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증권 재벌의 천재 손자가 되었다-9화 (9/477)

제9화 엮인 놈들이 왜 이렇게 많아(1)

“공시를 안 했다…….”

하긴 뭐, 공시를 하나 안 하나 회사에 손해가 가는 일은 없을 테니까.

1996년이면 불성실공시에 대한 처벌은 솜방망이가 아니라 공기방망이 수준이라 큰 의미가 없었다.

2000년에 가서야 공정공시제도가 나오는데, 그전에야 기업들이 공시의 중요성을 알 리도 없고, 신경도 안 썼을 거고.

불공정공시로 금융감독원에 신고하겠다는 협박은 먹힐 리가 없다.

그럼, 재경기계를 옥죌 수 있는 수단은 주가인데…….

다행히 현재증권은 재경기계의 대주주다.

왜? 노경범이 열심히 매집을 해 놓았으니까.

수틀려서 현재증권이 보유 물량을 시장에 쏟아내면 재경기계 주가는 순식간에 절벽을 맞는다.

더해서 오폐수 처리 장비를 개발도 허위였다는 보고서를 뿌려 버리면 주가는 당분간 회복이 어려울 것이고.

어쩌면 상장 폐지 될 수도 있다.

악감정을 가진 증권사를 상대하기에는 중견기업인 재경기계는 능력 자체가 턱없이 부족했다.

재준의 눈치를 보는 김재수 차장은 변명조차 꺼내지 못했다.

이렇게 얼어 있어서 대화가 되지 않을 것 같은데.

재준은 분위기를 냉탕에서 온탕으로 급선회했다.

“자, 자. 김 차장님. 어쨌든, HD자동차에 메인 부품을 납품한다는 건 굉장한 호재입니다. 이 소식은 바로 애널리스트에게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재준의 말에 차장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정말입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뭐?

김재수 차장은 할 말이 있는 듯 혀를 자꾸 입술 밖으로 밀어냈다.

재준은 온탕이 아니라 사우나의 열기를 내뿜어 주었다.

“에이, 하실 말씀 있으시면 하세요. 차장님. 우리 사이에 뭘 걱정하십니까?”

“아, 그…… 그러니까.”

“네, 편하게. 편하게.”

“……그 보고서 한 달 후에 올려주셔도 되겠습니까?”

한 달 후에?

“그러니까 자동차 부품에 대한 보고서를 한 달 후에?”

“네.”

정 실장의 눈치를 살피며 차장은 하얀 편지 봉투를 재준에게 내밀었다.

“먼 길 오셨는데 여비에 보태시라고 준비했습니다.”

재준이 봉투를 바라보며 지그시 웃자 차장은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부탁했다.

“한 달 후로 미뤄주십시오. 저희도 준비할 게 있어서 말입니다.”

한 달씩이나 걸린다…….

이 사람이 기껏 온탕을 만들어 줬더니 냉탕으로 가고 싶어 안달이네.

이러니 내가 온탕을 지속할 수 없잖아.

냉탕 갈 수밖에.

“해 드리죠.”

너무 선뜻 대답하는 재준의 태도에 차장의 눈빛이 흔들렸다.

“감사합니다…….”

“뭔 감사까지. 아닌가? 차명으로 자사주를 매입하시는 걸 눈 감아 드리는 건데. 감사받을 만한가?”

“네?”

“아니지. 차명이 아니지? 친인척을 동원하면 차명은 아니겠네. 그렇죠?”

이 시대는 이렇게들 한몫씩 챙겼으니 이해는 했다.

그런데 김재수 차장은 직원들 핑계를 읊어댔다.

“그게 아니라. 그동안 고생한 직원들을 생각하면…….”

어라. 직원들에게 기회를?

정말?

어째 과거에도 창의성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아니지, 미래가 창의성이 없는 거지.

어쨌든 뭔가 대승적인 척하는 꼬락서니 하고는.

사실은 자신과 윗선 주머니 채우려는 속셈이면서.

“이보세요. 차장님. 그러니까 고생한 자사 직원들을 챙기려고 작전에 휘말린 수만 명의 피눈물은 괜찮다?”

“작전…… 그게 아니라…….”

“괜찮아요. 뭐 서로 좋자고 하는 일인데 그 정도는 묻고 가도 상관없겠네.”

“아, 네. 그게…… 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근데, 나는?”

“네?”

“나도 뭔가 보상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

“그렇잖아요. 오폐수 처리 장비 개발도 안 했는데 한 것처럼 소문난 거 눈감아 줘. 자동차 엔진 부품 개발한 거 널리 알려 줘. 그럼 나한테 뭔가 있어야 하지 않나요?”

재준은 책상에 놓인 봉투를 김재수 차장 쪽으로 밀었다.

“이 돈은 차장님 용돈 하시고. 그 정도론 헬기 기름값도 안 나오는데. 헬기 타보셨어요? 의외로 기름 많이 먹어요.”

김재수 차장의 눈빛이 아래로 떨어졌다.

“저에겐 이 이상의 권한은 없습니다.”

재준은 실망스럽다는 듯 몸을 뒤로 젖히며 혀를 찼다.

“그럼, 권한 있는 사람을 불러오세요. 지금까지 내가 괜히 차장님 시간을 뺏었네. 이거 미안합니다.”

내가 생각해도 말 참 싸가지 없게 한다.

재준은 자신이 대화하면서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생각 이상으로 거침없는 행동이 머리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내가 사람들을 아래로 보고 있다.

이런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아마 미래와 과거라는 키워드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뭔가 이 시대의 사람들보다 20년 이상을 더 산 느낌.

당신들이 아무리 머리를 써도 난 당신들 위에 있다는 우월감.

또한, 미래를 알고 있는 내 앞에서 이 시대 사람은 과거의 유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재수 차장은 우물쭈물하자 재준이 다그쳤다.

“뭐해요? 나가보세요. 제가 현재증권을 대표해서 왔는데 회사 대표님 정도는 데려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지, 뭐, 헬기 기름값을 대 줄 사람이면 충분할 거 같기도 하고.”

“네. 그럼.”

김재수 차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허리를 90도로 구부리고 문을 향해 걸어갔다.

나가면서 다시 한 번 돌아보는데 정 실장이 눈을 부라리자 부르르 떨며 빠르게 사라졌다.

김재수 차장이 사라진 걸 확인한 정 실장이 재준에게 물었다.

“도련님. 유학 가서 협상에 대해서 배우신 겁니까?”

“배우긴 했지요. 근데 이건 협상이 아니잖아요.”

정 실장이 재준을 보며 실없이 웃었다.

망나니 임재준도 호주 MBA 과정을 이수했으니 배우긴 했을 것이다.

하지만 기껏해야 1996년까지의 협상 기법일 것이고 재준은 실제 2022년까지 선진화된 협상 기법을 알고 있었다.

실전에서 써먹는 게 오늘이 처음이라 그렇지.

그런데 실전을 겪어보니 협상의 기법이란 것들이 약자들의 변명 같았다.

협상에 대한 조언은 수도 없이 퍼져 있다.

선입견을 품지 마라, 주어진 권한을 활용하라, 서두르지 마라, 결론을 내리지 마라, 대안을 미리 생각하라, 뭐 등등.

근데 막상 해 보니 재벌 앞에선 협상의 기법이고 나발이고 소용이 없었다.

이미 결정을 내고 시작하는 건데 협상이 될 리가 없었다.

“정 실장님. 재경기계에서 누가 올까요?”

“도련님. 그 난리를 쳤으니 부사장이 직접 올 겁니다.”

“사장이 아니라 부사장이요?”

“재경기계는 지금 부사장이 실세입니다. 최재철 부사장이라고 강단이 보통이 넘는 사람입니다.”

최재철 부사장…….

그래 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이지.

아니, 재벌 손바닥 안인가.

***

김재수 차장은 다급한 마음에 부리나케 부사장실로 직행했다.

비서가 두 팔을 휘두르며 달려오는 차장을 보자 당황한 나머지 벌떡 일어섰다.

“김 차장님. 무슨 일 있으세요?”

“황 비서, 부사장님 안에 계시지?”

“네.”

“급하니까. 부사장님 연락 좀 해줘.”

“네.”

-김재수 차장님 오셨습니다.

놀랐지만 사무적인 말투를 잃지 않은 비서가 수화기를 들었다 몇 마디 하고 내려놓았다.

“들어가세요.”

“고마워.”

“근데 회사에 무슨 일 있습니까?”

“옥상에 헬기 떴잖아. 헬기.”

아, 헬기.

황 비서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김재수 차장은 부사장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부사장님.”

“무슨 일이야?”

“옥상에 헬기요.”

“헬기가 왜?”

“현재증권에서 왔습니다. 헬기 타고요.”

“누가? 노경범이 헬기를 타고 온 거야?”

“그건 아니고…… 아주 젊은인데…… 직위가 높은 것 같습니다. 자신이 현재증권 대표 자격으로 왔다고…….”

“대표?”

“네.”

“젊은 놈이 헬기를 타고 왔는데…… 자기가 대표라고? 설마…… 회장 손자인가? 그…… 임 뭐더라. 임재준. 그래, 임재준. 그 망나니 아냐?”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젊은 거 보면 그런 거 같습니다.”

최재철 부사장은 손가락으로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임재준인 것 같은데.

그 날라리가 왜?

노경범이 실수라도 한 건가?

1년 전 자금을 융통하기 위해 명동 사채 시장을 찾은 적이 있었다.

명동의 큰손 황선달에게 사정을 얘기하고 자금을 융통했다.

그리고 한 달 후 황선달은 추가 자금을 지원한다며 현재증권 노경범을 데리고 왔었다.

그리고 또 한 달 후 노경범을 만나러 현재증권을 방문했을 때 임재준을 보았다.

지하 주차장에서 건들건들거리며 임병달 회장에게 카드를 건네받던 그 모습.

세상 편하게 사는 놈이었는데.

머리는 백발로 염색하고 가죽 재킷에 큼지막한 오토바이를 몰고 사라지던 모습이 1년이 지나도록 뇌리에서 잊히질 않았다.

“혼자 왔어?”

“아니요. 눈매가 매서운 사람이 보좌하고 있었습니다. 심장이 얼 것 같았습니다.”

날카로운 인상이면,

“정 실장이군. 정 실장이 보좌한다면 임재준이 확실한 것 같은데. 김 차장이 보기에 첫인상이 어때?”

“제가 보기에…….”

김재수 차장은 재준을 떠올리며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외모는 핸섬하지만 말투가 양아치 같습니다, 아니 또 들어보면 지적인 것 같기도 한데 물어뜯을 것처럼 말하는 것 같고. 재벌 손자라기보단 깡패에 가깝다고 해야 하나…….”

“뭐?”

임재준이?

깡패…… 딱 어울리네.

“임재준이 날 보자고 한 건가?”

“딱 부사장님을 보자고 한 건 아닌데. 제가 너무 버거워서. 그분을 상대하기엔 부사장님밖에 없습니다. 일단 가 보시죠.”

“버겁긴! 사람. 망나니 재벌 손자 하나 해결 못 하고. 알았으니 앞장서.”

자신밖에 없다는 말에 어깨를 한껏 부풀린 부사장을 향해 김재수 차장이 물었다.

“부사장님, 임재준이 망나니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김 차장은 본 적이 없으니 모르겠지. 재벌들 사이에선 소문이 파다한 인간 말종이지. 뭐 그렇게 된 사연은 있는데. 그래도 그놈 인간 되긴 글렀어.”

“그런가요…….”

아니던데…….

김재수 차장은 그럴 리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간 있었던 내용을 부사장에게 소상히 보고하며 걸었다.

***

김재수 차장과 체격이 건장한 최재철 부사장이 미팅룸에 들어섰다.

그는 재준보다는 뒤에 있는 정 실장을 보고 짧게 미간이 좁아졌다 펴졌다.

그리고 그 앞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자신을 쳐다보는 젊은이는 본 적이 없었다.

임재준이 이렇게 멀쩡할 리가 없을 테고.

애써 젊은이를 무시하고 정 실장에게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정 실장님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최재철 부사장을 무시하며 정 실장은 재준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최재철 부사장입니다.”

재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최재철을 보았다.

거, 사람 되게 두껍게 생겼네.

어디 뚫고 들어가려면 힘깨나 들겠는데.

정 실장이 재준을 모시고 있다는 확신이 들자 최재철이 재준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최재철입니다.”

그제야 재준이 일어나서 최재철 부사장의 손을 잡았다.

“임재준입니다.”

“네?”

진짜 임재준?

순간 최재철이 그럴 리가 없다는 표정으로 재준을 찬찬히 살폈다.

이렇게 멀쩡한 모습으로?

최재철이 절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말을 해 보면 알겠지.

“기름값을 원한다고 들었습니다.”

“아, 얼핏 차비를 준다고 들어서요.”

“그럼 기름만 채워주면 되겠습니까?”

“뭐, 그 정도면 만족합니다.”

최재철은 김재수 차장에게 넌지시 지시했다.

“현금으로 1억만 가져와.”

그 말은 들은 재준이 피식 웃었다.

“부사장님. 회사 보유 주식이 50%가 넘는 거로 알고 있는데. 보유 주식 수가 100만 주 정도 되시죠? 아닌가? 그 사이 어디다 팔아먹었나? 작전 중이니 그럴 리는 없을 것 같고. 정 실장님 지금 재경기계 주가가 얼마지요?”

“10만 원 넘었습니다.”

“와우, 100만 주면 얼마라는 겁니까?”

최재철이 재준을 보고 눈가를 부르르 떨었지만, 재준은 여전히 싱글벙글 웃었다.

“부사장님. 1억이면 헬기 가다가 서요.”

“그렇습니까?”

“그럼요. 제 헬기는 주유통은 크고 효율이 떨어져서 기름을 엄청 잡아먹거든요.”

“생각보다 협박에 능하시군요.”

“협박? 제가요?”

“그럼, 아닌가요?”

“그런가? 그럼, 없던 일로 하시죠.”

재준은 일어서며 손을 내밀었다.

“죄송했습니다.”

재준이 이 자리에서 나가면 재경기계는 엄청난 타격을 입는 건 뻔했다.

1년 전 주가는 1만 원.

지금은 10배인 10만 원으로 올라서 있는 상태였다.

현재증권이 주식을 쏟아내면 원 상태인 1만 원이 문제가 아니었다.

떨어지는 주식은 바닥이 없다.

아마 천 원까지도 떨어질 수도 있었다.

자존심 내세우다 회사 말아먹는다.

“10억. 현금이든 달러든 원하시는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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