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이놈을 어떻게 잡지(3)
강호석이 떨떠름한 음성으로 한동안 노경범에 대해 떠들었다.
마침내 다 떠들었는지 시간을 보았다.
“재준 씨, 이제 가야겠어요.”
“알겠습니다.”
“…저랑 같이 갑시다. 제가 옆에 있어야 노경범이 그나마 좀 심하게 대하지 않을 거예요.”
“친하십니까?”
“좀, 나만의 생각일지는 모르지만, 노경범과 저는 같은 대학교, 같은 과에 심지어 입사 동기입니다.”
“아, 네.”
재준은 알면서도 되물어 봤다.
그뿐이랴, 입사시험 수석은 강호석이 했지만, 실적은 늘 노경범이 앞선 것도 알고 있었다.
“안 부러우세요? 제가 알기론 노경범 선배는 실적이 탑이라던데.”
강호석은 ‘네가 그걸 어떻게 아니?’라는 표정을 짓더니,
“증권은 실적보다 중요한 게 있습니다. 딱히 뭐라 표현하기 힘든데…… 굳이 말하자면 ‘생존’? 정도로 표현이 되려나? 하하.”
“생존이요?”
“네. 하하.”
강호석은 자신이 말하고 어색한지 웃었다.
‘생존, 이 사람에게 뭔가 있다.’
강호석이 먼저 서둘러 일어서자, 뒷말을 음미하며 재준이 일어섰다.
강호석이 말했다.
“자, 갑시다!”
***
재준과 호석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
펀드 매니저가 상주하는 사무실로 들어섰다.
강호석은 저 멀리 창가 옆 구석 자리로 다가가더니. 노경범의 칸막이를 톡톡 두드렸다.
눈에 쌍심지를 켜고 돌아본 노경범은, 범인이 강호석임을 확인하고는 콧김을 내뿜으며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노경범, 신입 데려왔어. 서형길 실장님하고 통화했지?”
“늦었네.”
“회사 분위기도 익힐 겸해서 내가 데리고 다니느라 좀 늦었다.”
“두고 가.”
짧은 말 한마디 이외에 그 어떤 반응도 없었다.
노경범은 계속 모니터를 응시하며 키보드 숫자판을 두드렸다.
주변에 냉랭한 공기가 만들어졌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강호석은 그에게 재준을 소개했다.
“임재준 씨. 이리 와서 인사해요. 노경범 팀장이에요.”
재준은 노경범에게 다가서며 인사했다.
“잘 부탁드립니…….”
재준의 인사를 끊으며 노경범은 신경질을 냈다.
“내가 모니터에 집중할 때는 나한테 말 걸지 마. 움직이지도 말고.”
“야, 노경범. 인사는 받고 세워둬야 하는 거 아니냐?”
“…….”
“노경범!”
강호석의 화가 섞인 목소리에 그제야 뒤돌아보는 노경범.
얼굴엔 짜증이 가득했고, 마지못해 꾹 참고 있는 듯했다.
“나 지금 예민하니까 3층, 강병구한테 신입 서포트 하라고 해. 그놈이 나보다 나을 거다.”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모니터에 시선을 돌리며 강호석과 임재준을 투명인간 취급하는 노경범.
‘못됐군.’
재준은 속으로 혀를 끌끌 차며 노경범의 시선을 따라 각종 그래프가 가득한 모니터를 보았다.
시난건설, 대식식품, 로버트전기, 재경기계…….
로버트전기? 재경기계?
불현듯 재준의 머리를 스치는 역사의 기록들.
‘잠깐. 1996년…… 이건?’
로버트전기와 재경기계는.
작전주였다.
재준은 빠르게 노경범의 모니터를 다시 훑었다.
그의 눈에 비친 로버트전기는 이미 작전이 끝나서, 남아 있는 잔여 주식을 털어내고 있었고.
매집을 끝낸 재경기계는 주가를 끌어 올릴 준비를 하는 상황인 듯했다.
‘현재증권 탑 펀드 매니저가 작전을 친다?’
재준은 지난 삶에서 증권 업계의 역사를 줄줄이 외웠다.
특히 작전주들에 끼어든 재벌 2세, 3세들의 행태를 조사했기 때문에 웬만한 작전주는 모두 알고 있었다.
‘작전으로 자기 잇속을 챙기는 놈이라…… 그것도 내 회사의 돈으로.’
이 시대의 작전은 대략 300만 주에서 500만 주 발행된 종목이 타깃이었다.
300만에서 500만 주에서 대주주 또는 관계된 사람이 30%~50%를 소유했고. 기관은 보통 20% 정도 소유했다.
시장에 유통 중인 주식은 30%~50% 정도, 대략 150만에서 250만 주가 된다.
하루 거래량은 상장 주식 수의 1% 미만이 거래되니, 1% 미만이면 1만 주에서 2만 주가 거래되고 15일 동안 매집에 나선다면 15만 주에서 30만 주 정도.
즉, 30만 주를 움직일 수 있는 자금만 받쳐준다면 바로 작전에 들어갈 수 있었다.
2만 원짜리 주식이라면 60억이고, 1만 원짜리 주식이면 30억이면 되었다.
종목당 대략 50억 정도의 자금을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이 있는 펀드 매니저는 회사 자금으로 은밀히 융통하고 수익률만 먹고 자금을 원래대로 돌려놓으면 끝.
은밀한 융통이란 차명계좌도 있고 다른 증권회사 창구를 이용할 수도 있고…… 생각을 현실로 만드는 방법은 많았다.
자금이 모자라면 전주를 물색하면 되었다.
명동에 널리고 널린 게 사채업자들이니까.
재경기계는 좀 돈이 들어갈 주식인 것 같은데…….
한 200억에서 300억은 필요하겠네.
1995년부터 1998년까지, 주식시장에선 이렇게 작전이 난무했다.
이러니.
‘노경범이 작전주를 들고 있는 게 우연은 아니겠지. 작전 중인게 확실하네. 재경기계는 혼자 하기 버거우니 파트너가 있을 텐데…….’
재준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퍼져나가는 생각을 멈추고, 앞장서서 사무실을 나가는 강호석의 뒤를 천천히 따라가면서 주변에 있는 모니터들을 빠르게 스캔했다.
‘어떤 놈이냐…….’
작전 주를 들고 있는 직원이 또 있는지 확인했다.
처음 눈에 들어온 펀드 매니저 모니터.
태얀산업, 대선화섬, SS텔레콤, 바바리안, 신홍와코루, BYB.
그래프를 보니 저PER주들이다.
주가를 주당순이익으로 나누었을 때 수치가 낮은 주식들.
PER이 낮다는 건 시장에서 저평가되었다는 것이고 앞으로 반드시 오를 수 있는 주식이었다.
‘근데 저PER은 언제 오를지 모르는 주식이다. 짧아도 5년이니, 인내심이 대단해야 할 텐데.’
왜 인내심이 필요할까?
이 시대에 나름 현대 금융이라는 외국인이 될 만한 저PER주와 저PBR주들을 싹쓸이했으니까.
나머지는 저PER이긴 하지만 회사가 관심을 받기에 실적의 변화가 없었다.
저 종목을 보라.
BYB는 속옷 만드는 회사인데 갑자기 속옷이 잘 팔릴 일이 있을까?
갑자기 속옷을 두 장씩 겹쳐 입는 유행이 생기기 전에는 주목받을 일이 없는 종목이다.
다음 펀드 매니저의 모니터에는 아직도 건설주, 중공업주를 붙들고 오르기만 기다리며 깜빡거리는 마우스 커서가 보였다.
1980년대 시장을 화려하게 누볐던 종목이 바로 건설과 중공업이었다.
이 종목을 붙들고 있는 이들은 과거의 영광이 다시 올 거란 미련을 놓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주식의 유행은 돌고 돌지 않아요.
재준은 펀드 매니저들을 스쳐 가며 계속 모니터를 훑었다.
대향산업, 만국제강, 삼육전자, 한성주철관, 성공기업, 태얀산업, 대성통운, 혜성.
저PBR주들이다.
주가를 주당순자산으로 나누었을 때 수치가 낮은 주식들.
이들 또한 저PER와 같은 주식이다.
나무 기둥 붙잡고 코끼리 다리라고 우기고 있었다.
나무는 움직이지 않아요.
이제 그만 놓아 주세요.
저PER이나, 저PBR이나 외국인이 선점해서 더는 큰 이익을 내기 힘든 주식인데.
재준의 눈에 반짝이는 한 종목이 눈에 들어왔다.
대향산업!
‘그래도 대향산업은 2007년까지 들고 있으면 엄청난 수익을 낼 수 있지. 과연 저 사람이 대향산업을 10년 동안 보유할 수 있을지가 문제지만.’
진심 이야기해 주고 싶다.
다른 펀드 매니저들은 대부분 블루칩, 우량주를 들고 있었다.
POSK, SS전자, HD자동차 같은 물량이 많아 사고팔기에 편한 종목들.
재준은 그들을 보며 아쉬워했다.
펀드 매니저들이 특색이 없기 때문이었다.
특정 기업군을 파고드는 펀드 매니저가 없구나.
기업에 대한 분석과 미래 가치를 제대로 적용하지 못한 투자.
외국인 모방을 교과서적인 투자로 잘못 알고 있는 이들.
‘애널리스트들의 보고서를 실전에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나? 아니면 애널리스트들이 보고서를 제대로 못 만드는 건가?’
15년 후인 2010년만 해도, 주식에 투자하는 일반인들까지 PER이나 PBR, 우량주, 가치주 따위의 용어에 익숙했다.
시장에서도 저PER주나 저PBR주들은 이미 기관이나 외국인, 심지어 개미들도 선점하여 유망한 가치주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야 했다.
2020년부턴 기업의 가치가 아닌 주가 버블과 폭락에서 이득을 취하는 시기였고.
전문성을 갖춘 애널리스트들의 보고서를 토대로 펀드 매니저는 합리적인 투자를 했다.
하지만 이곳은 전혀 딴 세상,
‘이들을 욕할 건 아니지, 아직 경험이 없으니까.’
***
3층, 애널리스트 사무실.
그 공간 끝, 가장 좋아 보이는 자리에 강병구 대리가 있었다.
어느새 강병구 대리의 자리에 도착한 호석이 천천히 따라오는 재준에게 빨리 오라며 손짓했다.
“강 선배님.”
강병구 대리가 일어나 강호석에게 먼저 인사를 했다.
“어, 여기 이번에 수석인 신입 사원 임재준이야.”
“잘 부탁드립니다.”
“어서 오세요.”
강병구 대리는 사람 좋은 웃음으로 인사를 받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재준에게 악수를 청했다.
마주 잡은 손에 악력이 전해졌다.
손에 힘은 왜 주는 거지? 반갑다는 건가? 내가 너보다 위라고 위세를 떠는 건가?
악수를 푼 강병구 대리는 강호석 팀장과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일상의 대화를 이어갔고, 잠시 후,
“노경범 부탁이니까. 재준 씨 좀 부탁해.”
“네, 염려 붙들어 매십시오.”
강호석이 가다가 돌아보며 애써 고개를 돌리고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그러자 강병구 대리의 눈빛이 달라졌다.
“어이, 신입.”
강호석 팀장이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말투였다.
“수석이라며?”
“네, 맞습니다.”
“영어는?”
“잘하는 편입니다.”
“그럼 이거 먼저 해석해.”
강병구 대리는 재준에서 200페이지 분량의 원서 뭉치를 던졌다.
“해석이요?”
“왜? 싫어?
”아닙니다.“
“하늘 같은 선배가 하라면 하는 거야. 알았어?”
“…….”
“저기 구석에 가서 자료 해석하고 깔끔하게 정리해. 점심시간 전까지 나한테 갖고 오고.”
재준은 강병구 대리가 내민 서류를 받아들며 강병구의 모니터도 빠르게 훑어보았다.
로버트전기, 재경기계.
노경범의 모니터에 있는 종목과 같은 종목.
‘……또 작전주라.’
그렇다는 건, 너희 둘이 파트너구나.
강병구와 노경범.
애널리스트와 펀드 매니저라.
찰떡궁합이네.
강병구의 지시대로 구석 책상에 앉은 재준은 그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생각에 잠겼다.
펀드 매니저와 애널리스트 사이에는 서로 의견을 주고받을 수 없게 방화벽이라는 장치가 있다.
펀드 매니저끼리도 그렇고 애널리스트와 펀드 매니저 사이에도 그렇다.
일반인들은 의아하게 여기겠지만 이 제도는 정말 필요했다.
둘이 짜고 펀드 매니저가 대량 매집한 주식을 애널리스트가 추천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애널리스트 한 명으로 안 된다면 수십 명이 같은 종목을 추천하면?
방화벽은 특정 기업의 주가를 조작하거나 심지어는 둘이서 짜고 정직하지 못한 행위를 할 개연성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어디까지나 공개된 자료를 주고받아야 한다.
……이놈들을 어떻게 잡지.
작전주, 재경기계.
증권의 역사를 머릿속에 펼치며 재준은 저장된 기억을 끄집어냈다.
재경기계는 환경관련주로 오폐수 처리 장비를 개발했다는 소문이 퍼지며 1995년 7월, 1만 원이었던 주가가 1996년 9월, 13만 원까지 오른다.
물론 오폐수 처리 장비 개발은 명백한 허위 사실이었고.
재경기계가 오폐수 처리 장비를 개발했다는 소문이 작전에 동원된 가짜 찌라시였음이 밝혀진 건, 2년 후 금융감독원에 의해서였다.
하지만.
금융감독원도 작전이 벌어졌던 상황만 포착했을 뿐, 이미 배를 불린 도둑놈들은 밝히지 못했다.
시장을 상대로 낚시질을 한 놈들은 어느새 사라졌고.
미꾸라지처럼 잘도 빠져나간 뒷배는 누군지도 모르고.
심지어 낚인 고기인 재경기계도 그런 적 없다고 발을 뺐다.
능력도 없었고 증거도 없었다.
오직 돈만 잃은 투자자들만 억울했다.
그런데….
그 낚시꾼 두 놈이 재준의 눈앞에 있었다.
바로,
노. 경. 범과 강. 병. 구.
좋아, 어디 이것부터 봐보자.
재준은 강병구가 건넨 영어 자료를 펼친 순간 ‘이 나쁜 새끼’ 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 자료엔 지금 막 개발을 앞둔 미국 GreenFiled 회사의 오폐수 처리 장비에 관한 내용이 상세히 적혀있었다.
이 자료를 잘 버무려서 오폐수 처리 장비를 재경기계가 개발한 것처럼 소문을 퍼트릴 속셈인 거다.
이거였구나.
재준은 강병구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냉정하게 상황을 정리해보았다.
재경기계에 관한 보고서를 만든다.
그렇다는 것은 주식 매입이 거의 끝났다는 뜻일 테고.
이 보고서가 나가면 그동안 매집한 주식을 던질 것이다.
젠장, 재준은 탁상에 있는 달력을 집어 들어 넘기기 시작했다.
지금은 6월, 주가를 올리기 시작하는 건 아마 7월일 테고. 그렇다면 이들의 작전 타이밍은 대략 한 달에서 두 달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