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증권 재벌의 천재 손자가 되었다-19화 (19/477)

제19화 작전은 작전으로 받아쳐야지(6)

110,700.

104,000.

97,800.

91,900.

86,400.

6일 연속 하한가로 주가는 1/3이 날아갔다.

1996년 하한가는 –6%로 2022년의 –30%와 비교도 안 되게 적었지만 30% 이상의 공포가 시장을 지배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시대 국민은 1989년 코스피 1000포인트를 뚫을 때가 최고의 날이었다.

난리, 난리, 생난리였다.

어떤 이는 동네잔치까지 벌였다.

집 팔고 땅 팔아서 주식을 샀는데 그게 못 먹어도 두 배, 어떤 이는 열 배도 더 먹었으니 잔치가 대수이겠는가.

하지만 1년 후 1990년에 반 토막이 난 600포인트.

집 잃고 땅 잃은 친척과 이웃들의 험한 생활을 보아왔다.

즐거운 시기는 어느새 기억에서 싹 지워지고 없었다.

이러니 주가가 1/3이 빠지는 것은 그 당시 공포가 다시 떠오르는 것과 같았다.

재준의 자산도 깎여 나갔다.

그럼, 재준도 공포를 느꼈을까?

천만에.

재준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정 실장에게 주문했다.

하한가로 몰아넣으세요.

어쩔 수 없이 정 실장도 강호석에게 같은 주문을 넣었다.

하한가에서 못 나오게 만들어.

9시.

장이 시작하고.

강호석은 주가를 하한가로 몰아넣고는 움직이지 못하게 방어하기 시작했다.

강호석은 떨어진 명령에 자신의 혼을 갈아 넣어 하한가에서 단 한 주의 오차도 없다는 각오로 하한가 잔량을 관리했다.

정 실장이 재준에게 위험을 다시 환기시켰다.

“도련님. 지금 도련님 자산으로 매입을 하고 있어서 회사에 피해가 가진 않습니다만, 손해가 막심합니다. 회장님이…….”

“할아버지께서 궁금해하시죠? 어떻게 할 건지.”

“그런 건 아니지만, 제 생각에는…….”

“작전은 작전으로 되받아치고 있으니 걱정 마세요.”

“그렇지만 작전을 막는다 해도 떨어진 주가를 다시 끌어 올리려면 또 출혈이 있을 겁니다.”

“주가를 왜 끌어 올려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

정 실장은 재준의 계획이 궁금했지만, 재준은 한마디도 설명하지 않았다.

설명이 왜 필요할까?

뻔한 설명은 행동에 방해가 될 뿐이다.

쓸데없는 난상 토론으로 시간을 허비하기도 싫었고.

마지막 결과가 말해줄 것인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할아버지도 지금까지 자신에게 직접 말하지 않는 걸 보면.

내심 자신의 능력을 보고 싶어서 입을 다물고 계신 것이다.

망망대해를 헤매는 인생의 항로에 손자를 걱정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그 손자의 크기를 측정하지 못했다면 할아버지가 해 줄 수 있는 건 그저 믿고 맡기는 것뿐이니까.

내심 재준도 자신이 어느 정도까지 몰아갈 수 있는지 알고 싶어졌다.

이번엔 나 자신을 던질 정도로 몰아친다.

재벌이라면 적당히 타협하는 건 있을 수 없다.

현재, 주가는 86,400원에서 노경범의 공격과 강호석의 방어로 정체되어 있었다.

정 실장의 걱정은 사라지지 않아 자꾸 말려야 한다는 조바심이 들었다.

내가 왜 이렇게…….

침묵을 지키며 모니터만 빤히 바라보고 있는 재준이 낯설었다.

점점 쌓여가는 물량에 속은 타들어 갔지만, 재준은 이상하게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이상해.

뭔가 걸려.

“도련님, 여기서 빠지는 게 좋겠습니다.”

“아니요, 계속 버팁니다.”

마치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아이처럼 말한다.

“지금 빠져야 주가가 올라갑니다.”

“아직은 아닙니다.”

“손해가 점점 늘어납니다.”

“상관없다니까요. 정 실장님, 여기 이 숫자가 정말 돈이라 생각하세요? 돈 아니잖아요. 이건 그냥 숫자예요. 이 숫자로 이 숫자를 늘리는 겁니다. 이해하셨죠.”

돈의 숫자로 주식의 숫자를 늘린다.

계속 매수를 고집한다.

과연 매수만이 답일까?

맞긴 했다.

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얼까?

아니, 가장 중요하다가 아니라 중요한 건 하나밖에 없다.

그건 매수다.

단, 누가 매수를 하는지 모르게 시장에 나와 있는 주식 전부 쓸어 담아야 한다.

지금까지 노경범은 누구도 모르게 혼자서 매집을 해왔다.

그래서 강호석도 그림을 잘 그렸다고 표현했고.

하지만 이제 강호석이 못지않게 그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었다.

재준은 그래프를 보며 생각했다.

‘강 선배, 그림 참 잘 그리네.’

지금쯤 노경범도 기관 주식 보유 현황을 통해 어느 정도 감을 잡았을 것이다.

자신의 적이 현재증권을 이용하고 있든가, 어쩌면 현재증권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특히 강호석을 의심할 것이다.

이쯤에서 손을 떼게 만들어야겠지?

그래, 자꾸 조물딱거리면 부정 타.

재준이 핸드폰을 들었다.

“서형길 실장님, 제가 부탁한 것 어떻게 됐습니까?”

-이미 준비는 끝났습니다. 도련님.

재준은 정 실장을 향해 빙긋 웃었다.

“다 되었답니다. 안 움직일 모양인데 우리가 찾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

노경범은 핸드폰을 귀에 바짝 대고 눈을 감았다.

핸드폰 너머로 어떤 노인이 조용히 웃어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고 있습니다.”

-

“지금 매도를 쳐도 매수세가 없어 팔리지 않습니다.”

-

“보고 있습니다.”

노경범은 통화를 하면서 시야는 시황판에 뜨는 기사를 바라봤다.

[재경기계 오폐수 처리 장비 개발 보류]

처음엔 분노가 일었고 날이 갈수록 서서히 공포가 자리 잡았다가 지금은 허탈했다.

어떤 개X끼인지 걸리면 죽인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누가 끼어들었는지.”

-

“아니요. 재경기계도 협박을 받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 물량을 전부 던질 리가 없습니다.”

-

“네? 하지만 그러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다음 종목을 물색하는게…….”

툭.

핸드폰은 끊어졌고 신호음만 귀에서 울렸다.

재경기계에 부정적인 뉴스가 나갔지만, 물량은 변화가 없었다.

시장에 돌아다니는 주식이 없다는 반증이었다.

노경범은 강병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걸어 놓은 거 전부 취소하고 손 떼고 물러나. 전량 보유해.”

대략 시장에 퍼져 있는 30만 주를 거의 다 매집했다.

대략 200억 정도 자금이 투입되었다.

이제 물량을 풀면서 달려드는 놈들에게 넘기면 끝이었는데.

이렇게 당하다니.

팔지도 사지도 못한다.

옴짝달싹할 틈조차 없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아주 지능적인 놈이 끼어들었다.

***

재준을 태운 차량은 남산을 넘어가고 있었다.

정 실장은 뒷좌석에서 두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는 재준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의식했는지 재준이 눈을 떴다.

“왜요?”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을 리가 있겠습니까?”

“지금이라도 돌아가시죠. 위험할 수 있습니다.”

“위험하지 않아요. 제가 괜찮지 않은 건 그게 아닙니다.”

“…….”

“전부를 뺏어야 하는데…….”

쩝.

재준은 무언가 아까운 듯 입맛을 다셨다.

“명동은 어떻게 됐습니까?”

“지금쯤 특수기동대가 덮쳤으니 다 잡았을 겁니다.”

확실히 재벌이 좋네.

전화 한 통이면 안 되는 일이 없어.

그동안 할아버지가 열심히 공을 들이신 결과겠지만.

재준은 흐뭇하게 웃으며 등을 기댔다.

정 실장은 백미러로 재준을 바라봤다.

지금 회사에 들어온 지 석 달이 지난 회장님 손자가 해 온 일을 생각해 봤다.

뭐랄까?

마치 지적능력을 가진 사자와 같달까.

상대의 수를 모조리 꿰뚫어 보고 물어뜯을 때는 일말의 망설임이 없었다.

가끔 튀어나오는 지랄맞은 성격이야 지금도 마찬가지다.

입사 전에도 알아주는 망나니였으니까.

임재준 손에 죽도록 얻어맞은 인간이 어디 한둘이어야지.

일반인이건 재벌이건 가리질 않았다.

하지만 요즘은 지랄맞게 패는 게 아니라…… 차분하게 팬다?

그래, 이게 딱 어울리는 표현이다.

실로 자근자근 아픈 데만 골라서 팬다.

그것도 입으로, 아님 돈으로.

이젠 거의, 아니, 입사 후 한 번도 손을 쓰지 않는다.

그리고,

재벌이라는 힘을 적절히 이용할 줄도 안다.

정확히 재벌 손자의 힘.

할아버지의 공권력과 돈 같은 거.

그래, 돈?

이 부분도 많이 달라지긴 했다.

그 전엔 돈을 물 쓰듯이 쓰며 자신의 힘을 과시했다면,

입사한 후부턴 가끔 돈을 쓰는데 그 쓰임새가 과거와 비교도 안 된다.

이번 일만 해도 지금 일주일 동안 거의 재경기계 주식을 10만 주 매입하는 데 100억 가까운 돈을 낭비(?)했다.

낭비는 아니어도 손해는 피할 수 없다.

주식이 남았으니 기다려 보면 언젠간 올라가겠지만,

그러나 중요한 건 재준의 표정이었다.

전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저 표정.

그래. 돈에 대한 태도.

재준이 했던 말,

-정 실장님. 여기 이 숫자가 정말 돈이라 생각하세요?

돈이 아니지요.

그저 수단일 뿐입니다.

그러나 돈이기도 합니다.

***

“실장님 도착했습니다.”

운전기사의 말에 정 실장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재준은 차에서 내려 목을 좌우로 꺾더니 앞서서 걸어갔다.

충무로 인쇄소 골목.

이로써 이번이 세 번째 방문이었다.

“자주 오니까, 정이 드는데요?”

“땅이 질퍽합니다.”

실제로 질퍽했다.

“담부턴 밖으로 끌어내야겠어요. 이것들이 버릇이 나쁘게 들어서, 안 좋아. 안 좋아.”

재준은 익숙한 듯 이리저리 골목 안을 누비며 길을 찾아갔다.

마침내 익숙한 간판 앞에 섰다.

태풍인쇄소.

정 실장이 앞서 들어가려 하자 재준이 손으로 막으며 자신이 먼저 들어가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도련님, 위험합니다.”

“괜찮다니까요.”

재준은 정 실장이 막아서는 손을 뿌리쳤다.

속에서 무언가 불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왜 화가 나지?

이런 감정 생소한데.

재준은 인쇄소로 들어서며 주위를 살폈다.

전에 봤던 노인과 젊은 작가가 재준을 알아보았다.

재준이 노인을 보며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젊은 작가가 일어서자 노인이 그의 소매를 잡았다.

뭔가 웃는 얼굴에 서늘함이 서려 있었다.

노인은 본능적으로 알아보았다.

“현슬아, 날 찾아온 손님 같다.”

재준이 노인을 보고 싱글거리며 다가와서 손을 내밀었다.

“또 보네요.”

“인쇄 맡기실 일이 있으십니까?”

“에이, 이제 인쇄소 일 그만하셔야 할 것 같은데, 돈도 많은 분이 굳이 이런 일로 푼돈을 벌려고 하실까? 좀 더 스케일을 키우셔야겠는데. 안 그래요, 황선달 씨.”

이 녀석. 그전에 왔던 신입이 아니다.

변해도 너무 변했다.

허허허.

노인은 재준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호탕하게 웃었다.

“저는 황선달이 아닙니다.”

“그래요? 1985년인가 객장에 와서 25개나 되는 건설주를 10만 주씩 걷어가신 분 맞잖아요. 그때 한 200억 썼던가?”

노인은 긍정도 부정도 안 하고 재준을 바라만 봤다.

“유공 주식도 보유 중이실 텐데…… 100만 주? 아, 맞다. 120만 주.”

“나를 기억할 만한 나이는 아닌 것 같은데.”

“그걸 꼭 봐야 기억합니까? 다 기록에 남아 있는 건데.”

“그래, 내 옛 추억을 되살려 주려고 온 것 같지는 않은데. 무슨 일로 왔습니까?”

재준은 허탈하게 두 손을 들었다 놨다.

“아니, 이것도 말을 해줘야 알아요? 작전 때문에 왔지요. 영감이 치고 있는 작전. 알죠? 재경기계.”

“난 모르는 일입니다만.”

“그래요? 그럼 앞으로 20일 정도 더 하한가를 맞으면 기억이 나시려나? 아니, 아예 바닥을 지나 지하까지 파 줘요?”

노인의 미간이 좁혀졌다가 펴졌다.

재경기계가 앞으로 20일 더 하한가를 맞으면 자신이 들어간 돈은 거의 사라진다.

“주식이 오르고 내리는 건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정말?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그럼 저건 어때요?”

노인과 젊은 작가가 보고 있던 모니터에 토막 뉴스가 떴다.

[재경기계, 자동차 엔진 부품 개발. HD자동차에 납품 예정. 독일 자동차 회사들도 관심.]

서형길 실장의 작품이었다.

한 시간 정도 후에 연타로 때리라 했는데 절묘하게 타이밍이 좋았다.

안 좋아도 기다리면 되는 거고,

암튼,

움찔.

노인의 눈이 꿈틀거리자 젊은 작가가 컴퓨터에 앉아 마우스와 키보드를 쥐었다.

매수하려는 듯.

“나라면 매수 안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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