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작전은 작전으로 받아쳐야지(3)
실장실.
“커피.”
재준이 실장실의 소파에 앉아 서형길에게 커피를 주문했다.
“아, 네. 도련님…… 커, 커피가 어디…… 아, 저기.”
서형길 실장이 커피포트의 스위치를 올리고 믹스커피를 꺼내서 종이컵에 따랐다.
믹스커피?
“실장님. 그거 저 주시려는 거 아니죠?”
“네? 커피 드신다고 하셨…….”
“정말? 벌써 내 스타일도 까먹은 겁니까?”
“아, 아닙니다. 아, 맞다. 아메리카노, 아메리카노…….”
재준은 자신이 아메리카노를 먹는 줄은 몰랐다.
다만 재벌 손자가 믹스커피를 먹지는 않을 거라 생각해서 한 말이었는데.
서형길 실장은 사물함을 열어 원두 그라인더를 찾았는데 먼지가 뽀얗게 쌓여있었다.
재준의 눈치를 보며 소매로 먼지를 쓱 닦았다.
그리고 원두 봉지를 들고 유통기간을 확인했다.
다행히 한참 남았다.
강호석이 선물로 준 거 잘 놔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믹스커피 먹으면 몸에 해롭다고 비싸게 준 거라 했다.
고맙다. 호석아.
까드득, 까드득.
서형길 실장이 원두를 갈아대기 시작했다.
서형길 실장은 덩치가 꽤 큰 편이라 지금의 모습을 보니 마치 킹콩이 자신의 친구를 위해 뜨개질을 하는 것 같달까.
재준은 그 모습을 보면서 웃음을 참느라 목이 다 멜 지경이었다.
재준은 주변을 둘러봤다.
“실장님. 제가 이 사무실에 온 적이 있나요?”
“아니요, 회사에 오신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한 번도?”
“네. 절대 오시지 않았습니다.”
“실장님 없을 때 제가 올 수도 있었잖아요.”
“그 없을 때가 없었습니다.”
재가 도련님의 그림자였거든요.
호주로 유학 간다고 해서 한시름 놨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군요. 음.”
서형길은 다시 원두를 갈기 시작하며 재준을 힐끔거렸다.
기억 상실에 걸렸다더니 진짜인가?
자신이 회사에 온 지도 안 왔는지도 모르게.
“실장님. 현재증권이 증권업계에서 순위가 어느 정도입니까?”
이건 또 무슨 자다가 남의 다리 긁는 소리일까?
매일 술 처먹고 남의 자식들 쥐어패면서 하던 말도 기억 못 하나?
-내가, 퍽, 너 따위가, 퍽, 친구 먹자면, 퍽, 친구 해줘야 하는 거야, 퍽, 퍽, 퍽. 이래 봬도, 현재증권이, 퍽, 퍽, 업계 1위인데. 퍽, 퍽, 퍽.
“증권회사로 따지면 두 번째도 서럽습니다. 하지만 계열사를 합치면 10위 정도로 밀려납니다.”
“아, 그렇군요.”
“또 궁금하신 거라도…….”
재준은 기획실을 들어오면서 총 여섯 개의 팻말에 여섯 개의 팀이 있는 걸 봤다.
모두 펀드 매니저와 애널리스트들을 보조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근데 유독 서형길 실장은 이들과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실장님. 그럼, 실장님 하는 일이 뭡니까?”
서형길이 간 원두를 거름종이에 부으며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재준을 쳐다봤다.
그걸 왜 물어봐.
당연히 네 뒤치다꺼리지.
“기획실에서 하는 일은 경영지원입니다. 그것도 기억이 안…….”
‘기억이 안 나십니까’를 끝까지 마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재준이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게 ‘더 지껄이면 아주 갈아 마실 거야. 어디 감히 내 치부를.’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꿀꺽,
마른 침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경영지원이 정확히 뭡니까?”
“그건…….”
왜 자꾸 뻔한 걸 물어보시는 걸까? 다 알면서.
다 네가 사고 친 거 소문나지 않게 마무리하는 게 경영상 도움이 되니까 경영지원이라고 하는 거잖아.
이걸 말할 수도 없고, 난감하네.
“크게 두 가지로, 내부적으론 직원들 지원이고 외부적으론 언론과 동종업종 사람들을 만나서 회사의 이미지를 관리하는 겁니다.”
“그래요?”
“네.”
“그럼, 언론 쪽과 다른 증권회사 사람들 많이 알고 있겠네요?”
당연한 걸 왜 물어볼까?
알고 지내는 차원을 넘어 형·동생 먹은 지가 언젠데.
내가 그놈들 입 틀어막으려고 마신 술만 해도 한강을 채우고도 남았을 거다.
“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 종이랑 펜 좀 주세요.”
“아, 네.”
재준은 태풍인쇄소에서 봤던 증권사 이름들을 떠올리며 종이에 적었다.
“됐다. 여기 일곱 군데 기획실 실장님들도 아십니까?”
서형길 실장은 종이에 적힌 증권회사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잘 압니다.”
“친해요?”
“네, 아주 친합니다.”
안 친할 수가 없지. 이놈들도 다 재벌 아들에 손자 뒤치다꺼리하는 놈들인데.
한 달에 한 번 기획실 실장 모임까지 있다고. 모임까지.
얼마나 속에서 열불이 났으면 쌍욕으로 밤새 술을 먹었을까.
“그럼, 한 가지 부탁 좀 할게요.”
재준은 작전에 동원된 증권사 펀드 매니저를 찾기 위해 정 실장에게 부탁하려 했다.
하지만 서형길을 보자 오히려 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여기.”
재준은 카드 한 장을 서형길에게 내밀었다.
“이걸 왜 저에게…….”
“실장님, 명품으로 양복 한 벌 사 입으시고요. 한 천만 원짜리로 사 입으세요. 그리고 그 옷 입고 그 사람들 만나서 접대 한번 해주세요. 비싼 곳에서. 맘껏. 그 카드 한도 없으니까. 원 없이 긁어 보세요.”
“아니, 왜…….”
“증권사 기획실장들에게 재경기계는 제 장난감이니까. 알아서 처신하라고. 그렇게 말하면 됩니다.”
“재경기계요? 그건 지금 노경범이…….”
쉿!
재준은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지금 재밌게 구경하는 중이니까. 가만히 제가 시킨 일만 해주세요.”
아, 알아서 기라는 말이구나.
방해하면…… 상상하기도 싫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경제신문에 아주 짧은 기사 하나 부탁합니다.”
“뭐, 그것도 어렵진 않습니다.”
“고맙습니다.”
서형길 실장은 순간 비릿하게 웃는 재준을 보았다.
오싹했는데 금세 재준의 얼굴엔 함박 미소가 걸렸다.
“그리고 강호석 선배한테 전화 좀 넣어주세요.”
“뭐라고?”
“절 좀 가르치라고.”
“그럼…….”
“네. 제 사수로 임명해 주시면 됩니다.”
“강호석을요? 그놈 옆에서 죽어 나간 서포터가 한 트럭이에요. 그러지 마시고 제가 더 똘똘한 펀드 매니저를 알아봐 드리겠습니다.”
“아니요. 강호석 선배가 딱입니다. 그 선배 스캘핑이 필요하거든요. 아시죠. 이렇게 휙휙. 엄청 손이 빠르다고 하던데.”
“아, 스캘핑은 강호석이죠. 그건 뭐 이 업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죠. 근데 그 스캘핑 때문에 서포터가 도망간 건데요?”
“알아요. 강 선배 흉내 내다 집 말아먹은 놈들 있다는 거. 근데 제가 집을 말아먹으려면 좀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지 않아요?”
“아, 그러네요. 이해됐습니다.”
재준은 인사기록에서 강호석의 스캘핑 능력을 봤다.
그의 능력으로 재경기계가 9월 1일 물량을 던지는 순간 매집하는 데 제격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도련님. 뭣 때문에 강호석에게 배우시려는지 모르지만, 그놈이 아주 작전을 싫어합니다. 심지어 VIP들이 원하는 매매도 다 작전이라고 학을 떼는 놈입니다. 그놈 앞에서 절대 작전의 ‘지읒’도 얘기하시면 안 됩니다.”
“아, 그래요?”
그럼, 작전하는 놈들 때려잡자고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
휴.
강호석은 자리로 돌아와 앉아 가족사진을 물끄러미 보았다.
캠퍼스 커플인 아내와 딸 셋을 둔 강호석은 사진을 보며 미소 지었다.
“언젠가 내 실력을 인정받을 날이 오겠지.”
강호석이 사진에서 모니터로 시선을 옮겨 집중하려는데.
따르릉.
전화를 받자,
-임재준 신입 사원 다시 받아. 강병구 같은 놈이…… 암튼 그리 보냈어.
서형길의 고함이 짱짱하게 사무실에 퍼졌고, 그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탁 끊어버렸다.
에휴.
“또 한 명 원수가 생기겠네.”
에휴.
강호석이 바닥이 꺼질세라 한숨을 내뱉었다.
임재준이란 신입을 본 순간 왜 탐이 나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서포터 욕심을 버린 지 이미 오래되었다.
매년 신입이 들어오면 자신에게도 신입을 서포터라고 붙여줬다.
정말 편하게 잘해 줬는데.
맞다. 강호석은 신입에게 잘 대해 주었다.
잡일도 시키지도 않았다.
증권에 대해 알기 쉽게 가르쳐 주었다.
매매는 자신감이 붙을 때까지 절대 하지 말라고 경고도 했다.
하지만 강호석이 스캘핑으로 주식을 하는 걸 본 신입들은 석 달이 지나면 회사에 나오지 않았다.
스켈핑은 주식 매수·매도를 하루에 수도 없이 반복하여 작은 수익을 쌓아서 큰 수익을 창출하는 기법이다.
예로, A라는 주식을 1000원에 매입하고 1010원에 팔아서 10원을 벌면, 바로 B라는 주식을 2000원에 사서 2010원에 팔고, 또 바로 C를 사고팔고 또 바로 D를…… 이렇게 끊임없이 매수·매도를 치는 것이다.
이게 옆에서 보면 하루 종일 마우스 클릭질만 하는 것 같은데 하루 마감하면 몇십에서 몇백만 원을 벌었다.
보통 주식이 10%가 오르려면 꽤 오래 기다려야 한다.
1000원에 사서 1100원까지 오르는 걸 지켜보고 있으면 숨이 턱턱 넘어갈 정도로.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조금씩 올라가는 주식.
또한, 언제 폭락해 버릴지도 모르는 주식.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암에 걸릴 것 같다.
근데 1000원에서 1010원은 하루에도 수도 없이 왔다 갔다 한다.
순식간에 10원의 이익을 잡아먹는 놀라운 능력 스캘핑.
30분도 안 돼서 10% 수익률을 올려버린다.
이를 보고 있으면 눈이 뒤집어진다.
당장 집에 가서 돈을 마련해 보자.
일이 이렇게 된 것이다.
회사에 나오지 않는 신입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첫째는 자신감이 팽배해 객장에서 스캘핑으로 주식을 하다 돈을 탕진한 놈들.
트레이딩 시스템으로 해도 어려운데 객장에서 스캘핑을 하다니 자신감이 너무 과했다.
증권회사 안에서 펀드 매니저가 다루는 트레이딩 시스템이 없으면 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걸 굳이 객장에서 했다.
돈을 잃고 망연자실한 본인을 부모, 일가친척, 친구, 심지어 동네 슈퍼 아줌마들도 증권회사에 못 가게 막았다.
역시 주식은 도박이라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두 번째는 극히 소수지만 객장에서 운 좋게 스캘핑으로 돈을 번 놈들.
이 부류의 신입들은 하루 한 시간 정도 객장에서 돈을 벌고 유유히 사라지는 이성적인 인간이었다.
이들에게 주식은 여유와 삶의 질을 높여주는 도구였다.
이러니 강호석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서포터들이 남아나질 않았다.
그렇다고 강호석보고 스캘핑을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었다.
강호석이 하루 장을 마감하고 내일을 위해 뉴스를 검색하려는데,
“팀장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호석은 뒤를 돌아보았다.
재준이 태평스럽게 서 있었다.
싱글거리며 서 있는 재준의 모습에 강호석은 피식 웃었고,
“신입 싸가지님. 돼지껍데기 먹을 줄 알아요?”
***
마포의 돼지껍데기 집.
재준이 강호석을 사수로 찍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강호석은 재준을 위로해 주고 싶었다.
노경범에 치이고 강병구에게 시달렸을 신입을 생각하자 맘이 짠했다.
퇴근 후 호석이 자주 오는 돼지껍데기 집에서 소주라도 한잔 사주고 싶었다.
재준은 돼지껍데기를 신기하게 쳐다봤다.
돼지껍데기.
예전에는 먹어보지 못한 음식이었다.
이야기로만 들었던 증권맨이라면 반드시 퇴근길에 거쳐야 할 장소, 마포의 돼지껍데기 집.
재준은 1990년대 증권맨의 애환을 담은 소설에서 언급했던 이곳에 꼭 한번 와 보고 싶었다.
‘강호석 선배 단골집일 줄은 몰랐네.’
하지만 재준은 궁금한 맛과는 달리 톡톡 튀는 껍데기에 깜짝 놀라 움찔했다.
“집게 이리 줘요. 그렇게 구우면 튀어요.“
재준은 호석에게 집게를 줬고 호석은 능숙하게 굽기 시작했다.
“안쪽을 먼저 구워야 말리지 않거든. 한꺼번에 많이 올리면 탁구공처럼 튀어 올라요.”
“신기하네요.”
강호석은 껍데기를 앞뒤로 뒤집어 가며 집게로 꾹꾹 눌러 알맞게 익혔다.
잘 익은 껍데기를 재준의 접시 위에 놓아주었다.
“소스에 찍어 먹어 봐요.“
재준은 소스에 찍어 입안에 넣었다.
음……. 쫄깃하고 맛있는데.
재준은 자신을 챙기는 강호석을 보며 선후배라는 의미가 이 정도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과하지 않은 음식을 맛있게 요리해주는 사람과 맛있게 먹어주는 사람. 그 정도.
“쫄깃한 게 기가 막히죠?”
강호석은 껍데기를 정말 맛깔나게 먹었다.
그리고,
“뭐해요? 한잔 따라 봐요.”
“네.”
둘은 잔을 부딪치고 단번에 소주를 들이켰다.
카아.
“임재준 씨, 내가 사수니까 지금부터 말 놓을게. 괜찮지?”
“네.”
나중에 뒷감당을 어찌 하려고 이러시나.
하여튼 지금이야 선배 대접은 해줘야지.
“임재준.”
“네”
“본인 되게 무뚝뚝해. 이런 말, 주변에서 많이 듣지?”
“…글쎄요.”
주위에 사람이 있어야 말을 듣지.
지금까지 공부 외에는 해본 게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