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증권 재벌의 손자(3)
평소 같으면 건들거리며 밖으로 나가거나 고개를 젖혀 하늘을 바라봐야 할 재준이 임병달을 똑바로 바라봤다.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정 실장도 왠지 모를 호기심에 재준에게 시선을 돌렸다.
‘뭔가 달라지긴 했는데.’
인간은 단지 마음먹는다고 행동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큰 시련을 겪었거나, 주변 환경이 자신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변해야 달라진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설마 교통사고 때문에?’
어쨌든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릴 만한 교통사고를 겪었으니 어쩌면 커다란 시련이라고 불릴 만한 사고일지도 몰랐다.
‘도련님. 아무튼 알겠습니다. 회장님에게 원하는 걸 말씀하세요.’
정 실장은 재준을 보며 한번 해보라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숙인 재준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임병달의 눈빛에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이놈 봐라. 그냥 물러나지 않는다고?’
“…해 봐.”
“제가 파악한 현재증권의 미래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임병달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손자를 향해 몸을 내밀었다.
‘현재증권의 미래?’
정 실장은 앞으로 치고 나가려는 자신을 겨우 참았다.
재준이 정 실장을 향해 잠시 고개를 돌렸다가 임병달에게 가져갔기 때문이다.
‘정말 뭔가 있는 겁니까?’
재준이 임병달을 향해 진중한 표정으로 말을 했다.
“현재증권이 세계적인 금융사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실력 있는 애널리스트를 양성해야 합니다.”
면접을 위해 준비했던 브리핑을 이렇게 써먹을 줄은 몰랐다.
자신의 말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임병달 회장과 장 실장의 표정을 보는 맛이 쏠쏠했다.
“……결론적으로, 일반 투자자들을 적극적으로 유치하여 그들의 비중을 공격적으로 늘려야 합니다.”
이 시기에 증권사들은 기업과 큰손들에 의존하는 비중이 높았다. 개미라고 불리는 일반 투자자들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던 시기였다.
잠시간의 정적이 흐른 후.
임병달이 재준을 향해 싱거운 웃음을 지었다.
“어디서 귓등으로 들은 게 있긴 한가 보구나. 하지만 어디서 주워들은 거로 네가 회사에 들어오는 것은 부족하다. 뭐 영어라도 하면 모를까. 유학은 다시 가야···.”
“I will tell you about the future of Hyunjae Securities that I have identified···.”
재준의 입에서 막힘 없이 흘러나오는 영어에, 임병달 회장과 정 실장의 표정이 또 한 번 급격하게 변했다.
이젠 입을 다물 생각도 없는 두 사람을 보며 재준은 자신감의 표현으로 작게 고개를 숙였다.
‘…놀랐겠지.’
가까스로 표정을 수습한 임병달 회장이 재준을 유심히 뜯어보며 입을 열었다.
“크흠! 솔직히 말하면 네 영어 실력에 좀 놀랐다. 유학 가서 마냥 놀기만 한 줄 알았는데 말이야. 으흠.”
임병달의 말끝이 놀라움으로 살짝 떨렸다.
하지만 잠시 뚱한 표정을 짓더니,
“그런데 말이다. 욱하는 성질 못 이겨서 툭하면 말썽을 일으키는 너를 내가 어떻게 믿겠느냐?”
‘아직도 부족한 겁니까?’
이 망나니 자식이 어지간히 신뢰를 주지 못한 모양이었다.
임병달의 마음을 돌리고 현재증권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파격적인 묘안이 필요했다.
‘내가 치사해서 재벌 계급장 떼고 들어간다.’
“평사원으로 입사하겠습니다. 아니, 입사시험을 보고 들어가겠습니다.”
“……평사원? 입사시험? 네놈 얼굴을 보면 실장이랑 부사장이 퍽도 떨어뜨리겠다. 그리고 입사했다고 치자, 네놈이 내 손자라는 걸 다 아는데 그게 무슨 평사원이야?”
“시험은 저를 포함해서 모든 사원을 블라인드 시험으로 채용해 주십시오.”
이 당시엔 블라인드 시험이라는 제도가 있지도 않았다.
치열한 입사시험도 재벌에겐 남의 이야기였다.
알아서 가족이 운영하는 회사에 들어가면 그뿐이니까.
“블라인드…?”
“수험번호만 알고 있는 상태에서 시험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학력, 배경. 그 모든 것을 가린 채 오로지 실력으로만 사원을 뽑는 것이죠.”
“…그건 그렇다 치고. 배경 없이 네 녀석이 뭘 할 수 있을까.”
“저는 할아버지의 손자가 아니라 실력으로 평가받고 싶습니다. 회사 내에 저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지 않습니까.”
“허, 자신 있느냐?”
“예.”
임회장의 재준을 뚫어 보는 눈빛이 깊어졌다.
‘임원이 아니라, 시험을 치르고 평사원부터 일을 배우겠다…….’
“……일단 생각해보마.”
생각해 본다는 건 이미 결정 난 것과 다름이 없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그리고….”
“뭐냐?”
“제 통장. 다시 주셨으면 합니다.”
“차라리 용돈을 달라고 하지 그러냐? 통장은 안 돼.”
통장이란 임재준 부모의 유산을 가리키는 말이다.
재준이 단호한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건 입사와 다른 문제다. 이제 달러가 미친 듯이 올라간다. 그 전에 무조건 매집해야 한다.
“그동안 할아버지 속을 태운 건 정말 죄송합니다. 그래서 달라지려고 합니다.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시고 저에게 통장을 주십시오. 할아버지께 당당한 모습 보여드리겠습니다.”
“그 돈으로 무엇을 하려고?”
“달러를 사려고 합니다.”
“달러?”
할아버지는 매서운 표정으로 재준를 쳐다봤다.
“환치기라도 할 생각이야? 한심한 놈. 기껏 생각한 게 환치기라니.”
재준은 놀라서 순간 말문이 막혔다.
‘아니, 환치기라니…….’
“할아버지, 설마 지금 말씀하신 환치기라는 게 해외 노동자들 송금 수수료 아끼려고 하는 그 환치기를 말씀하시는 건 아니죠?”
“그럼, 달러를 왜 개인이 매입하려는 건데. 돈은 돌아야 한다. 금고 안에 있으면 아무 쓸모가 없어.”
‘할아버지, 근데 곧 IMF가 터져서 그게 아주 쓸모가 있습니다. 미래를 안다고 말할 수도 없고.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드려야 할까…….’
재준은 답답함을 애써 없애려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대한민국은 현재 외화 보유액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거기에 반해 외채는 급하게 늘고 있고요. 조만간 국제통화 기구에서 제시한 2.5배를 넘어설 것입니다. 알고 계십니까?“
임병달이 정 실장을 쳐다보며 의아한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둘의 표정으로는 ‘이 녀석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와도 되는 건가?’라고 말하고 있었다.
정 실장이 임병달에게 무언가 속삭이자 임병달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후 재준에게 말했다.
“지금 기업들은 여기저기 규모를 키우고 있어. 세계적인 대기업이 되려면 빚을 내는 건 당연한 거야. 네가 뭘 알고 하는 소리냐. 외채? 그런 건 금방 갚아.”
‘못 갚아요. 할아버지.’
“할아버지, 오늘 미국 채권시장의 지표금리인 30년 만기 재무부 채권 수익률이 6.46%에서 6.70%로 0.24% 폭등했습니다. 이게 뭘 뜻하는지 아십니까?”
너도나도 미국 채권을 산다는 이야기였다.
채권의 수익률은 그야말로 개미 똥구멍 같은 수익률로 큰돈이 움직이는 시장이었다.
1년에 1~2%가 오를까 말까 한데, 하루에 0.24%라면, 외국 딜러들에게 이런 날은 3년 농사를 하루에 날리는 날, Friday crisis라 불렀다.
임병달이 재준을 정말 알 수 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재준은 임병달의 표정에서 자신감을 얻으며 말을 이었다.
“이유를 말씀드리자면 이야기가 길어집니다. 하지만 달러가 미국으로 몰리면서 달러가 하락합니다. 지금이 기회입니다.”
할아버지는 재준에게서 시선을 거두고는, 정 실장에게 물었다.
“정 실장, 지금 미국 재무부 채권에 얼마 투자되어 있지?”
재준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정 실장은, 언제 그랬냐는 듯 할아버지의 질문에 곧바로 대답했다.
“100만 불 정도 투자되어 있습니다.”
“허허. 미국 덕분에 우리가 이익을 좀 보겠구나.”
재준이 다시 한 번 고개를 저었다.
“할아버지. 그깟 이익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럼?”
슬며시 입꼬리를 올린 임병달 회장의 표정이 순간 딱딱해졌다.
“FED가 금리를 인상할 것입니다.”
“…금리를 인상한다……."
“네. 한국에 투자된 외화가 모두 미국으로 빠져나갈 것입니다. 투자하는 것보다 미국 은행에 돈을 두는 것이 더 이익이니까요. 당연히 미국에 달러가 모이겠죠.”
“그러니까 네 말은 한국에 있는 달러가 곧 없어진다…?”
“네, 할아버지. 가능한 한 빨리 달러를 매입해야 합니다.”
임병달의 눈썹이 꿈틀했지만, 아직은 미심쩍은 눈치였다.
재준은 재차 강조했다.
“달러가 없어지기 전에 서두르셔야 합니다.”
IMF.
그 고통의 경제사에서 발을 빼려면, 지금 할아버지를 설득해야 했다.
달러를 비축해야만 한다.
임병달 회장은 그 자리에서 깊은 고민에 빠졌다.
‘달러를 매입한다…….’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이런 수준의 경제 지식이 재준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도 조사는 해 봐야지.’
그냥 흘려보내기엔, 손자의 말이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임병달은 고개를 숙이고 뭔가 생각하고 있는 재준이를 대견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이놈 봐라. 미국 금리 인상과 미국 국채의 변동으로 외환 이동을 예측할 수 있다? 나아가서 대한민국의 위기까지?’
경제 대국 14위에 올라있는 아시아의 4마리의 용 중 하나인 대한민국에.
‘……달러가 없어진다…….’
고심하는 할아버지를 보며, 재준이 덧붙였다.
“할아버지, 달러를 매입하는 김에 미국 주식에도 투자할까 합니다. 절대 떨어지지 않는 대형주 위주로요. 언제든 매도할 수 있는 종목으로 말입니다.“
“미국 주식을?”
“네.”
“…일단 알았다. 이제 네 방으로 올라가.”
재준은 허리를 90도로 숙이고는, 서재를 나왔다.
손자가 나간 것을 확인한 임병달 회장이 정 실장을 힐끗 보며 물었다.
“네가 보기엔 어떠냐?”
“진심이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보여?”
“네.”
“믿어도 되겠어?”
“도련님께서는 칩거하시는 동안 아침마다 경제 신문과 주요 일간지를 찾아보시고 뉴스도 꼬박꼬박 시청하셨다고 합니다.”
“……그래?”
“옷장에 두었던 술과 담배도 없애셨다고 하고요.”
“음.”
하나밖에 없는 손주.
사고로 한순간에 부모를 잃고, 유모의 손에 자란 불쌍한 아이기도 했다.
오냐오냐 모든 것을 받아 주다 보니 안하무인이 되었다.
저 녀석의 망나니짓에, 임병달 스스로가 일조했다고 생각했다.
“정 실장.”
“네, 회장님.”
“저 녀석이 아까 했던 말. 경제 연구소에서 조사해 봐.”
“알겠습니다.”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재준은 블라인드 신입 사원 채용에서 수석으로 합격했다.
임병달 회장이 경제 연구소를 통해 확인한 자료와 분석 결과는 재준의 의견과 맞아떨어졌다.
그리고 지금.
재준은 앞에 앉은 정 실장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정실장님. 제 상태 아시죠? 단기 기억상실증요.”
“…알고 있습니다.”
“궁금해서 묻는 거니까 오해는 하지 마세요. 제 통장에 현금으로 당장 인출 가능한 돈이 얼마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