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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권 재벌의 천재 손자가 되었다-2화 (2/477)

제2화 증권 재벌의 손자(2)

임재준이란 이름에 눈만 깜박일 뿐 대답을 하지 않는 자신을 보며, 걱정을 쏟아내는 눈빛과 낯선 사람들의 깊은 한숨 소리를 들었다.

깨어났지만 대답할 수도, 반응할 수도 없었다.

강진 또한 무척 혼란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이런 그를 두고 의사들은 임병달 회장에게,

-회장님, 아무래도 사고로 인한 단기 기억상실증 같습니다. 그래서 실어증이 나타나고 있으며, 환자 스스로 누군지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검사 결과 다른 인지 장애는 없습니다.

‘실어증? 단기 기억상실증?’

얼토당토않은 진단에 어이가 없었지만, 낯선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강진은 일부러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조용히 있는 것이 그가 처한 상황을 지켜보기 더 편하리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차츰 정신을 차린 후, 그가 깨달은 것은.

현재증권 회장의 손자, 임재준으로 눈을 떴고 이제는 그 이름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현재증권 면접 보고 합격해서 좋아했는데 아예 회장의 손자가 되어 버렸다.

이를 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근데 문제가 있었다.

지금이 1996년이고.

회귀? 빙의? 환생?

어떤 표현을 써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임재준이 교통사고로 죽을 때 차강진의 영혼이 임재준의 몸에 들어왔다.

이제 임재준으로 살아야 한다.

단기 기억상실을 핑계 삼아 집사에게 임재준에 관한 질문을 퍼부었고, 그렇게 강진은 임재준에 관해 차츰차츰 알아 갔다.

-도련님은 충격에 기절했을 뿐, 크게 다치지는 않았어요. 하늘이 도우셨죠. 그리고 경찰 문제는…….

이 임재준이라는 놈이 면허 없이 운전했단다.

그리고 잘 마무리했단다.

이건 인간이 잘못된 건가 사회가 잘못된 건가.

아무리 돈으로 해결이 가능한 시절이라지만 인간이 쓰레기네.

‘뻔뻔히도 피해갔네. 무면허 운전은 구속감인데…….’

강진은 앞으로 자신이 살아가야 할 임재준의 간단한 정보와 이력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나이 : 26세

이름 : 임재준

약력 : 고등학교 졸업 후 도피성 호주 유학

군대 : 질병으로 면제

공부도 못했고, 군대도 안 갔다.

부자들의 전형적인 편법으로 도배된 이력.

그리고 백수.

그것도 할아버지의 돈을 탕진하는,

망나니 백수.

“흠···.”

돈이 많은 금융가의 손자.

부자라니.

부자라는 말에 가슴이 설레지 않았다면 거짓이었다.

부자.

듣기만 해도 얼마나 가슴 벅차고 황홀해지는 단어인가.

거기에 하나밖에 없는 친손자.

형제간의 암투나 눈치 게임을 할 필요도 없었다.

돈에 구애받지 않고 행복한 인생을 즐기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금수저.

매일매일 끊이지 않는 파티와 술자리, 일주일마다 바뀌는 여자친구…….

전 세계 몇 대밖에 없는 자동차를 타고, 전세기와 크루즈를 소유하는 삶.

원하면 그 이상도 할 수 있는 빨대를 물고 태어났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가득한 미래.

재벌로 살아 본 경험이 없으니 당연히 불가능한 상상이었다.

이렇듯 멋지게 살아 볼 날이 눈앞에 있는데.

그런데, 하필이면 개 같은 타이밍에 깨어난 것이었다.

“오늘이 1996년 3월 5일이니까···. 대충 2년 남았네.”

현재증권은 1997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전날에 부도가 난다.

달리 말하면, 재무 개선 작업.

더 간단하게 얘기하면, 망한다는 뜻이었다.

그 후 현재증권 이름만 살아남고 사람은 싹 다 물갈이되어버렸다.

‘운도 더럽게 없지.’

다행이라 해야 하나.

강진은 ‘현재증권’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다.

전생에 면접에선 말하지 않았지만 현재증권이야말로 재벌 후계자가 처절하게 말아 먹은 증권사 중에 단연 으뜸이었다.

임재준, 왜 하필 너냐!

어딘가 이름이 낯설지 않다고 했더니.

현재증권의 임재준이었다.

그러나,

임재준으로 살기로 한 이상, 현재증권을 망하게 놔두면 안 된다.

당장 현재증권을 물려받아서 나락의 길에서 구원해야 한다.

전생에 현재증권을 볼 때마다 생각한 것.

‘내가 재벌 3세면 회사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만들 텐데.’였다.

자신도 진정한 재벌이 될 수 있었다.

세계 경제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

포브스지에 선정된 사람.

단 한 번의 식사를 같이하기 위해 1천만 원 이상의 비용을 낼 가치가 있는, 그런 사람.

그런데, 포부와는 다르게 갈 길이 멀다.

“정 실장, 이놈 퇴원하면 바로 다시 외국으로 보내. 카드, 통장도 다 뺏고. 정신 차리기 전엔 절대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해!”

그 서막을 알리는 소리.

병실에서 고함을 치던 임병달 회장의 서슬 퍼런 명령이 떠올랐다.

우선, 할아버지, 임병달을 설득해야 한다.

이대로라면, 현재증권 사장은 고사하고 신입 사원도 못 되어 외국으로 쫓겨갈 판이였다.

“일단 할아버지의 결정을 바꿔야 하는데.”

목욕재계(沐浴齋戒)라 했다.

“일단 씻자.”

샤워를 마친 후, 욕실과 이어진 방문을 열자 커다란 드레스룸이 나타났다.

30평 정도 되는 넓은 방에는 온갖 액세서리와 명품, 개인 디자이너들이 제작한 옷들이 가득했다.

그 많은 옷 중에서, 임재준은 회장에게 가장 무난하게 보일 것 같은 스타일을 고민하며 옷을 골랐다.

하얀 셔츠와 깔끔한 남색 슈트, 푸른 넥타이, 그리고 은빛 메탈 시계.

“넌 차강진이 아니다. 이제 망나니 임재준도 아니다.”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와 머리를 다듬은 재준이 중얼거렸다.

“난 독종 임재준이다.”

그리고 그때.

밑에서 쩌렁쩌렁한 소리가 들려왔다.

“임재준! 당장 내려와!”

할아버지, 임병달 회장의 목소리였다.

거대 증권회사의 수장답게, 목소리가 흡사 개선장군의 그것과 같았다.

심지어 그 울림엔 적을 눈앞에 둔 분노마저 서려 있었다.

물론 적은 임재준이었다.

재준은 결심한 듯 방문을 단호하게 열고 계단을 힘차게 내려가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를 중심으로 부엌부터 거실까지 도열해 있던 사람들의 눈이 점점 커졌다.

재준의 세련되고 잘 갖춰진 슈트.

사람들은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고, 재준의 달라진 옷차림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각자 악평을 하기에 바빴다.

“이봐, 도련님 옷 세탁 안 한 거야? 웬 슈트야?”

“자네야말로 음식에 독이라도 탄 건가? 멀쩡한 모습이 아니지 않은가?”

“병원에서 퇴원할 때 약이 바뀐 게 아닐까?”

“그건 약국에서 받아 온 거야?”

‘반응이 너무 격한데,’

난생처음 보는 듯한, 깜짝 놀란 얼굴들을 대하자 재준이란 놈이 얼마나 나잇값을 못했는지 알 것 같았다.

아마 재준은 이런 단정한 옷차림을 한 적이 없는 듯했다.

평소에 입고 다니는 옷이 궁금할 정도였다.

재준은 할아버지 앞에 똑바로 섰다.

“부르셨습니까.”

현재증권의 수장, 임병달 회장.

1층 거실 한 가운데에 우뚝 서 있는 그의 모습에 위엄이 묻어나왔다.

회장에게서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노기가 뿜어져 나오고, 집안에는 숨 막힐 듯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방금 외국 출장에서 돌아온 사람 같지 않고 다급하게 사건 처리를 하러 온 형사반장 같은 느낌이었다.

재준은 ‘전 지금까지의 임재준과는 다른 임재준입니다’라고 항변하듯이 할아버지 눈을 마주 보았다.

“…반성하라고 했지, 시위하라고 하진 않았다. 방에서 두문불출하면 내가 화를 풀 줄 알았던 게냐?”

“아닙니다.”

“그럼 왜 그랬느냐.”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생각?”

“할아버지한테 누가 되지 않도록 제대로 사는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제대로 사는 방법?”

“그동안 제가 한 행동들이 잘못인 건 압니다.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십시오.”

“또? 이제 기회는 없다. 당장 외국으로 떠나.”

“할아버지….”

임병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네 이놈…!! 네놈을 믿고 기획실에 입사시키려고도 했다. 그런데 귀국하자마자 사고를 쳐?”

‘기획실? 사장이 아니라?’

전생의 기억에 임재준이 회사 사장이었던 기록은 본 것 같은데 기획실에서 시작했단 부분은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기획실도 괜찮은 시작이다.

증권사의 기획실은 회사를 총괄하는 부서 아니겠는가?

기획실 실장을 역임하고 사장이 되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줄 때 받아야 한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재준의 입에서 ‘죄송합니다’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주변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임병달 회장의 뒤로 도열해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고, 그들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듣기 민망한 말을 뱉은 게 자신이라도 되는 듯 입을 오물거리고 마른 침을 삼켰다.

그들이 서로 귀에 대고 수군거렸다.

“지금 도련님이 말한 거 맞아?”

“난 회장님이 말씀하신 줄 알았어.”

“이 사람아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너무 당황스러워서……. 도련님 입에서 ‘다’로 끝나는 말이 나온 게 말이 되냐고.”

할아버지인 임 회장 또한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임 회장은 이번엔 안 속는다는 심지가 엿보였다.

“나가서 네놈이 한 행동에 책임지고 자숙해. 내가 부를 때까지 들어올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게다.”

회장이 옆에 서 있던 정 실장에게 눈짓하자, 그는 공손히 고개를 숙인 후 가지고 있던 노란색 봉투를 재준에게 넘겼다.

재준이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봉투를 받지 않으려고 뒤로 물러서자 정 실장은 일단 받아야 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보일 듯 말 듯 흔들었다.

보는 눈이 많다고 생각한 재준은 일단 봉투를 받았다.

“내일까지 서류 작성하고 일주일 후에 출국해. 이번엔 캐나다야. 정 실장, 자네가 옆에서 저 녀석 서류 준비 도와주고.”

“네.”

할아버지는 말을 마치자 휙 돌아서서 서재로 들어갔다.

‘안 통한다. 그렇다면….’

할아버지가 쉽게 물러나지 않으리라는 건 예상했다.

재준이 다시 살아난 뒤 겪은 경험만 해도 무면허 음주 운전, 정장 한 번 입었다고 두 발로 걷는 강아지를 보는 듯한 시선, 사과 한 번 했더니 평생 들으면 안 되는 외계 신호를 들은 듯한 표정들이었으니까.

재준은 할아버지를 따라 서둘러 서재로 들어갔고, 임병달은 ‘왜 따라 들어와?’ 하는 눈빛으로 재준을 쳐다보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할아버지 옆에 호위무사처럼 서는 정 실장.

“왜?”

“할아버지. 저는 캐나다에 가지 않겠습니다.”

임병달의 시선이 재준의 온몸을 잠깐 훑고 입술을 들썩였다.

오늘 보여준 모습에 많이 놀라긴 했다.

저럴 놈이 아닌데, 속된 말로 뭐 잘못 먹은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저놈 속에 세상모르고 날뛰는 천둥벌거숭이도 있지만, 천년 묵은 이무기가 있을지도 몰랐다.

‘자기 속을 숨기기만 하는 놈이니까.’

“그 얘기 하러 온 거면 더 듣지 않겠다.”

“회사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재준은 결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뭐라…?”

임병달의 눈썹이 부르르 떨린다.

회사에 들어오겠다고?

“내가 했던 말을 허투루 들은 것이냐?”

“아닙니다.”

“떠나. 더는 안 된다.”

“할아버지.”

“무면허 운전으로 감옥에 있어야 할 놈을 살렸다.”

“죄송합니다.”

“듣기 싫다. 나가 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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