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이놈을 어떻게 잡지(5)
현재증권 회장실.
갑자기 재준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는 정 실장의 미간이 혐오감으로 찌그러졌다.
안 좋은 일이란 걸 직감한 임병달 회장이 물었다.
“무슨 일인가?”
“도련님입니다.”
“재준이가 왜?”
“울산에 출장 간다고 합니다. 운전을 부탁하셨습니다.”
“울산?”
“재경기계에 간다고 합니다.”
임병달 회장의 눈빛이 순식간에 변했다.
“갑자기 왜?”
“강병구 대리가 출장을 보내는 것 같습니다….”
“신입이 뭘 안다고 벌써 출장을 가?”
“…….”
말도 되지 않는 상황에 회장의 눈썹이 파르르 떨며 위로 올라갔다.
“펀드 매니저나 애널리스트쯤은 되어야 출장을 갈 수 있는 거 아냐? 시장의 흐름을 채 파악하지 못하는 신입에게 업체 탐방을 맡긴다는 건 강병구 대리 근무 태만 같은데. 재준이는 아직 신입이야. 재무제표도 볼 줄 모를 텐데. 뭘 안다고 보내?”
“아무래도 신입 길들이기 같습니다.”
“뭐라? 감히 내 손자를 길들여? 이놈들이…… 내 당장!”
“회장님. 나서시면 안 됩니다. 도련님의 대처를 지켜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임병달 회장의 노여움이 회장실의 분위기를 폭풍전야처럼 고요하게 만들었다.
철이 없는 손자고, 남에게 이익보다 해만 끼치고 살아온 손자였지만, 그래도 임병달 회장에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하나밖에 없는 손자였다.
자신의 손자를 길들인다는 말에 속에서 천불이 올라왔다.
하지만 어쩌랴, 여기서 나설 수는 없는 것을.
손자가 신입 사원부터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겠다고 했으니 믿어야 했다.
입사 첫날부터 회장 손자라고 감싸고 돌면 손자나 자신이나 사원들에게 좋게 보일 리 없다.
이제 점심시간이 다가오는 시간이니 울산에 갔다 오면 저녁이 다 되어서 돌아올 것이다.
‘길바닥에서 시간 다 보내게 생겼네.’
임병달 회장은 즉시, 명령했다.
“정 실장. 헬기 보내”
“…….”
“자동차로 언제 다녀오겠어. 당장 띄워.”
“알겠습니다.”
***
헬기 이착륙장.
헬기라….
재벌이면 무엇이 달라질까 생각했는데…….
재준은 말로만 듣던 헬기를 눈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할아버지…… 재벌은 애정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시는 겁니까.’
드라마에서만 보았고 뉴스에서만 보았지 실제 헬기를 타고 출장을 가게 될 줄이야.
“정 실장님은 제 일거수일투족을 할아버지께 모두 보고하시나요?”
“당연한 일입니다. 도련님에 대한 건 보고라기보단 보호에 목적이 있습니다.”
“보호라구요?.”
“회장님께선 도련님을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 같다고 생각하십니다.”
“하긴 저는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손자군요.”
자식도 아니고 손자.
한참 위에서 내려다보고 계시겠네.
“타시죠.”
“네.”
이윽고 헬기가 떠오르자 재준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현재증권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며 좋다고 웃고 있는 익숙한 인물들이 보였다.
노경범과 강병구.
좀 더 즐기고 있어라.
그 얼굴이 어떻게 변하는지 궁금하니까.
작전주.
알면서 당하는 게 작전이다.
순식간에 치고 올라가는 그래프를 본 사람들은 멍하니 구경만 하는 게 아니다.
지금까지 상승폭이 가장 높은 주식을 찾아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직은 상승 여력이 남아 있다고 스스로 위안 삼는다.
더 올라갈 수 있다.
겨우 10배 올라갔잖아.
어서 올라타야 해.
욕망이 들끓는다.
1만 원이 100만 원이 되고, 100만 원이 1억이 되고, 1억이 수백억이 되는 건 꿈이 아니다.
가능해.
100배 올라간 주식이 이렇게나 많은데, 이번은 겨우 10배 올라간 것뿐이잖아.
인간은 그래프 뒤에 숨겨진 돈의 본심을 읽지 못한다.
그래프가 이야기하는 것 같다.
어서 와! 여기 돈이 있다.
솔직히 아직 벌 기회가 한참 남았다니까.
그래프가 달콤하게 속삭이는 말에 현혹되어 자신의 잔고를 확인해 본다.
이 정도는 담가도 괜찮을 것 같은데.
이제 사람들은 상승하는 그래프에 돈을 던진다.
그러나 멀리서 떨어져서 객관적으로 보면 이 정신 나간 사람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상승하는 그래프에 삶을 던진다는 것이다.
돈이 아니라 삶을.
왜!
중간에 정지한 엘리베이터는 올라갈지 내려갈지 알 수가 없는데, 무조건 올라간다고 믿고 달려든다.
1층에 정지한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꼭 중간에서 타려 한다.
심지어 작전은 엘리베이터를 꼭대기 한 층을 남겨 두고 사람들에게 손짓한다.
거짓된 정보가 쏟아진다.
이쯤 되면 종착역이 다가왔다는 걸 알아야 하는데.
그러고 보니 한 놈 더 잡아야 하는구나.
확성기를 잡은 놈.
돈을 댄 놈,
돈질한 놈,
떠들어 댄 놈.
하나하나 찾아서 다시는 내 눈앞에 띄지 않게 잘게 잘게 분질러야 한다.
솔직히 그들이 작전하든 말든 상관은 없다.
이 시기에 일어나는 작전만도 두 손 두 발을 동원해도 다 세지 못할 정도인데, 일일이 찾아다닐 정도로 열혈 청년은 아니니까.
단, 2년 후에 쫓겨나는 회장 할아버지를 위해서,
이제 재벌이 되어 잘살아야 하는 나를 위해서,
작전 없는 클린한 청정구역이 되어야 할 현재증권을 위해서.
남의 돈으로 생색내는 놈들은 반드시 척결해야 한다.
특히, 클린한 청정구역인 현재증권.
이건 반드시 이루어야 할 일이다.
증권회사는 기본적으로 투자자의 수수료로 먹고사는 회사다.
구린내를 풍기는 놈들이 있다는 소문이 돌면 바로 망하는 수순을 밟는다.
굳이 2년 뒤에 재무 개선으로 물러나지 않아도 회사 주가가 폭락해 이사회에서 쫓겨날 것이다.
실제로 건실한 현재증권이 몰락한 건 IMF로 금융권이 허물어지자, 두려움을 느낀 투자자들의 환매 요청에 대응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재준이 의지를 불태우고 있는 중에,
“곧 울산에 도착합니다.”
재준은 타오르는 열감을 식히기 위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울산의 풍경은 마치 어린아이가 미니 자동차를 일목요연하게 정렬해 놓은 장난감 도시 같았다.
‘울산이라.’
HD라는 그룹이 만들어 낸 울산 자동차 선착장을 지난 후 건평만 2000평이 넘는 5층짜리 공장에 재경기계라는 글자가 보였다.
재경기계는 건실한 중견기업으로, 자동차 부품을 주로 생산하며 산업용 장비를 생산하는 기술력이 탄탄한 기업이었다.
헬기 조종사는 무선을 주고받은 후 재경기계 빌딩 옥상에 착륙했다.
벌써 재경기계 옥상으로 누군가 올라와 지켜보고 있었다.
재준이 헬기에서 내려서자 정 실장이 뒤를 따랐다.
헬기의 바람을 뚫고 재경기계 사람이 다가와 공손히 물어왔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네. 현재증권에서 왔습니다.”
“헬기 타고요?”
“네. 제 헬기 제가 타고 온 건데. 문제 있습니까?”
“아, 아닙니다. 안으로 드시죠.”
***
6평 남짓한 미팅룸.
정 실장이 재준에게 재경기계에 관해 알리는 중에 작업복 차림의 50대 초반의 남자가 들어왔다.
남자는 처음 재준을 보고 잠시 멈칫하더니 천천히 다가왔다.
현재증권…… 누굴까?
“안녕하십니까?”
바지에 손을 닦더니 두 손을 내밀었다.
두 손으로 재준의 손을 잡고 흔든 후 명함을 내밀었다.
“여기.”
재준은 명함을 받았다.
경영지원팀 차장, 김재수.
김재수 차장은 재준보다는 뒤에 서 있는 정 실장을 살피고는 마른 침을 삼켰다.
‘저 사람은 누굴까? 딱 봐도 보통 인물은 아닌데. 저런 사람이 보좌하는 이 젊은이는 현재증권 후계자라도 되는 거야?’
재준은 명함을 책상 우측에 놓았다.
“제가 현재증권에서 일한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명함이 없습니다.”
“아, 네. 괜찮습니다. 혹시 기업 탐방 오신 겁니까?”
기업 탐방.
증권사 직원이 예고 없이 기업을 탐방하는 것은 매우 놀랄 일도 아니고 아주 흔하다.
애널리스트가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아니면 펀드 매니저가 저평가된 종목을 찾기 위해 회사를 직접 방문하며 가치를 확인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보통의 경우 눈치 빠른 대리급 직원이 그들의 주머니에 돈 봉투를 넣어주며 대접했고. 애널리스트는 그 기업의 장점을 부각한 보고서를 시장에 내놓았다.
“현재증권을 대표해서 왔습니다. 그냥 기업 탐방으로 해두죠.”
이제 영혼을 탈탈 털어 볼까.
“아, 대표해서. 현재증권 대표. 아, 앉으시죠.”
김재수 차장이 두 손으로 자리를 권하고 자신도 맞은편에 앉았다.
재준이 자리에 앉자 뒤에 정 실장이 서서 김재수 차장을 노려봤다.
김재수 차장은 정 실장의 위압감에 눈치를 보며 연신 흘러내리는 땀을 닦았다.
‘현재증권 대표라고? 헬기 타고? 헬기는 회장만 타는 거 아냐? 그럼, 회장이 헬기를 내줬단 소리잖아. 가만, 직위가 어떻게 되는 거야? 나이로 보면 20대인데, 이 나이에 달 수 있는 직위가…… 이사? 상무? 설마 전무? 그보다 왜 불쑥 나타난 거지?’
김재수 차장은 마른침을 삼키며 다시 정중히 인사했다.
“대한민국 일등 증권사인 현재증권에서 재경기계를 직접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등은 무슨. 이렇게 불쑥 찾아와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자! 이제 협상이라는 걸 해볼 건데.
협상의 방식 중 러시아식 협상이란 게 있다.
일단 자리에 앉아 진흙이 가득 묻은 부츠를 벗어 바닥에 내리치며 털기 시작한다.
알 수 없는 욕지거리를 혼자 중얼거리며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든다.
왜 이렇게 하냐고?
당연히 분위기를 주도해야 내가 먹을 게 많으니까.
단 상대는 러시아란 나라를 막 나가는 나라라고 인정해야 효력이 있다.
요즘 이 협상을 가장 잘하는 나라가 북한이다.
재준은 오늘 협상은 러시아식으로 나가려 한다.
완전히는 아니고 절반 정도만.
“혹시 오늘 실장님과 저희 직원이 만나기로 했다는데…….”
“아, 네. 방금 강병구 대리한테 연락을 받았습니다. 오후쯤에 사원 하나가 방문할 거라고. 근데 실장님을 만나러 오신 겁니까?”
“딱히 그런 건 아니고. 지나가는 길에 들렀습니다. 저희 애널리스트가 재경기계에 관심이 많다고 해서.”
“안 그래도 좋은 소식이 있어 연락드리려고 했습니다.”
“좋은 소식이라면….”
“이 문서부터 봐주십시오”
김재수 차장이 내민 서류 표지엔 진한 고딕체로 ‘자동차 엔진 부품 개발 성공’이라고 지역 신문에 실린 기사와 함께 관련 자료가 백과사전 두께만큼 분철돼 있었다.
재준의 시선이 그 기사에 머물자 차장은 처음 상을 받은 아이처럼 신나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오래 숙원 사업이었던 엔진 부품을 자체 개발했습니다. 지금은 테스트 진행 중이고 올해 안에 HD자동차에 납품할 예정입니다.”
“대단하군요.”
차장이 기분 좋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하하, 여기저기 자잘한 자동차 부품만 납품하며 고생 많이 했습니다.”
‘뻔히 오폐수 처리 장비로 온줄 알 텐데. 딴 이야기를 하네.’
텅!
재준은 김재수 차장이 한창 떠들고 있는데 탁자에 문서를 내 던졌다.
“차장님. 오폐수 처리 장비는 어떻게 되고 있어요? 완성했습니까?”
“네?”
재준의 질문에 차장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오폐수 처리 장비 개발, 잘 되고 있냐고요.”
“그게…….”
“시작은 한 겁니까?”
“그 건은 기획 단계부터 좌초될 운명이어서…….”
이건 또 무슨 이야기야?
“왜죠?”
“그건…….”
“차장님. 저희 애널리스트가 오폐수 처리 장비에 대해 보고서를 작성 중인 걸로 아는데. 어째 이래? 설마 모르고 있는 건 아니죠?”
“알고는 있지만…….”
“알고 있다? 그럼 지금 저희 현재증권 애널리스트가 애초에 만들지도 못할 장비에 대해 시장에 보고서를 내야 한다. 맞습니까?”
재준의 물음에 차장은 당황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게 사정이 있습니다. 오폐수 처리 장비 개발은 시간과 자금이 굉장하게 들어갑니다. 정부가 공약한 보조금을 철석같이 믿고 진행했는데 지금까지 보조금은 들어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때가 벌써 1년 전인데…….”
차장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어갔다.
“자금이 없는데 어떻게 일을 진척시키겠습니까? 정부에선 자신들을 믿고 시작하라고 아우성이지만 언제 바뀔지도 모를 상황을 100% 신뢰할 수도 없구요. 그래서 그 건은 잠시 중단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니까, 언제 다시 시작하게 될지 모른다. 이거지요?”
“네……. 맞긴 한데.”
“그 덕에 주가는 이미 올라가 있는 상태이고. 맞아요?”
“네.”
“지금 와서 오폐수 처리 장비 이야기를 사실대로 말하면 주가는 곤두박질칠 거고. 그래서 유야무야 넘어가겠다?”
재준이 몰아치자 김재수 차장은 재준의 시선을 피해 한숨을 쉬었다.
재경기계가 오폐수 처리 장비를 개발 중인 건 사실이지만 잠정 보류됐었다.
이미 주가는 올라있는 상태이고 작전이 걸렸으니 앞으로 더 오를 게 뻔했다.
“차장님, 오폐수 처리 장비가 중단된 거 아무도 모르죠?”
“그게…… 네. 아직 공시하지 않았으니 모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