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작전은 작전으로 받아쳐야지(1)
“수석도 굴리는 증권사라니 괜히 지원했나 봐요.”
“이럴 거면 뭐하러 블라인드 테스트를 했담. 실력만 보는 줄 알고 내심 기대했는데”
“저도요. 신입 교육도 없이 바로 실전 돌입하라고 해서 잔뜩 기대했어요.”
“아직 개인 컴퓨터도 없고. 오늘도 커피 심부름에 점심 배달하려니 눈앞이 캄캄합니다.”
“복사는 얼마나 하는지, 여기가 증권회산지 인쇄소인지 착각할 정도예요.”
좋은 인재를 데려와서 소모성으로 쓰고 있으니 이들의 입에서 한숨이 터져 나올 만했다.
또 남는 시간엔 실전 매매도 없이 멍하니 모니터만 보라는 건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시간은 금인데.
그럼,
내가 이놈들을 좀 굴려 볼까.
아주 빡세게.
어차피 몇몇은 나랑 호흡을 맞추며 가야 하잖아.
빙그레 웃는 재준이 그들에게 제안했다.
“우리 스터디 해요. 동기들끼리 친목도 다지고, 어때요?”
모두 재준의 말에 관심을 보이자 재준은 말을 이었다.
“신입 교육이 없어서 누가 동기인 줄도 모르잖아요. 나중에 다들 모여서 밥도 먹고, 이야기도 하고, 서로 도와주면서 지내면 좋지 않을까 합니다.”
재준의 제안에 동기들의 표정이 밝아졌고 재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누가 어떤 자리에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이 딱 모임을 만들기 좋지 않을까요? 포지션 정하기 전에 스터디도 하고 각자 피드백도 받으면 적성을 찾기가 더 쉬울 것 같은데.”
재준의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한 김혜림은 반짝, 눈을 빛냈고,
반면 최진기는 더 설명해 달라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재준은 그들을 향해 재차 설명했다.
“몇 년이 지나면 누구는 애널리스트고, 누구는 펀드 매니저고, 누구는 개인 투자 회사를 차릴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증권사를 떠날 수도 있구요. 하지만 첫 사수에 의해 신입의 길이 정해지는 도제 시스템을 우리 스스로 바꾸는 겁니다. 우리가 서로 자신의 장점을 찾는 걸 도와주고 회사에 제안하는 겁니다.”
잠시 후,
팔짱을 낀 채 생각하던 이무열이 먼저 찬성의 뜻을 내비쳤다.
“전 찬성입니다. 저는 회계학을 전공했습니다. 숫자라면 자신 있습니다. 저도 제가 잘할 수 있는 분야를 찾고 싶습니다. 서로 적성에 맞는 업무를 찾도록 도와준다는 재준 씨의 말에 동감해요.”
최진기는 이무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좋습니다. 자주 모이죠.”
“자, 자, 연락처 적어주세요.”
재준과 동기들은 서로 연락처를 교환한 후, 다음 만날 약속을 하며 각자 자리로 돌아갔다.
재준은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자신의 장점을 찾는 게 먼저지.
그러려면 실전이 도움이 될 텐데.
실전을 시작하면 또 선배들이 갈굴 테고…….
모의투자대회를 살짝 변형해서 <사내투자대회>를 열어 볼까?
모의투자대회는 2000년부터 시작되어 증권사별로 진행되었다.
대학생 모의투자대회, 일반인 모의투자대회 등 증권회사에 대한 인지도를 높이고 건전한 투자 문화를 만든다는 취지로 상금을 걸고 개최했다.
피 말리는 시장을 경험하려면 모의가 아닌 실전 투자가 낫지.
자기 돈이 줄어들고 늘어나는 걸 직접 경험해야 이 길이 자신의 길인지 알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투자대회를 하려면 홈트레이딩시스템(HTS)이 필요하다.
HTS은 1997년 4월에 전 증권사가 동시에 선보인다.
현재는 주가 시세만 알아볼 수 있는 ‘가정용투자정보시스템’이 있었다.
이걸 살짝 손보면 현재증권 시스템 안에서만 매수·매도는 가능할 것 같았다.
펀드 하나 개설하고 대회 참가자들이 모두 펀드 매니저가 되는 것이었다.
딱 좋네.
기획실에 이야기하면 가정용투자정보시스템을 HTS로 바꾸는 데 1개월이면 충분하려나…….
1997년 4월에 나오는 HTS도 1997년 법이 개정되어 모든 증권사가 4개월 만에 뚝딱 만들었다.
한 달이면 충분하다.
자, 동기들아. 실전이 어떤 건지 희열을 느껴보자.
짜릿짜릿할 거다.
재준의 전생이었던 강진도 실감 나는 매매에서 쏟아지는 숫자의 파도를 바라보며 전율을 느꼈었다.
손홍민 선수가 축구공을 처음 발에 느꼈을 때, 김여나 선수가 피겨스케이팅을 하며 느꼈던 그 운명 같은 끌림처럼.
나같이 운명을 보는 이가 있으면 좋겠는데.
***
“커피 여기 있습니다.”
그나저나, 이 작전 조무래기를 어떻게 떼어 놓지?
서형길 실장을 한번 만나서 결판을 내야겠는데.
재준이 커피를 강병구 앞에 내밀자 강병구는 짜증을 내며 책상에 놓으라고 턱짓을 했다.
‘이 자식, 정말 꼴 보기 싫다니까.’
강병구는 기분 나쁜 시선을 보냈지만, 재준은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자리에 앉았고 모니터로 주식 차트를 보기 시작했다.
강병구는 이 정도 눈치를 주면 시무룩한 표정은 기본으로 지어줘야 하는 신입을 상상했는데, 재준이 전혀 개의치 않자 더 짜증이 났다.
신입의 일거수일투족을 곁눈질하며 커피를 홀짝이려다 흠칫 커피 안에 뭐가 들었나 자세히 살펴봤다.
‘침이라도 뱉은 거 아냐?’
꺼림칙한 듯 다시 재준을 노려봤다.
아주 건방지게 모니터에 여러 가지 차트를 올려놓고 고민하는 게 얄미웠다.
‘신입 주제에 차트를 분석한다고?’
“야, 신입. 이리 와봐. 너 지금 보니까. 차트 분석하는 것 같은데. 볼 줄은 아냐?”
“몇 개는 압니다.”
강병구는 ‘몇 개’ 그 말에 꽂히며, ‘설마, 신입 주제에?’라는 표정으로 재준에게 묻기 시작했다.
“EPS가 뭐야?”
“당기순이익을 주식 수로 나눈 값입니다.”
‘어쭈, 그 정도는 안다 이거냐, 그럼.’
“자기자본이익률이 10%야. 주주가 연초에 1,000원을 투자하면 연말 이익은?”
‘머리 좀 써야 할 거다.’
헌데,
“100원의 이익을 냈습니다.”
재준이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이놈 봐라? 하긴 10% 이익이 100원인 건 당연한 거니까. 그럼 이건 어때?’
“주가가 10,000원인 기업 A와 B가 있고, 두 기업의 SPS(주당매출액)는 각각 1000원과 5000원이라고 할 때 PSR(주가매출비율)은?”
“각각 10과 2입니다.”
재준의 빠른 대답에 강병구와 주변 애널리스트들의 동작이 일제히 멈췄다.
“뭐야, 저 신입. 역시 수석이네.”
“SPS? PSR? 그게 뭐야?”
“나도 모르는데. 쟨 모르는 게 없어.”
“아이큐가 200이 넘는단 소리가 있던데.”
“200? 무슨 뇌세포가 증폭하는 인간이야?”
“근데 강병구는 뭐 하는 거야?”
“저 질문은 작년에도 똑같이 하지 않았냐?”
“신입 올 때마다 골탕 먹이려고 외우고 다니는 거잖아.”
그들은 재준에 대한 놀람과 호기심이 강병구의 치졸함으로 변했다.
주변의 반응을 감지한 강병구가 버럭 소리 질렀다.
“너, 지금 내 앞에서 수석이라고 자랑하는 거냐?”
갑자기 왜 성질이야?
“아닙니다.”
‘이놈, 뭐야?’
펀드 매니저든, 브로커든, 애널리스트든.
증권맨이라면 잠잘 시간도 없이 일에 치이며 살아간다.
그도 그럴 것이 상장된 기업 수만 2000개가 넘었고, 하루에 한 개씩만 분석해도 3년이란 긴 시간이 걸린다.
그 분석이라는 기법들 또한 수백 가지가 넘는다.
그런데 이제 막 입사한 신입이 머릿속에 증권 사전이 있는 것처럼 막힘없이 술술 기업의 가치를 산출해 내자, 강병구의 자존심을 묘하게 건드렸다.
고초를 겪는 건 임재준이 아니라 바로 강병구 자신 같아서 속이 뒤틀렸다.
“야, 임재준. 공부 좀 했다고 나대지 마라. 아니다. 매매를 모르는 신입이 뭘 알겠냐. 피가 마르게 실전을 겪어봐야 선배 앞에서 공손해지지.”
강병구는 사람들 앞에서 재준의 코를 납작하게 하려고 했지만 생각한 대로 되지 않자 노골적으로 삐딱하게 굴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선배들의 신입 길들이기에 어김없이 나오는 단골 멘트.
신입이 뭘 알겠냐.
실전을 경험한 적 있냐.
본인들도 신입 시절이 있었을 텐데 신입 딱지를 뗀 그 순간부터 먹잇감을 찾아 돌아다니는 승냥이처럼 신입을 못살게 구는 놈들이 꼭 있다.
그런 놈들이 있는 건 그렇다 치고.
왜 애널리스트가 매매를 하고 있는데?
“선배님께서 저에게 실전을 가르쳐 주십시오.”
“실전?”
“네.”
시스템을 능숙하게 다루지 못하는 신입.
자신에게 실전을 가르쳐 달라고 하는 재준을 보며 드디어 제대로 잡도리할 기회가 왔구나 싶어 강병구의 표정이 변했다.
아무리 똑똑하다 해도 시스템을 익히지 않으면 실수가 나오게 마련.
복잡한 시스템을 선배 도움 없이 만진다는 건 자진해서 폭탄 속으로 뛰어드는 행위와 같다.
전쟁을 혼자 치르기엔 저 녀석은,
아직 애송이다.
“실전? 그래 가르쳐 주지. 너처럼 이론으로 공부한 놈들은 기본을 몰라. 온갖 이론 갖다 대며 아는 척이나 하고 말이지. 실전은 머리가 아니라 감으로 하는 거야. 신입은 절대 알 수 없는 감. 근데, 감이 없다? 그럼 그냥 잘되는 회사 주식 사. 이게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실전이야.”
강병구의 삐딱한 말을 듣고 있던 재준은 강병구의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잘되는 회사에 투자하라는 것이 선배님 가르침입니까?”
“왜, 너도 한번 해보게?”
“선배님, 로버트전기가 잘되는 회사 맞습니까?”
“그럼…… 아주 잘 나가는…… 회사지.”
“제가 판단하기엔 그 회사 매출액도 낮고, 영업이익도 낮습니다. 그뿐 아니라 자기 자본율도 바닥인 회사입니다.”
순간 강병구는 자신의 모니터를 보았고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머릿속이 하얘졌다.
신입을 요란스럽게 닦달질하려고 했는데 자신의 숨겨진 패를 보이고 말았다.
로버트전기.
그 종목은 그가 작전을 마무리하고 있는 주식이었다.
‘이게 왜 여기에 떠 있냐?’
강병구는 너무 놀라 당황한 나머지 입만 벌린 채 서 있었다.
누렁소처럼 눈만 끔뻑거렸다.
강병구와 재준을 지켜보던 애널리스트들의 입에서 로버트전기? 하는 의아함이 쏟아졌고, 그들은 즉시 로버트전기를 서치했다.
‘이런, 제기랄.’
주변의 공기가 변하고 있음을 느낀 강병구는 정신을 차리며 소리를 높였지만, 말을 더듬고 말았다.
“…아, 아냐, 임마…! 로버트전기에 내가 왜…왜, 투자…하…냐? 잘못 봤어.”
강병구는 몸으로 슬쩍 모니터를 가렸고 물끄러미 자신을 쳐다보는 재준의 눈빛에 제 발 저린 도둑처럼 어쩔 줄 몰라 했다.
“야, …이게 어디서… 선배한테 꼬치꼬치 캐물어. …말한다고 네…네가 알아?”
재준은 물러나지 않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것도 정말 궁금해서 드리는 말인데요. 왜 애널리스트가 매매를 합니까?”
“뭐?”
“애널리스트의 실전은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인데 왜 매매를 하고 계시냔 말입니다.”
재준의 말에 주변의 애널리스트들도 자신들의 모니터를 보며 의아해했다.
그러게 왜 우리가 매매하고 있을까? 라고 전부 재준의 말에 공감을 표했다.
이것만 봐도 아직 애널리스트가 왜 존재하는지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아는 이가 없었다.
애널리스트는 펀드 매니저의 비서나 자료 조사원쯤으로 생각했다.
증권사의 꽃은 애널리스트이거늘.
강병구는 이 상황을 해결해야 했다.
애널리스트가 매매를 하든 안 하든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이제 이틀 된 신입이 자신을 몰아붙여서 할 말을 없게 만드는 게 문제였다.
책상 위에 있는 메모지를 집었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수군거림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자신의 이메일 주소를 갈겨 적었다.
“거기 서 있지 말고 태풍인쇄소에서 온 이메일이나 확인해.”
“…….”
메모지를 받은 재준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자 재빨리 자리에 앉아 모니터 화면을 바꿨다.
휴우.
조용히 한숨을 내뱉은 강병구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들을 수 있도록 큰소리로 중얼거렸다.
“로버트전기가 어디 있다는 거야? 아아. 로봇 만드는 업체 선정한다는 기사보고 착각한 거네.”
자신의 지적을 헛소리 취급하는 강병구의 말을 들으며 자리에 앉은 재준은 종이를 와락 구겨 강병구에게 던지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기에 마음을 가라앉혔다.
당장 도제 시스템부터 바꿔야겠어.
속셈이 뻔히 보일 만큼 후배들을 괴롭히는 낡은 관습에 재준은 고개를 저으며 강병구가 적어준 주소로 들어가 이메일을 확인했다.
태풍인쇄소라… 여기 있군.
메일을 열어 확인하고 프린트 버튼을 눌렀다.
지잉.
재경기계 보고서가 프린트되어 나오는 순간, 강병구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야, 이 새끼야. 누가 너보고 프린트하라 했어? 엉?”
강병구가 프린트되어 나오는 종이를 벅벅 찢으며 재준 얼굴에 던졌다.
“이 새끼가 누굴 엿 먹이려고. 야, 너 왜 프린트했어.”
일부러 이걸 노린 건가? 아니면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려는 수작인가? 아니면 찌라시라는 걸 들킬까 봐?
고민하는 재준을 향해 험악한 얼굴을 한 강병구가 다가오는데, 뒤에서 천둥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강병구 대리. 네가 감히 어디서 못돼먹은 짓거리를…….”
부르르 두 주먹을 말아쥔 서형길 실장이 강병구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저 아저씬 왜 저러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