나열된 의자에 앉아있었다.
재준은 모두가 앉기를 꺼리는 오른쪽 맨 앞 좌석에 앉아 리포트를 읽었다.
오늘 강호석이 발표할 리포트는 현 시장에 아주 민감한 주제였다.
적대적 M&A.
“분위기 살벌하네요.”
상큼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김혜림이였다.
“옆에 앉아도 되죠?”
재준의 바로 옆에 앉는 그녀에게서 호기심으로 불타는 눈빛을 읽을 수 있었다.
“오늘 주제가 적대적 M&A죠?”
“네.”
“적대적 M&A를 하면 나중에 문제가 되는 거 아니에요?”
“왜요?”
“적대적이잖아요.”
“말이 그런 거지, 잘 나가는 기업을 사겠다는 건데. 문제가 될 건 없습니다.”
혜림은 재준의 말에 의아심으로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문제가 안 돼요? 회사를 빼앗기면 창업하고 키운 사람은 억울하잖아요.”
“왜 억울합니까? 이미 시장에 돈 받고 팔았는데.”
“네?”
“자기 회사라고 주장하고 싶으면 상장하면 안 됩니다.”
“아, 상장.”
그래, 상장.
기업을 시작하는 사장들의 꿈.
“상장하면서 이미 자신의 노력만큼 돈으로 보상받은 겁니다.”
“그렇긴 하지만 아직 자기 지분을 안 팔았는데도요?”
“그건 그 사람 맘이고요. 상장하는 순간 회사는 주주들 소유입니다. 주식을 안 팔았다고 해서 회사도 내 것이고 돈도 내 것이라면 도둑놈 심보죠.”
혜림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직도 여운이 남았다.
“저도 그 정도는 알아요. 하지만 적대적이란 단어가 들어가면 무조건 나빠 보이거든요.”
“적대적 M&A는 주식시장에 나온 회사를 더 비싼 가격에 사겠다는 의지에서 나온 말입니다. 나쁘게 보지 마세요. 그리고 적대적이란 말은 일반인은 접근하지 못하게 만드는 수법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요?”
“네, 적대적 M&A라면 꼭 나쁜 짓 하는 기분이 들잖아요.”
“그렇긴 해요. 저처럼.”
1996년은 아직 단 한 건의 적대적 M&A도 없었던 시기다.
경험이 없으니 단어에서 주는 뉘앙스가 적대적 M&A의 이미지를 좌우했다.
“적대적 M&A가 시작되면 간혹 공개매수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나쁜 짓 하는 기분이 들긴 해요. 하지만 일반 투자자들에게 돈 벌 수 있는 기회입니다.”
“전 안 팔겠어요. 더 올라갈 것 같아요.”
“하지만 파는 게 맞습니다.”
“왜요?”
“주가는 더 올라가지 않습니다. 뒤에서 적당히 타협을 보는 예가 더 많습니다. 주춤하는 사이 상황이 끝나고 맙니다. 주가는 더 떨어지고, 화가 난 일반 투자자들이 투매하고, 기업은 그 틈을 노려 자사주를 더 싼 값에 매집합니다.”
“잘 모르겠어요.”
뭐? 아직 1/10도 설명 안 했는데?
위임장 대결이나 그린메일, 산업 재편, 독과점 문제 등 한참 남았는데?
“근데, 재준 씨. 그랜드월이 미레도홀딩스를 왜 인수하려 하죠? 평범한 유통회사인데.”
“네?”
평범한 유통회사 아니야.
미레도홀딩스는 대한 그룹의 지주회사잖아.
평범한 유통회사를 왜 M&A를 해.
얘, 우리 회사에 어떻게 들어온 거야.
분명 시험 보고 들어 왔을 텐데.
재준은 김혜림을 안쓰럽게 쳐다봤다.
미레도홀딩스 사건.
오늘의 주제는 바로 1996년부터 1997년까지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던 유통업의 대표기업 미레도홀딩스의 적대적 M&A였다.
대한민국 증권사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적대적 M&A.
그 서막이 어제 터졌다.
미국 증권사 그랜드월이 미레도홀딩스를 인수하겠다고 발표했다.
재준의 머릿속에서 역사의 사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재미있는 프레젠테이션이 될 것 같아. 적대적 M&A, 이거 내가 먹을까? 가능할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