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화 계산은 똑바로 하셔야죠(3)
재준이 왕방울만 해진 김재수 차장의 눈을 말똥말똥 쳐다봤다.
“왜 그렇게 놀래요? 당연한 것을. 재경기계가 9월 1일 물량을 던졌잖아요.”
“네. 약속대로…… 어? 설마 그걸…….”
“당연하지. 그거 내가 다 샀잖아요.”
“네?”
그러다 눈 튀어나오겠네.
정말로 김재수 차장이 눈알이 튀어나와 받아야 할 정도로 눈을 떴다.
“자…… 잠시만요.”
“뭘, 잠시만. 그리고 노경범이 가지고 있는 30만 주도 내가 다 샀는데. 지금 시장에 남아 있는 주식 이제 거의 없어요. 내가 다 긁었어요. 50만 주, 내가 50% 가지고 있다니까.”
“그…… 그럼.”
“맞아. 이 회사 내 거라고.”
“네?”
“김 차장님. 이 회사 주식 얼마 있어?”
“전 그냥 백 주 정도.”
“이야. 이거 동지구만. 나랑 손잡읍시다. 내가 주식이 몇 주만 더 있으면 50%를 완전히 넘을 것 같거든. 나랑 손잡으면 내가 김 차장, 대표이사, 사장 시켜줄게.”
꼬로록.
“놀래기는. 난 그냥 꼬박꼬박 배당만 잘 주면 되는데. 일어나, 일어나요. 기절한 척하지 말고.”
김 차장은 혼미한 눈으로 재준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자, 잠시만요. 당장 가서 부사장님 모시고 오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그래요. 어, 어. 거, 조심히 가세요. 걸음이 완전 갈지자네. 조심. 조심.”
멀어져 가는 김 차장을 보고 눈을 가늘게 뜨고 입꼬리를 들어 올린 재준의 곁에 정 실장이 다가왔다.
“도련님, 이거였습니까?”
“뭐가요?”
“주식 안 올려도 된다는 말씀이…….”
“아, 네. 이분들이 알아서 좋은 가격에 사주실 건데 뭐하러 주가를 올립니까?”
“얼마에 파실려고요?”
“주당 20만 원? 30만 원? 그냥 시원하게 100만 원 부를까요?”
“20만 원도 버거울 겁니다. 재경기계는 그만한 자금은 없습니다.”
“정 실장님, 그걸 내가 왜 걱정하죠?”
“도련님…….”
“제가 걱정할 일이 아니에요. 전 우리 회사 살리기 바빠요.”
정 실장님. 1년 후면 할아버지랑 같이 길거리에 나 앉는다고.
정신 차리세요.
“그, 그렇긴 하지만.”
“자금이 없으면 쫓아내고 할아버지랑 피스톤 링이나 만들죠, 뭐.”
“아니, 꼭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되지 않을까요?”
“아니요. 전 현재증권에 흠집 내는 놈들은 자신이 얼마나 잘못을 했는지 알아야 해요. 평생 기억에 남도록.”
증권 역사책에 나와 있다.
이런 일 하나하나가 모여서 사람들이 현재증권을 믿지 못하고 떼로 몰려와서 환매 요청하게 만들었다고.
건실한 현재증권은 그 환매 요청에 대응하지 못하고 회사를 정부에 빼앗겼다.
작은 일이라고 무시하면 안 돼.
그리고 이번 일은 작은 일도 아니다.
벌컥.
문을 열고 부사장이 들어왔다.
얼굴에 노기를 잔뜩 머금은 그는 재준을 보자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
“오면서 김 차장에게 대략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지금 현재증권이 재경기계의 대주주가 됐다는 말씀입니까?”
“대주주라기보단 그냥 대빵이 됐습니다.”
재준은 인상을 잔뜩 쓴 부사장을 보고 입가의 주름을 내려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대주주, 통상 1%의 유가증권을 소유하면 대주주라 부른다.
공시에 올려야 하는 대주주는 5%를 소유한 사람이고.
이 시대 공시가 자기들 맘대로였으니 1%로든 100%든 주식 보유 현황은 알기 어려웠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하긴 뭘 해요. 당장 이사회 소집하세요. 본인은 짐부터 싸시고요.”
최재철 부사장은 손으로 이마를 집고 얼굴을 감쌌다.
저 말이 안 통하는 인간.
“이 책임은 저만 지면 되는 겁니까?”
“무슨? 작전에 가담한 사람 싹 다 물갈이해야지요. 누가 연루되었는지 잘 아시죠?”
“우리가 그 주식을 사겠습니다.”
“주식을 산다고요? 진짜? 자금은 있으세요?”
“마련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아, 그렇구나. 역시 재경기계 신용이 살아있네. 살아있어. 은행에서 5천억 정도는 대출이 가능하구나.”
“얼마요? 5…… 5천억?”
“네, 5천억.”
“무슨, 200억이면 될 것을…….”
“네? 계산은 똑바로 하셔야죠. 200억 받으려고 내가 이 고생을 했다고요? 내가 헬기 타고 오면 어떻게 되는지 모르세요? 기름값 때문에 주당 100만 원은 받아야 하는데.”
“…….”
이 인간이 미쳤구나.
“왜요? 대출 안 돼요? 힘들면 우리가 알아봐 줄 수도 있고.”
“이봐요. 임재준 씨. 장난 그만하고 현실적인 협상을 합시다.”
“장난?”
재준은 고개를 숙이고 심호흡을 길게 한 후 말을 했다.
“그러니까. 당신은 남의 피 같은 돈 먹는 건 사업이고 당신의 피 같은 돈 뱉어내는 건 장난이다? 당신들이 편 작전으로 멋모르고 달려든 사람들이 1만 원짜리 주식을 12만 원에 산 후 어떨 것 같은데?”
“그건…….”
“당신들은 모르지. 사실 5천억을 마련하려고 여기저기 빚을 져도 여전히 살 만한 삶을 살 거야. 하지만 작전에 걸린 누군가는 빚에 쫓겨 평생을 도망다녀야 하고, 누군가는 집과 땅을 잃고 길거리에 나 앉을 거야. 어쩌면 삶을 포기하는 사람도 있을 거고.”
“…….”
“사람들이 작전에 휘말리면 현재증권은 어떻게 되는 줄 알아? 사람들이 뭐라고 손가락질 할 것 같은데? 현재증권 망한다고. 근데 장난?”
“…….”
“그래, 나도 장난 한번 쳐 볼까? 정 실장님 임시 주총 소집해 주세요. 제대로 놀아 볼 테니까.”
“…….”
최재철 부사장은 어금니를 꽉 물었다.
“잠시만요.”
회의실 문이 열리며 힘없는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모두 시선이 그리로 향했다.
“사장님.”
“아버지.”
재경기계 사장 최복기가 비서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섰다.
왜 부사장이 실세인지 알만큼 나이가 들어 걷는 것도 힘들어 보였다.
“조금 늦었습니다.”
옆에서 수행하는 비서가 최재철 부사장을 보고 고개를 흔들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있던 일을 사장에게 소상히 전달한 듯했다.
“재경기계 사장 최복기입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재준은 일단 들어보겠다는 듯이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네. 해보십시오.”
“이번 사태를 책임지고 저와 아들이 물러나겠습니다.”
“아버지.”
“그만해라. 5천억을 만드는 것도 네가 계속 경영을 하는 것도 둘 다 불가능한 일이야. 기업의 본질은 욕심이지만 그 욕심의 대가는 책임질 준비도 되어있어야 하는 거다.”
재준은 고개를 갸우뚱 옆으로 기울였다.
“책임을 진다면서 이야기가 이상하게 돌아가네요.”
“뭐가 이상하다는 겁니까?”
“그러니까 사장님이랑 부사장님이 그만두는 건 뭐, 내가 알 바 아닌데요. 책임에 대한 핵심을 잘못 짚으신 것 같아요.”
“이게 핵심 아닙니까?”
“당연히 아니죠. 사장, 부사장이 일은 안 하고 돈만 벌겠다는 거잖아요. 더 좋아지잖아요. 지금 재경기계 주식 30% 누구 명의로 되어있나요? 본인들 명의로 되어 있잖아요. 안 그래요?”
“그러면…….”
“30%를 홀라당 팔아서 여생을 아주 편하게 살겠다. 이거 아닌가요? 어째 생각하시는 게 책임지겠다는 자세가 아니네요. 그냥 말만 그럴듯한 거지.”
“그러면 30% 주식도 내놓으란 말입니까?”
“에이, 거, 왜 절 날강도로 만드세요? 아닙니다. 그깟 주식 가지고 있어서 뭐하게.”
재준은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어디 보자. 제가 재경기계에 대해 좀 조사해 봤는데. 작지만 자회사도 7개나 있고 협력 업체도 50여 개나 되고 건실한 기업이네요.”
“…….”
“근데, 딱 봐도 중복된 아이템을 납품하는 여기, 이 협력업체 다섯 군데는 누가 봐도 유령회사야. 이곳으로 빠져나가는 돈이 대략 연 50억 정도. 이건 노후를 생각해서 마련한 것 같은데. 그리고 연 매출 2,000억에 순이익 100억. 매출 대비 순이익이 5%라…….”
“…….”
“같은 업종의 순이익이 15%인데 반해 좀 적네요. 뭐, 그렇다고 칩시다. 내가 재경기계를 운영하는 것도 아니니까? 그럴 수도 있지요. 하지만 ‘회삿돈을 빼돌렸다’라고 가정하고 이것저것 계산해 보니 해외에 대충 일 년에 200억 원씩 나갈 수 있고 사장님이랑 부사장님이 회사를 세운 지 얼추 25년이니까…… 5000억?”
“…….”
“그래서 제가 받을 돈이 5천억이네요. 10개월 드리겠습니다. 숨겨둔 거 다 끄집어내든 벌든 알아서 갚으세요. 현재증권이 사장님 부사장님의 연대 보증으로 재경기계에 5천억 빌려드린 겁니다. 매달 500억씩 원금 상환하셔야 합니다. 연 5% 이자도 갚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분기당 배당도 하셔야 합니다.”
최재철은 눈을 내리깔고 부들부들 떨었다.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이건 억지입니다.”
“그래요? 그럼 아까 말한 다섯 개 회사가 이익금을 어디로 보냈는지 밝혀내도 상관없는 거지요? 스위스로 갔을라나? 아니다. 일단 한국에 투자사 하나 만들었겠지요? 그리고 해외에 투자한다고 돈을 보냈을 거고. 중간에 섬나라 하나 거치면서 여기저기 왔다 갔다 생지랄을 하다 스위스에 안착했겠네요. 그렇죠? 근데 어쩌나, 지금 정부가 해외 외화 유출을 상당히 꺼려 하는 것 같던데. 걸리면 바로 감옥행이에요. 아이고.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엉덩이 붙이고 있으면 치질도 걸리고. 감기는 달고 살겠네요. 하, 나쁜 놈들. 아무리 감옥이라도 온돌은 기본으로 해줘야 하는 거 아냐?”
최재철보다 최복기의 표정이 더 일그러졌다.
지금은 문민정부 시절이었다.
외환 보유고가 눈에 띄게 줄어들어서 정부가 달러를 해외에 보내는 것에 대해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있을 때였다.
이런 시기에 외화를 해외에 빼돌렸다가는 뼈도 못 추릴 것이었다.
가뜩이나 대기업들이 해외로 비자금 빼돌리는 걸 보면서 말도 못 하고 끙끙 앓고 있는 정부인데. 중소기업까지 그 짓을 한다면 옳다구나 하고 달려들어 감옥에서 최소한 열 바퀴는 돌 게 뻔했다.
재준은 갑자기 두 사람에게 장난기 빼고 말했다.
“보세요. 책임에 대해 잘 아시니까 말씀드립니다. 대충 넘길 생각하지 마세요. 5천억도 만들고 부사장님은 더 열심히 일하세요. 내 돈 다 갚을 때까지. 일단 임시 주총 열어 부채에 대해 못 박을 겁니다. 그리고 현재증권에서 두 사람의 모든 재산에 대해 가압류 신청할 거고요. 또한, 5천억 다 들어오는 시점에서 주식을 전부 넘겨드릴 겁니다.”
휘청.
최복기가 넘어지려 하자 최재철과 비서가 달려들어 부축했다.
재준은 정 실장을 보며 말했다.
“지금 바로 실행해 주세요.”
“네. 도련님.”
재준은 최재철을 바라보며 싱글벙글 웃었다.
“에이, 그렇게 억울해하지 마세요. 황선달도 내가 싹 벗겨 먹었으니까. 노경범하고 강병구는 검찰에 갔고. 그나마 재경기계는 돈으로 때우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좋게 좋게 생각합시다.”
최재철은 뭔가 말을 하려 했지만 입술이 달라붙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