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엮인 놈들이 왜 이렇게 많아(4)
“아니, 여길 혼자 사용하시다니요. 이건 인력 낭비에, 시간 낭비에, 전력 낭비, 전력 낭비는 아니고, 공간 낭비까지 이해하기 힘든데요.”
“하하, 나중에 회장님이 도련님에게 말씀드릴 겁니다만 이 사무실은 저와 제 친구와 둘이 쓰던 사무실입니다.”
“친구요? 친구분 어디? 출장 가셨나요?”
“도련님, 제 친구는 도련님 아버님이십니다.”
머리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임재준의 아버지 임석훈.
본 적도 없고 기억도 없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알고 있었다.
이미 죽었다는 것.
이미 고인이 되어 현세에 없다는 것.
당연히 눈물이 나거나 슬픈 감정은 거의 없었다.
전혀 없을 수는 없지만, 자신과 겹치는 추억이 없으니 그럴 수밖에.
하지만 왠지 우울한 감정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런 사람이었구나.
할아버지에게 아버지는 이런 사람이었어.
정 실장과 아버지.
할아버지의 곁에 있던 두 사람.
왜 할아버지가 임재준의 망나니짓을 하염없이 지켜만 보고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후,
웃음이 났다.
하지만, 감성에 젖을 때가 아니었다.
“정 실장님, 여기엔 뭐가 있나요?”
“여긴 현재증권은 모든 자료를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어떻게요?”
“임 사장의 마지막 작품이 바로 현재증권의 전산화입니다. 이곳에선 현재증권의 과거와 현재를 그리고 세계 경제의 대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이거 1996년에 기가 인터넷을 얻은 기분이네.
그렇다면, 감성적인 분위기는 날려 버리고 일을 하자.
“그럼, 현재증권의 영업용순자본비율을 보여주시겠습니까? 일단 우리도 살고 봐야 하니까.”
“NCR(영업용순자본비율)을 아십니까?”
“그럼요. 저 성적은 바닥이지만 MBA 과정 이수했어요.”
“네. 그렇군요…… 그래요. 맞아요.”
정 실장님, 그런 믿지 못하겠단 얼굴은 아니죠.
NCR은 은행의 BIS와 똑같은 개념이다.
증권회사의 BIS라고 보면 됐다.
BIS 8%가 기준이라면 NCR 150%가 기준이다.
150%가 넘어야 증권회사로서 업무를 이어갈 수 있다.
못 넘으면?
그 전에 경고 좀 먹고 100% 밑으로 떨어지면 문 닫아야 한다.
1996년은 국내 증권회사에 NCR을 적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1997년 4월에 도입되면서 증권회사에 피바람이 몰려온다.
재준은 먼저 현재증권의 NCR을 손봐야 했다.
그나저나,
내가 지금 출근 첫날이란 게 실화인가.
작전하는 놈들 쫓아다니고, 늦은 점심을 먹고 나니 현재증권을 통째로 손봐야 한다고?
이게 신입 사원이 할 일인가.
뭐, 헬기도 타고, 부사장이란 사람이 꼼짝 못 하고, 최고급 승용차에 국밥집도 전세 아닌 전세 내고.
다 좋은데 하루 일과가 너무 빡세다.
재준의 맘도 모르게 정 실장은 간략하게 요약한 현재증권의 NCR을 가져왔다.
일이나 하란다.
“NCR 150% 밑이네요.”
“네, 지금 현재종금사를 만들기 위해 물밑 작업 중이라, 잉여자금은 따로 빼놓고 있습니다.”
“뭐라고요?”
종금사?
“지금 종금사라고 하셨어요?”
“뭐 잘못된 것이라도 있습니까? 종금사는 꼭 필요한 사업입니다. 종금사는 증권과 보험 업무 이외에 모든 업무를 할 수 있습니다. 현재증권에 꼭 필요한…….”
“정 실장님. 잠깐만요.”
재준이 단호하게 정 실장의 말을 잘라 버렸다.
이쯤에서, 종금사가 IMF 사태의 원흉으로 찍혀서 쫄딱 망한 이야기를 해줘야 하나.
종금사는 절대 안 돼.
재준이 정 실장을 똑바로 보고 말을 이었다.
“종금사를 만드는 이유는 해외에서 달러를 가져오기 위한 것 아닙니까?”
“그 이유가 가장 큽니다.”
“자, 그럼, 종금사가 해외에서 가져온 달러가 단기입니까, 장기입니까?”
“글쎄요. 그건 저도 파악은 안 해봤습니다.”
“아, 그렇지요. 그럼, 다르게 이야기해 보죠. 우리나라 종금사가 국제적으로 신용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직은 크지 않다고 봅니다.”
“그럼 결론 났네요. 저신용으로 해외에서 가져온 달러는 단기가 많을까요, 장기가 많을까요?”
“……단기가 많겠군요.”
“네. 그럼 단기에 갚아야 할 자금을 가져와서 빌려주려면 단기로 빌려줄까요? 장기로 빌려줄까요?”
“이럴 수가. 빌려주는 것도 신용의 문제이니 장기가 많겠군요.”
“네, 바로 그겁니다. 지금 종금사가 단기 자금을 가지고 들어와서 장기 자금에 빌려주고 있습니다. 그럼 단기 자금의 상환일이 다가오면 또 단기 자금을 빌려와서 갚고 있는 거 아닙니까?”
“그렇다는 건…….”
“네. 아마 종금사는 카드 돌려막기처럼 단기 자금을 빌려서 단기 상환을 돌려막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심지어 동남아 고위험성 투자에도 돈을 쏟아붓고 있을 겁니다.”
종금사가 IMF 사태의 주범으로 몰리는 이유가 이거다.
대한민국이 급격하게 성장하자 달러가 필요했다.
그래서 정부는 지방에 있는 자잘한 투자금융회사들을 전부 종금사(종합금융회사)로 탈바꿈시켜줬다.
국내에서 푼돈이나 만지던 사람들이니, 해외에서 달러를 빌려와도 어떻게 달러를 굴릴지 몰랐다.
결국, IMF 사태가 터지고 24개 종금사 중 23개가 퇴출되었다.
그러게, 교육이나 좀 시키고 종금사를 만들든가.
하여튼.
우리가 종금사를 만든다고?
절대 안 돼, 내 눈에 흙이 들어올 때까지 종금사는 절대 안 돼.
“그렇다면…….”
“맞습니다. 실장님. 지금 종금사에 관련된 사업을 다 접고 거기에 투입될 자본을 현재증권으로 돌려놓으셔야 합니다. 그럼 NCR은 150%를 넘어서 건전한 증권사가 되는 겁니다.”
“아, 네. 회장님에게 즉시 보고하겠습니다.”
“할아버지에게 절대 안 된다고 해 주십시오.”
재준이 단호한 표정을 짓자 정 실장은 식겁한 얼굴을 했다.
재준이 예전의 망나니 같은 표정을 지었지만, 생각해 보면 예전하고는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
술이나 여자 때문이 아니고 회사를 위해서 망나니로 돌변한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보다 일단 진행 중인 종금사 관련 프로젝트는 당장 중지하십시오. 보고는 그다음입니다.”
만에 하나 어쩔 수 없이 진행한다는 어설픈 논리를 당장 끊어야 했다.
“지금 종금사 진행 중인 부서가 어디입니까?”
“기획실입니다.”
“서형길 실장님이 주도하고 있는 겁니까?”
“네.”
이건 할아버지에게 이야기하면 한 번에 중지될 일이고.
“그보다, 현재 종금사들의 상태를 파악해야 하는데…….”
“다른 종금사들 말입니까?”
“네, 살릴 수 있는 곳은 살려야지요.”
“네? 갑자기 종금사를 살린다니요?”
아차, 지금 종금사들은 한창 잘 나가고 있을 때구나.
종금사 설립은 절대 안 된다고 했지만, 현재 종금사는 달러로 배가 빵빵하게 불러 있을 때였다.
저게 한순간에 빵하고 터지겠지만.
“정 실장님, 곧 종금사의 폐단이 터질 겁니다.”
“갑자기요?”
“시간이 없습니다. 종금사에 관한 모든 자료를 수집해야 합니다. 혹시 전 직원에게 명을 내릴 수 있을까요?”
“도련님…….”
정 실장의 눈이 ‘아니 도련님. 무슨 점쟁이이십니까?’라고 말하면서 손가락으로 모니터를 가리켰다.
“그렇지.”
여긴 재준의 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전산타워다.
이 안에 모든 것이 있을 것이다.
재준은 모니터로 달려가자 정 실장이 다가가 초록색 폴더를 가리켰다.
“저기에 종금사 자료가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고 있을 겁니다.”
“이건 누가 업데이트를 하는 겁니까?”
“각 부서에 전산요원이 한 명씩 배치되어 있고, 기획실에 신문과 방송을 담당하는 직원들이 십여 명 있습니다. 한국에서 발생하는 경제 관련 소식은 아주 작은 뉴스라도 모두 수집되고 매크로에 의해 분류되고 있습니다.”
다행이다.
역시 재벌이구나.
이러니 일반인들이 당해낼 수가 없을 테지만.
하지만,
폴더를 연 재준은 잠시 망연자실해졌다.
그냥 종금사란 말만 있으면 한 폴더에 다 때려 넣어놨구나.
그렇지. 매크로를 인공지능으로 착각하면 안 되지.
시간별로 쌓여있는 수만 건의 기사들.
이걸 언제 다 보나.
차라리 모르고 지나칠걸.
에휴, 회사 첫날 이게 웬 고생이람.
재준은 올라온 기사를 하나하나 읽어 가며 정리하기 시작했다.
입사 첫날의 고단한 업무는 새벽까지 이어졌다.
***
다음 날 아침.
새벽에 돌아온 재준은 두 시간 자고 일어나 주방으로 내려갔다. 여느 때처럼 할아버지 임병달 회장은 식탁에 먼저 앉아 있었다.
“울산에 다녀왔다고.”
“네.”
“고생했다.”
“제 일인데요. 고생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허, 출근 첫날 새벽까지 일한 놈 입에서 나올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할아버지 손자니까요.”
“얼씨구. 녀석.”
허허 함박웃음이 임병달 얼굴에 그려졌다.
밥 한술 뜨고 난 임병달 회장은 재준에게 말을 꺼냈다.
“회사는 어떠냐?”
“몇 가지 손볼 곳이 있지만 건실하던데요.”
“손을 본다고? 어딜?”
“지금 애널리스트와 펀드 매니저가 두리뭉실하게 구분되어 있어서 중첩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좀 더 테마를 세분하게 나눠야 할 것 같습니다.”
“그걸 누가 나눠?”
“제가요.”
“네가?”
“네. 저보다 더 잘할 사람은 없을 것 같은데요.”
“네가?”
“네.”
재준은 의심스러워하는 임병달의 잇단 질문에 아무렇지도 않게 밥을 먹으며 넙죽넙죽 대답했다.
할아버지, 제가 다 정해 줄게요.
앞으로 뭐가 유행할지 어떤 주식이 오를지 저보다 잘하는 사람은 없어요.
“정말 잘할 수 있냐?”
“정 실장님한테 울산에서 있던 일이며 경제정책연구실에서 있던 일 다 들으셨잖아요. 뭘 자꾸 물어보세요.”
“알고 있었냐?”
“그렇게 대놓고 꼰지르는데 어떻게 모르겠어요.”
허, 녀석.
임병달이 민망한 듯 웃음을 흘렸다.
“그게 다 너를 위한 거다. 고깝게 생각하지 마라.”
“알아요. 저를 위해서 그런 거란 걸. 괜히 신경 쓰지 마세요. 전 제가 하는 일을 할아버지가 못 볼까 봐 걱정이었는데,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제가 어떻게 성장하는지 지켜봐 주세요.”
“허허, 그래. 내가 다 지켜보마.”
“네.”
“그럼, 이제 어느 부서로 가고 싶으냐?”
“이미 정하셨잖아요.”
임병달이 의미심장하게 물어보았다.
“할 수 있겠느냐?”
“할아버지.”
재준은 음식을 오물거리며 할아버지를 쳐다봤다.
“아버지가 남긴 걸 누구에게 넘겨줄 생각 없으시잖아요.”
“아주 많이 힘들어했다.”
“힘들지 않은 일이 어딨어요. 제 생각에는 할아버지가 제일 힘드신 것 같은데.”
재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임 회장.
진짜 다 큰 건가?
하지만 너무 갑작스럽게 변한 것 같아 걱정이구나.
재준은 할아버지의 따뜻한 시선을 받으며 기회는 이때다 싶었다.
“할아버지. 제가 호주에 있을 때 주식에 관심 있는 친구들이 꽤 있던 건 아시죠?”
“글쎄다.”
거짓말이다.
호주에 친구가 있긴, 간 적도 없는데.
“하여튼 그 친구들과 오랜 연구 끝에 도달한 게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뭔데?”
“이제 회사의 가치를 보고 투자하는 시대는 지났다는 거죠.”
“그럼, 뭘 보고 투자를 하느냐?”
“미래요. 회사보다는 세계 경제가 나아가는 방향에 투자하는 겁니다.”
“미래라면 정치와 관련이 더 있겠구나.”
“국내 정치보단 미국 정치에 비중이 큽니다.”
탁.
임 회장이 수저를 내려놓고 재준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직도 달러 가치가 올라간다고 생각하느냐?”
“네.”
“네 명의로 된 자산을 정 실장에게 물어봤다며.”
“네. 될 수 있으면 처분하고 싶습니다.”
임병달은 꽤 오랫동안 고민했지만, 결론을 못 내린 듯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정신 차리고 회사에 입사한다고 했을 때만 해도 어림없다고 일축했는데. 네가 수석으로 입사해서 믿어볼까 고민하긴 했다. 하지만 위험하다.”
“안전한 방법이 있습니다.”
“한 번 팔아 버린 것을 다시 찾기는 아주 힘든 법이야.”
“저의 전 자산을 할아버지께 매각하면 되잖아요. 그럼 굳이 찾지 않아도 되고 때가 되면 다시 저 주시면 됩니다.”
뭐 이런 날강도 같은 놈을 봤나.
“그리고 달러가 안 오르면 할아버지에게 더 좋은 거 아닙니까?”
“이놈이? 허허허.”
임병달은 웃음뿐이 나오지 않았다.
사실은 손자의 말대로 달러가 올랐으면 했다.
그래야 손자의 혜안을 믿을 수 있고 회사도 맡길 수 있었다.
하지만 달러가 안 올라도 괜찮았다.
전 재산을 날려버렸으니 꼼짝없이 회사에 잡혀서 자신에게 경영에 대해 배우면 되니까.
진짜 중요한 건 손자 놈이 이 두 가지의 경우를 이미 들여다보고 자신에게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손자 주머닛돈을 뺏는 할아버지라…….”
“대신 가격을 후하게 쳐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