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전 (6)
칼데릭 군주회의 시작은 수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그것은 드래곤이라는 종의 역사와도 관련이 깊었다.
칼데릭이 위치한 대륙 북서쪽, 그곳은 본래 땅 전체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결계로 덮여있어 출입이 불가능했던 땅이다.
누군가는 그 땅에 고대의 악마가 봉인되어있을 거라 두려워했고, 누군가는 신이 존재하는 성역이라 믿고 경외시했으며, 또 누군가는 사후의 세계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툰. 칼데릭이 탄생하기 전 그 미지의 땅이 불리었던 이름이다.
툰에 대한 건 그 어느 것도 진실이 아니었다.
사실 그곳에는 드래곤들이 살고 있었다.
잊혀진 수천 년 전의 역사, 아직 지성체들이 마력을 제대로 인지하지도, 다루지도 못했던 아득한 고대.
마족도 아직 없던 그 시절에 드래곤들은 절대적인 존재였다.
그들은 날 때부터 본능만으로 마력을 다룰 수 있고, 숨만 쉬어도 몸에 마력이 쌓이는 축복받은 종이었기 때문이다.
드래곤들은 그 절대적인 힘으로 자유롭게 살아가길 주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자유에 다른 종들에 대한 배려는 없었다.
내키면 다른 종족을 학살하고, 부족과 국가를 멸망시키고, 대륙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그런 시대가 이어지길 오래, 이대로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드래곤들의 수도 점점 많아졌다.
그들은 동족들의 행패에 진절머리가 났기에 무언가 제약이 필요하다 생각했다.
다행히 그들 중에는, 그 뜻을 실현할 수 있을 만큼 아주 강력한 드래곤도 존재했다.
그 드래곤은 동료들과 함께 모든 드래곤을 힘으로 휘어잡은 뒤, 드래곤 로드가 되었다.
드래곤 로드는 대륙 북서쪽에 터를 잡고 아주 거대한 결계를 만들었다.
그리고 모든 드래곤이 그곳에서만 살아갈 것을 강제했다.
긴 세월이 흐르며 세상에서 드래곤의 존재는 서서히 잊혀지고, 전설만이 무성한 땅이 만들어졌다.
드래곤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툰에서 지냈으며, 가끔씩 로드에게 허락을 받은 드래곤만이 바깥으로 나가 짧은 유희를 즐길 수 있었다.
물론 유희 중 세상에 조금이라도 혼란을 야기하는 건 엄격하게 금지됐다.
그렇게 또 긴 세월이 흐르고, 한 드래곤이 태어났다.
드래곤의 이름은 가크.
로드보다도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태어난, 툰의 수천 년 역사를 끝낸 마룡이다.
가크는 평생을 결계 안에서만 갇혀 살아가야 하는 처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끝내 동족들을 모두 죽이고, 툰의 결계를 부순 뒤 세상으로 나왔다.
몇 차례 유희를 경험했던 가크에게는 거대한 국가를 세우고 다스려보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다.
그래서 원하는 대로 했다.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고, 툰의 땅에 초석을 세웠다.
시작은 주변 지역에 있던 야만 부족 몇몇을 모은 것에 불과했으나, 어느 종족도 차별하지 않는다는 강력한 지도자가 있다는 말에 수많은 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가크의, 드래곤이라는 종의 압도적인 힘을 보고도 감히 그를 방해할 수 있는 세력은 없었다.
가크는 그렇게 하나의 거대한 연합 국가를 완성했다.
가장 뛰어난 인물들을 아홉 군주 자리에 앉히고, 자신은 대군주로 칭했다.
칼데릭의 시작이었다.
드래곤은 성별이 존재하지만 사실상 생물적인 의미는 크게 없으며, 남성이든 여성이든 배우자가 필요 없이 후손을 남기는 것이 가능하다.
또한 수명이 무한하기에 노화로 죽는 일은 없지만, 후손을 남긴 드래곤은 그때부턴 더 이상 수명이 무한하지 않다.
칼데릭이 세워지고 약 백 년.
본래 후손을 만들 생각이 없었던 가크는 무슨 변덕에서인지 후손을 만들었다.
그리고 후손이 완전히 성장하자마자 대군주좌를 물려준 뒤, 스스로의 생명을 포기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가크의 후손, 라샤테인.
칼데릭의 2대 대군주.
라샤테인은 홀로 모든 동족을 죽였을 만큼 강했던 가크만큼이나 뛰어난 자질을 타고난 드래곤이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그랬듯 대군주로서 칼데릭을 다스렸다.
시간이 흘렀다. 계속 흘렀다. 수백 년이 흘렀다.
라샤테인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가크가 왜 영생을 포기하고 죽음을 택했던 것인지.
'재미없다.'
그냥, 전부 지겹고 따분해졌다.
라샤테인은 너무 강했다.
이대로 수백, 수천 년이 더 지나면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질 것이다.
드래곤은 그런 생물이었다. 숨만 쉬어도 강해지고, 강해지려고 마음 먹으면 훨씬 빠르게 강해진다.
그녀는 그런 드래곤들 중에서도 가장 강했던 드래곤의 피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존재였다.
물론 세상에 자신만큼 강한 존재들이 없지 않다는 건 라샤테인도 알고 있었다.
세인테아의 현자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그녀와 비교해도 격이 뒤떨어지지 않는 마법사였다.
또한 올테로어에도 그녀와 충분히 자웅을 겨룰 수 있는 마족들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라샤테인은 그것에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어차피 오랜 시간이 지나면 그들은 수명이 다해 죽을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결국 자신이 더 강해질 것이다.
그건 정해진 미래였다.
그렇다면 뭘 하든 무슨 의미가 있는가?
칼데릭뿐 아니라 온 세상을 발아래에 두고 지배하겠다는 목표라도 세워볼까?
하찮다. 그저 조금 더 커진 칼데릭을 다스리는 것과 다를 것도 없겠지.
이렇게 무료함과 권태로움에 묻혀 가크와 같은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걸까.
더 많은 시간이 흐르고, 마족의 침공과 함께 대전쟁이 일어났다.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마법사로 칭송받던 현자마저 세상을 뜬 가운데, 세인테아는 속절없이 멸망할 위기에 처했다.
라샤테인은 전쟁에 조금도 관여하지 않고 멀리서나마 마왕의 모습을 구경했다.
모든 마족들을 발아래 꿇리고, 혼잡한 올테로어를 통일했다는 최강의 마족은 어떤 존재일까.
그리고 마왕을 보자마자 자신보다도 한 차원 더 격이 높은 존재라는 사실을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꽤나 인상적이었다.
라샤테인은 처음으로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뛰어넘을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게 하는 상대를 만났다.
저런 괴물이라면 세인테아는 반드시 멸망할 테고, 다음은 칼데릭이 멸망할 수도 있겠지.
라샤테인은 스스로 생을 포기하는 것보다는, 저런 강적과 싸우다 최후를 맞이할 수 있겠다는 사실에 그나마의 위안을 느꼈다.
그리고, 용사가 세상에 나타났다.
처음 성검의 용사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때, 마왕에게 온 신경이 쏠려 있던 라샤테인은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금세 용사가 마족들을 모조리 무찌르고 마왕성까지 나아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라샤테인은 조금 흥미가 일었다.
그래서 한번 어떤 인간인지 구경이나 해보기로 했다.
'······아.'
마왕과 홀로 싸우는 용사를 처음 목격한 순간.
라샤테인은 살아생전 느껴본 적 없던 감정을 느꼈다.
마왕을 처음 봤을 때조차 느껴지지 않았던 압도적인 전율감.
그 전율감의 근원은 정확히 용사가 아니라, 그녀가 가진 성검이었다.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저 검이 담고 있는 힘은 이 세상의 힘이 아니라는 걸.
용사는 끝내 마왕을 봉인시키고 전쟁을 종결했다.
라샤테인은 성검의 정체에 대해 알아보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용사를 몇 차례 직접 만나기도 했지만, 용사에게선 성검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자신도 모른다는 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세상에는 진정 자신의 인식 밖에 존재하는 초월자가 존재했던가?
라샤테인은 그것이 궁금해졌다.
너무도.
만약 성검의 힘이 정말 신과 같은 존재의 힘이라면, 그 신의 모습을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싶었다.
무료함만이 가득했던 그녀의 삶에 처음으로 생긴 아주 선명하고, 강렬한 욕망이었다.
***
"어서와, 7군주. 네가 왜 여기에 왔을까?"
대군주가 내게 물었다. 나는 경계를 끌어올린 채 대답했다.
"······그건 이쪽에서 물어야 할 말 아닌가?"
"아하하, 그렇긴 한가."
돌연 모습을 감췄던 대군주가 세인테아의 전장에 있다.
나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뭘 하고 싶은 거냐, 대군주. 네가 갑자기 사라진 탓에 칼데릭이 전멸할 뻔했다."
"아, 알고 있어."
"뭐?"
"그래서 의외인 거야. 전멸할 뻔했다는 건 결국 쓰러뜨렸다는 소리지? 내가 군주들의 힘을 너무 과소평가했나. 기간티시움이 있다고 해도 설마 아즈켈을 잡아낼 줄은 몰랐는데."
대군주가 뻔뻔하게도 웃었다.
"아무튼 미안. 그 성가신 놈을 내가 직접 상대하고 있다간 때를 못 맞출 것 같았거든."
"대체 뭔 소리를 하고 있는 거냐."
"보라고, 7군주."
대군주가 저멀리 전장을 가리켰다. 카앤이 마왕과 싸우고 있는 방향을.
"떨리지 않아? 용사가 사력을 다해 싸우고 있잖아."
"이봐······."
"나는 말이야, 예전부터 쭉 궁금했었어. 용사가 가진 성검의 정체가 무엇인지. 왜 그런 초월적인 존재가 한낱 인간에게 자신의 힘을 주었는지."
"······."
"그래서 이건 아주 오랫동안 고대해왔던 순간이야. 나는 단지, 오늘 이 자리에서 그 답을 확인할 수 있길 바랄 뿐이고."
본래도 정상이라고는 할 수 없었던 여자지만, 지금 대군주가 풍기는 분위기는 완전히 광인의 그것과도 같았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더 이상의 대화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고 물었다.
"그래서 결국 뭐냐. 용사를 돕지 않고 여기서 계속 지켜보고만 있겠다는 건가?"
"그렇지."
"그럼 나는 가보겠다. 이쪽은 구경만 하고 있을 생각이 없어서."
심상치 않은 기류를 감지했기에 은근슬쩍 지나치려고 할 때였다.
대군주가 다시 내 앞으로 날아와서 앞길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안 되지, 7군주. 누구도 저기에 간섭할 수는 없어."
"······개소리는 작작해라, 대군주. 뭐 하자는 거냐?"
"방금 말했잖아? 성검의 본체를 확인하고 싶을 뿐이라고. 만약 이대로 용사가 궁지에 몰리면, 성검에서도 무언가 더 변화가 일어나지 않겠어?"
그렇지 않아도 몸이 정상이 아닌 와중, 대군주의 말은 날 더 혼미하게 만들었다.
"용사가 패배하면 세상은 멸망한다! 지금 그딴 호기심 때문에 날 막는다는 거냐?!"
대군주가 눈웃음을 지었다.
"세상이 멸망하든 말든 그건 내 관심사가 아니야. 넌 용사를 도우러 갈 수 없어, 7군주."
아셸이 검을 휘둘렀다. 백색의 검기가 대군주의 보호막을 강타했다.
그 틈에 대군주를 지나치려고 했으나, 돌연 덮쳐온 강풍에 튕겨나가고 말았다.
"윽······!"
나는 부동 장막을 펼쳐 날아가는 띠용이를 멈추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주위를 대군주의 결계가 뒤덮었다.
속절없이 결계에 완전히 갇힌 형세가 되었다.
"거기 가만히 있어줘. 허튼 짓을 하려고 하면 나도 죽일 수밖에 없어."
나는 결계를 노려보며 어금니를 깨물었다.
젠장, 이렇게 어이없게 갇혀있을 수는 없······.
쩌엉!
그때 뒤쪽에서 날아든 공격이 대군주의 결계를 깨부쉈다.
나는 재빨리 결계에서 벗어나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는 이들을 바라봤다.
공격을 날려 결계를 부숴준 인물은 신퇴였다. 신퇴뿐 아니라 광랑, 뇌후도 있었다.
왜 그들이 여기에?
"대군주, 왜 이곳에 있는 것이오? 어째서 7군주를 막는 것이고?"
곁으로 다가온 신퇴가 한 손에는 마스티온을 쥔 채 차갑게 대군주를 노려봤다.
대군주가 흥이 조금 식는다는 얼굴로 이쪽을 쳐다봤다.
"명령이야, 군주들. 모두 본대로 돌아가줄래? 나도 상황이 끝나면 돌아갈 테니까."
"뭐? 명령? 우리가 죽어라 아즈켈 상대할 때 혼자 튀어놓고 명려엉?"
광랑이 빈정거렸다.
뇌후 또한 상황을 이해하기 힘든 듯 물었다.
"대군주, 설명이 필요합니다. 이곳에서 뭘 하고 계신 겁니까?"
대군주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두 번 말하지 않아. 모두 돌아가."
얼어붙은 분위기 속, 잠시 침묵이 흘렀다.
신퇴가 용사와 마왕이 싸우는 방향을 바라보고서, 내게 물었다.
"7군주, 용사를 도와 마왕을 확실히 끝장낼 것이라고 했지. 내가 그 말을 믿어도 되겠나?"
나는 즉시 대답했다.
"믿어라."
신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에 들린 마스티온에서 검은 기류가 흘러나왔다.
대군주가 그것을 보고 혀를 찼다.
"벌써 절반 넘게 사용한 거 아니야, 1군주? 나와 싸우다 죽기라고 하겠다는 건가?"
"필요하다면 그래야겠지. 라샤테인, 당신은 대군주의 자격이 없다."
콰아아아앙!
마스티온의 힘과 대군주의 마력이 충돌했다.
대군주가 잠시 붙들린 사이, 나는 전속력으로 전장을 향해서 나아갔다.
하늘에 날아다니며 경로를 막는 마족들을 아셸이 검기로 모조리 베어넘겼다.
이내 용사와 마왕, 둘의 전투가 선명히 보일 정도까지 가까이 다다랐다.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살이 떨릴 정도로 거대한 압력이 느껴진다.
마왕의 기운이다.
카앤은 전장 한가운데에서 홀로 마왕과 싸우고 있었다.
그에 다급히 카앤이 있는 쪽으로 다가가려던 때, 한 마족이 하늘로 솟아올라 앞길을 막았다.
【Lv. 94】
4개의 팔, 그리고 등에는 날개를 달고 있는 마족.
내가 모르는 원마급 전력이다.
아셸이 곧장 띠용이의 등에서 놈을 향해 도약하며 외쳤다.
"가십시오!"
아셸이 검을 찍어내리며 놈과 함께 지상으로 떨어졌다.
나는 돌아보지 않고 나아갔다.
용사가, 카앤이 있는 곳으로.
마침내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 보인 광경은, 전방에 신성력의 보호막을 펼친 채 위태롭게 마왕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는 카앤의 모습이었다.
"······카앤!"
나는 곧바로 띠용이의 등에서 뛰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