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화 천억이면 수조는 벌 수 있습니다(1)
다음 날 아침.
임병달 자택 서재.
정 실장은 임병달 회장에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보고했다.
임병달의 얼굴이 처음엔 차분하다가 환하게 밝아지는가 싶더니점점 미간을 찡그렸다.
‘끝이 왜 이래?’
임병달은 결국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입을 열었다.
“재준이가 이렇게 마무리했단 말이지.”
“네.”
임병달은 한 손으로 턱을 괴고 한 손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3개월.
3개월.
3개월이라…….
그 사이를 참지 못하고 손자가 칼을 꺼내 들었다.
작은 단도가 아니라 사람 목을 두서너 명을 동시에 베어 버릴 수 있는 언월도 정도 되는 도(刀)였다.
도(刀)를 꺼내 들었으니 당연히 사고를 쳤다.
이전 같은 사고를 쳤다면 돈으로 무마시키겠는데…….
이번엔 달라도 아주 달랐다.
이걸 사고라고 하기에도 애매하고.
돈으로 해결할 수준도 넘어버렸고.
‘작전을 눈치챘을 땐 그저 신기했는데…….’
처음엔 작전을 알아봤다고 놀랐지만, 호주에서 4년 동안 주식을 했다면 크게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
‘이놈의 자식, 공부는 안 하고…… 아니, 그 보다…….’
자신을 고민하게 만드는 건 돈을 벌어왔다는 점이었다.
‘거참, 돈을 벌어왔는데도 고민이 되네.’
5천억.
5천억을 한 번의 거래로 벌었다.
‘거래? 이걸 거래라고 해야 하나?’
거래는 쌍방의 합의에 따라 진행되는 상행위니 거래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거래의 과정에서 발휘된 능력이 더욱 기가 찼다.
기발한 발상?
시장의 미래를 내다보고 한 과감한 투자?
이런 게 아니라.
협박.
이 말이 적당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협박으로 5천억을 뜯어냈으니 조폭 수준을 한참 넘어섰고.
이 정도면 정치인 정도는 되는 것 같은데…….
그것도 최고로 잘 뜯어낸다는 안기부장 정도?
그것도 황선달과 최재철을 상대로.
허허.
이걸 능력이라 해야 하나.
자신이 생각하는 능력이란 재화를 다루는 기술,
인재를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인술,
현재의 상황을 파악하고 미래를 내다보는 선구안, 즉 경영.
‘사업가에겐 경영을 능력이라 하지 않나?’
근데 손자놈이 발휘한 능력이 아무리 생각해도 경영은 아닌 것 같았다.
상대에게 찾아가 겁박을 놓아 돈을 갈취해 왔다.
그리고 또 뭐?
서형길 실장에게 지시해서 펀드 매니저의 30명을 내쫓았다.
‘이건 또 어떻게 해야 하나…….’
회사를 그만두게 한 것뿐만 아니라 회삿돈으로 번 돈도 전부 회수하겠다고 펀드 매니저들을 쥐잡듯 몰아가고 있었다.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은 통쾌했을 수 있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언제 칼을 들고 덤빌지 모르는 일이었다.
황선달이나 최재철도 벼르고 있는 건 당연하고.
‘계속 이런 식이면 상당히 곤란한데…….’
“정 실장. 자네는 재준이 앞으로도 이럴 거라 보는가?”
“네. 변하지는 않을 겁니다.”
‘허, 정 실장, 너라도 좀 말리지 그랬어.’
“그럼, 좋은 건가? 나쁜 건가?”
“좋든 싫든 도련님은 한 가지만 생각하십니다. 현재증권. 오직 회사만 생각하십니다.”
“그건 나도 알아. 어디 회사 다니면서 애사심 없는 놈이 어딨어? ‘적당히’라는 게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지.”
“제 생각엔, 도련님은 적당히 회사 생활하진 않으실 겁니다.”
‘나도 같은 생각이네.’
“그렇겠지?”
“네.”
할 수 없이 사람 하나 붙여야 하나…….
“천 실장을 붙여줘야겠지?”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후.
임병달의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천 실장 좀 들어오라고 해.”
“네.”
정 실장이 밖으로 나가고 임병달은 혼자서 생각에 잠겼다.
눈을 잠깐 감았다 뜨는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정 실장이 누군가와 같이 들어왔다.
짧은 머리, 차분한 눈매. 자신의 의지로 열리지 않을 것 같은 꽉 다문 입. 그리고 단단한 체격.
누가 봐도 쌈 좀 하는 사람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그가 임병달을 보자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찾으셨습니까, 회장님.”
“그래, 좀 앉아.”
“괜찮습니다.”
“정 실장, 재준이 좀 내려오라고 해.”
“네.”
잠시 후 재준이 서재로 들어섰다.
냉랭한 분위의 주인공이 누군지는 바로 눈치챘다.
저 사람은 누굴까?
정 실장 옆에 웬 늑대 한 마리가 서 있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 찾으셨습니까?”
“그래. 이리 와서 인사해라. 천 실장이다. 앞으로 네 옆에서 너를 보좌해줄 친구야.”
천 실장?
이거 영화에서 보던 내 수족 같은 싸움꾼인가?
“임재준입니다.”
재준이 천 실장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하지만 천 실장은 고개를 숙이는 거로 인사를 대신했다.
오호, 기싸움을 해 보겠다!
천 실장의 행동에 임병달은 고개를 끄덕이며 정 실장에게 눈치를 줬다.
“정 실장. 천 실장하고 나가 봐.”
임병달의 말에 둘은 고개를 숙이고 서재 밖으로 나갔다.
재준은 서재 문이 닫히는 걸 확인하고 임병달에게 물었다.
“저 때문이군요.”
“그래, 이 녀석아. 오죽 말썽을 부렸으면 내가 저 친구를 너에게 붙였을까.”
“경호원입니까?”
“뭐, 그런 셈이다.”
“깡패입니까?”
“군인이다. 이놈아. 깡패는 무슨.”
“깡패보다 싸움은 더 잘하게 생겼습니다.”
“천 실장. 싸움만 잘하는 게 아니다. 일머리가 남다른 친구야. 일단 앉아라.”
재준이 소파에 앉자 임병달이 상석에 앉았다.
“재준아.”
“네.”
“현재증권 직원들 다루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거다. 월급쟁이 놈들이야 다 거기서 거기니까. 정작 다루기 힘든 사람은 회사 밖에 있는 거야. 알고 있지?”
“네.”
‘아는 놈이 그 지랄을…….’
흠, 흠.
“그리고 네 옆에서 보좌하는 천 실장 같은 사람도 다루기 쉽지는 않을 거다.”
“방금 느꼈습니다.”
악수를 피했다.
자신이 섬겨야 할 주인이지만, 아직은 완전한 신뢰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의지인가?
“천 실장이 일은 잘하지만, 특정 순간에는 너를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어.”
특정 순간?
이미 나를 섬겨야 하는데 나를 선택하지 않는다…….
그 순간이구나.
“알 것 같습니다.”
“어떤 때라 생각하느냐.”
“할아버지와 저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입니다.”
“그래, 지금부터 너는 천 실장이 그 순간에도 너를 선택하게 만들어야 한다.”
“쉽진 않은 일이군요. 마음이란 게 그렇게 쉽게 변하는 건 아니니까요.”
“글쎄, 마음이라기보다 습관일 것이다.”
습관.
이미 배어 있어서 머리가 판단하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인다.
“알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천 실장에게 맞출 필요는 없다.”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그래, 너무 가까이도 안 되고 너무 멀어져서도 안 된다.”
가까우면 기어오를 것이고 멀어지면 도망갈 것이다.
“적당한 일을 주어야 하고 일에는 적당한 보상이 따라야 한다.”
적당한 보상?
돈은 아니다.
돈으로 마음 사는 데는 한계가 있으니까.
무얼까?
“적당한 보상은 무엇입니까?”
“그게 너의 그릇을 결정할 것이야. 잘 생각해 보거라. 하수는 돈을 원하지만 천 실장은 결코 하수가 아니야.”
“네. 알겠습니다.”
“또한, 가끔 천 실장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도 주어야 한다.”
“시험해 보라는 말씀입니까?”
“그래.”
“알겠습니다.”
능력을 넘어서는 일…….
어렴풋이 느껴졌다.
육체적인 능력을 말하는 게 아닌 것 같았다.
몸이 말을 듣지 않는 상황의 일이란 게 있다.
예를 들어, 살인이나 강간 같은.
내가 ‘저 여자를 강간하세요’라고 명령을 내리면 천 실장은 할 수 있을까.
궁금하다.
어디까지 나의 명령을 따를까.
그리고 어디까지 나를 신뢰할까.
나를 신뢰한다면 어느 정도 일까지 처리할까.
“천 실장은 네가 볼 수 없지만 네 곁에 있을 거다.”
“네. 다행입니다.”
“괜찮겠느냐?”
“물론입니다.”
당연히, 아직 회사에서 신입인데 옆에 떡하니 보디가드를 데리고 다니면 ‘나 회장 손자요’라고 광고하는 꼴 밖에 안 된다.
“근데, 이제 슬슬 펀드 매니저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 애널리스트는 좀 그렇고.”
“그것보다는 제 목표가 무엇인지 아시지 않습니까?”
“네 목표 달러 아니냐.”
“맞습니다. 어떻게 하면 달러를 대량으로 사야 하나 고민했습니다.”
“외환 딜러 시켜주랴?”
“그건 너무…… 하루 종일 앉아서 키보드만 두드리는 건 제 체질에 안 맞습니다. 그것보다는 제가 생각한 게 있습니다.”
“그래, 말해 보거라.”
“12층에 있는 경제정책연구실을 운영해 보고 싶습니다.”
“거긴, 지금도 맘대로 사용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12층이 아니라 6층에 또 다른 경영정책연구실을 운영하고 싶습니다. 기획실 옆에 있는 회의실 중 하나를 사용하면 장소는 문제없을 겁니다.”
“회의실? 그래 회의실이 4개니까 그중 하나를 쓰는 건 문제가 안 되는데 거기서 뭐 하려고. 차라리 12층에서 일하는 게 나을 텐데.”
“팀을 만들려고 합니다.”
“혼자가 아니라 팀을 꾸리겠단 말이지.”
“네. 주식부터 기업 인수, 투자까지 뭐든지 할 수 있는 팀입니다.”
“너무 거창한 거 아니냐?”
“절대 거창하지 않습니다.”
지금 할 게 너무 많다.
혼자서는 무리다.
물론 현재증권을 살리는 게 우선이지만, 외환위기 이후는 어떻게?
싹 주워 먹으려면 엄청난 자금을 준비해야 한다.
외환위기로 쓰러지는 알짜 은행이며 증권사도 인수해야 하고,
앞으로 미리 대기업 주식도 쓸어 담아야 한다.
또,
미국은 어떻게 할 거야?
미래를 훤히 알고 있는데 좀스럽게 몇 군데 투자해서 대주주 행세하는 건 너무 아쉬운 투자다.
미국에 IB(투자은행)을 만들어 아예 다 먹어야 직성이 풀릴 것 같다.
근데 이걸 다 하려면 혼자서는 죽어다 깨어나도 못한다.
내가 분신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있다 한들 분신 한두 명으로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다.
“근데 네가 연구실을 세우면 네가 실장을 해야 하는데. 이제 신입 사원을 실장으로 임명하는 건 좀 이상하지 않을까. 그냥 이 기회에 네가 내 손자라고 밝히는 건 어떠냐.”
할아버지, 손자라고 밝히면 얼마나 재미없게 살아야 하는지 아십니까?
내 앞에서 전부 얼어서 사고의 전환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무조건 네, 네, 하는 건 딱 질색입니다.
뒤에서 살살 조종하면서 큰일 팡팡 터트리는 게 쾌감이 배가 됩니다.
“정 실장님을 실장으로 앉히고 전 팀원으로 남을 겁니다.”
“정 실장을? 그럼, 나는?”
안 빼갑니다. 안 빼가.
“정 실장님은 이름만 올려놓으시면 됩니다. 바지 실장으로.”
“어험, 그렇구나.”
“걱정 마십시오.”
할아버지, 표정 관리가 안 되십니다.
“그럼, 팀원은 어쩔 셈이냐. 구해주랴?”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저희 회사에도 인재는 넘칩니다.”
현재증권이 증권 분야 선두주자라 명문대를 나온 사람들이 넘쳐났다.
다만,
“옥석을 구분하기 위해 ‘사내투자대회’를 열고 싶습니다.”
“사내투자대회?”
“네, 간단히 말해. 동일한 투자금으로 한 달간 대회를 여는 것입니다. 투자대회 취지는 연구실에 투입할 인재를 발굴한다고 발표하시면 됩니다. 1등부터 5등까지.”
“5등까지? 힘들지 않을까?”
“다섯 명이면 한팀을 꾸리기 괜찮은 수입니다.”
“아니, 내 말은 네가 5등 안에 들 수 있냐는 말이다.”
할아버지!!!!
“투자대회의 목적은 팀원도 구하는 거지만 제가 1등을 해서 회사에서 제 위상을 올리려는 목적도 있습니다.”
“1등이 되겠다고 해서 되느냐?”
할아버지!!!!
“저 할아버지 손자입니다.”
“아, 뒤에서 약간의 도움을 줘야 한다, 이거구나?”
할아버지!!!!
그건 양아치나 하는 행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