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증권 재벌의 천재 손자가 되었다-5화 (5/477)

제5화 이놈을 어떻게 잡지(2)

기획 실장 서형길.

실적은 없지만 승승장구하는 인물.

임병달의 성정에 비추어 이런 인물이 살아남았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하나.

황금 동아줄을 잡았다는 것.

그리고 그 황금 동아줄을 잡을 만한 능력이 있다는 것.

이것도 능력이다.

줄을 늘어뜨린 윗선도 눈이 있는데 옆에서 아부 좀 떤다고 자기 사람으로 삼지는 않는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윗선의 더러운 행적을 치워주는 역할이거나, 남들이 보지 못하는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사람이거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위험을 감지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과연 서형길은 어떤 능력으로 살아남았을까.

그리고,

서형길의 능력을 알아봐 준 사람도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누굴까?’

서형길을 이 자리까지 오게 손을 잡아 준 사람이.

인사기록을 찬찬히 살펴보면서 가졌던 의구심이 다시 올라왔다.

***

서형길 실장은 담배를 뽁뽁 피워대며 재준의 이력서를 보더니 의아한 눈빛과 함게 고개를 들었다.

매서운 눈매로 재준을 째려보다가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고개를 좌우로 까닥까닥했다.

다 피운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면서도 재준에게 눈을 떼지 않았다.

다시 담배를 한 개비 더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이며 마치 ‘네가 왜 여기 있냐’는 눈빛으로 재준을 노려봤다.

금방 실장실 안이 담배 연기로 꽉 찼다.

대한민국을 선도하는 증권사 실장실이 너구리 소굴이라니.

냄새가 시야를 가리는 건 대충 참을 수 있지만 이게 코를 통해 목으로 넘어가는 건 참을 수 없었다.

쿨럭쿨럭.

대단한 골초네.

2015년에 실내 금연법이 생기는데 지금이 1996년이니까 대략 20년은 이 연기를 마셔야 하는 건가…….

당장 금연실이 급했다.

재준이 마른기침을 하자 그때서야 자신의 담배를 바라보고 재떨이에 끄며 창문을 열었다.

“네가 이번 특별 채용 수석이야?”

…대뜸 반말이라.

재준이 서형길 실장을 바라봤고, 재준의 무심한 표정에 서형길은 인상을 팍 구겼다.

“대답 안 해?”

서형길의 표정을 살핀 강호석이 재준의 팔을 툭 쳤다.

음…… 괜히 기분 나쁘네.

재벌의 손자에게 한낱 실장이 반말이라니 기분이 그런데.

그리고 웃음이 났지만, 입술은 굳게 다물었다.

‘내가 언제부터 재벌이었다고.’

스스로에게 참 한심하다 생각하니 내면에서 자조적인 목소리가 나왔다.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새로 입사한 임재준입니다.”

재준의 처지고 나른한 어투에, 서형길 실장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딘지 모르게 기분이 더러워지는 목소리. 어디선가 본 듯한 외모에 어울리는 저 목소리.’

“그래, 그 목소리. 너, 아니, 아니. 어디 보자.”

다시 이력서를 들춰보더니,

“맞아. 임재준. 뭐, 임재준? 이거 회장님 손자 이름인데……요. 혹시…….”

옆에서 호석이 화들짝 놀라며 재준을 바라봤다.

“재준 씨, 혹시 회장님 손자……이십니까?”

재준은 속으로 잠깐 움찔했다.

언젠간 알겠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무조건 잡아뗀다.

“…아닙니다.”

“그래? 부모님은 뭐 하셔? 빨리 가족관계 읊어 봐……요.”

서형길 실장은 어쩐지 신입 사원을 대하는 것 같지 않았다.

“아니지, 여기 이력서 있으니까, 이거 보면 되겠다.”

서형길의 긴장 가득한 눈이 재준의 이력서를 빠르게 훑었다.

“…음. 부모님은 호주에 계시네. 이것부터가 회장의 손자와 이력이 다르고……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고?”

서형길이 다시 눈매를 가늘게 뜨며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냥 동명이인일 뿐이다?”

“네.”

재준은 이번엔 씩씩하게 대답했다.

허, 나 참.

서형길은 떠오를 듯 말 듯 한 기억의 편린에서 재준의 모습을 찾아 헤맸다.

드디어 하나의 그림이 여러 장의 그림으로 분화되었다.

분명해.

하얗게 염색한 머리에 레더룩으로 도배를 한 채 술에 취해 지랄 발광을 하던 망나니 손자를 왜 모르겠는가.

근데 지금 멀쩡한 정장에 단정함의 표본을 보여주고 있는 이 녀석을 회장님의 손자로 보자니 찜찜함이 목을 마르게 해 입안이 썼다.

“커피 마실까? 달달한 믹스커피.”

“전 괜찮습니다.”

“아, 그래……요? 그럼 나만 먹지 뭐……요.”

자꾸 말이 꼬이는 서형길을 지켜보던 강호석도 서형길의 찜찜함이 옮은 듯 앞으로 나섰다.

“제가 타겠습니다.”

“응? 고마워.”

강호석이 커피포트 버튼을 누르고 물의 끓기를 기다리며 재준을 슬쩍슬쩍 살폈다.

‘회장님 손자라고? 서형길 실장 하는 꼴을 보면 딱 맞는 것 같긴 한데…… 말이 되나. 회장님 손자는 공부를 못해서 도피 유학을 갔다고 했는데. 여기 임재준은 분명 입사시험 수석이잖아! 그럴 리가.’

물이 다 끓고 강호석이 커피를 타서 서형길에게 건넸다.

커피를 받아 든 서형길이 한 모금 마시고 확신에 찬 톤으로 재준에게 물었다.

“도련님이죠?”

뭘 확신했냐고?

당연히 도련님이라는 확신.

확신에 찼을 때 해야 할 일은 바로 존대였다.

말을 높인다는 건 직장생활에서 아주 중요한 문제다.

아니 제일 중요한 문제다.

실제 나이를 떠나서 상하의 관계는 바로 존대에서 시작한다.

지금이 바로 그렇다.

회장님 손자라면 당연히 존대해야 한다.

만약에 반말을 했는데 이 나이 어린 망나니 놈이 ‘실장이 나한테 반말하던데요.’라고 회장님에게 한마디만 하면 나이 많은 직장 상사인 나는 당장 모가지가 날아가니까.

그러나 존대를 하지 말아야 하는 대상에게 존대하는 것도 안 좋다.

여기 외모는 닮았는데 회장이 아닌 일반 신입 사원에게 존대를 하면,

이 무슨 서형길 인생 역사에 커다란 오점으로 남을 일인가.

저놈이 이 오점을 술안주로 씹어대다 못해 커다란 대자보를 만들어 게시판에 붙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 사실을 모든 직원이 아는 날에는.

망신, 망신, 개망신이다.

그래도.

짤리는 거보다 망신당하는 게 낫지.

“회장님 잘 계시죠?”

재준은 살짝 눈에 힘을 주다 풀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도련님을 모를 리가 없잖아요. 왜 그러십니까? 제가 도련님을 뒷처리만…….”

서형길이 강호석을 보고 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저, 실장님? 이게 무슨 말입니까?”

강호석이 끼어들었다.

“넌, 가만있어. 나중에 설명해 줄게.”

강호석을 향해 방해하지 말라고 손을 훠이훠이 내저으며 재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아주 천천히 재준의 얼굴 구석구석을 살폈다.

재준은 방금 나온 서형길의 말을 되뇌었다.

‘내 뒷처리? 잠깐만, 그럼 서형길 실장님의 황금 동아줄이 나였어?’

재준은 서형길을 향해 살짝 미소를 지었다.

서형길이 확신에 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맞네. 도련님 맞아.”

“아닙니다.”

“근데 전에 기획실에 자리 하나 만들어 놓으라 지시가 있었는데. 입사시험은 왜 보신 겁니까? 그것도 수석씩이나 하시고.”

“실례지만 저 회장님 손자 아닙니다.”

“도련님?”

“아닙니다.”

“맞는데.”

“아닙니다.”

“무슨 일이죠?”

“넌 가만 좀 있으라고.”

“네.”

서형길은 강호석을 향해 노기를 뿜어내고 재준을 향해 가늘게 눈을 떴다.

‘손자의 신분을 숨기고 회사에 입사했다? 가능한가?’

가능하다.

회사 내에 회장 손자에 관한 소문은 개망나니로 알려졌지만, 손자의 얼굴은 아무도 모른다.

철저히 언론을 통제했으니까.

누가?

‘바로 회사의 궂은일 담당을 하는 내가.’

서형길은 재준의 세련된 외모에서 방금까지 의아심이 들었다.

하지만, 손자라고 못을 박고 살펴보니 딱이네.

검은 머리를 하얗게 만들어 마구 헝클어트리고 정장을 가죽옷으로 바꾸고 그 옆에 할리 데이비슨 오토바이를 세워 두면…… 똑같다.

‘근데, 아니라고 잡아떼시겠다…….’

그럼, 그렇게 해드려야지.

어떤 일로 회사에 들어왔는지 모르지만 이건 바로 회장님의 손자 양성 프로젝트가 분명했다.

역시 이렇게 속이 깊은 회장님.

하지만 이건 아닙니다.

회장님 손자를 당장 회사 밖으로 내쫓아야 했다.

제가 누굽니까.

저 왕싸가지 손자 뒤치다꺼리를 10년이 넘게 해 온 사람입니다.

회사에서 무슨 개망나니 짓거리를 할지 훤히 보였다.

허.

서형길은 한숨을 내쉬며 천장을 바라보자 인자한 회장님의 얼굴이 보였다.

‘회장님, 제발 손자 양성 프로젝트는 다른 곳에서 하십시오. 왜 많잖습니까. 다른 대기업도 있고, 아, 거긴 아닌가. 사고가 터지면 회장님이 더 곤란하시겠지. 그럼 다시 저 멀리 해외로 내보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대학 말고 몸소 노동의 신성함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는 서부 광산이라든가. 환경의 귀중함을 가슴 깊이 간직할 수 있는 저 시베리아 실험실이라든가.’

결심을 굳힌 서형길이 재준을 향해 눈을 부릎떴다.

“어쨌든, 회장님 손자가 아니란 말이지……요.”

“네.”

“알겠습니다. 아니란 말이지…….”

‘좋아. 뺑이 좀 쳐라, 뻔뻔하고 싸가지 없는 손자새끼.’

서형길은 재준을 노려보며 말은 강호석에게 했다.

“야, 강호석. 그럼 일단 노경범한테 데리고 가.”

강호석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노경범이요? 실장님, 그건 안 됩니다. 노경범이 신입을 어떻게 다루는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알지, 아니까 그러는 거야.

“수석 입사라잖아. 그 정도는 참으면서 일해야 하지 않나? 안 그래, 임.재.준. 씨?”

“맞습니다.”

거봐, 맞다잖아.

아주 노경범한테 개무시를 골수에 사무치도록 당해봐야 정신을 차리고 회사를 나가지.

재준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담담한 모습에 서형길이 눈썹을 꿈틀거렸고 이를 호석이 재빠르게 눈치챘다.

“네, 그럼. 실장님 저희 나가보겠습니다.”

“응, 수고.”

실장실을 나온 강호석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재준을 바라봤다.

“재준 씨 담배 피워요?“

“아뇨, 안 피웁니다.”

“그럼 커피 마십시다.”

***

12층, 커피숍.

여의도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재준과 호석은 자리를 잡았다.

강호석은 재준을 노경범에게 데리고 가야 하는데 어쩐지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 커피라도 먹여서 보내고 싶었다.

이윽고 종업원이 주문한 커피를 가져오자, 호석은 찻잔을 들고 한 모금을 홀짝였다.

“임재준 씨, 이력서 보니까 호주에서 살았다고요.”

“…네, 맞습니다.”

호석은 창밖으로 비치는 여의도 공원을 가만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여긴 외국과 달라요. 개인의 생각이 존중되는 곳이 아니죠. 상사에게 무조건 복종, 서열 관계가 확실한 군대라고 보는 게…… 아, 군대 면제라 그랬지.”

호석의 잔소리가 다시 시작되었다.

“아무튼 신입은 신입답게 고분고분해야 해야 일하기가 편해요. 눈치도 빨라야 하고요. 그렇지 않으면 수석이고 뭐고, 임재준 씨 한 달 만에 퇴사하게 만들 수 있는 곳이 여기예요. “

재준은 속으로 피식 웃었고,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퇴사하게 만드는 건 할아버지뿐일 텐데.’

그래도 재준은 이제 사회에 첫발을 디딘 사회초년병이었다.

파릇파릇한 씩씩함이 우선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윗사람한테 인사, 인사는 90도로 하고요. 상사가 묻는 말엔 빛의 속도로 대답하고요. 아시겠죠?”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강호석의 걱정이 젖어 있는 잔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호주에서 살았으면 진짜 회화 잘하겠네요.”

“네? 아, 네. 좀 합니다.”

“그럼 임재준 씨 걱정이 좀 되네. 이제 여기저기 불려 다니겠어요. 영어로 소통이 된다. 그렇다는 것은 외환 팀에서 시도 때도 없이 재준 씨를 부를 거라는 뜻이죠.”

“그건 왜 그렇습니까?”

“소통이 안 되는 사람들이 꽤 있거든요. 영어는 읽는데 대화는 하지 못하는. 아, 대한민국의 영어 교육이여……!”

연극이라도 하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강호석이 손목시계를 보았다.

“시간은 아직 괜찮네요. 하하!”

후.

강호석은 웃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재준의 눈에 자신을 애처롭게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럼 해방해 드려야지.

“노경범… 그분 성격이 만만치 않다고 방금 팀장님이 실장님께 말씀하셨습니다만. 빨리 가야 하지 않을까요?”

“빨리 가야지, 가야 하는데…… 재준 씨. 노경범, 정말 만만치 않아요.”

강호석은 만만치 않다 정도가 아니라는 듯 피식 웃었다.

노경범.

현재증권의 탑 오브 탑이다.

서포터에서 시작한 억대 연봉의 펀드 매니저.

예민하고 신경질적이며, 독단적인 인물로 한 종목을 물면 절대 놓지 않는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 바로 ‘미친개’였다.

투자에 대한 감이 기가 막힌다는 평도 있었다.

“노경범 펀드 매니저는 굉장히… 뭐랄까, 차가운 사람입니다.”

“차갑다는 것이…….”

“…음, 그 사람이 모니터를 보고 있거나 말을 걸기 전까진 절대 먼저 움직이거나 말을 걸면 안 됩니다. 애널리스트를 들들 볶는 게 특기라면 특기고. 1주일도 못 버티고 퇴사한 서포터도 좀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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