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증권 재벌의 천재 손자가 되었다-4화 (4/477)

제4화 이놈을 어떻게 잡지(1)

정 실장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것도 기억이 안 나시는 겁니까?”

“네.”

정 실정은 재준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실장님, 전 괜찮습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네, 죄송합니다. 5억 정도 있습니다.”

현금 5억.

“생각보다 많지 않네요?”

“한 달 전까지만 해도 30억이었습니다.”

“그럼 나머진 어디 갔어요?”

“귀국하자마자 도련님이 전부 쓰셨습니다.”

“한 달에 25억을?”

‘이런 씨X…… 미친놈.’

25억을 한 달에 써버렸다는 말에 재준은 자신의 턱을 자기 손으로 후려갈길 뻔했다.

‘도대체 뭘 하느라고.’

1996년과 2022년의 돈의 가치를 비교하면 2배 정도 차이로 알고 있었다.

즉, 이 정신 나간 망나니가 2022년이라면 50억 가까운 돈을 한 달 만에 탕진했단 소리다.

“어디에 썼죠?”

“이것저것 다 손을 대셨습니다. 25억을 한 달 만에 탕진하셨습니다.”

“손을 댔는데 탕진이라뇨? 어디에 썼는데요?”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유흥비는 아니죠?”

유흥비가 아닌 건 직감으로 알았다.

놀려면 여자든 남자든 사람이 필요하지 않을까?

설마 혼자 25억을 쓰지 않았겠지.

사고가 나고 한 달 가까이 지났는데 단 한 명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는 건 이놈이 근래 누군가와 심하게 어울려 놀지 않았단 증거가 아닐까.

원래 재벌들이란 서로의 사생활을 건드리지 않기도 하지만 한 달 동안 아무도 연락이 없다는 건 해도 해도 너무했다.

정 실장은 유흥비란 말에 슬쩍 웃었다.

“그럴지도 모르죠. 아닐 수도 있고요.”

정 실장은 이도 저도 아니란 말인데도 힘이 들어갔다.

‘뭔가 있는데 말을 안 하시겠다…….’

“제가 그 돈으로 정치인을 후원했나요? 아니면 어디에 투자했나요?”

정 실장의 눈빛에 이채가 서렸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 많은 돈을 한 달 만에 쓴 걸 보면, 그런 추론이 가장 합리적이라서요. 아무리 놀고먹어도 하루에 1억씩 쓸 수는 없죠. 차를 30대 산 것도 아니니까.”

“정치 후원은… 정확히는 모릅니다. 저희 쪽에서 추측만 하고 있었습니다. 도련님께선 VIP 자제분과 친분이 있으시니까요.”

“친분이라…… 마냥 좋은 소식은 아니네요.”

재벌 자제끼리 친분이라니.

서로 못 뜯어먹어 안날이 난 놈들끼리.

재준의 질문은 쉬지 않았다.

“그렇군요. 그럼 5억 말고 다른 자산은 없습니까?”

“강남에 보유한 부동산, 경기도와 지방 일대의 땅, 예치금, 미국과 일본 정부에서 발행한 채권, 정기 예금과 펀드 등을 모두 합치면 대략 500억 정도 됩니다.”

500억.

현금성 자산과 부동산을 모두 합해 500억이라.

“돌아가신 부모님의 재산이 전부 도련님께 상속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실제 자산의 규모는 더 크다는 말씀이시죠?”

“그렇습니다.”

500억.

큰돈이다.

전생이라면 20억짜리 로또를 25번이나 맞아야 할 액수였다.

즉, 일 년이 55주이니 2주에 한 번씩 로또를 맞아야 만질 수 있는 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500억이 내 손에 들려 있고 언제든 쓸 수 있었다.

손에 잡힌 공허함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돈이 비현실적이라 그랬다.

돈의 단위가 아직은 낯설어.

하지만.

익숙해져야 한다.

10억? 100억? 1조?

갑부들이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그 단위에 적응해야 한다.

어쨌든.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돈이 5억이라……. 재벌의 돈을 익히기에 나쁘지 않은 수준이지만.’

재준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적다.’

2년 안에 회사의 존폐 위기를 극복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어차피 소비하지 않는 돈이란 숫자 놀음에 불과하다.

1000억 원어치 자동차를 산다면 버겁겠지만 주식이나 채권을 산다면 그저 숫자 키보드를 몇 번 두드리면 끝날 일이었다.

‘부동산을 현금화하려면 할아버지를 또 설득해야 한다.’

대략 2년 후 닥칠 IMF에 KO패 당하지 않기 위해, 다방면의 투자를 통해 외화를 비축해야 하는 시점이었다.

정확히는 달러.

기. 승. 전. 달러다.

그러기 위해선 회사에 들어가서 정보를 끌어모아야 하고 돈을 굴릴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했다.

개인이 큰돈을 굴리면 정부가 득달같이 달려들 테니까.

“정 실장님, 제가 부탁한 서류는요?”

정 실장은 품에서 노란 봉투를 꺼내 재준에게 주었다.

봉투를 받은 재준은 정 실장을 향해 고맙다는 말 대신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이제 혼자 있고 싶다는 메시지이기도 했다.

역시 정 실장은 눈치가 빨랐다.

“저는 그만 일어나겠습니다. 도련님, 이젠 회사에서 뵙겠네요.”

“회사에서는 모르는 척하셔야 합니다. 저는 평사원이니까요.”

“알겠습니다. 늦었지만 수석 입사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도련님 덕분에 요즘 회장님 입가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습니다.”

재준은 다시 환한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정 실장이 고개를 숙이며 방을 나갔고, 재준은 봉투에서 두툼한 서류를 꺼냈다.

현재증권의 인사기록이다.

월급 주는 위치에 있는 고용주만이 볼 수 있는 정보.

자신이 원하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위치가 재벌이다.

직원들의 인사기록.

재준은 그 정보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생각이었다.

정식으로 출근하기 전, 이 안에 있는 내용을 모두 머릿속에 때려 넣는다.

일인자가 되기 위해서는 입지를 넓혀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발언권을 가져야 했다.

그 첫 번째 관문은 바로 인맥.

‘여기 있는 사람들. 서서히 완벽하게 내 사람으로 만들겠어.’

***

한 달 후, 새벽 5시 30분.

똑똑.

집사가 재준의 방문을 노크했다.

“네.”

“도련님, 일어나셨습니까?”

“네. 들어오세요.”

집사는 재준의 방으로 들어왔다.

여러 장의 신문을 탐독하고 있는 재준.

방 안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집사는 하루아침에 사람이 변하는 광경을 지켜보는 것이 무척 즐거웠다.

자신의 손으로 업어 키운 재준이 망나니처럼 굴 때마다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갔었다.

눈시울이 괜히 붉어졌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아침 공기가 좋더라고요.”

재준은 집사를 가만히 바라봤다.

재준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는 사람.

재준의 편을 들어준 유일한 사람.

망나니 임재준 곁에, 적어도 한 사람은 있었다.

집사는 재준의 옷차림을 쭉 훑어보았다.

“도련님. 첫 출근 양복이 아주 멋지세요.”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는 집사.

그 모습에 재준은 괜히 짠한 기분이 들었다.

재준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고, 집사는 손으로 재준의 가슴께를 툭툭 털어주었다.

“내려가세요. 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셔요.”

***

여의도, 현재증권 건물의 1층 로비.

게시판 앞에 신입 사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모여있었고, 그중에는 재준도 있었다.

7시 30분.

한 사나이가 종이를 들고 그들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현재증권에 입사한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증권회사는 시간이 생명입니다. 신입에게 회사 분위기에 익숙해질 시간을 준다? 그런 것 없습니다.”

굉장히 빠른 말투였다.

“현재증권의 사훈은 ‘직접 배우고 익히자’입니다. 조만간 신입 사원 한 명당 한 명의 사수가 배정될 것입니다. 사수를 따라 실전을 경험하고, 체득하시길 바랍니다. 호명하는 대로 앞으로 나와 각자의 위치로 가시기 바랍니다.”

신입 사원 교육도 없이 바로 실전 투입이라.

까다로운 블라인드 테스트를 통과했으니, 실력을 믿겠다?

‘아주 맘에 들어.’

재준의 마음과는 달리, 여기저기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호명하는 대로 앞으로 나간 신입 사원들은 하나둘씩 사라졌고, 재준은 맨 마지막까지 남았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며 손짓하는 남자.

‘설마 저 사람이 내 사수?’

“임재준 씨.”

“네, 선배님.”

“수석답게 빠릿빠릿하게 생겼네. 잠깐 여기서 기다려요.”

사나이는 빠른 발걸음으로 강당에서 나갔고, 그렇게 재준은 멀뚱멀뚱 서 있었다.

대략 10여 분이 흘렀고, 한 남자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인상 좋게 생긴 30대 초반의 남자였다.

‘저 사람은…… 강호석?’

인사기록에서 봤던 명함사진은 굉장히 반듯한 듯했지만, 실제로는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출중한 실력과는 달리 매일 지각을 한다는 코멘트가 근평에 기록되어 있었다.

“오, 임재준 씨. 저는 강호석이라 합니다.”

“안녕하십니까.”

호석이 내민 손을 재준이 맞잡았다.

“임재준 씨. 반갑습니다. 우선 회사 분위기부터 살핍시다. 아무리 사훈이라지만 신입에게 바로 실전은 위험하죠.”

재준은 호석이 이끄는 대로 1층으로 내려갔고, 재준은 묵묵하게 그를 따라다녔다.

호석은 따뜻한 눈빛으로 재준을 바라보았다.

“재준 씨. 이 광경이 처음엔 정신없을 겁니다. 하지만 금방 적응할 거예요.”

‘증권회사를 다니는 게 목표이긴 했는데 1997년에 입사를 하네.’

“…네. 말씀 감사합니다.”

호석은 2층으로 올라가며, 끊임없이 재잘거렸다.

투머치토킹에 슬슬 질려갈 무렵 도착한 2층.

그곳은 증권사의 메카.

돈이 흐르는 곳.

주식시장.

재준의 눈에 빨강과 파랑으로 정신없이 움직이는 주식시황판이 들어왔다.

300평 정도 되는 공간에, 40여 명의 브로커.

CRT 모니터를 적게는 3개에서 많게는 7개를 휙휙 번갈아 보며, 분주히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었다.

‘아침부터 바쁘게 돌아가는구나.’

주식 브로커 뒤에는 로비에 있던 신입 사원들이 모니터를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곳은 ‘애널리스트-RA’와 ‘펀드 매니저-서포터’의 길이 명확히 구분되어 있었다.

어쩌면 신입 사원은 처음부터 운명이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성적에 따라 길이 갈리니까.

RA로 애널리스트가 되느냐, 서포터로 펀드 매니저가 되느냐.

재준은 이 풍경을 유심히 바라봤다.

예전부터 꾸준히 해오던 고민이었다.

서포터냐, RA냐.

그러나 오늘, 이 장소에서 가슴이 뜨거워지는 걸 보니 알 것 같았다.

뜨거운 현장의 분위기를 몸으로 체득하는 것이 맞는 길이었다.

이 현장에서 일인자가 되는 것.

펀드 매니저다.

시장과 기업을 분석하고 투자의 길을 안내하는 애널리스트의 길을 가는 것보다 훨씬 매력적이었다.

이내, 호석과 재준은 3층으로 향했다.

리서치 센터.

‘하우스’라고 불리는,

증권회사의 브레인 애널리스트들이 상주하는 곳.

그곳엔 개인 칸막이가 높게 설치되어 있었고,

기업, 채권, 부동산, 주식 등등의 팻말이 눈에 띄었다.

‘역시 현재증권이다. 책에서 읽은 그대로야.’

이 당시만 해도 전문적으로 업무가 분리되지 않았지만. 현재증권은 이미 다양한 기업 분석, 전문성을 토대로 애널리스트들을 키워내고 있었다.

재준은 전문성과 가치 투자에 대한 할아버지 임병달의 신념을 확인했다.

잠시 멈춰선 호석이 재준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중앙을 기준으로 창가 쪽은 바이사이드 사람들이 쓰는 공간이고, 복도 쪽은 셀사이드 사람들이 쓰는 공간이에요.”

바이사이드는 펀드 매니저를 위한 공간, 셀사이드는 고객을 위한 공간.

즉, 그들의 작업 공간이 분리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바이사이드는 저기 보이는 프론트 오피스의 세일즈&트레이드나, 저쪽에 보이는 미들 오피스의 기획과 리스크 관리 부서를 위해 보고서를 작성하고.”

호석이 말을 이었다.

“셀사이드는 공개 보고서를 작성하거나 고객을 위해 비공식 보고서를 만들어요. 셀사이드가 바이사이드한테 좀 밀리죠. 자리도 좀 별로고. 하하하!”

사람들 머릿속에 자리 잡은 TV에 나오는 애널리스트의 이미지는 모두 바이사이드다.

그리고 애널리스트들은, 뒤에서 서포트를 해주는 셀사이드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셀사이트가 장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길고 오래 살아남기 위해서는 셀사이드가 훨씬 나으니까.

특히 굴곡이 있는 대한민국 증권사에서는 말이다.

외환위기, IT 버블 붕괴, 9.11 테러, 글로벌 금융위기, 유럽 재정위기에서 수많은 바이사이드들은 실패의 책임을 져야 했다.

“재준 씨는 말이 별로 없네요.”

“필요할 땐 합니다.”

“필요할 때가 언제예요?”

“제 의견을 피력할 때라 생각합니다.”

“오, 깔끔한 외모만큼 성격도 깔끔하네요, 하하하. 자, 이제 기획실로 올라가 업무 배정받을까요.”

계단을 이용해 기획실이 있는 6층으로 올라간 재준과 호석.

기획실로 들어서자, 재준의 눈에 제일 처음 보인 것은 명패였다.

<기획 실장 서형길>

‘사내정치의 달인, 서형길.’

재준이 인사기록을 통해 봤던 서형길 기획실장을 처음 대면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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