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엮인 놈들이 왜 이렇게 많아(5)
“허, 녀석. 그러면 부동산 공시지가보다 높은 실거래가격으로 계산해 주마.”
“네.”
“알았다.”
“가능하시다면 빨리 매입해 주십시오.”
“그러마.”
그리고 임병달은 또 다른 호기심이 어린 표정으로 재준을 바라봤다.
“작전을 친다고.”
“정 실장님도 참, 좀 기다렸다 말하지. 네. 제 눈에 보인 이상 그냥 넘어갈 순 없잖아요.”
“증권사가 작전을 왜 그냥 넘어가는 줄 아느냐?”
“큰손 때문이잖아요.”
“황선달은 쉬운 상대가 아니다. 현재증권보다 더 많은 돈을 굴리는 노인네야.”
“그 정도입니까?”
“정계, 재계 모두 손이 닿아 있어. 잘못 건드리면 더 크게 돌아올 거야.”
그저 돈이 많은 일수쟁이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자금력이 대단한가 보다.
하지만 재준은 알고 있었다.
황선달은 지금 재미나 돈을 벌려고 작전을 하는 게 아니란 것을.
큰손들은 1980년대까지 주식시장에서 힘을 발휘했다.
모두가 우러러봤고 모두가 존경해 마지않았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일반 투자자들이 대거 주식시장에 뛰어들고 기관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점점 힘을 잃더니,
급기야 1992년 외국인 직접 투자와 1993년 금융실명제로 인해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들었다.
그럼에도 과거의 영광에 집착하는 돈 많은 늙은이가 황선달이었다.
경제가 살아나고 돈이 돌기 시작하자 기업들은 급전이 필요하면 사채보다는 은행에서 대출을 받고 증권사에서 신주를 발행했다.
돈을 아무리 찔러 넣어 줘도 정치인들은 더는 명동 사채 시장 거부들을 고아한 노인으로 대우해주지 않았다.
서민의 고혈을 빨아먹는 기생충 취급하며 척결 대상으로 치부했다.
황선달은 속상했다.
지금도 기업 하나 정도는 쥐락펴락할 수 있는 재력을 가지고 있는데.
권력을 가지기 위해선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야 하는데.
아무도 오지 않았다.
“걱정 마세요, 할아버지. 전 뒤에서 살짝 소금만 뿌릴 겁니다.”
“소금?”
“그냥 후다닥 끝나면 싱거우니까요. 소금 친 김에 다리 한 짝은 뜯어 먹어야지요.”
“설마, 황선달 돈을 먹으려고?”
“그럼, 그냥 주는데 안 받을 수 없잖아요. 성의껏 맘 상하지 않게 받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허.
임병달은 재준을 보고 걱정을 넘어 경이로움이 일었다.
도대체 무슨 배짱인 거냐.
***
재준은 할아버지와 아침에 한 대화로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자금도 마련되었고, 할아버지의 믿음도 어느 정도 얻었다.
그리고,
황선달이 어떻게 나올지 그림이 그려졌다.
이제 재경기계와 노경범, 황선달이 잘 어우러지게 버무리기만 하면 되었다.
앞으로 계획을 머릿속에 그리며 태풍인쇄소에 도착했다.
아침 일찍부터 기계는 돌아가고 있었지만,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계십니까?”
인기척은 없고 기계에서 나오는 인쇄물에 시선을 두었다.
‘책인가?’
<청초하게 푸른 하늘이라면 내 안에 잠들어 아직 한 번도 온기를 느낀 적이 없는 천년의 고독을 맞이할 자격이 있으리라. ……이제, 검을 잡고 베어라.>
뭐야, 이 닭살 돋는 문장은…. 무협?
재준은 눈을 돌려 저쪽에서 인쇄되는 표지를 보았다.
비운의 천상 검객.
와! 정말 읽고 싶지 않은 제목이다.
비운의 주인공이라니 무협에 전혀 어울리지 않잖아.
로맨스도 아니고. 아, 로맨스도 비운은 싫어하지.
호기심에 표지가 인쇄되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 할 때. 왁자지껄 두 명의 남자가 인쇄소 쪽으로 걸어왔다.
“현슬아, 이번 소설은 반드시 성공한다.”
“그냥 중간만 갔으면 좋겠어요.”
“하이텔에서 그 난리가 났는데 당연히 책은 더 팔리겠지.”
재준이 그들과 눈이 마주쳤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재준이 사원증을 내밀었다.
“현재증권에서 왔습니다.”
“아, 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이 지긋한 노인이 반갑게 인사했다.
“전에 말씀하신 대로 하면 되는 거죠?”
전에 뭘 말했는데?
일단 떠보고,
“저희가 부탁한 내용을 기억하십니까?”
“아, 그럼요. 재경기계가 오랜 연구 끝에 국가의 숙원 사업 중 하나인 오폐수 처리 장비를 개발했다. 수입에만 의존했던 장비를 국산화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메일로 주신 자료에 있는 전문용어랑 미사여구를 집어넣어 화려하게 글을 써달라고 하셨습니다. 맞지요?”
“아, 네.”
“오늘 안으로 초안을 보내겠습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더없이 순수해 보이는 얼굴.
의뢰한 내용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젊은 작가를 보며 작전이란 단어와 연관 지을 수도 없었고, 그는 오폐수 처리 장비를 개발했다는 것이 가짜라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
“이게 뭔지 알고 계십니까?”
혹시나 해서 물어봤다.
“홍보용 자료 아닙니까?”
“잘 아시고 계시네요.”
그래, 그 정도만 알고 있으면 다행이고.
재준은 ‘일을 맡겨주셔서 고맙습니다’라는 얼굴로 재준을 대하는 노인을 보았다.
재준의 시선이 인쇄되고 있는 무협 표지에 머무르자 젊은 작가는 부끄러운지 볼이 빨개졌다.
“작가세요?”
“아, 예. 제 작품이 졸작이긴 하지만 팬들이 좀 있습니다. 제 수입이 걱정되신 그분이 종종 일감을 주세요. 어쩌다 보니 꾸준히 하게 됐고요.”
“그분이요? 혹시 현재증권 사람입니까?”
“네. 현재증권에서 근무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분이 혹시 강병구 대린가요?”
“아니요. 그분의 성함은 모릅니다. 통신으로만 연락을 주고받아서 아이디만 알고 있습니다.”
누굴까?
“인쇄는 언제 다 마무리가 되나요?”
“현재증권 책자는 오늘 마무리가 되는데, 다른 증권사는…….”
이때 나이 든 노인이 젊은 작가의 옆구리를 꾹 찔렀다.
아,
젊은 작가가 다급히 입을 다물었다.
뭐야? 다른 증권사?
재준은 인쇄소 안을 한 바퀴 돌며 인쇄물들을 살펴보았다.
기가 막히는구나.
최소 십여 개의 증권사가 찍힌 책자가 눈에 들어왔다.
모두 표지 메인 자리가 비어 있었고.
설마, 다른 증권사 펀드 매니저들도 한통속인 거야?
엮인 놈들이 왜 이렇게 많아.
***
인쇄소를 나와 현재증권에 출근한 재준은 강병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굿모닝.”
저기 다른 애널리스트에게 인사를 하며 들어오는 강병구가 보였다.
“나오셨습니까?”
재준의 인사에 강병구의 눈이 흔들렸다.
왜?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놀라기는.
“…어,어…!? 너!”
강병구는 놀란 표정을 숨기지도 않았다.
서울에서 울산까지, 버스를 타고 출장을 다녀온 것이 아니라 휴가를 마치고 막 출근한 사람처럼 쌩쌩한 재준의 모습이다.
‘뭐지? 울산 갔다 온 놈 맞아?’
예상을 빗나간 재준의 이른 출근에 강병구는 조금 긴장했다.
다크서클이 얼굴 절반을 내려와야 정상인 놈이 뽀송뽀송한 얼굴에 옷도 어제 입던 것이 아닌 깔끔한 새 옷이었다.
‘쌩쌩해도 너무 쌩쌩한데. 기분 나쁠 정도로.’
“너, 충무로도 다녀왔어?”
“태풍인쇄소 점검하고 왔습니다. 오늘 중에 대리님 이메일로 결과 보낸다고 했습니다.”
강병구의 얼굴에 심술이 묻어났다.
‘이 새끼 진짜 다녀왔나? 헬기라도 타고 다녀온 거 아냐.’
“야 신입. 거기 멀대같이 서 있지 말고 커피 한잔 뽑아 와.”
“커피요?”
“왜? 싫어?”
“아니요. 커피 드시고 싶으시면 타다 드려야죠. 근데…….”
“근데, 뭐?”
“후배들이 커피에 손가락 집어넣고 동전 빠뜨리고 심지어 침까지 뱉는다는데 괜찮으시겠어요?”
“뭐?”
“전 안 그러는데, 그런 일이 있다고 들어서요.”
재준이 싱글싱글 웃고 있는 꼴이 꼭 자신이 다 할 수 있다는 협박처럼 보였다.
“설마.”
“전 아닙니다. 그럼.”
재준은 고개를 숙여 일부러 깍듯이 인사하고 밖으로 나와 탕비실로 갔다.
후후.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지.
그러니까 왜 갈구냐고.
넌 이제부터 맛있는 커피 먹긴 글렀어.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무실을 나가는 재준을 보자 강병구는 부글부글 속을 끓이며 수화기를 들었다.
‘신입, 너는 내가 제대로 갈궈주마.’
강병구는 재경기계 김재수 차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차장님. 이렇게 신경 써 줘서 고맙습니다.”
-네?
“아, 글쎄 우리 신입이 몰래 봉투를 주더라구요.”
-…무슨 봉투 말씀이십니까?
“에이. 실장님도. 저는 다 이해합니다.”
-아. 대리님. 그 직원. 아무것도 받지 않고 갔는데요.
“네?”
-완강히 거부하더라고요. 봉투가 갔다면 저희 재경기계는 아닙니다.
강병구의 표정이 순식간에 썩어들어갔다.
봉투를 거절했다고?
내가 이래서 머리 좋은 놈들을 싫어하는 거야,
***
탕비실 앞.
그곳엔 재준처럼 상사의 커피 심부름 온, 한눈에 봐도 신입 티가 나는 김혜림, 최진기, 박승하, 이무열이 모여 있었다.
이들은 재준의 입사 동기.
재준은 속으로 빙긋 웃었다.
하지만 재준의 기분 좋음과는 달리 그들의 대화엔 탄식이 섞여 있었다.
“사수와 부사수의 관계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들었는데 저는 벌써 글렀어요.”
이렇게 말하는 세련된 옷차림의 미국 유학파 김혜림.
자기소개서에서 느꼈던 재기발랄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어깨가 축 늘어져 있었다.
“저두요. 제 사수인 김 대리님은 적정 매도가 찾는다면서 온종일 모니터만 보고 있어요.”
김혜림의 말에 수긍하며 투덜대는 그는 회계학을 전공한 최진기였다.
재무제표를 이용한 주식의 기술적 분석?
대충 이런 내용으로 논문처럼 자기소개서에 보고서를 첨부한 장본인이었다.
재무제표는 가치 분석 아닌가?
웬 기술적 분석.
그 보고서가 생각난 재준은 최진기를 바라보았다.
‘상상했던 것처럼 진지하게 생겼네.’
“저는 어제 점심 메뉴 때문에 이 주변을 샅샅이 돌아다녔어요. 신입의 기본은 이것부터라나 뭐라나 하면서요. 선배님들 커피 취향 외우느라 혼났습니다.”
귀공자풍의 면모를 가진, 경영학을 전공하고 부동산에 관심이 많은 박승하는 고개를 절로 흔들었다.
“저는 회의자료 복사하고, 정리하고 온종일 복사실에 있었습니다.”
아나운서처럼 낮은 저음으로 말하고 있는 그는 이무열.
법학을 전공했지만 사법고시를 버리고 증권사로 바로 온 수재다.
재준이 그들에게 다가서자 그의 아우라에 동기들은 옆으로 슬쩍 비켜섰고 재준의 사원증을 유심히 보던 혜림이 특유의 친화력으로 말을 걸었다.
“어머, 안녕하세요. 이번 채용에서 수석 한 275번. 맞죠?
길을 가다 연예인을 만난 것처럼 기뻐하며 인사를 건네는 그녀 덕분에, 주변의 분위기는 탄식에서 순식간에 반가움으로 변했다.
이번 채용은 철저히 블라인드 테스트로 진행됐기 때문에 서로 이름을 몰랐다.
면접에서도 수험번호로 불렸고, 신입 교육도 따로 없었기 때문에 누가 동료인지 정확히 알지도 못했다.
그런데 김혜림의 친화력으로 동기들은 금세 자신의 이름을 밝히며 지난 하루 동안의 애로 사항을 털어놓고 있는 모양이었다.
재준도 그녀의 밝은 인사에 복잡했던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았다.
“면접실로 들어가는 거 봤어요. 내 수험번호가 276번이라 알고 있어요. 수석이 275번이란 것두요.”
“수석?”
“수석?”
그녀의 말에 세 사람의 눈이 동시에 재준을 향했고 재준은 예상치 못한 그녀의 말에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재준은 그 감정을 감추기 위해 서둘러 말을 꺼냈다.
“저는 어제 울산 출장 다녀왔습니다.”
“출장요?”
오 마이 갓! 하는 표정이 혜림에게서 묻어 나왔고 동기들의 입에선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자신들의 무게보다 재준의 무게가 더한 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정말 힘들었죠.”
누나가 경기에서 진 남동생을 위로하듯 바라보는 혜림을 보며 재준은 훗 하고 웃음이 터질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