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증권 재벌의 천재 손자가 되었다-10화 (10/477)

제10화 엮인 놈들이 왜 이렇게 많아(2)

10억.

최재철이 제시한 금액이었다.

“원화, 달러 둘 다 가능하시다고요?”

“그렇습니다.”

재준은 최재철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이러면 우린 공범이 되는 건가요?”

여전히 무거운 얼굴을 한 최재철에게 재준은 다시 빙그레 웃었다.

“어디 보자. 사실 10억도 그리 탐탁스러운 금액은 아닌데…….”

이 자가…….

가느다란 신음이 최재철의 입술에서 새어 나왔다.

“근데, 얼마를 원하는지 물어볼 게 아니라, 먼저 재경기계가 시장에 몇 주를 던질지를 알려주셔야 제가 정확한 금액을 책정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죠?”

흠.

최재철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틀린 말이 아니라 반박을 할 수 없어 더욱 짜증이 났다.

설마 우리가 50%를 다 던진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텐데…….

기업은 주가가 천정부지로 올라간다고 해서 마구 던질 수는 없다.

누군가 앙심을 품고 시장에 유통되는 주식을 매집하는 동시에 보유자들을 설득해서 우호지분을 확보한다면 경영권을 빼앗길 수도 있으니까.

재준이 최재철을 달래듯 말을 꺼냈다.

“자, 재경기계 주식을 기관이 20% 정도 소유하고 있고 시장에 30% 정도. 뭐, 정확히 29.9% 정도 풀려있겠지요. 재경기계는 50.1% 이상은 보유 중일 것이고. 주가가 10만 원이니 최소한 10%~20%는 팔 수 있겠죠.”

팔기만 하면 위험하다.

“판 후에 주식이 1만 원 선에 안착할 때쯤 다시 주워 담아서 50% 이상을 보유하려는 계획이실 겁니다. 맞나요?”

다시 사는 게 더 중요하다.

“…….”

“에잇 하고 용기 있게 20만 주 풀었다가 1만 원 선은 좀 그렇고, 한 3만 원 선에서 다시 매집한다고 해도…… 가만있자, 그럼, 얼마야? 최소 100억은 넘게 벌 수 있네요?”

최재철은 부르르 떨던 눈가에 힘이 들어갔다.

“임재준!”

최재철의 노기 어린 목소리가 방안에 쩌렁하게 울렸다.

하지만.

짝짝짝.

재준은 최재철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박수를 세 번 치며 집중시켰다.

“자, 이렇게 합시다.”

“…….”

“솔직히 코 묻은 돈 100억을 뺏어 먹기는 그렇고…….”

“코 묻은 돈?”

“아닌가? 아, 기름때 묻은 돈이 정확하겠네요. 밤낮 납기일에 쫓겨 야근에 철야까지 했을 텐데. 저 보세요. 김 차장님, 차장이란 직함에 작업복이 말이나 됩니까? 이런 분들의 돈을 내 귀히 대접해 드려야 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원하는 게 뭐지?”

“어, 부사장님, 화를 내는 건 괜찮은데. 반말은 하는 거 아닙니다.”

“이…….”

최재철의 눈에 재준은 완전히 딴 사람이었다.

재경기계가 현재증권과 비교하면 규모에서 그리 큰 차이가 나는 기업은 아니라 생각했다.

다만, 약점을 잡혀서 이도 저도 못하는 신세일 뿐.

하지만 눈앞에 있는 임재준은 그 약점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있었다.

상대의 약점을 이용하는 것은 협상의 기본이다.

하지만 그것도 상대에게 예의를 다하면서 해야 나중을 기약할 수 있지 않을까.

지금 임재준은 어설픈 예의 따위는 생각도 하지 말라는 듯 몰아치고 있었다.

다음에도 이런 일이 있다면 아예 기업 자체를 공중분해 시키겠다는 듯.

그것도 저렇게 싱글싱글 웃으면서.

이놈이 이정도 인물이었나.

항간에 떠도는 망나니, 말종이란 소문과 너무 달라.

재준이 다시 싱글싱글 웃는다.

“이렇게 합시다. 부사장님.”

“이번엔 또 뭐지?”

“난 그냥 헬기 타고 돌아가겠습니다.”

“그리고 보유지분을 시장에 풀겠다?”

“아닌데요. 지금 다 잡은 고기를 왜 놓아줍니까? 나랑 약속만 하나 해주면 됩니다.”

“약속…… 말해보세요.”

“시장에 던지려는 지분을 9월 1일에 시장에 던지는 거로.”

“9월 1일?”

“네. 9시 땡 하면 바로 던지면 됩니다. 아마 12만 원까지 올라있을 겁니다. 그 이상일 수도 있고.”

이건 무슨 속셈일까?

이건 재경기계에 확실히 유리한 조건이다.

설마 노경범을 죽이려는 속셈인가?

9월 1일로 작전을 종결지으려는 것인가?

최재철은 아직 노경범에게 작전을 종료할 시간을 통보받지 못했다.

지금 재준과 노경범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걸 직감할 수 있었는데, 어디에 자신의 패를 던져야 할지 고민했다.

임재준이 헬기를 타고 와서 보여준 모습은 지금까지 자신이 실제로 본 모습이나 소문으로 알던 임재준이 아닌 건 확실했다.

노경범을 확실히 밟아 버릴 것 같은 위압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노경범 뒤에는 현재증권도 어쩌지 못할 황선달이란 명동 사채시장의 거부가 있다는 걸 생각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일단은 시간을 벌어야 한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그럼, 매도 용지를 받아 오십시오. 서로 확실히 해야 하니까.”

“매도 용지…….”

임재준…….

이건 생각 못 했다.

서로 구두로 끝낼 줄 알았는데,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겠다…….

재준은 김재수 차장을 보며 빙긋 웃었다.

“이 근방에 현재증권이 있으니 김 차장님이 금방 갔다 오실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 부사장님.”

최재철은 이미 결정된 사항에 대해 망설이는 모습을 보여주긴 싫었다.

“김 차장, 갔다 오세요.”

“정말 갔다 옵니까, 부사장님?”

“당연한 걸 왜 묻습니까. 어서 다녀오세요.”

“아, 네.”

“20만 주 9월 1일 하한가에 매도 예약 잡으세요.”

“네.”

김재수 차장이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을 전부 흩어 보고는 진저리를 친 후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최재철은 김 차장이 나간 걸 확인한 후 재준에게 시선을 돌렸다.

얼굴에 짜증이 사라지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임재준 씨…… 뭐라 불러야 할까요? 전무? 부사장?”

“하하, 그냥 임재준 씨입니다. 이제 갓 회사에 입사한 신입이거든요.”

“신입 사원이라고요?”

“네, 그것도 오늘이 첫 출근인데. 일을 너무 크게 벌였네요.”

하하하.

최재철은 허무한 듯 크게 웃었다.

“임병달 회장님의 손자라 이건가요?”

“글쎄요. 할아버지라면 좀 더 생각하셨을 겁니다. 저야 혈기가 왕성해서 바로 헬기 타고 온 거지만.”

“무슨 일로 여길 온 겁니까?”

“제 사수가 강병구거든요. 가 보라고 하더라고요.”

“강병구가…… 사수라…….”

허, 대단한 건지. 무모한 건지.

아무튼.

현재증권 내에 임재준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없단 소리였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무도 임재준의 민낯을 본 자가 없다.

언제부터 변한 걸까?

아니면 지금까지 숨긴 걸까?

왜?

“현재증권 주인이 바뀌는 겁니까?”

“아직은 아닙니다. 아니지, 당분간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제가 그리 빨리 승진할 가능성이 없거든요. 아주 오래도록 현재증권을 다녀 볼 생각입니다.”

“그렇군요.”

최재철 부사장,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부사장님. 작전 끝날 때까지 긴장을 놓지 마십시오. 제가 언제 다시 나타날지 모르니까.”

“다시 안 보는 게 좋겠습니다.”

“그럼 더 좋고요. 오늘 일은 서로 함구하는 게 좋겠지요.”

“그게 재경기계에 도움이 된다면요.”

“좋네요.”

최재철은 지난번 지하 주차장에서 봤던 재준과 지금의 재준을 겹쳐 보고 고개를 저었다.

달라도 너무 달라.

한 시간 후.

재준은 김 차장이 가져온 매도 용지를 확인하고 정 실장과 함께 헬기에 올랐다.

헬기가 떠오르며 재경기계가 작은 상자처럼 보이자 정 실장이 재준에게 물었다.

“노경범과 강병구가 작전한다는 건 어떻게 알았습니까?”

“직감!”

“네?”

“하하하. 농담입니다. 둘의 모니터를 보고 알았습니다. 애널리스트와 펀드 매니저는 다른 영역의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 둘의 모니터에 같은 종목에 같은 그래프가 있었습니다. 거의 불가능한 일이죠. 그리고 애널리스트가 매집을 한다는 것도 우습고. 재경기계 주가도 너무 올라있고, 이러면 너무 뻔했습니다.”

그걸 단번에 알아채셨다?

“그런 건 언제 배우신 겁니까?”

“제 호주 유학 성적 아시죠?”

“네…….”

“어떻든가요?”

“그건…….”

그럴 줄 알았다.

임재준 이놈이 호주에서 공부할 리가 없지.

“호주 유학 동안 객장에서 살았습니다. 나름 할아버지가 증권사 회장인데, 공부는 못해도 주식은 좀 잘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렇군요.”

“할아버지에겐 비밀입니다. 이건 제가 할아버지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서프라이즈이니까요.”

“하하, 네. 알겠습니다.”

정 실장은 재준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그냥 모른 척하시면 돼요.”

“그리고, 참, 그 재경기계. 매도 용지는 중간에 취소하고 바꿀 수 있을 텐데요.”

“알아요. 하지만 바꾸지 않을 겁니다. 아니, 오히려 노경범에게 전화해서 작전 마감일을 9월 1일로 맞추려고 할 겁니다.”

“음. 혼선을 준 거군요.”

“네. 지금쯤 노경범에 득달같이 전화해서 한창 떠들어 대고 있겠지요.”

“그러다 도련님 이야기가 나오면 어쩌시려고요?”

“그럼 좋은 거 아닙니까? 최재철 부사장이 노경범에게 제 이야기를 하면 노경범이 어떻게 나올까요? 둘을 불러들인 진짜인 놈에게 연락하지 않을까요?”

“그렇군요. 알아도 작전을 중단할 수 없다…….”

이 작전의 전말을 다 아는 재준은 진짜인 놈, 돈 댄 놈, 황선달의 존재도 알고 있었다.

“맞아요. 노경범 뒤에 있는 돈 댄 놈에게 허락을 받아야 할 겁니다. 당연히 재경기계는 그 돈 댄 놈에게 자금을 융통한 상태일 거고요. 둘이 목줄이 걸려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돈 댄 놈에게 제 정체를 말하면 어떻게 될까요?”

“난리가 나겠군요. 보안이 생명인 작전을 들켰다. 그것도 현재증권의 손자에게? 아마 돈 댄 놈이 최재철 부사장은 몰라도 노경범 정도는 산속에 생매장할 수도 있겠군요.”

“네, 그러니 최재철 부사장은 제 존재를 끝까지 숨기려 할 겁니다. 혹시 최재철 부사장이 노경범에게 말해도 노경범이 최재철 부사장에게 함구령을 내릴 거고요. 근데 아까 보니 최재철 부사장 그 사람, 생각은 있어 보이던데. 그 사람 손에서 제 존재는 묻힐 겁니다.”

정 실장이 실없이 웃었다.

“보통이 아니십니다.”

“에이, 실장님도 다 아는 걸 무슨…….”

“그럼, 노경범은 어찌 막을 겁니까?”

“그건 이제 생각해 봐야죠. 저희 펀드 매니저 종목당 운용 금액 한도가 얼마입니까?”

“중소기업은 50억이 한계입니다.”

“그럼 최소한 돈 댄 놈이 150억은 투자했단 소리네요.”

“노경범이 어느 정도 매집했다고 보십니까?”

“시중 물량의 20%는 매집했지 않았을까요?”

“그럼 20만 주 정도.”

“네, 매수와 매도를 혼자 놀았을 거니까 손실은 꽤 입었을 겁니다. 이제 한 번 크게 매집을 하고 찌라시가 은연중 뿌려지면서 며칠간 상한가를 밟을 겁니다.”

“그럼, 사람들이 달려들고.”

“며칠 더 돈을 뿌리다가 한방에 쾅 하고 내려치면 끝인데. 여기 제동이 걸린 겁니다.”

“9월 1일 말이군요.”

“네. 최소한 머리털 한 움큼은 빠질 겁니다. 9월 1일에 모든 작전을 종료하려면 중간에 세부 일정 조정이 장난이 아니겠죠.”

“9월 1일 재경기계 물량을 노경범이 받아 버릴 수도 있잖습니까?”

“아니요? 그건 저희가 먹을 겁니다.”

“네? 그게 무슨…….”

“아직 정확하진 않으니까 나중에 설명해 드릴게요.”

재준의 머리에 할아버지의 비호를 받는 강호석이 떠올랐다.

이 게임을 제대로 마무리 지으려면 숨은 실력자가 필요했다.

정 실장이 건네준 인사기록에는 강호석은 스캘핑의 숙련자라고 적혀있었다.

재준이 원하는 스캘핑의 속도를 강호석이 발휘해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현재증권에 다 왔습니다.”

헬기 조종사의 말에 재준은 창밖을 보았다.

여전히 옥상에서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보였다.

객장이 끝나고 휴식을 취하는 직원들이었다.

이제 객장이 끝났으니 증권회사는 지금부터 내일을 위한 새로운 전쟁 준비를 할 것이다.

우선 해외 증시를 정리해야 하고, 환율과 현물 시세도 파악해야 하고, 혹시나 내일 벌어질 기업들의 동태를 예측해야 한다.

재준은 옥상에 있는 사람 하나하나를 봤다.

모두 현재증권을 평생직장으로 알며 사는 사람들.

이 시대는 직장이 곧 자신의 삶이었던 시대였다.

내가 저들을 정말 잘 이끌 수 있을까.

앞으로 닥칠 외환위기에 저들 중 단 한 명도 거리로 내쫓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

이때, 정 실장이 재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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