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증권 재벌의 천재 손자가 되었다-7화 (7/477)

제7화 이놈을 어떻게 잡지(4)

주식시장은 거짓말이 태반이다.

일확천금을 노리는 일반 투자자들은 준비 없이 시장에 뛰어든다.

대부분 시장이 호황을 이룰 때.

지금은 시장이 고점에서 비명을 지를 때였다.

1994년 1100포인트를 넘어,

1996년 990포인트는 조정 기간이네 뭐네 하면서 더 가파르게 상승할 것이라고 사람들 희망에 바람을 한껏 불어넣어 부풀리고 있을 시기였다.

이 시대에 주식은 상승장에 올라타는 것이 정석이었다.

하락장에서 주식을 산다?

2022년이라면 이만한 호재가 없다며 달려들겠지만, 1996년엔 지나가는 개도 배꼽을 잡고 비웃을 짓이었다.

호황에서 초심자의 행운을 맛본 사람들은 어려운 용어를 공부하며 차츰차츰 덫에 빠진다.

기술적 분석, 미래가치 등등.

주식시장에 뛰어든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금융의 복잡함 속에서 기법을 발견하고 확신하기 시작한다.

기법 속엔 비밀정보가 있다고 신앙처럼 믿는다.

있긴 개뿔 아무것도 없다.

주식시장에 휘날리는 모든 기법은 전부 과거의 자취일 뿐이다.

미래는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데 꼭 그렇게 될 것처럼 믿어 버린다.

과거에 3파까지 뛴 주식이 이번에도 3파까지 뛴단다.

나름 공부를 했다는 개미는 안전하게 1파를 보내고 2파에 뛰어들어 3파의 몫을 챙길 수 있다고 뛰어든다.

그러나 여지없이 날개 없이 추락하는 그래프를 보게 된다.

실패를 맛본 개미는 또 다른 신비로운 분석기법을 애타게 찾으며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찾듯 여기저기 돌아다닌다.

그리고 결국, 찌라시가 자신에게 다가온다.

선한 하늘에서 자신만을 위한 계시를 내려주듯이.

찌라시.

비밀 정보라는 유혹 앞에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의 쌈짓돈을 턱 내놓는다.

어이없지.

이런 엉터리 정보에 일반인들은 속을 테고, 세력들은 이들의 순진함을 이용하며 막대한 이익을 취하고.

재준은 그 사실에 가슴이 뻐근했다.

인터넷이 발달한 미래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 1996년에는 버젓이 벌어지고 있었다.

오폐수 처리 장비 개발?

클릭 몇 번이면 사실 여부를 바로 확인할 수 있는데.

작전?

이런 작전에 빠지는 놈이 어디 있을까.

근데 여기 있네.

정보 노출이 투명하지 않은 시기였던 1995년부터 1997년에 유독 작전주가 난립했다.

강병구와 노경범. 미꾸라지들.

감히 현재증권을 이용해 시장을 흔들어!

재준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간신히 가라앉힌 다음, 영어 자료를 펼치고는 다시 한 번 짜증이 났다.

아니, 근데 이건 웬 기초영어야?

이걸 꼭 번역해야 하는 거야?

키보드 두드리는 시간이 더 걸리겠네.

1시간 남짓 영어 자료를 해석하고 문서로 정리한 후, 재준은 프린트해서 모니터에 열중하는 강병구 눈앞에 들이밀었다.

“다 했습니다.”

한창 집중해 있던 강병구는 재준이 서류를 내밀자 짜증을 냈다.

“벌써? 대충한 거 아냐?”

강병구는 자료를 낚아채 훑어보았고 깔끔하게 정리된 자료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이 자식 봐라.’

재준이 내민 문서를 보며 고개를 갸웃하던 강병구는 딴지를 걸려고 서류를 툭툭 치며 말했다.

“어이, 신입. 너 여기 있는 전문용어 다 알고 해석한 거야?”

뭐? 이런 한심한 놈.

“전문용어라니요?”

“여기, 이거.”

강병구는 Recycling이란 단어를 가리켰다.

설마.

재활용이 전문용어? 제정신이야?

Recycling. 중학교 수준의 영어단언데?

아닌가? 이 시기엔 Recycling이란 용어보다 ‘아나바다’가 더 적절하려나.

그러겠네.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고. 즉, ‘아나바다’ 운동이 정부의 환경정책으로 자리 잡은 터라 그 표현이 더 익숙하겠다.

한편으론 Recycling을 전문용어로 인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 해도 Recycling을 전문용어로 지적하다니, 좀 어처구니가 없었다.

대학씩이나 나온 놈이.

재준의 황당한 표정을 읽어서일까?

이어지는 강병구의 행동은 가관이었다.

강병구는 기계 그림 옆에 깨알같이 쓰여 있는 영어를 가리키며 재준을 다그쳤다.

“여기 기계 옆에 쓰인 전문용어들을 다 안다고?”

재준은 강병구가 가리키는 것을 바라보자 속으로 욕이 나왔다.

이 사람, 영어가 목적이 아니라 그냥 나를 괴롭히려는 거구나.

재준은 강병구의 꼽을 주려는 의도를 눈치채곤 일부러 큰 소리로 대답했다.

“저, 선배님. 그 글자는 볼트, 너트, 엔진, 벨트 등 전문적인 용어가 아닙니다.”

“뭐?”

강병구는 서둘러 영어를 읽어 보고는 얼굴이 빨개졌다.

‘아···씨,’

“알아, 임마. 내가 말한 건 그게 아니잖아.”

“그럼 어디가 잘못됐습니까?”

말문이 막힌 강병구는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느끼곤 손사래를 쳤다.

“뭘 봐.”

‘또 시작이구나’하는 표정으로 사람들이 자신의 모니터로 고개를 돌렸다.

“야, 강병구. 신입 교육 똑바로 안 해?”

느닷없는 고함에 모두의 시선이 문 쪽으로 돌아갔다.

잔뜩 인상을 찌푸린 노경범이 들어서고 있었다.

펀드 매니저가 애널리스트 방에 막 들어와서 고함을 쳐도 되는 건가?

재준도 어이없는 표정으로 노경범을 쳐다봤다.

방화벽이 전부 소용이 없구나.

“어, 선배. 오셨어요?”

노경범은 대뜸 강병구의 팔을 잡고 끌어당기며 재준이 만든 프린트 자료와 강병구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소리 없이 입술을 나불거렸다.

‘미쳤어, 이걸 왜 신입한테 시키는 거야?’라고 말하는 게 다 보였다.

강병구도 눈꼬리는 내리며 소리 없이 오물거렸다.

‘괜찮아요. 정리는 제가 할거예요.’라고 하는 것도 다 보였고.

그러니까 저 둘은 해외자료를 잘 버무려서 재경기계가 개발한 것처럼 꾸미겠단 말을 인상을 쓰고 입만 뻥긋거리며 말하고 있었다.

이렇게 어설퍼도 작전이 되는 시대인가.

“됐고. 너 시간 없으니까. 빨리 출발해.”

노경범이 강병구에게 대뜸 지시하자 강병구가 세상 힘들다는 표정을 지었다.

“선배, 이 시간에 가면 저 오늘 중으로 서울로 못 돌아와요.”

“그럼, 내가 가냐? 아니면 약속 펑크낼까?”

“그러면 아침에 이걸 시키지 말고 가라고 했어야죠.”

강병구가 자신의 모니터를 가리켰다.

재준의 시선도 모니터를 향했는데, 거기, 재경기계 차트가 보였다.

노경범이 재준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고 강병구에게 소리쳤다.

“이 자식이 빠져 가지고. 당장 갔다 와.”

“정말 오늘은 안 됩니다. 약속 내일로 미루겠습니다.”

“야, 거기 실장이 내일 아침에 미국으로 출장이라고. 오늘 아니면 안 돼.”

“저도 시간이 없는데…….”

“그냥 가서 자료만 받아 오는 거니까 빨리 갔다 와.”

“중요한 것도 아닌데…… 나중에 해도 되는 거 아닙니까?”

“이게 진짜.”

노경범의 윽박에 강병구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재경기계가 무슨 인천도 아니고…….”

재경기계?

이놈들이 뭘 꾸미는지 알려면 나도 갔다 와야 하는데.

재준이 잔뜩 인상 쓴 노경범과 시무룩하게 입술을 내민 강병구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선배님들. 중요한 거 아니면 제가 갔다 오겠습니다.”

“네가?”

“뭐라고?”

둘이 동시에 재준을 쳐다보는데 강병구는 구세주라도 만난 표정이지만 노경범은 범죄자라도 보듯 노려봤다.

“자료만 받아 오는 거라면 제가 갔다 오겠습니다.”

“네가? 네가…… 네가! 갈 수 있지. 그래, 갈 수 있어. 그렇지 않나요, 선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네가 가.”

“아니, 아니. 잘 생각해 봐요. 가서 자료만 받아 오는 거잖아요.”

“네가 가.”

노경범이 단단하게 말을 하며 강병구에게 눈썹을 한 번 치켜뜨고 몸을 돌려 나가버렸다.

음.

‘마지막의 눈을 치켜뜬 건 내가 알아서 처리하라는 신호가 맞아.’

강병구가 노경범이 사라진 자리에 대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메모지를 꺼내 뭔가 적더니 재준에게 내밀었다.

“자, 출장이라 생각하고 갔다 와.”

메모지를 받은 재준이 거기에 적힌 주소를 보고, 티는 내지 않았지만 내심 놀랐다.

재경기계, 울산 301번지

태풍인쇄소, 충무로. 22가에 3번지.

울산?

재경기계가 울산에 있었어?

가깝지 않을 거란 생각은 했지만, 울산은 너무 먼데…….

정 실장 도움을 좀 받으면 가능하려나.

어쨌든,

재경기계는 가야 한다.

그런데, 태풍인쇄소는 뭐야?

재준은 호기심이 일었다.

이럴 땐 모든 걸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해 봐야 한다.

메모지의 주소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재준을 향해 강병구가 별거 아니란 듯이 말했다.

“알고 보면 가까워. 왜? 불만 있어? 고속버스 타고 후딱 갔다 오면 되잖아.”

“…….”

“그리고 내일 아침 일찍 인쇄소 들르고. 그렇다고 늦게 출근하지 말고. 정시에 출근한다. 수석 신입이 그 정도는 껌 아닌가?”

껌?

껌이지. KTX가 있다면. 지금이 1996년이라 이건 츄잉 껌이 아니라 고래 심줄 껌이라 문제지.

고속버스로 얼마나 걸리려나…….

가 보면 알겠지.

“알겠습니다.”

재준은 강병구의 능글거리는 표정에 가볍게 웃는 얼굴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바로 정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강병구는 재준의 뒷모습을 보며 눈앞의 생쥐를 괴롭히는 못된 고양이처럼 입가에 비웃음을 걸었다.

***

현재증권 옥상.

노경범의 호출에 헐레벌떡 옥상으로 뛰어온 강병구는 노경범에게 담배를 권한 후 자신도 담배를 입에 물었다.

멀리서 보는 그들의 모습에선 상하 관계가 명확한 대장과 똘마니가 연상되었다.

담배를 입에 물고 하늘을 향해 연기를 뿜어대는 노경범의 얼굴엔 짜증과 피곤이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마무리 잘했어?”

“그럼요.”

“인쇄소는?”

“오늘 번역 버무려서 이메일로 넘길 겁니다, 인쇄는 내일 아침에 돌릴 예정이고요.”

“재경기계는 언제 갈 거야? 오폐수 처리 장비 어떻게 진행되는지 확인은 해야지.”

“재경기계 박스권에 넣으려면 제가 지키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신입 보냈습니다.”

“신입?”

“네. 신입.”

“신입을 왜 거길 보내.”

“팀장님이 아까 보내라면서요?”

“내가?”

“네. 사인하셨잖아요. 눈으로 그놈 보내라고.”

“내가?”

“네.”

노경범은 담배를 뻑뻑 빨고는 강병구를 쳐다봤다.

“내가?”

“이미 울산으로 출발했는데요?”

“벌써?”

“네.”

“너, 미친 거 아냐? 그놈이 가서 사고 치면 어쩌려고.”

“수석인데 잘하겠지요.”

“수석? 강호석도 수석이야. 그놈 잘하는 거 봤어?”

“잘하잖아요. 강 선배 나름 실력 있어요.”

“그게 실력이야? 실적도 안 나오는 놈이? 증권회사는 실적 좋은 게 실력이야. 강호석처럼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인간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실적이 좋을 리가 없어. 너도 잘 새겨들어.”

“네.”

노경범이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재경기계에 전화 한 통 넣어. 실수하지 말라고.”

“네.”

“그리고 명동 애들이랑 미팅 한 번 하자. 다음 종목 정했…….”

투투투투투.

갑자기 들려오는 시끄러운 헬기 소리에 노경범이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뭔 놈의 헬기가 갑자기…… 어쨌든, 다음 종목 정했다.”

“벌써요?”

“분위기 타오를 때 몇 건 더 하고 빠져야지. 언제까지 남의 밑에서 눈치 보며 작업 치냐. 독립해야지.”

“독립! 저도 벌써 기대됩니다.”

강병구가 담배 한 대를 더 꺼내 불을 붙이려는데 헬기의 바람 때문에 꺼졌다.

“진짜, 저놈의 헬기가…….”

“자, 여기 다시 붙이십시오.”

불을 붙인 노경범이 다시 물었다.

“그 신입 말야. 가서 나대진 않겠지?”

“나대긴요. 어디 신입이 기업 가서 말을 하겠습니까. 가만히 대접 받고 차비 받으면 좋아 죽을 겁니다.”

“차비, 하긴. 차비는 꿀이지.”

“에이, 맛보기 전에 다시 뺏어야죠.”

“너도 정말 양아치다. 그걸 뺏게.”

강병구의 양아치 짓이 무척이나 맘에 든 노경범은 입술을 실룩거리며 비열하게 큭큭댔다.

“저는 공부 잘하는 놈들이 딱 질색입니다. 답답하고, 고지식하고. 융통성도 없고 말입니다. 출장 다녀오면 실컷 고생시킬 겁니다.”

노경범은 인상을 쓴 후 강병구에게 명령하듯 말했다.

“강호석한테 다시 보내. 잘난 놈은 잘난 놈들끼리 잘해보라고.”

“좀 굴리다가 보내야죠.”

“그럴 시간 없어.”

“에이 그래도…….”

“시간 없다.”

“알겠습니다.”

“내가 서형길 실장한테 신입 걸리적거린다고 말할게. 강호석한테 보내라고.”

노경범은 강호석을 떠올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강호석.

허허실실 웃지만 속을 내비치지 않는 놈이다.

재능을 타고난 덕분에 항상 노경범의 발목을 잡았던 라이벌.

노경범은 그 녀석이 자신을 빤히 쳐다볼 때마다 기분이 몹시 나빴다.

마치 ‘너 그렇게 살지 마’라고 훈계하듯 바라보는 눈빛은 노경범을 열 받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때마다 노경범은 잘난 척하는 강호석을 깔아 뭉개버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불필요한 감정으로 일을 망치고 싶지는 않았고 언젠가는 반드시 기회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돈으로 기를 죽여 놓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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