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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권 재벌의 천재 손자가 되었다-11화 (11/477)

제11화 엮인 놈들이 왜 이렇게 많아(3)

“도련님. 아직 식사 안 하셨잖습니까?”

“그렇죠.”

“그럼, 식사하러 가시죠.”

“할아버지가 가시는 국밥집 있지요?”

“아, 네. 그리 모시겠습니다.”

재준은 피식 웃었다.

사실 할아버지가 단골 국밥집이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영화나 드라마 보면 꼭 재벌들은 허름한 국밥집을 단골로 삼아 가끔 먹는 장면이 나오지 않던가.

혹시나 해서 던졌는데 정말 할아버지 단골집이 있을 줄이야.

투투투투투.

헬기 소리에 현재증권 직원들이 전부 헬기를 쳐다보며 담배 연기를 뿜어댔다.

현재증권 옥상과 거리가 있는 헬기 이착륙장이라 이들의 눈엔 부사장이나 회장이 어디 갔다 오는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다.

재준은 정 실장과 같이 지하 주차장으로 가서 차를 탔다.

재준이 뒷좌석에 몸을 기대자 정 실장이 안쓰러운 듯 말했다.

“잠시 쉬십시오. 한 30분 걸릴 겁니다.”

“네.”

재준은 눈을 감고 최고급 세단의 울렁거림을 즐겼다.

부드럽게 흘러가는 진동은 마치 몸 전체가 물결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아, 피곤하다.

겨우 한 곳에서 격전을 치른 것뿐인데.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순간순간 머릿속을 떠다니는 수백 가지의 지식을 파악하고 확인하고 상대의 심리를 추리해서 가장 적절한 말을 찾아 쏟아내는 것이 정말 힘들었다.

알고 있는 지식을 현실에서 써먹으려니 확실히 체력이 필요했다.

재벌들은, 아니 할아버지는 이런 미팅을 하루에도 몇 번씩 치른다 들었다.

그것도 하루도 빠짐없이.

대단한 체력이다.

이런 미팅을 매일 하다니,

이왕이면 재벌 손자라도 한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였으면 좋았겠다.

족히 20년은 놀고먹을 수 있을 텐데.

아 환생 시기도, 1996년 말고 IMF 지난 2000년으로.

다섯 살로 환생하자마자 2001년에 옵션으로 대박 치고 그 돈으로 한 10년 정도 IT 기업 주식에 푹 담갔다가 2010년쯤 슬슬 비트코인에 투자해서 평생 돈 걱정 없이 살게.

이게 진정 손 안 대고 코 푸는 거지.

아무 일도 안 하고 억만장자가 되는 거.

정말 아무 일도 안 하는 게 재벌일 줄 알았는데…….

쓸데없는 공상에 잠겨 있는데,

“도련님 거의 다 왔습니다.”

정 실장 말에 현실로 돌아와 눈을 떴다.

남산을 넘는 차가 코너를 급하게 돌자 몸이 물 위에 떠 있는 듯 움직였다.

차 좋다.

무슨 2000년이냐.

이런 차를 타는 것만으로 행복에 겨운 거지.

외환위기만 잘 넘기자.

그다음은 쭉쭉 뻗어 나가 줄 테니까.

차에서 내린 재준은 정 실장의 안내에 따라 충무로 시장 골목으로 들어갔다.

이 골목 얼핏 기억이 났다.

충무로 인쇄 골목은 2022년까지 크게 발전한 곳이 아니었다.

그 인쇄밥 먹는 기사들이 24시간 기계를 돌려대며 살아가는 곳이 충무로 인쇄 골목이고 그 한쪽을 차지한 곳이 충무로 시장 골목이었다.

시장이라 부르지만 작은 식당들이 세운상가를 따라 죽 나열되어있는 곳이었다.

삼분의 일이 고등어구이를 파는데 냄새가 식욕을 엄청 자극했다.

식당 앞 연탄 위에서 노릇하게 구워지는 고등어구이 행렬에 안 들어가고는 못 배기는 곳이었다.

하지만 무심한 정 실장은 그 고등어구이를 지나쳐 작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드디어 정 실장이 식당에 도착해 문을 열어주었다.

정 실장을 아는 듯 할머니가 다가와 꾸벅 인사를 하고 부엌으로 갔다.

할머니, 뭐가 이리 건조해?

원래 이런 곳의 할머니라면 ‘아이고, 왔어.’라며 등을 팡팡 두드려주는 거 아닌가?

할머니는 혼자서 뚝딱뚝딱 요리를 시작했다.

칼질 소리가 일반 국밥집답지 않게 정갈하게 들려왔다.

드륵.

“이모 국밥 4개요. 양 많이.”

문을 열고 4명의 인쇄 기사들이 들어오며 소리쳤다.

할머니가 주방에서 고개를 쑥 빼들고는,

“오늘 장사 안 해. 나가.”

“아, 또, 왜……?”

“야, 저기, 저기.”

인쇄 기사들은 그제야 한쪽에 양복을 입은 두 명이 앉아 있는 걸 알고는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그럼 좀 이따 먹지 뭐…….”

“이따가 올게요.”

기사들은 할머니를 힐끔거리고 재준을 힐끔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저, 저기.

‘같이 먹어도 괜찮습니다.’라는 말이 입안에서 맴돌 뿐 나오지 않았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같이 먹자는 말을 하면 큰일 날 것 같은 기분.

단어가 떠올랐다.

감히…….

감히 너희들이 나와 함께…….

이건 전생의 강진이라면 언감생심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말인데.

어째서 이런 생각이 순간 머릿속을 지배하는 것일까.

참나,

헛웃음이 나왔다.

너무 어이없는 말이었다.

내가 뭐라고.

근데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일까?

내 존재가 재준에게 환생과 빙의를 거치며 바뀌어 가는 것인가.

아니면 원래 가지고 있던 무의식이 환경이 바뀌자 헤집고 나오는 것인가.

왜 그런지 모르지만 확실한 건 재벌이 되어가는 느낌이었다.

그냥 주변만 풍족하게 바뀐 재벌이 아니라 마음가짐도 재벌이 되고 있었다.

그래서 아까 최재철에게도 그렇게 들이받을 수 있었나…….

실장님, 원래 임재준은 어떤 놈이었습니까…….

정 실장은 뉴스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아무 말도 없었다.

재준도 피식 웃고는 정 실장이 보고 있는 뉴스를 봤다.

-일본이 BIS 자기자본비율을 도입하여 은행 건전성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재준은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에 벌떡 일어섰다.

정 실장은 예민해진 재준을 눈치챘는지,

“왜 그러십니까?”

“실장님…….”

재준은 정 실장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제 시작되려나 봅니다.”

“도련님?”

이제 슬슬 외환위기의 공포가 현실로 드러나고 있었다.

한국 정부는 저 뉴스가 의미하는 것을 알아차렸어야 했다.

하지만 BIS의 필요성을 일부러 외면한 이들이 판치는 한국에서는 그저 옆 나라가 수렁에 빠지는 꼴을 보며 비웃기 바빴었다.

일본의 발 한쪽을 집어삼킨 수렁이 한국에 번지는 것도, 끝내 온몸이 집어삼켜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늪이 되는 것도 모른 채.

BIS 자기자본비율.

한마디로 은행은 예금주가 돈을 인출했을 때 가지고 있어야 할 자본을 말한다.

현실적으로 모든 예금주들이 동시에 인출을 요청할 경우는 설정 자제가 불가능하니까 대충 이정도면 가능하다는 퍼센트를 국제결제은행의 주도하에 정한 것이다.

기준은 8%.

기준치 아래로 떨어지면 더 이상 국제사회에서 은행 취급을 받지 못한다.

국제 은행계에서 퇴출되는 것이다.

이런 은행은 3일도 못가서 파산하고 만다.

정말 우리가 아는 은행이 3일을 버티지 못하냐고?

그렇다.

1997년이지만, 일본의 4대 증권사인 야야마니 증권사가 모디스의 신용하락으로 채권 발행이 막히자 단 3일 만에 자진 폐업한 예가 이를 증명했다.

이처럼 국제적으로 채권 발행이 막히면 거대 증권사도 3일 만에 망한다.

인출이 적은 증권사도 망하는데 일개 은행이야 말할 것도 없다.

아마 하루도 못 버틸 것이다.

은행이란 자신의 단기, 장기 채권을 발행해서 돈을 융통시켜야 한다.

급할 땐 채권을 발행하고 이익이 나면 남의 채권도 사고, 서로서로 상대 은행의 채권을 사고팔며 상부상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BIS가 8% 이하라고 알려지면 어떤 은행도 그 은행의 채권을 사주지 않는다.

그러면 돈이 돌지 않는다.

예금을 인출해 줄 수 없다.

쉽게 말해,

은행은 돈을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들어오기가 무섭게 대출을 해 준다.

은행이 먹고 사는 길이 대출이자이니 이건 당연한 일이다.

은행은 대부분의 돈을 대출해 주어서 남아 있는 돈이 항상 부족하다.

그런데 갑자기 대기업이 예치해 두었던 큰돈을 인출해 달라면?

이때 채권을 발행하면 다른 은행들이 이를 사준다.

그 돈으로 대기업에 인출해 주고 만기가 도래한 대출금을 상환받으면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다른 은행 채권을 사준다.

은행은 고고한 백조처럼 우아한 자태를 뽐내지만, 뒤로는 채권을 사고파는 발버둥이 애처로울 정도다.

그런데 고고하게 뻗대던 일본 은행에 BIS비율을 맞추라고 미국이 칼을 든 것이다.

이제 일본 은행은 발등에 불이 떨어져 발버둥이 시작되었다.

추가 대출을 금지하는 건 물론, 대출해 준 돈을 회수할 것이다.

1996년까지 일본 은행이 돈을 제일 많이 빌려준 나라는 바로 우리나라였다.

당장 한국에 대출해 준 돈을 갚으라고 난리를 칠 것이다.

IMF 사태의 전조가 울리기 시작됐다.

“도련님…… 보이십니까?”

“네, 이제 일본이 대출 회수에 들어갈 겁니다.”

“그렇겠죠.”

“저희 현재증권 대출 현황과 예금 현황을 살펴서 우리가 먼저 일본과 연을 끊어야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식사 후 연구실로 가시죠.”

“네.”

여기.

할머니가 국밥 두 그릇을 가져다주었다.

냄새부터 식욕을 자극하는 국밥이었지만 재준은 정신이 온통 뉴스에 가 있어서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쉽다.

이런 국밥을 먹으면 ‘허, 역시 맛있어.’ 하면서 할머니를 보며 웃어주는 건데.

다 먹고 난 후 재준은 빤히 바라보고 있는 할머니에게 미안한 맘이 들었다.

다른 손님들도 물리고 오직 자신을 위해 음식을 만들어 주었는데.

“잘 먹었습니다.”

“네. 또 오십시오.”

할머니는 나를 할아버지라고 생각하는 듯 깍듯했다.

“네.”

너무 미안한데.

재준은 밖으로 나가다 말고 할머니를 돌아봤다.

근처에서 자유은행을 본 것 같은데.

“할머니, 은행 어디 사용하세요?”

“은행이야. 요 앞에 있는 자유은행인데.”

하필…… 사라질 은행을 거래하시네.

IMF 사태로 유동성 문제로 문을 닫는 은행 중 하나였다.

예금자들은 한동안 예금을 찾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

묻기를 잘했네.

“은행 바꾸세요. 좀 걸으시더라도 국도은행으로요.”

“아, 네.”

“꼭 바꾸셔야 합니다. 자유은행 망합니다.”

“네?”

“꼭 바꾸세요.”

“네, 알겠습니다.”

“다음에 와서 확인할 겁니다.”

후후.

“네.”

할머니가 재준의 다그침에 살포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준도 할머니를 아련히 쳐다보며 안심이 되는 듯 미소를 지었다.

왠지 마음의 짐이 덜어진 것 같다.

“정 실장님, 가시죠.”

“네, 도련님.”

할머니는 ‘도련님’이란 말에 멀어지는 재준을 바라보았다.

은행이 망한다…….

***

정 실장은 현재증권 지하 주차장에 들어섰다.

지하 주차장에는 현재증권 경제정책연구실로 이어지는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현재증권 경제정책연구실.

여기 실장이 오늘 재준을 보좌한 정태균 실장이다.

임병달 회장의 직속 연구실로 정태균은 실장이란 직위로 불리지만 부사장급 대우를 받고 있었다.

아니, 임병달 회장 직속이기에 그 이상의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 했다.

재준도 궁금한 점이 몇 가지 있는 곳인데.

인사기록엔 경제정책연구실의 직원에 대한 기록이 전무했다.

당연히 정태균 실장에 대한 기록도 보이지 않았고.

도대체 정 실장은 정책연구를 언제 하는 건지 궁금했다.

정 실장은 항상 할아버지 임병달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으니까.

밤새워서?

엘리베이터가 지하에 도착했다.

“타시죠. 도련님.”

“네.”

엘리베이터에 타자 12층에 있는 경제정책연구소로 직행했다.

“정 실장님. 이 엘리베이터는 중간에 누가 타지 않나요?”

“네. 저와 회장님 외에는 탈 수가 없습니다.”

“중간에 내릴 수는 있고요?”

“네. 저는 내릴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은 탈 수 없습니다.”

“기회비용이군요.”

“그렇습니다.”

편리하거나 특권을 누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란 소리다.

기업의 회장의 시간과 직원의 시간은 가치가 다르다.

회장이 누군가와 점심을 먹으면, 다음날 회사 직원에게 100% 보너스가 지급될 수도 있다.

하지만 직원은 누군가와 점심을 먹으면, 다음날 회사 직원에게 보너스가 지급될 확률이 거의 제로에 가깝다.

회장이 시간의 기회를 소비하게 만든다는 것은 비용으로 산정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하다.

가끔 이런 회장님이 있지 않은가?

직원들과 같은 엘리베이터를 쓰는 소탈한 회장님.

현실적으로 그건 소탈한 게 아니라 이제 할 일이 없는 회장일 것이다.

즉, 그 회장은 선택의 기회가 없다는 뜻이다.

땡!

12층에 엘리베이터가 서고 문이 열리자 바로 사무실로 연결되었다.

가운데 책상 하나와 정면 벽 전체를 장식한 모니터들.

전 세계 증시와 각종 그래프들이 실시간으로 움직였다.

좌측과 우측의 벽들은 각종 서적들과 논문들로 가득 차 있었고.

정 실장, 이 사람도 자료를 광적으로 집착하는구나.

근데.

이 넓은 공간에 왜 아무도 없나?

재준은 허탈해져서 사무실 구석구석을 스캔했지만 휑했다.

진짜 아무도 없는 거야?

“정 실장님 경제정책연구실…….”

“네, 맞습니다. 저 혼자입니다.”

왜?

“이해가 안 되는데요.”

“이해 안 되실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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