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증권 재벌의 손자(1)
지상에서 하늘과 가장 가깝게 맞닿아 있는 곳.
이곳은 63빌딩도 아니고 120층이 넘는 롯드타워도 아니다.
절벽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살아가고 있는, 차강진의 보금자리.
옥탑방이다.
대학 졸업반인 강진은 애널리스트가 되기 위한 관문인 RA를 위해, 2차 면접을 준비하고 있었다.
원어민 수준의 실력을 보여줘야 하는 영어 면접.
단정하게 양복을 입고, 의자에 앉아 있는 강진은 책상 위에 놓인 스마트폰을 바라보며 동영상 녹화를 하는 중이었다.
강진의 뒤로 보이는 책장엔 두꺼운 영어 원서, 두꺼운 금융 관련 책, 수학 전공 책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고,
-This is a corporate report that I researched and analyzed….
(제가 조사하고 분석한 기업보고서입니다….)
-In order to grow into a global company, CEO must be not a 2nd or 3rd generation with no ability, but a professional manager….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선 능력이 없는 2세, 3세가 아니라 전문 경영인에게….)
강진은 정지 버튼을 눌렀다.
“발음이 문제는 아닌데…… 자꾸 이 부분에서 막히네.”
‘She sells sea shells by the seashore.’
‘The big black bug bit the bit the big black bear.’
‘Peter piper picked a peak of pickled peppers.’
‘How much wood would a woodchuck chuck if a woodchuck could chuck wood.’
발음 연습 문장을 반복하며 5분 정도 입 운동을 한 후, 다시 자신이 작성한 영어 대본을 유창하게 읽으며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막히는 구간이 없을 때까지 계속 따라 읽었고, 이내 눈을 감고 외우기 시작했다.
-제가 작성한 보고서 내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대본을 완벽히 외운 강진은 그제야 눈을 떴고,
핸드폰 화면의 녹화 버튼을 눌렀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후우. 드디어, 끝냈다…!”
녹화 영상을 재생하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 강진.
“완벽해.”
강진은 녹화 영상을 끄고, 좌우로 몸을 돌리며 긴장을 풀었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
“잠깐. 면접에서 재벌 2세나 3세… 그들이 기업에 끼친 폐단에 대해 예를 들라고 할 수도 있으니까….”
강진은 책장에서 딱 봐도 엄청 두꺼운,
<한국 증권사의 역사>
백과사전 같은 책을 집어 들었다.
“제일 유명한 사례가 현재증권이었지. 현재증권, 현재증권…. 몇 페이지에 있더라. 1997년인데…… 아, 찾았다.”
강진은 책을 들고 의자에 앉아 읽기 시작했다.
“망나니 손자라. 이놈 때문에 현재증권이 망했지. 한심한 놈, 내가 재벌 3세면 회사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만들 텐데. 망나니면 재벌들에게 겁 없이 덤벼들고 딴지 걸고 다 빼앗아 버릴 수 있는 거 아닌가. 나랑 성격이 안 맞으려나.”
내일 면접 보기로 한 현재증권은 1997년 재무 개선으로 일선의 실무진들이 전부 물러나고 새로 태어난 기업이었다.
강진이 꼭 들어가고 싶은 증권회사이기도 했다.
강진은 전공을 살려 수학 선생님이 되려고 했지만, 대학 동아리에서 주식투자로 수억을 번 선배를 본 후 생각을 바꾸었다.
대한민국에서 부자가 되는 길.
그 길은 주식밖에 없었다.
타고난 배경, 출발점이 강진과는 다른 재벌 후계자들.
그 배경이 없는 가난한 강진은 죽도록 일하며 죽도록 공부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고는 부자?
아니, 당장 먹고 살기도 힘들었으니까.
“머리라도 좋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꼬르륵.
갑자기 몰려드는 허기에 강진은 책을 덮고 일어섰다.
냉장고 문을 열었지만, 보이는 건 봉지에 있는 냉동 밥과 시장에서 산 마른반찬 몇 개가 다였다.
밑반찬과 함께 먹을까 생각하다, 이내 냉장고 문을 다시 닫았다.
***
며칠 후, 현재증권 최종 면접실.
세 명의 면접관 앞에 앉아 있는 강진.
삼엄한 침묵 속에,
사락, 사락.
종이 넘기는 소리만 들려왔다.
가장 좌측에 있는 면접관이 고개를 들고 강진을 바라봤다.
머리가 하얀 백발에 금테 안경.
딱 봐도 증권가에 뼈를 묻은 사람.
“차강진 씨. 1차 수석이군요.”
“네.”
“이 정도면 실력이면 굳이 우리 회사 말고도 더 큰 대기업에 갈 수 있지 않나요?”
면접관이 예상한 대답은 대략 이런 것일 터였다.
-현재증권은 대한민국 최고의 증권사이기 때문입니다.
혹은,
-이 한몸 불태워 현재증권을 세계 최고의 반열에….
하지만, 강진의 답변은 그것들과 궤를 달리했다.
“현재증권에는 재벌 후계자들이 없어서 지원했습니다.”
“…재벌 후계자?”
“네. 대한민국 증권사를 보면 선진 금융 기술을 무시하는 재벌 후계자들의 전횡으로 망한 사례가 종종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1997년 현재증권의 후계자는 저PER에서 저PBR, 블루칩으로 이어지는 주도주를 항상 한발 늦게 투자함으로써 유동성에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강진은 현재증권 면접에 와서는 비록 과거의 인물이고 현재 실무진과는 관계가 없는 일이지만, 치부를 그대로 말했다.
“…….”
“1998년 작전 세력과 결탁한 후계자의 비리가 발각되어 고객의 인출 사태를 일으킨 창성증권 후계자도 있습니다.”
강진의 대답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2010년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큰 금융 사고인 옵션 조작 사건 역시 일본 이치증권과 결탁한 재벌 2세의 행동도 범죄행위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됐습니다. 대한민국 증권사가 차강진 씨 머리에 다 들어 있나 보네요.”
“저는 공부하면서 그들에게 분노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이렇게 질문해 보죠. 만약에, 회장님 손자가 차강진 씨 상사로 들어오면 그땐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제가 말한 재벌 후계자는 실력이 없는 분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실력이 있다면 당연히 보필할 것입니다. 재벌의 후계자가 임원이 아니라 증권사 사원으로 들어오는 건 이유가 있을 테니까요.”
“그런데, 그 상사가 실력이 없는 망나니라면…?”
씨익 웃으며 대답하는 강진.
“그럼, 먼저 면접관님께 퇴사를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예?”
“이 회사는 곧 망할 테니까요.”
첫 번째 면접관이 ‘오호, 이놈 봐라’ 하는 표정으로 변했다.
이어, 두 번째 면접관이 옆에 있는 면접관과 귓속말을 하며 서류를 톡톡 쳤다.
“차강진 씨.”
“네.”
“한 가지만 물어보죠. 만약 9.11 테러나 서브프라임 모기지 같은 사태가 발생하여 풋옵션으로 엄청난 이익을 벌어들일 수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죄송합니다만 면접관님의 질문에는 어폐가 있습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정확히 알 수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면접관들의 이목이 강진에게 집중됐다.
“평상시와 똑같은 업무를 보고 있을 겁니다. 때에 따라선 이익도 취할 겁니다.”
“그 이익이 다른 사람들의 피와 눈물이라면?”
“위기의 상황에선 피와 눈물을 생각할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어째서죠?”
“증권은 제로섬 게임입니다. 누군가 잃으면 누군가 이득을 취하죠. 위기의 순간에, 저는 주저하기보단 이득을 취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이득은 앞으로의 불행한 사태를 막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데 사용하겠습니다.”
면접관은 눈빛에 깊게 가라앉았다.
‘차강진이라고 했나. 자신의 신념에 확신이 있군.’
이제, 마지막 면접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질문했다.
“차강진 씨가 현재증권에 입사했다고 칩시다. 어디에 투자하는 게 적당하겠습니까?”
“저라면….”
강진이 면접관을 똑바로 마주 보며 대답했다.
“금융의 최첨단 기법을 사용하여 기업을 사냥하는 IB, 투자은행에 투자하겠습니다.”
“IB? 굳이 기업사냥꾼에게 투자한다고요?”
“기업사냥꾼(Corporate Raider)은 당하는 쪽 명칭입니다. 저는 주주행동주의자(Shareholder Activist)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리고 할 수 있다면 현재증권을 투자은행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
“미국을 비롯해서 유럽과 아시아를 지배하는 투자은행. 이게 진정한 증권사 아니겠습니까?”
장내에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그리고.
“하하하하!”
백발에 금테 안경을 낀, 첫 번째 면접관의 호탕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
며칠 후.
기다리던 문자가 왔다.
[Web발신]
[현재증권]
최종면접에 합격한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합격.
컴퓨터로 다시 확인해 보니, 심지어 수석 합격이었다.
“해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대망의 첫 출근날.
두근거리는 마음에, 뒤척이다 잠이 깬 강진은 결국 자는 것을 포기했다.
이른 새벽, 강진은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고 출근길에 나섰다.
‘일찍 출근해서 건물의 내부부터 기억해 둬야지.’
1시간 뒤, 회사의 정문 앞에 선 강진은 길게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저곳은 이제 내 회사다.”
빌딩 숲 사이에 위치한 건물.
고요하고 평화로운 새벽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니 괜한 설렘이 밀려왔다.
그런데 그때.
“어, 어…! 자, 잠깐!”
바로 옆 교차로에서부터 지그재그로 휘청이며 달려오는 외제 차 한 대.
그리고 그다음 순간.
그 자동차는 인도로 돌진하며 강진을 덮쳤다.
끼이이이익!
‘뭐지?’
강진의 몸이 하늘로 붕 떴다.
이윽고.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잠깐의 끔찍한 충격이 찾아왔다.
‘제기랄….’
이내 강진의 의식이 점차 흐려졌다.
***
똑똑똑!
집사가 조심스럽게 방문을 두드렸다.
“…….”
현재증권 임병달 회장의 손자 임재준의 방.
그 안에선 아직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똑똑똑!
집사가 다시 문을 두드렸지만 역시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침묵.
‘왜 이러실까…….’
병원에서 퇴원한 지 일주일 째,
임재준은 아직도 방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았다.
‘설마…… 자숙하고 계신 건가?’
집사는 자숙이란 말에 실없이 웃었다.
‘그럴 리가 없지. 천하의 망나니가.’
집사의 뒤로 두 명의 가사 도우미가 쟁반에 밥과 국, 정갈해 보이는 반찬을 들고 다가왔다.
“도련님. 식사 가져왔어요.”
집사가 방문에 살며시 귀를 대는 순간,
“…두고 가세요.”
낮게 깔린 중얼거림에 집사는 흠칫 놀랐다.
그러고는 뒤에 있는 가사 도우미들을 쳐다보며 낮게 속삭였다.
“방금 뭐라 그러신 건가?”
“두고 가라는데요?”
“그래, 내가 맞게 들은 거 맞지?”
가사 도우미 둘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집사가 어이없다는 듯, 도우미에게 눈짓하자 도우미들은 조심스레 문 앞에 음식을 내려놓았다.
“도련님. 한 시간 뒤에 오겠습니다. 오늘은 꼭 나오셔야 합니다.”
“…….”
“오늘 회장님 귀국하십니다.”
“…….”
“공항에서 바로 오신다고 했습니다.”
“…….”
“식사하시고 기운 내셔야 회장님…….”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곧바로 가사 도우미들을 향하는 집사의 시선.
이번에도 가사 도우미 둘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존댓말 하신 거 맞지?”
“네, 맞는 것…… 같은데요.”
방에서 들려온 친절한 대답에 집사는 걱정스러운 한숨을 쉬었다. 내려가라는 손짓을 하며 도우미 두 명을 데리고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 중간에서 집사는 한 번 더 재준의 방으로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닌 것 같은데…….’
멀어져 가는 집사의 발소리를 확인하며, 강진은 실소를 터뜨렸다.
“도련님이라…….”
출근 첫날 회사 앞에서 사고가 난 후, 강진이 눈을 뜬 곳은 VIP 병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