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증권 재벌의 천재 손자가 되었다-20화 (20/477)

제20화 작전은 작전으로 받아쳐야지(7)

재경기계 엔진 부품 뉴스에 주가가 꿈틀거리더니 몇 개 증권사가 달려들어 매수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하한가 매도 잔량이 소진되자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다.

“아이고, 우리 강 선배, 고생하겠네. 정 실장님 전화 좀 해주세요. 그냥 내버려 두라고.”

정 실장이 핸드폰을 들어 통화했다.

재준은 다시 노인을 보며 싱글 웃었다.

“어때요? 사고 싶죠. 지금까지 떨어진 걸 만회할 만한 소식인데. 근데 뉴스라고 다 믿으면 안 돼요.”

재준의 말에 노인의 눈매가 올라갔다.

“네가 한 것이냐?”

“이거 참, 나이 좀 먹은 사람들은 급하면 반말이라니까? 이렇게 마음을 못 다스리니까. 옛날의 명성만 주워 먹고 사는 거 아닙니까?”

“네가 한 것이냐 물었는데.”

“자, 잘 보세요.”

재준은 핸드폰을 들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도련님.

서형길의 음성이 들려왔다.

“지금 재경기계에 끼어든 새끼들, 앞으로 멀쩡한 얼굴 들고 다니고 싶으면 전부 놓고 빠지라 전하세요.”

-네.

재준은 핸드폰을 끊고 노인을 향해 다시 싱글 미소를 지었다.

“자, 보세요. 작전은 이렇게 치는 거예요. 뭐, 힘들게 머리까지 써가며 여러 사람 피곤하게 만듭니까? 봐요. 저, 주가.”

노인은 모니터로 고개를 돌리자 재경기계의 매매 물량이 점점 사라지는 게 보였다.

“현슬아.”

노인의 말에 젊은 작가가 돌아보며 고개를 저었다.

“증권사들이 모두 손 털고 나가고 있습니다.”

쯧쯧.

재준이 멍청하다는 듯 혀를 찼다.

노인은 재준을 노려봤다.

“어느 파지?”

“와, 이 영감님 나를 조폭으로 만드네. 나 회사원이에요. 여기, 봐, 사원증 있잖아. 이거, 이거, 큰일 낼 사람이네.”

“근데 왜 협박을 하지.”

“어허, 이렇다니까, 물에 빠진 놈 살려주면 꼭 돈 때문에 살려준 줄 안다니까. 내가 지금 협박하는 게 아니라 증권사 놈들 살려준 거라고요. 봐요. 저기 뉴스 또 나오네.”

[재경기계 엔진 부품은 피스톤 링. 세계 두 번째로 크롬 도금에 성공.]

노인이 피스톤 링에서 표정이 묘해졌다.

“피스톤 링 뭔지 알아요?”

“…….”

“모르나? 그 있잖아요. 엔진, 그 안에 피스톤이 이렇게, 이렇게 움직이잖아요. 흡입, 압축, 폭발, 배기. 안 배우셨나? 중학교 기술 시간에 다 배우는 건데. 아 가방끈이 짧으시구나. 하긴 뭐 영감님 시대에 국민학교, 아, 올해부터 초등학교로 바뀌었구나, 어쨌든 학교 나오면 성공한 거지. 그렇죠?”

재준의 빈정거림에 속이 부글거리는 노인은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분명 호재가 나왔는데 주가가 도리어 내려가고 있었다.

한 주 두 주의 일반인들도 주식을 버리듯 매도했다.

“저 봐. 영감님. 내가 주가를 막은 것도 있지만 저건 그냥 내려가는 거예요. 내가 구세주라니까. 아, 하던 얘기마저 해드려야지. 피스톤 링. 그게 피스톤 겉에 들러붙어 있는 건데. 피스톤 표면에 묻은 잔여 기름을 쓸어주는 역할을 하거든요. 아주 중요한 부품이긴 한데…… 단가가…… 20원이야. 물론 엔진에 피스톤이 많아서 피스톤 링이 8개인가, 12개인가 들어갈 거예요. 그럼 얼말까? 딩동댕, 많아야 240원입니다. 자동차 한 대당 240원 버는 것 같은데, 어때요? 이게 호재인가? 악재인가?”

황선달은 재준을 노려봤다.

“뭐 하는 수작이지?”

“수작은 내가 아니라 당신이 시작한 거지.”

재준은 한발 다가섰다.

“어디 감히, 현재증권 안에서 X신 같은 짓거리를 끄적이는 거야, 정신 나갔어? 뒈지고 싶어 발악하는 거야?”

“이놈이, 어디서 말을 함부로…….”

“어디긴 당신 앞이잖아.”

황선달은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명동 왕손, 황선달.

장판, 곽 할머니,

여의도의 인텔리, 스텐리 정.

미시안, 최 사장.

마당발, 홍 사장.

채권의 큰손, 백 사장.

모두 1980년대까지 이름을 날리던 쟁쟁한 증권가의 큰손들이었다.

증권의 역사를 달달 외우는 재준이 이들을 모를 리 없었다.

대한민국의 경제가 막 기지개를 켜던 시점, 소위 눈먼 돈들을 쓸어 담았던 사람들을 왜 모를까.

오히려 1970년대로 환생했으면 이 고생을 안 하고 편하게 돈을 벌 수 있다고 한탄할 지경이었는데.

황선달은 재준을 노려보았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재준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톡톡 건드렸다.

“그런가요? 영감님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내 전화 한 통이면…….”

“아…… 전화.”

재준의 황선달의 말허리를 잘랐다.

“맞다. 전화가 있었네. 근데, 전화하면 대통령이라도 튀어 옵니까? 이 사람 정말 한심한 사람이잖아. 이봐요, 영감님. 전화하기 전에 상대를 알아야지. 그게 싸움의 기본인데. 안 그래? 당신 내가 누군지 알아요?”

“너…….”

“모르잖아. 모르면서 어디다 전화하려고? 아니지, 내가 전화를 해야겠네. 정 실장님, 대통령은 좀 그렇고. 재경부, 아니 좀 약한가? 총리께 전화 좀 넣어 주세요. 여기 범죄자 좀 잡아가라고.”

“뭐?”

“왜, 못할 것 같아요? 당신이 전화 걸 수 있는 게 이 동네 관리하는 검사잖아. 아닌가? 국회의원 정도 되려나? 어디 우리 서로 힘자랑 좀 할까요?”

띠리리링.

정 실장이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황선달의 눈이 큼지막하게 커졌다.

“네, 사무관님. 현재증권 정 실장입니다.”

-

“네. 회장님께서 총리님과 긴히 상의드릴 일이 있다고 하십니다.”

-

“네. 조만간 찾아뵙겠습니다.”

재준은 정 실장을 째려봤다.

아니, 그렇다고, 진짜 전화를 걸면 어쩌라고.

할아버지가 꼼짝없이 총리를 만나게 생겼잖아.

한소리 듣겠는걸.

그냥 갈 수는 없을 테고 단단히 챙겨드려야겠네.

정 실장이 전화를 끊고 재준에게 ‘나 잘했지’라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황선달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마른 침을 삼켰다.

그래, 긴장되겠지. 이 양반, 아주 싹 벗겨서 할아버지에게 드려야 직성이 풀리실 것 같은데.

“자, 우리는 했는데. 어디 한번 해 보세요. 전화 어디다 거실 겁니까? 이제 남은 건 대통령밖에 없는 것 같은데.”

인간은 너무 큰일을 당하면 말이 없어지는 건 당연하고, 앞뒤 안 가리고 현실을 벗어나고 싶어한다.

지금 황선달처럼.

“현재증권에서 철수하겠네.”

“네?”

재준은 황선달을 보며 손을 가로저었다.

“지금 무슨 얘길 하는 거예요? 철수? 어디서? 뭘 철수한다는 겁니까?”

“현재증권에서 지금 당장 주식과 돈을 빼겠네.”

“네?”

재준은 황선달을 빤히 쳐다봤다.

“영감님, 현재증권에 돈 있으세요? 정말? 있으려나…… 뭐, 주식 사고 남은 돈은 돌려드려야지요. 얼마나 남았으려나. 한 주가 8만원이니까, 한 7만 원 정도 있겠네. 그거 가져가세요. 주식은 놔두고.”

“주식을 놔두라고? 무슨 소린가?”

“아니, 내가 영감님 돈을 챙겨드리려고 여기 온 줄 아세요? 아니지, 조금 챙겨드리긴 해야겠네요. 자, 저한테 주식을 파세요. 얼마 생각하세요?”

“지금 재경기계 주식을 자네에게 팔라는 건가?”

“네, 얼마가 적당할까요?”

황선달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어쨌든 앞으로 내려갈 주식을 껴안고 있는 것도 부담이었다.

노경범에게 지시를 내려 빠르게 처분하라 해도 4만 원이나 5만 원 선에서 처리될 게 뻔했다.

그래도 1만 원부터 매집한 주식이라 약간의 이익은 생길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안 좋다.

약간의 이득도 버리는 게 맞다.

“3만 원.”

재준은 황선달이 제시한 금액을 듣더니,

“3만 원…… 지금 대략 30만 주 정도 있으시죠? 그럼, 90억 정도네요.”

끙.

황선달의 입에서 신음이 들려왔다.

생각보다 출혈이 있었다.

지금까지 투자해서 손해를 본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번은 왠지 강탈당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합의 본 겁니다.”

“그렇게 하세.”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정 실장도 3만 원도 좋아 보이질 않았다.

현재 주가가 8만 원 선이지만 매수세가 없다면 종전의 1만 원까지도 떨어질 것이다.

“저, 도련님. 그건 좀.”

도련님이란 말에 황선달이 흠칫 놀랬다.

“임병달 회장의 손자님이셨군.”

“오, 할아버지를 아세요? 몰랐네요. 알았으면 좀 더 쳐 드릴 걸 그랬나?”

“됐네. 이걸로 끝내야지.”

“아쉽네요. 좋은 관계가 될 수도 있었는데.”

“원수가 안 되면 그만이지.”

“그러네요. 알겠습니다.”

재준은 살짝 고개를 숙이고 돌아섰다.

뒤통수에서 황선달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재준이 휙 고개를 돌려 황선달을 바라봤다.

“아, 까먹은 게 있는데.”

“또 뭔가?”

가만, 가만 어디 있더라.

재준이 인쇄소 기계 뒤로 걸어가서 벽에 사람 키만큼 쌓여있는 다른 증권사 소식지를 봤다.

그리고 냅다 발로 인쇄물을 걷어찼다.

우루루.

쌓여있던 인쇄물들이 넘어지며 바닥에 어지러이 널브러졌다.

“뭐 하는 겁니까?”

젊은 작가가 자리에서 일어나 재준에게 다가갔다.

“어, 어. 움직이지 마요. 증거 인멸되니까.”

증거 인멸이란 말에 현슬의 발걸음이 굳었다.

어디 보자.

재준은 인쇄물 뒤에서 빵빵한 포대 자루 하나를 손으로 잡았다.

찾았다.

“건들지 마.”

황선달의 노한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인쇄소 안을 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재준은 자루의 밑자락을 잡고 들어 올려서 내용물을 쏟아버렸다.

와르르르르르.

재준은 포대 안에 있는 무언가 바닥에 쏟아져 나왔다.

바닥에 수백 개, 아니, 수천 개는 되어 보이는 손가락 마디만 한 목도장들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

황선달은 시뻘겋게 변한 얼굴로 재준을 노려봤다.

재준은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목도장 하나를 집었다.

“아직도 이런 걸 하시니까. 대한민국 경제가 좀 먹는 거 아닙니까?”

재준은 입사 첫날 울산을 갔다가 다음 날 아침 태풍인쇄소에 들른 적이 있었다.

그때 인쇄소를 둘러보며 증권 소식지를 보던 와중 뒤에 쌓여 있던 포대 자루를 발견했다.

그리고 헐렁한 구멍으로 삐져나온 목도장 몇 개를 보고 지나쳤다.

그때는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는데 황선달이란 이름을 듣고 알아차렸다.

황선달이 차명 계좌를 만들기 위해 썼던 목도장이란 것을.

“금융실명제 몰라요? 아직도 차명 계좌를 관리하는 겁니까? 아유, 이게 다 몇 개야. 차명 계좌 통장만 수천 개는 넘겠네. 아니, 이거 꽤 귀찮을 것 같은데. 어떻게 관리한담.”

재준이 목도장 하나를 들어 쓰레기통으로 집어 던졌다.

“골인.”

“뭐하는 짓이냐?”

“아, 이렇게 버릴 게 아니구나. 영감님. 이렇게 합시다. 이 도장 한 개당 천만 원 어때요?”

“뭐라고?”

“에이, 거, 내가 영감님한테 90억을 줘야 하잖아요. 내가 이 도장 눈감아 드릴 테니까, 개당 천만 원씩 깎읍시다. 어디 보자. 한 개, 두 개, 세 개…….”

재준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목도장을 하나씩 세자,

노인이 결국 참지 못하고,

“현슬아. 애들 불러라. 이분들이 조용히 가기 싫으신 것 같다.”

“네.”

현슬이 핸드폰을 꺼내자 재준이 웃기 시작했다.

큭큭큭.

재준이 앉은 자리에서 웃음을 참지 못하고 땅바닥까지 두드리며 웃었다.

하하하하.

결국,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정말. 바보 같다니까. 아니, 영감님. 저희가 여기 오면서 영감님 명동 사무실은 그냥 놔뒀을 거 같아요? 거기 벌써 경찰이 들이닥쳐서 다 아작이 났다고. 하하하하.”

“이…… 개 같은…… 명동은 어떻게 알고.”

“자, 이제 마지막 딜을 해야겠네요.”

“…….”

“자금 전화 걸어서 노경범에게 주식 모두 현재증권으로 넘기라고 하세요. 아마 지금 당신의 변호사가 노경범 옆에 있을 겁니다.”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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