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전 (5)
초감각을 끌어올린 나는 저멀리서 다소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일순간에 전멸해버린 흑해 여제의 군대, 그리고 모탑 위쪽에 보이는 한 명의 마족.
다급히 도주하려던 흑해 여제가 마족의 손에 붙잡혀 터져버린다.
문자 그대로, 그냥 찌부러져서 죽었다.
'저건······.'
아무리 대인전에 취약한 흑해 여제라고 해도 칼데릭의 군주다.
그런 그녀를 벌레 잡듯이 죽여버렸다.
무엇 하나 특징적이지 않은, 인간과 별다를 것 없는 외관의 마족.
나는 놈의 정체를 깨달았다.
저 가공할 힘, 머리 위의 레벨을 확인한 순간 곧바로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원마 서열 1위, 아즈켈.
마왕이 봉인되어있던 세월 동안 올테로어를 완벽하게 휘어잡았던, 명실상부한 마족의 2인자.
이 전장에는 마왕이 아니라 바로 놈이 있었던 것이다.
조금 의외였다.
아무리 마족이 카앤의 존재를 모른다고 해도, 마왕의 광신도이자 최강의 원마인 놈이라면 당연히 마왕을 곁에서 보좌할 거라고 생각했었으니까.
'역시 쉽게만 풀릴 리가 없나.'
칼데릭에는 아홉 군주가 있다.
무엇보다 대군주가 존재한다.
물론 놈들이 대평원 북쪽 방면에서 마주할 세력이 칼데릭이라는 걸 놈들이 진군하는 동안 파악하고 있지 않았을 리도 없으니, 버리는 전력으로 쓸 의도라도 아니었다면 걸맞는 전력을 갖췄겠지.
그리고 그 전력이라는 건, 따지면 마왕을 제외하고 아즈켈밖에 없었다.
"······아즈켈인가!"
신퇴도 이내 깨달은 듯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는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찌그러진 흑해 여제의 시체를 지면에 던져버리는 놈의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생각했다.
'대군주가 나서야 한다.'
【Lv. 98】
군주들이 전부 힘을 합쳐 싸우더라도 저 괴물은 무리다.
신퇴조차 놈과 2레벨 차이가 난다.
같은 레벨의 대군주가 놈을 상대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쿠구구구.
그때 아즈켈이 다음 움직임을 보였다.
모탑에서 뛰어오른 놈이 가공할 속도로 이곳 중앙의 전장으로 날아왔다.
나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소리쳤다.
"온다!"
아즈켈의 공세는 곧장 시작되었다.
벌레 군단을 쓸어버린 좀 전의 녹광이 이번엔 하늘을 뒤덮었다.
마치 오로라와 같은 그것은 끔찍할 정도로 사이한 기운을 품은 채 지면으로 쏟아져내렸다.
저게 떨어지면 중앙 병력의 최소 절반은 전멸이다.
하지만 어떻게 막을 방법도 없다.
다급히 아셸과 띠용이와 함께 자리를 피하려는 순간이었다.
신퇴가 들고 있던 방패를 하늘로 던졌다.
화아아!
방패를 중심으로 오색의 역장이 아주 광범위하게 퍼지며, 아즈켈의 공격을 막아내기 시작했다.
나는 놀라서 신퇴를 바라봤다.
이걸 막았어?
하지만 오만상을 찌푸린 채 눈꺼풀마저 파르르 떨리고 있는 그의 얼굴이 힘이 부친다는 사실을 여실히 알려주고 있었다.
'잠깐 버틸 뿐이야.'
하늘 한가운데에 우뚝 떠있는 아즈켈은 기운을 뻗어내며 여유롭게 전장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다.
"크어어어!"
그때 9군주 거왕이 기합과 함께 아즈켈을 향해서 자신의 덩치보다도 큰 거대한 창을 쏘아냈다.
아즈켈의 주위에 거신의 형상이 나타났다.
흑해 여제를 찌그러뜨린 팔의 완전한 본체였다.
저것이 바로 아즈켈의 권능, 안타마라의 거신상.
게임에서도 유저들에게 손꼽게 악명 높았던 보스 스킬.
거신은 팔을 휘저어 전력을 다한 거왕의 투창을 간단히 붙잡고 박살내버렸다.
다른 군주들 또한 마찬가지로 공격을 날렸지만 조금이라도 통하는 건 없었다.
'대군주는 뭘 하는 거야?'
상황이 이 지경인데 왜 아직까지도 안 움직이고 있지?
나는 다급함과 의아함에 아군 진영의 후방을 노려봤다.
그러나 대군주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신퇴가 잠시나마 벌어주고 있는 시간에 띠용이를 타고 서둘러 참모장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참모장은 굳은 얼굴로 아즈켈과 군주들이 대치하고 있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다가온 걸 발견하고서 그가 시선을 돌렸다.
"참모장, 아즈켈이다."
"······예."
"대군주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건가? 왜 모습이 보이지 않지?"
그에 참모장이 머뭇거리더니, 한층 더 어두워진 낯으로 대답했다.
"그게······ 모르겠습니다."
"뭐?"
"언질 한마디 없이 어느 순간 갑자기 사라지셨습니다. 죄송하지만, 저도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가 없어 혼란스럽습니다."
이게 뭔 개소리인가.
참모장의 이해하기 힘든 말에 나는 한순간 벙찔 수밖에 없었다.
'대군주가 사라져?'
참모장에게도 한마디 없이 갑자기 모습을 감췄다는 건가? 왜?
대군주가 그럴 행동을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설령 무언가 급한 일이 생겼더라도 뭐라 말이라도 남겼어야 정상이다.
전투가 한창인 와중에, 최측근인 참모장조차 그녀의 행방을 모르게 된 게 말이 되는가?
"웃기지 마라. 대체 대군주가 어디로 사라졌다는 거냐?!"
대군주가 없으면 저걸 누가 막을 건데!
다급함에 소리쳤지만 참모장은 여전히 같은 표정으로 침묵할 뿐이었다.
옆에 서있는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참모장과 같은 대군주의 최측근, 흑린의 단장인 크라디엘.
그는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눈빛에는 동요가 엿보이고 있었다.
역시 아는 건 없는 모양이다.
"참모장! 대군주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어 뇌후도 와서 참모장에게 다급히 물었다.
마찬가지로 상황을 설명들은 그녀가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대군주께서 갑자기 사라질 이유가 뭐가 있단 말입니까? 무슨 황당한 소리를······!"
그 말대로 황당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나는 환장할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다시 전장을 바라봤다.
어느새 망자왕도 나서 신퇴의 역장 위에 자신의 마력을 덮어 방어를 돕고 있었지만, 큰 차이는 없었다.
아즈켈이 아직 조금도 전력을 내지 않았다는 건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보란 듯 서서히 공격의 강도를 높여가며 군주들을 농락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대로면 진짜 전멸이겠다 싶은 때, 신퇴 쪽에서 거대한 마력이 일었다.
허공의 공간이 쩍 갈라지더니 돌연 거대한 골렘이 나타난 것이다.
······저게 뭐지? 신퇴가 한 건가?
크기는 다른 전투 골렘들의 몇 배는 컸고, 느껴지는 마력도 궤를 달리했다.
신퇴는 골렘이 등장하자마자 버틸 만큼 버텼던 역장을 곧장 거두었다.
【Lv. 97】
무려 97레벨에 달하는 그 골렘은 거체를 움직여 아즈켈의 기운을 모조리 밀어내고, 돌진했다.
아즈켈의 거신과 골렘이 양팔을 부딪혔다.
하늘에서 거대한 충격파가 고리 형태로 퍼져나갔다.
놀랍게도 골렘은 밀리는 기색 없이 그 상태로 거신과 힘겨루기를 이어갔다.
"저건······?"
참모장이 작은 탄성을 내뱉고서 말했다.
"기간티시움. 고대의 마법 기술로 제작한 전투 골렘입니다."
"고대 마법이라고?"
"예. 전쟁 전에 대군주께서 주신 설계도로 1군주께서 제작하셨습니다."
저런 것까지 만들었었나.
대군주가 갑자기 종적을 감춰버린 와중 그나마 희소식이었다.
"참모장, 팔을 치료해라."
나는 참모장에게 얼어붙은 팔을 내밀었다.
참모장이 치유 마법을 펼쳤다.
팔을 치료하고서 도로 띠용이 위에 올라탔다.
"빨리 대군주를 찾아서 이 상황을 정상으로 돌려놔야 할 거다."
참모장에게 마지막으로 으름장을 놓은 뒤, 신퇴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크라디엘은 나를 뒤따라왔다.
콰아아아아!
아즈켈은 골렘을 짓누르려 기운을 더 끌어올리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골렘의 몸체에서 시커먼 오라가 일더니, 서서히 녹색빛을 띈 기운으로 바뀌었다.
그것은 아즈켈의 것과 완전히 같은 기운이었다.
나는 그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뭐야, 마력의 성질을 복사한 건가?'
저게 바로 고대의 마법 기술?
평범한 마력도 아니고 마족의 권능을, 그것도 최강의 원마인 아즈켈의 힘을 그대로 카피하다니.
아무리 강대한 아즈켈의 힘이라도 같은 성질의 힘으로 맞받아치니, 골렘은 다시 밀리지 않고 버티기 시작했다.
아즈켈도 조금 놀란 기색이었지만 이내 조소를 흘리는 게 보였다.
"재밌는 장난감을 가지고 있구나. 잘 가지고 놀다가 부숴주마."
나와 크라디엘은 신퇴와 군주들이 모여있는 곁에 내려섰다.
한숨을 돌리고 있던 신퇴가 진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저것도 오래 버티지는 못할 거네."
그건 나도 알고 있었다. 레벨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골렘의 카피 능력이 대단하긴 해도 둘 사이 마력의 차이는 확연하게 느껴졌다.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대군주는 어디에 있는 거냐? 저런 괴물이 설치는데 왜 아직도 안 움직이고 있지?"
나는 의아한 기색의 군주들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정말인가?"
신퇴는 믿을 수가 없다는 얼굴이었다.
광랑도 어처구니가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런 씨발, 이게 뭔 개소리야? 대군주가 혼자 도망이라도 쳤다는 거야?"
망자왕이 껴들어서 말했다.
"상황이 그렇다면 나는 물러나겠네."
"뭐?"
"누구에게도 전언 하나 남기지 않고 대군주가 자취를 감췄네. 칼데릭의 수장으로서 명백한 책임 위반. 나 또한 더 이상 전투를 계속할 책임은 없어 보이는군."
광랑이 인상을 찌푸렸다.
"뭔 주저리주저리 씨부리고 있어. 도망치겠다는 거잖아."
"그 말대로네, 5군주. 8군주도 순식간에 죽었네. 저 괴물을 상대로 목숨 걸고 싸울 이유가 있나?"
"어차피 죽지도 않는 몸인 주제에 엄살은."
"완전한 불사는 아니라네. 그리고 또 모르지, 아즈켈이 내 영혼까지 통째로 소멸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는. 나는 무모한 싸움을 할 생각이 없네."
망자왕이 크라디엘을 바라보며 물었다.
"막을 것인가, 크라디엘 경?"
크라디엘은 침묵할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 그에게 망자왕의 행동을 막을 권리가 있을 리는 없었다.
군주들은 칼데릭에 충성을 바친 존재가 아니다.
대군주가 한마디 말 없이 사라진 마당에 그들이 목숨까지 걸어가며 자리를 지킬 의리는 없었다.
물론, 싸우고 있는 수백만 군사들은 영문도 모른 채 버려져서 전부 몰살당하는 셈이지만 말이다.
'애초에 아즈켈이 순순히 도망가게 둘 리도 없지만은.'
지금은 골렘을 상대 중이지만, 핵심인 군주들이 도망갈 낌새를 보인다면 높은 확률로 쫓아올 터.
그렇다면 결국 누군가는 남아서 싸울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나 또한 망자왕의 말에 마음이 흔들렸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하나의 분명한 목표는 세웠다.
나는 카앤이 마왕을 상대하는 데에 힘을 보태야 한다.
여기 계속 남아서 아즈켈을 상대로 승산 희박한 싸움을 해야 되나?
'물론 아즈켈도 즉살에는 죽겠지만······.'
나는 아즈켈의 모습을 올려다봤다.
권능으로 접근이 완전히 차단된 가운데, 솔직히 저 괴물에게 접촉할 자신은 없었다.
내가 파크큘리를 죽인 것도 전부 지켜보고 있었다면 더더욱 방심 따윈 안 하겠지.
과거에 서열 3위 원마인 카고스와 싸웠던 게 생각났다.
그때도 초감각으로도 미처 따라잡지 못한 공격에 순식간에 당했었다.
아즈켈은 그런 놈보다도 훨씬 강한 원마다.
싸우려고 하면 한순간에 목숨이 날아갈 수 있다.
이 전쟁에서 죽을 생각 따윈 없다.
하지만 그래도 죽게 된다면, 최소한 의미 없는 죽음이 아니라 마왕과 싸우다가 죽어야 하지 않겠나.
"그래, 그럼 얼른 꺼지든가. 난 남아서 싸운다."
광랑이 으르렁거리며 검을 어깨에 걸쳤다.
망자왕은 정말로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몸을 돌렸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지. 건투를 빌겠네."
언데드 와이번을 타고 망자왕의 모습이 순식간에 멀어졌다.
"저 해골처럼 또 도망칠 놈 있나?"
광랑의 말에 신퇴가 고개를 저었다.
"물론 나도 싸울 것이네. 하지만 의외군, 5군주."
"뭐가?"
"자네가 군주로서 이렇게 책임감이 큰 성격인 줄은 몰랐는데······."
"뭔 헛소리야, 영감. 나를 몰라? 군사들이 얼마나 죽어나가든 그딴 건 알 바 아니야. 마족 상대로 도망치느니 그냥 싸우다 뒈지려는 것뿐이지."
거왕도 껴들어서 말했다.
"훌륭한 전사의 혼이다. 나 또한 물러서지 않는다."
신퇴가 뇌후를 쳐다봤다. 그녀가 혀를 차고서 말했다.
"어쩌겠어요? 가문원들도 지금 전장에서 싸우고 있는데, 가주인 내가 그들을 버릴 일은 없습니다."
크라디엘도 그제야 입을 열었다.
"군주님들을 돕겠습니다. 대군주님께선 분명 돌아오실 겁니다."
남은 건 나와 천궁뿐이다.
천궁이 아즈켈을 힐끗 올려다보고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말했다.
"솔직히 다 죽을 것 같아서 싸우기 싫은데······ 뭐, 적당히 싸우다가 위험하면 도망칠래."
천궁도 일단은 더 싸우겠다는 쪽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모였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주위를 둘러봤다.
대군주는 여전히 나타날 기미도 없다.
"론 님."
아셸이 굳은 얼굴로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다.
아셸은 당연히 내 선택에 따른다.
하지만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는 알았다.
내 생각을, 내가 이 전쟁에서 무엇을 가장 중요시하고 있는지는 그녀 또한 알고 있었으니.
나는 이내 입을 열었다.
"이대로면 승산 없는 싸움이라는 건 인지하고들 있나?"
어떤 합리적인 이유가 있든, 결국 싸우지 않으면 이들을 희생양 삼아서 도망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그러니 낮은 확률이라도 승부를 걸어야겠다.
여기서 아즈켈을 죽이고, 서둘러 카앤이 있는 쪽으로 이동한다.
"내게 계획이 있다."
"계획? 뭔 계획."
"아즈켈의 권능에는 한 가지 약점이 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군주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게 정말입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타마라의 거신상.
절대적인 공격 능력과 방어 능력을 동시에 갖춘 사기적인 능력.
그 몸체에는 보이다시피 수많은 눈들이 달려있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바로 거신의 역린이다.
약점인 눈을 정확히 타격할 수만 있다면, 거신의 방어 능력은 순간적으로 크게 약화될 것이다.
'어디까지나 아즈켈의 권능이 게임의 설정과 다르지 않다면 말이지······.'
이 현실 세계가 게임 설정과 다소 차이가 있는 부분들이 많다는 건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
아즈켈의 약점에 대한 설정이라고 게임과 완전히 똑같을 거라고는 당연히 확신할 수 없다.
물론 그 불확실성까지 군주들에게 구태여 말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아니면 놈을 이길 방법도 달리 있지도 않으니, 반쯤은 운에 맡기는 수밖에.
나는 아즈켈의 약점과 계획에 대해 설명했다.
설명을 듣고 신퇴가 내게 물었다.
"그런데 7군주, 대체 어떻게 아즈켈의 약점을 알고 있는 것인가?"
"지금 그걸 설명하고 있을 시간은 없다."
의문은 일축해버렸다.
"방금 말한 대로 한순간의 결판이 아니면, 놈을 쓰러뜨릴 방법은 없을 거다. 저 권능을 없애기만 하면 아즈켈은 내가 끝장내겠다. 부디 믿고 따라줬으면 하는군."
광랑이 가장 먼저 대답했다.
"좋아, 해보자고. 어차피 다른 방법도 없잖아."
다른 군주들도 순순히 동의했다.
신퇴가 허공의 공간을 가르더니 한 자루의 망치를 꺼내들었다.
회색빛을 띤 다소 특이한 형태의 망치.
나는 그것을 보자마자 정체를 알아차렸다.
마스티온.
고대 드워프 제왕이 세상을 멸망시킬 뻔했던 마수의 혼을 도려내여 제작했다는, 신퇴의 가진 최강이자 최악의 무구.
망치 자루의 일부가 검은색으로 물들어있는 게 보였는데, 내가 기억하기로 망치 전체가 검은색으로 물들면 신퇴는 죽게 된다.
한마디로 주인의 생명을 갉아먹는 무기였다.
그만큼 강력하기에 그만한 대가가 있는 것이었지만.
"일격에 전력을 다해야겠지. 바로 가겠네."
더 떠들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나를 포함한 군주들이 모두 하늘을 올려다봤다.
골렘은 이제 힘이 거의 다했는지, 서서히 몸체에 균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나와 신퇴는 와이번을 타고 서로 반대편의 하늘로 날아올랐다.
부서지기 직전인 골렘을 향해 신퇴가 손을 뻗었다.
그러자 골렘의 핵이 섬광을 터뜨리더니, 마력을 모조리 분출하며 자폭했다.
쿠구구구구!
거대한 폭발을 뚫고서 신퇴가 거신의 지척까지 접근했다.
단 하나의 약점, 그것은 거신의 이마 한가운데에 위치한 눈.
신퇴의 망치가 내리쳐진 순간 거신의 머리 위로 검은 낙뢰가 떨어졌다.
초감각을 최대한 끌어올리고 있던 나는, 그의 공격이 약점 정확히 직격한 것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지금!"
다음으로 지상에서 대기하던 군주들이 일제히 공격에 나섰다.
뇌후가 뇌전을 쏟아내고, 광랑과 크라디엘이 검기를 퍼부었다.
크게 도약한 거왕이 육중한 거체를 거신에 부딪혔고, 천궁의 공격도 적중했다.
마지막으로 아셸의 일격이 거신의 한가운데를 정확히 꿰뚫었다.
끝내 데미지를 버티지 못한 거신의 형체가 무너져내렸다.
한순간 무방비해진 아즈켈.
더 이상 남은 장애물은 없다.
나는 혈무를 두르고 공간 도약을 연달아 펼쳤다.
그리고······.
푸욱!
녹빛의 가시가 정확히 내 가슴을 꿰뚫었다.
의식이 아찔하게 흔들리는 걸 느끼며, 눈앞의 아즈켈을 바라봤다.
놈은 두 눈을 부릅 뜬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온몸이 타들어가는 고통을 느끼면서도 입꼬리를 올렸다.
이미 늦었다.
네가 졌어.
혈무에 닿은 아즈켈의 몸이 맥없이 지면으로 떨어졌다.
나도 몸을 가누지 못하고 놈과 함께 떨어져내렸다.
누군가 떨어지는 내 몸을 잡아챘다. 아셸이었다.
"론 님······!"
시야가 완전히 어둠으로 물든 가운데, 다급히 날 부르는 아셸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이대로 죽는 건가 싶은 것도 잠시, 시야가 다시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잠깐 정신을 잃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군주들이 쓰러진 날 둘러싸고 있었다.
"어이, 살아있냐?"
속이 메스꺼워 토할 것 같다.
온몸이 타들어가는 고통 또한 여전했다.
"으······."
나는 신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아셸이 나를 부축했다.
어떻게 살아는 있는 건가?
아즈켈의 공격에 직격당했다.
그대로 즉사했어도 이상하진 않다.
꿰뚫렸던 상처 부위를 내려다보니 재생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었다.
"엘릭서를 사용했네만 회복이 좀처럼 되지 않는군. 우선 쉬고 있게."
신퇴가 피곤에 찌든 얼굴로 반쯤 남아있던 엘릭서를 마저 내 가슴에 부었다.
초재생이 아주 잠깐 목숨을 붙잡아놓고 있던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모양이다.
"아즈켈은······?"
"확실히 죽었습니다."
뇌후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쓰러진 아즈켈이 있었다.
이걸로 끝인가. 칼데릭의 승리였다.
"론 님, 부상이 심각합니다. 안정을 취해주십시오."
"······그래."
고통을 버티기가 힘들어 아셸에게 몸을 맡기고 눈을 감았다.
뭐든 좋으니 잠깐 쉬고 싶다.
그때 품속에서 마력이 느껴졌다.
나는 퍼뜩 눈을 뜨고서 품속에서 마도구를 꺼내들었다.
전쟁이 시작하기 전, 카앤 대신 나인베르크에게 건네줬었던 연락 마도구.
혹여 세인테아가 마왕의 본대와 마주친다면 최대한 빠르게 연락을 받기 위해 취해뒀던 조치다.
- 마왕의 위치를 확인했다. 마왕은 이곳 중앙 방면의 군대에 있다.
- 네 말대로 카앤은 최대한 붙잡아두고 있겠다. 합류할 여건이 된다면 서둘러라.
"······."
내용을 확인한 나는 아셸의 부축을 물리쳤다.
아셸이 놔주지 않고 내 몸을 단단히 붙잡았다.
"안 됩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가야 한다."
"안 됩니다! 이런 상태로 어떻게 마왕을······!"
"아셸."
나지막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가야 돼. 난 더 이상 후회하고 싶지 않다."
아셸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이내 입숙을 꾹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가겠습니다."
말리지는 않았다.
솔직히 아셸도 데려가고 싶지는 않지만, 말려봤자 소용이 없을 거라는 건 뻔했으니까.
"무슨 일인가?"
나는 다른 군주들에게 말했다.
"마왕은 세인테아 쪽에 있다고 하는군."
"뭐? 전령도 안 왔는데 어떻게······."
"마도구로 연락을 받았다. 나는 지금 당장 그쪽으로 향할 거다."
광랑이 미간을 좁힌 채 물었다.
"7군주, 그 몸 상태로 움직이겠다는 거냐? 무슨 이유로?"
"용사를 도와 마왕을 확실히 끝장낼 것이다. 뒷정리는 부탁하지."
"어이, 잠깐······."
그녀의 만류는 뿌리치고, 나와 아셸은 곧장 띠용이 위에 올라타서 하늘로 날아올랐다.
"띠용아, 힘들겠지만 전속력으로 부탁한다."
한 차례 힘차게 울부짖은 녀석이 속도를 올렸다.
이곳에서 세인테아가 싸우고 있을 중앙 평원까지 거리는 그렇게 멀지 않다.
띠용이의 전속력이면 적어도 반나절 안으로는 도착할 것이다.
그동안 나는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며, 최대한 회복에 집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서서히 저멀리 전장이 눈에 들어왔다.
마족과 싸우고 있는 세인테아 군. 그리고 여기까지 느껴지는 거대한 두 기운의 충돌.
'······마왕!'
카앤이 마왕과 싸우고 있는 것이었다.
서둘러 그곳을 향해 나아가려고 할 때, 전방을 가로막고 있는 누군가의 모습이 들어왔다.
나는 그 인물이 누구인지를 확인하고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잠시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대군주······."
의아한 눈으로 날 바라보던 그녀가, 이내 싱긋 웃고서 입을 열었다.
"어서와, 7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