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증권 재벌의 천재 손자가 되었다-15화 (15/477)

제15화 작전은 작전으로 받아쳐야지(2)

서형길이 강병구에게 적대감을 드러내기 한 시간 전.

“강호석 당장 올라오라고 해.”

거칠게 수화기를 내려놓은 서형길 기획실장의 머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서형길 실장의 급한 부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문을 열고 들어오는 강호석.

“실장님, 부르셨습니까?”

그 태도에 화가 치밀어 오른 서형길 실장은 대뜸, 소리부터 질렀다.

“야, 넌 내 말이 말 같지 않냐?”

서형길 실장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도 강호석은 능청스럽게 소파에 앉으며 대답했다.

“장 시작되고 한창 바쁜 시간 아닙니까.”

그 말에 서형길 실장이 시계를 흘끔 쳐다보았다.

“얌마, 그래도 그렇지 내가 더 바빴으니까 불렀을 것 아냐.”

“뭔데요?”

서형길은 A4 용지를 내밀며 강호석 앞에 앉았다.

“이거 뭐야?”

“아아. 그거 제가 답변 보낸 겁니다. ”

“야.”

서형길은 프린트물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면서 말을 이었다.

“너 이 사람이 누군지는 알고 이러는 거냐?”

“그럼요. 실장님이 작업 중인 VIP죠.”

“너 진짜 이럴래?”

“…음. 제 소견 듣고 싶다길래 투자 종목 분석해 줬는데…. 무슨 문제 있습니까?”

“이 자식은 말귀를 못 알아먹는 거야. 아니면 못 알아듣는 척하는 거야?”

“저 바빠요. 별일 아닌 것 같으니까 이만 내려가 보겠습니다.”

강호석이 일어서자 서형길이 그의 팔을 잡아 다시 소파에 앉힌다.

“그만 튕기고 이제 VIP 좀 받아. 애가 셋이면 고개 숙일 때도 됐잖아.”

“싫습니다.”

일어서려는 호석을 계속 끌어 앉히는 서형길.

“VIP가 손수 종목 골라 주면 수수료만 냉큼 받아먹으면 되잖아. 골치 아픈 영업 안 해도 되고. 그런데 왜 자꾸 안 받겠다는 거야? 너 찍은 고객이 어디 한둘이야?”

“전 노예가 아니라 펀드 매니저입니다.”

답답하다는 표정만 짓고 있는 서형길 기획실장.

강호석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덧붙였다.

“VIP가 고른 종목으로 편하게 앉아서 수수료만 먹으면 무슨 재미에 펀드 매니저를 합니까?”

“야 강호석. 좀 편히 가라. 네 나이도 생각해야지.”

“전 제가 분석한 종목에 투자하며 밥값 할 겁니다. VIP는 싫어요.”

강호석이 단호한 어조로 말을 내뱉고 문 앞으로 가자 서형길이 강호석 등 뒤에 대고 언성을 높였다.

“찍어 주면 사고, 팔라고 하면 팔고.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야?”

서형길의 말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고리를 잡은 채 말을 하는 강호석.

“그건 작전입니다.”

“찍어 주는 종목이 죄다 작전이야? 증권사 수익의 70% 이상이 수수료라는 거 잘 알잖아?”

강호석이 뒤를 돌아 서형길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그 눈빛에 움찔하는 서형길.

“호재 없이 주가를 띄우는 것만 작전은 아닙니다. 내부 정보를 이용해서 주식을 미리 사고 공시 뜨기 전에 파는 것도 엄연한 작전입니다. 불법은 아니어도 비겁한 겁니다. 전 그 꼴 못 봅니다.”

말을 마치고 나가는 강호석을 바라보며 서형길은 입술을 깨물었다.

자기 쪽 라인으로 끌어들이려 하면 매번 똑같이 반복되는 강호석의 거절.

‘저 녀석만큼 머리와 손이 같이 움직이는 놈도 없는데……. 말이 안 통해.’

펀드 매니저도 다 같은 펀드 매니저가 아니다.

수익률이 높은 펀드 매니저는 VIP 고객이 많았다.

물론 VIP는 정보를 가지고 있는 정치나 경제계의 거물들이 대부분이었다.

VIP가 원하는 주식을 원하는 가격에 매수해 주면 끝.

책임질 일도 없고 힘들이지 않고도 많은 수수료를 챙길 수 있었다.

정확한 가격에 매수하고 정확한 가격에 매도하는 매니저는 많지만, 언제나 물량이 문제였다.

VIP들은 더 많은 물량을 매집하길 원했는데 그건 쉽지 않았다.

매도 물량이 ‘나 여기 있소’ 하고 대기하고 있는 건 아니니까.

VIP가 원하는 물량을 매수하려면 정확한 예측과 빠른 판단, 그것에 더해 빠른 손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강호석처럼.

강호석은 VIP들의 수익을 늘리기 위해선 꼭 필요했다.

강호석 정도면 지금의 VIP 수익을 세 배는 더 챙길 수 있고 펀드 매니저로 업계 최고의 인센티브도 챙길 수 있을 텐데 황소고집도 이런 황소고집이 따로 없었다.

아니다 바윗돌이다.

산모퉁이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바윗덩어리.

단단히 박혀있어 뽑지도 못하고 산을 오르는 사람들을 돌아가게 만드는 그 바윗돌 말이다.

평소엔 능글맞게 잘 대하면서 VIP 얘기만 나오면 쌍심지를 켜고 정색을 하니, 서형길은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얼굴을 찌푸리던 서형길이 아차차 하며 탄식했다.

“신입 싸가지 다시 받으라고 말하는 걸 깜박했네.”

야, 강호석.

빽 소리를 지르고 강호석을 쫓아가기 위해 문을 나섰다.

이놈 어디로 갔지?

강호석의 자리를 향해 가는 도중, 탕비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라, 이 목소리는?

재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벽에 몸을 기대고 탕비실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재준과 동기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꽃피우고 있는데,

하하하하.

재준의 웃음소리를 듣자, 오싹한 식은땀이 반사적으로 등골을 타고 흘렀다.

이건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였다.

몸이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1년 전인가, 회장님의 손자, 임재준이 SC 그룹 사장 아들을 깔고 앉아서 개 패듯이 팬 적이 있었다.

외관으로 보기엔 명백히 임재준의 잘못이었다.

하지만 맞은 놈이 임재준을 보면서 자신이 잘못했으니 괜찮다고 벌벌 떨었었다.

그때 임재준의 눈은 마치 지옥의 악귀를 연상시켰다.

일이 잘 마무리되고 SC 그룹 사장 아들놈이 떠나자 임재준은 하늘을 향해 포효하듯 웃었다.

하하하하.

그때 그 웃음소리를 들으며 SC 그룹 사장 아들이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같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때는 저주에 차 있던 웃음이라면 지금은 먹잇감을 앞에 둔 호랑이라고나 할까?

임재준, 회장님의 손자가 확실해.

‘회장님 손자다’에 내 손모가지를 건다.

귀를 쫑긋 세워 말소리를 더 들어보았다.

-우리 스터디 합시다.

스터디? 공부하자는 소리인데.

근데,

어째 ‘너희들 이제 다 죽었어’라고 들린다.

이건 나만의 착각인가?

이놈들아, 싫다고 해. 싫다고.

네들 앞에 있는 도련님은 범이라고 범. 호랑이. 타이거. 그것도 지옥에서만 볼 수 있는 악귀 범 새끼.

-그럼, 나중에 약속을 잡고 같이 모입시다.

하하하하.

섬뜩한 몸서리가 다시 온몸을 휘몰고 지나갔다.

확실하다.

두 번이나 몸이 반응했다.

모두 탕비실에서 나오는 듯하자 서형길 실장은 뒤에 있는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

아니, 근데 왜 숨지.

난 실장이고 저놈들은 이제 이틀 된 신입인데.

당당히 나가자.

하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아교라도 발라놓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신입들은 각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고 재준도 멀어졌다.

한 손에 강병구의 커피를 들고.

‘뭐야, 어떤 놈이 도련님에게 커피 심부름을 시킨 거야? 어떤 놈인지 당장 쫓아가서 아작을 내야겠어.’

조심조심 들키지 않게 서형길은 재준을 따라갔다.

재준이 애널리스트 방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어라, 왜 저리로 들어가실까?

난 분명 노경범에게 도련님을 맡겼는데.

아, 경범아. 경범아. 너 무슨 짓을 했길래 도련님이 이리로 오신 거야.

일단 넌 오늘 나한테 죽었어.

서형길이 애널리스트 방으로 따라 들어가는 순간, 안에서 큰소리가 들렸다.

칸막이 위로 눈을 살짝 드러내서 어떤 상황인지 파악했다.

강병구, 저놈이 도련님에게 커피 심부름을 시킨 거네.

그리고 강병구의 공세를 재준이 거뜬히 물리치자, 서형길의 머릿속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도련님이…… 저렇게 똑똑했다고?

그러면 그동안 자신의 힘을 숨기신 거라고?

왜 그런가 싶었지만, 금방 원인을 알아차렸다.

그래, 이게 다 내가 물심양면으로 뒤를 봐 드린 덕이야.

자그마치 10년이었다.

임재준의 깽판을 수습한 게 자그마치 10년.

임석훈 사장이 죽고 스스로를 버린 듯이 개판으로 살아온 도련님의 그 10년.

하지만 그렇게 자신을 학대만 하지 않으셨어.

남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선 자신의 능력을 갈고닦으신 거라니.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소리 내어 울고 싶지만, 자신은 그래도 기획실 실장인데 쪽팔리게 우는 모습을 직원들에게 보일 수는 없었다.

유리 벽에 쪼그리고 앉아서 안에서 들리는 소리만으로 상황을 짐작하고 있는데,

-이 새끼야…….

나머지 말은 들리지 않았다.

강병구 저 미친놈이 감히 도련님에게 ‘새끼’라는 욕을 했다.

새끼? 분명 새끼라고 했지.

이 씨X랄 놈이.

서형길은 득달같이 강병구를 향해 나아갔다.

“강병구 대리. 네가 감히 어디서 못돼먹은 짓거리를…….”

갑작스러운 서형길 실장의 등장에 강병구가 놀라서 뒷걸음질을 쳤다.

“네놈 따위가 감히.”

흠, 흠.

재준이 헛기침을 했다.

그제야 서형길 실장은 회장님의 손자 양성 프로젝트가 떠올랐다.

그래, 회장님의 높으신 뜻을 여기서 망칠 수는 없지.

“강병구 네놈이 감히…… 내 명령을 개소리로 치부해?”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실장님.”

“네가 지금 내 말을 한쪽으로 흘려들은 거냐고?”

“전 실장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는데요.”

“내가 여기 도…… 신입 사원 임재준 씨를 분명 노경범에게 보냈는데. 왜 네가 커피 심부름을 시키고 있는 거냐? 내가 수석 신입 사원에게 노경범의 비술을 익히라고 보냈는데. 왜 네가 가로챘냐고 묻잖아.”

“네?”

“너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출중한 능력을 지닌 임재준 님, 아니 씨가 왜 여기 있냐고?”

“그건 저도 그냥 강호석 선배가 저에게 데려와서…… 그리고 노경범 선배도 전화를 했고…… 그래서 제가 잠시, 아주 잠시만 데리고 있으려고…….”

“시끄러? 그리고 너 방금 회사 안에서 ‘새끼’라는 욕을 하던데. 맞지? 너 욕했지. 너의 직위를 이용해서 같은 회사를 다니는 동료에게 ‘새끼’라고 욕했지. 아니라고 말하지 마라. 내가 두 번에 걸쳐서 다 들었으니까.”

“저, 실장님. 저희끼리는 그게 욕이라기보단. 친근함의 상징이랄까…….”

“그래? 그럼 나도 너와 친근하게 지내고 싶은데. 이 시간부로 강병구 새끼라고 부르고 다닐까? 야, 병구 새끼야. 좋은 아침이야. 어이, 병구 새끼. 커피 했어? 안 했으면 우리 한잔할까? 와, 강병구 새끼. 밥 먹으러 가자. 병구 새끼야 퇴근 후에 한 잔 어때. 개X끼야. 좋아? 이게 좋냐고?”

끄으윽.

주변에 있던 사람 웃음을 참지 못하고 이빨을 꽉 깨물고 있는 소리였다.

푸, 풋, 푸푸.

여자 직원들은 손으로 입을 막고 웃음을 참으려 애를 썼지만, 꽉 다문 입술 사이로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한심한 놈. 어디 그걸 변명이라고. 넌 내일까지 반성문 열 장 써서 나한테 직접 가져와. 알았어?”

“네.”

시말서가 아니라 반성문이라니.

초등학생도 아니고 반성문 열 장을 써야 한다.

열 장을…….

강병구는 이 억울함을 어디다 하소연해야 할지 막막했다.

“여기 임재준 님, 아니 씨. 따라 나오세요.”

서형길 실장은 재준에게 손짓하며 밖으로 나왔다.

재준은 서형길 실장이 자신을 알아본 것을 눈치챘다.

잘됐지 뭐, 내가 아니라고 해도 몸이 말을 듣지 않을 테니.

잘 드는 칼 하나 생겼네.

앞서가는 서형길 실장을 불렀다.

“실장님.”

서형길이 돌아서며 재준을 보고 멈칫 섰다.

“둘이서 긴히 할 말이 있는데.”

“아, 네.”

“그리고, 우리 둘만의 비밀…… 지킬 수 있죠?”

“그…… 그럼요. 도련님.”

서형길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드디어 황금 동아줄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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