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화 계산은 똑바로 하셔야죠(2)
펀드 매니저와 애널리스트들이 어리둥절하게 쳐다보는데 법대를 나온 서포터가 큰 소리로 동료와 얘기를 했다.
-횡령으로 잡혀간다는데.
-횡령은 회삿돈을 쓴 거 아냐?
-회삿돈으로 작전했잖아.
-다시 돌려놓으면 되잖아.
-그것도 횡령이야. 아니, 그게 더 가중 처벌 되는 거야. 3년은 살다 나오겠네. 3년 살다 나오면 증권 바닥에서 발도 못 디딜 거야. 그뿐이야? 증권뿐 아니라 금융계에는 아예 얼씬도 못 하지.
-3년이면 호적에 빨간 줄이야. 노가다밖에 할 게 없다고.
뭐?
펀드 매니저와 애널리스트는 이놈들이 일부러 들으라고 크게 말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놈들과 실랑이할 시간이 없다.
서형길 실장이 말했다.
한 시간, 한 시간이라고.
그 안에 자신의 죄를 전부 낱낱이 적어서 선처를 부탁해야 한다.
펀드 매니저와 애널리스트들은 오만 가지로 인상을 쓰며 자리로 돌아갔다.
서형길은 법대 나온 서포터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똘똘한 녀석. 잘했어.’
그리고,
탕! 탕!
탁자를 치며 직원들을 집중시켰다.
“봤지, 이제 우리 회사엔 펀드 매니저가 10명뿐이야. 큰일이지. 아주, 큰일이 났어. 그럼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 외부에서 펀드 매니저를 스카웃하는 게 좋을까? 아니면 너희들이 진급하는 게 좋을까?”
네?
직원들 사이 여기저기서 단발 음이 터졌다.
진급이라니, 내가 펀드 매니저가 될 수 있다고?
서형길 실장은 여기저기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확인하고 한가득 미소를 지었다.
“자, 자, 너무 좋아하지 말고. 정리를 좀 해야 하는데. 일단 자신은 당장 사수를 대신해서 매매를 할 수 있는 사람. 손.”
모든 부사수가 손을 들었다.
서형길 실장은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먼저 고인물을 쳐내지 못한 것도 있지만 일정 수준에 올라온 부사수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지 못한 안타까움이었다.
꼭, 펀드 매니저가 40명이라고 못을 박을 필요는 없었는데.
작게나마 자금을 주고 펀드 매니저로 키울 수 있었는데.
너무 안일하게 살아온 자신이었다.
하지만 이 또한 재준이 알고서 벌인 일이라 생각했다.
‘아, 진정 천재시다. 이런 일을 알고 일을 벌이신 거야. 역시 시야부터 넓고 깊으시구나.’
그렇다면 나도 열심히 보필해야 한다.
주먹을 불끈 쥐고 재준이 자신에게 당부한 말을 직원들에게 말했다.
“좋아. 그렇다고 무작정 맡길 수는 없으니까. 지금부터 베타계수 포지션을 낮게 잡고 매매를 하면서 향후 자신만의 포트폴리오를 작성해서 기획실로 올리면, 타당성을 점검하여 너희들만의 펀드 색깔을 만들어 보자.”
베타계수란 일명 변동성계수라 하는데 말 그대로 시장의 상황에 따라 주식이 오르락내리락을 나타내는 지표이다.
고베타는 확 올랐다 확 내렸다 하는 것이고, 저베타는 시장이 좋거나 말거나 거북이걸음을 하는 것을 말한다.
모두 서형길 실장을 쳐다보는 눈빛에 의심이 젖어 들었다.
-방금 베타계수라고 하신 거야?
-포트폴리오도 말씀하셨어.
-으…… 머리야. 난 지적 테러를 당한 기분이야.
-왜?
-7월에 88라이트 200원 올라서 900원 됐잖아, 그때 실장님이 소비세, 교육세를 들먹이며 물가안정을 위해 200원 이상은 무리라고 말할 때, 충격 먹었거든. 실장님이 이렇게 똑똑했나 하고. 그때와 비슷하게 머리가 띵하네.
“실장님.”
이때 서포터 중 하나가 손을 들었다.
“베타계수를 낮게 잡으라시는 건 변동성을 적게 하여 오르지도 내리지도 않는 안전하게 매매를 하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 그렇지.”
‘대충해. 나도 모르는 이야길 왜 물어.’
“그럼, 공격적 성향보다는 경기방어주에 집중하라는 말씀입니까, 아니면, 고베타주와 저베타주를 적절히 섞는 분산 투자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저놈이? 알아서 하라고. 알아서.’
모든 직원의 시선이 일제히 서형길에게 쏠렸다.
이들의 눈빛이 이야기를 했다.
이번에도 대답하면 진짜 존경한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하지만 모두의 우려와는 다른 말이 서형길의 입에서 나왔다.
“내가 말하는 건, 베타계수가 낮은 종목만 편입해서 매매하라는 말이다. 펀드 매니저는 영웅이 되려는 심리를 다들 가지고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우리는 큰 이익보다는 보다 안정적인 수익을 투자자에게 안겨주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하는 거야. 펀드 매니저의 과도한 주관적 선택으로 변동성이 큰 종목으로만 펀드를 조합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알 것이다. 그리고 크게 먹으려는 시도가 실패했을 때 여러분은 작전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지. 흠. 흠.”
와~~~~~
사원들의 입이 떡 벌어지며 서형길을 존경의 눈으로 쳐다보았다.
짝. 짝. 짝.
개중에 자신도 모르게 박수를 치는 이도 있었다.
‘쑥스럽게 뭐 이런 걸 가지고.’
“이만, 해산. 더는 질문을 받지 않는다. 모든 건 너희들의 포트폴리오가 말해줄 것이다. 다 나가. 얼른. 시간은 금이다. 금을 흘리면 안 돼.”
서형길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직원들은 서둘러 밖으로 나가며 자꾸자꾸 서형길을 쳐다보았다.
단상에서 근엄하게 바라보는 서형길은 자신을 쳐다보며 나가는 직원들을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자꾸 그런 눈으로 보지 마.
그리고 재준에게 감사했다.
‘감사합니다. 도련님. 도련님이 해 주신 말을 외우는 데 고생을 했지만. 전 결국 성공했습니다.’
***
재준은 정 실장과 함께 현재증권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정 실장은 재준이 한 일을 생각하면 실없이 웃음이 나왔다.
왜 상대에게 적개심을 품으면 예전의 망나니로 변하는 것일까.
평상시엔 그야말로 신사 그 자체인데.
재준은 황선달을 동네 양아치처럼 대했다.
황선달이 누군가.
큰손 중에서도 돈이 가장 많지는 않아도 가장 무게감이 있는 인간이었다.
다른 큰손들이 국체나 장기투자로 돈을 벌 때 황선달은 주식시장을 선도하며 나간 인물이었다.
아침에 객장으로 출근하여 건설주를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10만 주씩을 사고 사라진 적도 있었다.
물론, 치기 어린 짓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앞으로 대한민국에서 건설 붐이 한창 일어날 시기였고, 정부도 기간산업에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붓고는 있었다.
그래도 1985년 당시에 200억을 10분 만에 던지듯이 놓고 간 것은 아직도 전설로 회자되고 있었다.
“도련님. 황선달을 잘 아십니까?”
“아니요. 잘 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정말 책으로 본 게 다거든요.”
“무섭진 않으셨습니까?”
“그게……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마치 동화책에 나오는 나쁜 악당이랄까.
이 시대의 사람들은 황선달의 행적을 알고 부러워하고 어쩌면 무서워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재준은 책에서 본 인물일 뿐이었다.
무섭지도 않고 위협적이지도 않았다.
“그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입니다.”
“글쎄요. 정 실장님도 봐서 알겠지만, 전 할아버지가 더 무서운데요. 황선달은 전화 한 통화에 꼼짝없이 꼬리를 내렸잖아요.”
“그래도 저희는 사회적 체면이라는 게 있지만, 저들은 그런 게 없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럴지도 모르죠. 그러나 황선달은 아닙니다. 한 번 져 본 적이 있는 상대에게는 쉽게 싸움을 걸지 않습니다. 그리고 승부사 기질이 있어서 자신이 당한 방법으로 이기고 싶어합니다. 아마 지금부터 정계 연줄을 대려고 무척 애를 쓸 겁니다. 그뿐 아니라. 돈도 문제가 많습니다.”
“돈이라면?”
“네. 보셨잖아요, 그 도장들. 미처 처리하지 못한 차명 계좌가 저렇게 많은데. 저것만 해도 몇십억에서 몇백억은 될 겁니다. 90억을 안 받는 대가로 제가 입을 다문다고는 했지만, 제 말을 믿겠습니까? 제가 신고할까 전전긍긍할 겁니다. 되도록 빨리 처리하려고 발버둥 칠 겁니다. 그리고 경찰에 넘어간 장부도 있고. 할 일이 많을 겁니다.”
정 실장은 재준이 차분히 설명하는 들으며 신기해했다.
황선달과 싸울 때와 비교하면 180도 바뀌었다.
조용하고 차분한 말투로 조목조목 이야기했다.
껄렁껄렁할 거란 걸 도무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어떻게 순식간에 모습을 바꿀 수 있을까.
물론 인간이란 처한 상황에 따라서 성격이 휙휙 바뀔 수 있다.
연애할 때 서로 좋아 코맹맹이 소리를 내다가도 음식에 바퀴벌레가 나오면 식당 사장에게 삿대질하며 고함을 친다.
누구나 이 정도는 변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경계를 넘어선 변화를 우린 이중인격이라 부른다.
23 아이덴티티처럼
마치 재준 또한 실제 사람을 죽여도 아무렇지도 않게 웃을 것 같았다.
이건 성격이 변하는 게 아니라 인격이 변하는 거였다.
어쩌면 임병달 회장님보다 더 무서운 분이 될 수도 있겠어.
누구든 도련님을 상대하려면 자신이 가진 걸 다 걸어야 한다.
더 무서운 건, 자신이 예측한 걸 100% 믿고 달려드는 것이다.
조금의 의심도 하지 않는다.
“도련님.”
“네.”
“혹시 틀릴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뭐가요?”
“이번 작전 말입니다. 처음에 노경범의 그래프를 보고 작전이라 판단하시고, 회장님에게 돈을 마련하고, 강호석을 포섭하고, 서형길을 통해 언론과 증권사를 섭외하고, 심지어 황선달의 변호사에게 협박까지 하셨는데. 만약 작전이 아니었으면요?”
재준은 정 실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다 알고 하는 건데. 그럴 수는 없다.
“하지만 작전이 맞잖아요.”
정 실장은 피식 웃었다.
이렇다.
자신이 하는 일에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고,
정 실장은 더 무섭게 느껴지는 게 있었다.
재준은 자신이 틀렸다는 걸 알았다 해도 변함없이 돌진할 것이다.
“이제 회사로 들어가시면 서형길 실장을 만나보실 겁니까?”
“아닙니다. 서형길 실장은 잘 하고 있을 겁니다. 저흰 재경기계로 갈 겁니다. 정 실장님은 재경기계 최재철 부사장하고 통화하셔서 지금 간다고 하시고 할아버지께 헬기 한 번 더 빌려달라 하십시오.”
“네.”
재준은 두 손을 비비며 기분 좋게 웃었다.
***
투투투투투.
헬기가 재경기계 옥상에 착륙했다.
김재수 차장은 이미 나와서 재준을 마중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재준…… 사원님.”
하하.
재준은 김재수 차장의 어깨를 두드렸다.
“편하게. 응, 편하게.”
뒤따라 오던 정 실장의 미간이 좁혀졌다.
시작이구나.
그래도 좋다고 김재수 차장은 재준과 나란히 걸으려 쪼르르 달려갔다.
“이번 작전 끝나고 부사장님이 흡족해하십니다.”
“그래요? 우와, 20만 주 전부를 12만 원에 매도한 겁니까?”
알면서 물어봤다.
강호석이 관리를 했는데 20만 주 전부를 12만 원에 팔 리가 없었다.
“설마요. 대략 9만 원 선에서 처리된 것 같습니다.”
“그럼, 180억? 돈벼락을 맞으셨네.”
“돈벼락까지야…… 다 회삿돈인데요. 그런데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부사장님을 만나야 하는데. 좀 만날 수 있을까요?”
“아, 그게…… 그전에 하도 충격적인 일을 당해서…….”
“아니, 겨우 180억 번 거로 무슨 충격씩이나 받아요?”
“그게 아니라…… 돈이 아니고…….”
“설마 나? 나를 피하는 겁니까?”
“꼭 피한다기보다는…… 더 바쁜 일이 있어서…….”
“부사장님, 큰일 낼 사람이네.”
“왜요?”
“왜라니요? 제가 재경기계 주식을 50% 가지고 있잖아요.”
“네?”
“부사장 잘라야겠네.”
김재수 차장은 머리가 어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