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증권 재벌의 천재 손자가 되었다-17화 (17/477)

제17화 작전은 작전으로 받아쳐야지(4)

재준은 강호석의 물음에 머쓱해졌다.

공부만 하며 앞만 보고 달려온 전생에서 그에게 주변을 돌아볼 여유 따윈 없었다.

학점, 장학금, 토익 점수, 원어민만큼의 회화 실력, 쌓여가는 금융 자격증들.

스펙에만 매진하고 살았기 때문에 친구와 술 한잔 기울일 시간도 선배의 조언을 귀담아들을 틈도 없이 도서관과 알바로 뛰는 과외, 그리고 집만 왔다 갔다 했다.

봄이 오는지 여름이 오는지 가을이 오는지 겨울이 오는지, 알지 못했다.

새벽에 일어나서 밤늦게 귀가하는 그에게는 사계절의 흥에 취할 잠깐의 시간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런 그를 주변에선 독종이라 불렀다.

독종이면 어때.

생존을 위해 전쟁처럼 치러야 했던 사정을 누구가에게 털어놓으며 위로받는 건 그에게 익숙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생도 만만치 않네.

형제는 고사하고 사촌도 없다니.

“형제 관계가 어떻게 돼?

“외동입니다.”

“외동이라…… 이해한다.”

“절 이해한다고요?”

“형, 누나도 없고 동생도 없고. 대학도 외국에서 다녔고 군대는 면제고. 대한민국 선후배 서열을 어떻게 알겠어.”

“장유유서는 압니다.”

“장유유서를 아는 사람이 그래?”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문제? 있지. 강병구 대리가 먼저 시비를 걸었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사회생활 하려면 어머니들 시집살이하는 거랑 똑같아. 시집살이는 들어봤지?”

“네.”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장님 3년. 부모님 모두 한국분이지?”

“네.”

“시집살이에 비교하는 건 오버지만, 좀 웃어.”

“제가 왜…….”

“왜라니, 다 도움이 되니까 그렇지. 안 되면 꾸준히 연습해. 거울 보면서 ‘김치’ 하고 입꼬리 올리면서. 뭐, 신문 보니까 후천적으로 웃는 게 어색한 사람도 있다고 하더라. 그래도 하면 된다고 했어. 짐케리 봐. 가정이 불우해도 저렇게 잘 웃으니까 결국 유명해지잖아.”

와! 진짜 저놈의 잔소리.

“노력해 보겠습니다.”

“웃으면 복이 와요. 이 말도 알지? 소문만복래. 설마 외국에서 살았다고 이 정도 한자도 모르는 건 아니지?”

“팀장님, 저 고등학교까지는 한국에 있었습니다.”

강호석은 잠깐 멈칫하더니 목이 마른 지 입맛을 쩝쩝 다시며 재준의 잔에 술을 따랐다.

“미안. 내가 너무 멀리 갔다.”

“가시더라도 다시 제자리에 돌아오시면 됩니다.”

“어라, 농담을 다 하네.”

내가 2022년대 유행하는 유행어도 알아, 이 사람아.

재준은 강호석이 따라 준 술을 마신 후 강호석의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팀장님,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뭔데?”

“모두가 가치투자를 하고 있는데 왜 혼자 스캘핑을 하시는 겁니까?”

“가치투자?”

“네. 가치투자.”

“누가 내가 가치투자를 하지 않는다고 해? 난 지극히 가치투자를 하는 사람인데.”

“스캘핑은 가치투자와 잘 매치가 안 되는데요.”

“그런가? 난 아닌데. 난 종목을 선정할 때 지극히 보수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사람이야.”

“그럼, 가치 분석과 기술적 분석 어디에 중점을 두십니까?”

“일단 우리나라에서 가치 분석은 의미가 없는 건 알고 있지?”

“네.”

우리나라는 2011년부터 국제회계기준에 맞춰 재무제표를 작성했다.

그전에 작성된 재무제표는 엉망진창 시궁창에 가까웠다.

어떤 기업이 자신들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내고 싶을까.

엉터리 재무제표와 분식회계로 이루어진 가짜 장부들이 버젓이 세무서에 제출되었고 그걸 기준으로 가치 분석을 떠들어 대니 분석의 의미가 퇴색될 수밖에.

“그럼 기술적 분석은 의미가 있을까?”

“그건 더욱 힘들지요. 과거의 발자취일 뿐 미래를 결정해 주지 않으니까요.”

“잘 아네.”

주식을 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다 아는 기술적 기법들이 있다.

이동평균선, 밴드 오버레이, 이격도, 엘리어트 파동이론, 갠 이론, RSI, 스토캐스틱, MACD 등등 수도 없이 많다.

뭐, 지금도 최신 기술이라며 쏟아지고 있다.

왜 이렇게 새로운 기법들이 계속 나오는 것일까.

그건, 기술적 분석이 주가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의 기록은 참고는 될 수 있어도 미래를 결정하지 못한다.

암튼,

해 보면 안다.

하나도 맞지 않는다.

“그럼, 선배님이 생각하는 가치는 무엇인데요?”

“없어. 그래서 주식들을 다 두드려보는 거야.”

“스캘핑으로요?”

“그래.”

이런 무식한 인간 같으니라고.

무식하지만 맞는 말이다.

시장을 어떤 기준으로 파악하려는 게 바보 같은 짓이다.

차라리 강호석처럼 무모하고 무식하게 들이받는 게 정석에 가깝다.

결국,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으려면 엉덩이가 무거워야 하고 직장에서 많은 월급을 받으려면 남들보다 더 두꺼운 보고서를 작성해야 한다.

무식하게 곰같이 잔머리 굴리지 않고 우직한 게 최고다.

그래도,

우직하게, 죽어라 연구해도 시장이란 놈을 이해하기 힘들다.

올라간다고 바락바락 소리쳐 놓고 달려들면 추락하고, 추락한다고 손수건까지 흔들며 작별을 고하는 순간 손수건에서 초강력 토네이도가 생기면서 고공으로 날아가 버리기도 한다.

“어떨 때는 피곤하다고 느끼곤 해. 돈만 많으면 아무 주식에다 팍 박아 놓고 기다리면 쭉쭉 올라갈 텐데. 어차피 경제는 성장하면 주식도 같이 오르는 거 아냐?”

“글쎄요.”

아직 이 시대는 순진한 구석이 있네.

경제 성장과 주식이 같다면 코스피는 벌써 1만을 찍었을 것이다.

성장한다고 모두 주가가 올라가는 게 아니다.

경제가 성장하면 기업 간의 싸움은 더욱 격렬해진다.

그 전투에서 승자만이 상승을 그리는 주식을 소유하게 된다.

패자는 경제 성장과 상관없이 관속에 들어가 땅속에 묻히고 만다.

우리는 그 승자의 주식을 찾아야 하는데 찾을 수가 없다.

이게 주식이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쉬운 길을 가려고 하는 것이지.

작전 같은 거로.

“뭐가 ‘글쎄요’야? 내 말이 틀려?”

이 양반 취하니까 시비 터네.

“경제 성장과 주가가 비례한다면 증권사가 작전할 일이 없잖아요? 가만있어도 돈이 굴러 들어오는데. 그거 다 구라 아닙니까?”

“증권사가 작전을 한다…… 그러네. 나쁜 놈들.”

“증권사 돈 많잖아요. 근데 왜 작전까지 하면서 돈을 법니까? 아무 주식이나 대량으로 사서 푹 썩히면 될 일을.”

나도 취한 건가?

“그렇긴 하네. 증권사가 왜 작전을 하고 지랄이지? 왜 그러는 건지. 암튼 너도 알지? 미스터 마켓이라고.”

“네, 밴자민 그레이엄이 시장을 지칭할 때 쓰는 말이잖아요.”

“그래. 미스터 마켓, 그놈에 맞서 싸우기가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싸울 때까지는 해봐야 하는 거 아닐까 싶다.”

시장은 거대한 살아있는 생명체다.

그래서 미스터 마켓이라 부른다.

아니, 생명체가 아니라 신이라 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생각을 모두 알고 있어서 모두가 아니라고 할 때 주책없이 오르며,

오른다는 믿음으로 달려들 때는 여지없이 곤두박질치는,

우리를 가지고 노는 신.

강호석은 술잔을 단숨에 털어 넣고 한숨을 쉬었다.

“맞아. 다 핑계야. 그놈과 싸우기 싫으니까. 이것저것 핑계를 대고 도망가는 거지. 가치 분석이든 기술적 분석이든 다 마찬가지야. 핑계에 불과해. 그중에 제일 꼴사나운 건 작전이야. 격전을 치르기 겁이 나니까 제일 쉬운 방법을 택하는 거지. VIP놈들도 다 똑같은 놈들이고. 난 절대 그놈들에게 굽신거리지 않을 거야. 절대. 너도 VIP 절대 받지 말고, 작전 근처에도 가지 말고. 나처럼 독야청청하게 살아라.”

강호석은 술잔을 높이 들더니 다시 털어 넣었다.

이 양반 술 취하니까 잔소리가 더 심하네.

“선배, 혹시 작전을 보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작전을 보면? 내 눈앞에서?”

“네.”

“그런 놈은 당장…….”

큭큭큭.

강호석이 실없이 웃었다.

“내가 뭘 할 수가 있겠어. 돈 들고 덤비는 놈들을. 그저 시장이 심판해 주기를 기도할 수밖에.”

돈 있으면 심판을 할 수 있고?

“건배하시죠. 클린한 현재증권을 위해.”

“클린한 현재증권? 좋은데. 아주 좋아.”

건배.

건배.

재준은 강호석을 보며 술잔을 기울였다.

내가 한번 기회를 줄 테니, 얼마나 날뛰는지 보여 줘 봐요.

이렇게 재준과 강호석은 뜻깊은 만남을 술로 채웠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약 1개월 동안 강호석은 재준에게 주식에 대한 잔소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늘어놓았다.

***

9월 1일 아침.

채광이 거의 들지 않는 자리에서 노경범은 아주 담담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노경범은 작전의 대표적인 전략인 시가 동시호가 주문과 종가 동시호가 주문을 이용하였다.

시가 동시호가 주문은 주식시장이 개장하는 9시의 30분 전인 8시 30분에 매수 주문을 넣고, 종가 동시호가 주문은 폐장 후 주문을 넣는다.

주식시장이 개장하면 실시간으로 매수와 매도를 볼 수 있지만, 동시호가는 다수의 매수세가 일괄 처리되어 누가 얼마나 매수하는지 알 수가 없다.

노경범도 시가 동시호가 주문으로 장이 시작하기 전에 주가를 올리고, 종가 동시호가에서 상한가로 처리하는 방식으로 주가를 올렸다.

이러면 적은 돈으로 주가를 올릴 수 있는 데다 시세조종의 의심을 피해갈 수 있었다.

지금까지는 완벽했다.

꼬리 잡힐 만한 어떠한 단서도 흘리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오늘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근 한 달, 아주 피곤한 날들이었다.

재경기계 최재철 부사장이 날짜를 9월 1일로 못 박고 황선달의 닦달에 시달렸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다.

오전 중에 재경기계 오폐수 처리 장비 개발 성공이라는 가짜 리포트가 호재로 뿌려질 것이고, 왜 재경기계 주가가 열 배로 올랐는지 이유를 몰랐던 개미들은 뒤늦게 매수에 달려들 것이다.

그때, 개미들에게 물량을 던지고 나오면 작전 끝.

심플하다.

노경범은 마지막으로 오늘의 결전을 점검하며 희열을 느꼈다.

자신의 신경을 온통 긁어 대는 황선달 노친네의 전화를 받기 전까진.

-어때. 자신 있지, 노 팀장?

“지금까지 잘 준비해 왔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결과만 보여준다면야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네.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좋지 않으면, 뭐, 자신이 더 잘 알겠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 자네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는 걸 명심해.

“네. 그리고…….”

툭,

일방적으로 전화가 끊긴다.

쇠를 긁는 듯한 황선달의 목소리.

저승에서나 겪을 법한 그 소리만 들으면 노경범은 어금니 쪽에서 짜릿한 무언가가 진동해 온몸을 떨었다.

6개월.

1만 원인 주가를 12만 원 근처까지 끌어올린 노경범에겐 줄타기를 하는 줄광대처럼 아슬아슬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돈 귀신이 붙은 황선달의 눈에 노경범은 그저 소작농일뿐.

농사를 망친다면 지주는 농지를 빌려 농사짓는 소작농의 처지를 봐줄 리 없었다.

‘오늘만 버티면 된다.’

오전 9시.

드디어 장이 시작되었다.

오늘은 동시호가 주문 따위는 필요 없었다.

어제 올려놓은 주가의 각도에 따라 시작과 함께 주가는 폭등할 것이다.

이제 던지는 일만 남았는데…….

“어떤 개새끼야!”

***

8시 30분.

재준은 임병달 증권 계좌에 들어있는 1000억을 바라봤다.

할아버지에게 팔아버린 자신의 자산을 정 실장이 현재증권 할아버지 계좌에 넣어 놓았다.

1000억.

이걸 만 원짜리로 쌓아 놓으면 10층짜리 건물에 해당하는 약 22m에 달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숫자에 불과하다.

이제 마우스 버튼만 몇 번 클릭하면 10층짜리 건물이 눈앞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역시 금융은 재밌는 놀이라니까.

자, 이걸 그의 손에 쥐여주면 어떤 마법이 일어날까.

저기 온다.

강호석이 헐레벌떡 사무실에 들어섰다.

“재준, 나 늦었지.”

“아니요. 아직 30분 남았어요. 준비는 제가 다 해 놓았고. 여기 앉아서 시작하시면 됩니다.”

“너도 이제 꽤 능숙해졌다.”

“다, 선배님 덕이지요.”

“미국 시장이 뭔가 일이 터질 것 같아. 빵빵한 풍선 같단 말이야.”

당연히. 지금 미국 말고는 돈이 모일 데가 없으니까.

아마 터지기 직전이겠지.

“돈 쓸 나라를 찾으려고 할 겁니다.”

“그래, 돈이 넘치면 어디론가 흘러가는 게 맞는데, 미국이란 나라가 영 맘에 걸려.”

강호석이 기지개를 쭉 켜고 의자에 앉자, 재준이 강호석의 어깨를 주무르며 싱긋 웃었다.

“어디 한번, 오늘도 해 볼까?”

강호석은 의자에 앉아 모니터를 바라보는데 어쩐지 배치가 익숙하지 않았다.

“재준, 이게…… 뭔가…….”

임병달의 계좌에 1000억이 들어있는 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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