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전 (4)
세인테아, 칼데릭, 아데사, 각 세력이 마족군과 조우한 건 조금의 시간 차이가 있었지만 큰 규격에서는 거의 동시와 다름없었다.
칼데릭이 한창 전쟁을 이어가고 있을 무렵, 대평원 남쪽에서도 치열한 혈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더러운 마족들에게 아데사의 긍지를 뼈에 새겨줘라! 우리의 숲을 더럽혔던 죗값을 치루게 해라!"
마족과 뒤섞여 싸우는 수인 전사들.
허공에 수없이 펼쳐진 정령들의 형상과, 그를 조종하는 엘프들.
앞서 두 차례나 마족들에게 대수림을 습격받았던 아데사는 세인테아 못지않게 사기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무기가 부러지면 발톱과 이빨로 적을 찢어발긴다.
힘이 다해 쓰러지는 순간까지도 적의 다리를 물어뜯고 늘어진다.
정령술사들 또한 그런 전사들 못지않게 처절하게 싸우고 있었다.
무리하게 힘을 끌어쓰다 눈코입에서 핏물이 흘러내리는 이들이 허다했고, 수세에 몰린 이는 정령의 힘으로 자폭해버려 마지막 순간까지 적들을 길동무로 데려갔다.
전장 한가운데에서는 수인 대족장 우다크바트와, 엘프 대족장 샨드라가 두 원마와 싸우고 있었다.
원마 서열 4위, 반다프모샨.
원마 서열 5위, 발라크.
누구보다 최전선에서 마족들을 쓸어나가던 두 대족장을 막아선 건 그들이었다.
콰아아앙!
온 대지를 뒤집으며 뻗어나온 거대한 식물 줄기들이 우다크바트를 에워쌌다.
우다크바트는 언월도를 붕붕 휘둘렀다.
몰아치는 검기가 줄기들을 잘라냈다.
떨어지는 파편들을 밟고 도약하며 야수처럼 돌진하는 그의 주위에 허공에 파동이 일렁거렸다.
우다크바트는 별 수 없이 몸을 뒤로 날려 물러섰다.
파동이 발생한 허공에서 돌연 식물 줄기들이 튀어나오며 방금까지 있던 자리를 강타했다.
더 많은 식물 줄기들이 그를 어지럽게 따라붙었다.
우다크바트는 날아가면서 왼편의 줄기들을 잘라냈다.
오른편은 다른 곳에서 날아든 칼바람이 줄기들을 숭덩숭덩 잘라내며 방어를 도왔다.
파아아아.
그때 이번엔 지상의 식물 줄기에서 꽃들이 피어오르더니, 황색 꽃가루를 자욱하게 뿜어내기 시작했다.
우다크바트는 가루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기운에 조금이라도 닿으면 치명적일 거라 직감했다.
동시에 거대한 회오리가 몰아쳤다.
우다크바트의 주위를 휘감은 회오리는 꽃가루를 모조리 날려버리고 안전하게 그를 지상으로 이끌어주었다.
"쯧."
바람을 타고 지면에 착지한 우다크바트가 혀를 차며 한숨을 돌렸다.
이어 샨드라가 그의 옆에 내려섰다.
그녀의 머리 위에는 바람의 대정령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쉽지 않군요."
샨드라가 온 일대를 휩쓸고 있는 식물 줄기와, 그 너머에 있는 두 원마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반다프모샨의 능력은 거대한 식물 줄기를 소환해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것.
그리고 발라크의 능력은 공간을 왜곡시키는 것이었다.
식물 줄기도 평범하게 크기만 한 게 아니라 워낙에 단단한 데다가, 닿으면 마력이 빨려들어가서 움직임에 제약이 걸린다.
그리고 알 수 없는 꽃가루까지.
거기에 발라크의 공간 능력까지 더해져 사방에서 무질서하게 공격이 날아드니 까다롭기 그지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저 둘 외에 다른 원마들이 더 있지는 않은 것 같다는 점이었다.
남쪽 방면은 마왕이 위치한 본대가 아니었다.
저 두 원마만 쓰러뜨릴 수 있다면 전쟁은 아데사의 승리로 돌아갈 것이었다.
물론 이곳에서 승전을 거둔다고 해도 전쟁은 끝이 아니다.
마왕이 죽지 않은 이상 잔챙이들을 얼마나 죽이든 마족의 전력은 건재한 것과 다름없다.
그러니 서둘러 이 싸움을 끝내고, 마왕의 본대와 마주한 쪽을 지원하러 가야만 했다.
"공간을 넘는 공격만 최대한 막아주면, 나머지는 내가 자력으로 뚫겠소. 그래야 접근할 수 있소."
"알겠습니다."
샨드라가 허공에 바람의 길을 만들어주었다.
그 길을 타고 우다크바트가 식물 줄기로 돌진했다.
다시금 치열한 사투가 시작되었다.
***
끔찍하다.
피, 절규, 시체, 아비규환.
공허한 눈으로 전장을 내려다보며 카앤은 생각했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모두가 목숨을 내던진 채 싸우고 있다.
공포에 질려 우왕좌왕하는 이들이 있는 한편, 죽는 순간까지도 투지가 꺾이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누군가는 국가를 위해서, 누군가는 가족을 위해서, 누군가는 신앙을 위해서.
혹은 누군가는 복수를 위해서.
최소한 무언가 지킬 게 남아있었다면 자신은 무슨 마음으로 싸울 수 있었을까?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 차라리 그런 생각도 했었다.
에인델이 그랬던 것처럼, 홀로 진격해오는 마족들을 상대하러 움직이는 것도 하나의 선택지였다.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도 싫었지만, 에인델에 대한 유치한 복수심이기도 했다.
결국 그러지 않았지만.
카앤은 적진 한가운데 저편으로 시선을 옮겼다.
전장 전체를 굽어보는 듯한 거대하고 노골적인 기운.
마왕의 존재감이었다.
마왕이 위치한 본대는 결국 이곳 중앙 방면의 마족군이었고, 그건 카앤이 원했던 바였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카앤이 전투에 나서지 않은 이유는 나인베르크의 만류 때문이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카앤의 옆에 굳은 얼굴로 서있던 나인베르크가 대답했다.
"마왕이 먼저 움직임을 보일 때까지 기다려다오."
이 자리에 있는 건 마왕. 절대적인 성검의 힘으로도 승리를 확신할 수 없는 상대.
상대의 행동을 보고 그에 따라 대처한다.
조금이라도 전투를 유리하게 시작할 수 있는 당연한 방법이었다.
마족은 전력을 셋으로 나눈 만큼, 병력의 규모 자체는 세인테아가 우위였다.
물론 마왕이나 원마들이 나선다면 숫자 따위에 아무 의미는 없지만, 적어도 그때까지는 먼저 움직여줄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지금도 시야 아래에서 처참히 죽어나가고 있는 군사들의 희생을 감수한다면 말이다.
나인베르크는 전쟁이 시작하기 전에 확실히 각오를 굳혔다.
어떤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마왕만큼은 죽여 반드시 이 지옥의 끝을 보겠다는.
"······관둘래요."
하지만 나인베르크는 그렇더라도, 카앤은 아니었다.
에인델의 동료였던 나인베르크를 존중하기에 일단 그의 말을 들어주었지만, 슬슬 그녀의 인내심도 한계에 다다랐다.
성검을 소환한 카앤이 하늘 높이 도약했다.
나인베르크는 그 모습을 바라봤다.
여태 기다려준 것도 참을 만큼 참은 것이라는 걸 알았기에, 별 수 없다고 생각하며 이내 자신도 싸울 준비를 했다.
"부디 이겨다오, 카앤."
번쩍!
황금빛 파도가 전장을 반으로 갈랐다.
휩쓸린 마족들은 일순간에 모조리 절멸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하나의 거대한 길이 생겼다.
카앤은 그 자리에 사뿐히 내려서서 걷기 시작했다.
"······."
길 양옆으로 갈라진 마족들은 두려움에 질려 누구도 움직이지 못했다.
최전선에서는 여전히 피튀기는 전투가 이어지는 가운데, 마족 진영 한가운데에선 기이하기 그지없는 광경이 연출되었다.
마왕이 인류에게 공포의 대명사였다면, 마족에게는 반대로 용사 또한 그런 존재였다.
더군다나 그들은 분명히 죽었다고 알고 있는 용사가 어째서 살아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카앤은 계속 걸었다.
마왕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서. 이내 누군가 나타나 앞길을 가로막았다.
염소와 비슷한 머리와 뿔을 가진 마족, 서열 2위의 원마 혼카였다.
"너는 누구냐?"
혼카가 카앤에게 물었다.
용사가 홀로 올테로어를 침공했던 그날, 모든 원마들은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똑똑히 보았다.
마왕의 손에 죽어, 재 한 줌 남기지 못하고 소멸한 용사의 모습을.
세인테아와 칼데릭, 아데사가 마족의 움직임을 정찰했던 것처럼, 마족 또한 첩자들을 통해 계속해서 올테로어 바깥의 정보를 파악하고 있었다.
물론 진군하는 와중에도 계속.
그리고 전쟁이 시작할 때까지 세인테아에서 용사의 죽음에 대해 어떠한 파장도 일지 않았던 건, 당연히 그들이 혼란을 막기 위해 진실을 숨기는 것이라 여기며 혼카는 비웃었었다.
하지만 용사가 살아있다.
가짜 따위가 아니다. 성검에서 느껴지는 힘은 진짜였다.
카앤이 말없이 성검을 들어올렸다.
혼카는 다급히 힘을 끌어올렸다.
그의 권능인 핏빛 뇌기가 자욱하게 사방을 뒤덮었다.
사아아아!
그러나 단 일격이었다.
세 번째로 강한 마족의 권능은 성검의 신성력을 잠시도 막아주지 못했다.
황금빛 실선이 허공에 새겨지며 혼카를 반으로 갈랐다.
카앤은 마저 발걸음을 옮겼다.
걸으면 걸을수록, 주위의 마족들은 더 멀어지며 광활한 공간이 만들어졌다.
이내 끝에 다다라서 멈추었다.
그곳에 홀로 우두커니 서있던 건, 인간과 크게 다를 것 없는 외관을 가진 마족이었다.
마왕이 카앤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대답했다.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
"······."
"용사를 잃은 세인테아가 다른 두 세력과 각개 진군하는 걸 택할 리가 없다. 전멸할 테니까. 한데 마땅한 이유가 있었구나."
마왕이 물었다.
"네 정체는 무엇이냐?"
"용사. 에인델의 후계자."
"과연. 이제야 모든 게 이해되는구나."
한마디 한마디, 말을 나눌 때마다 싸늘한 사기가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당장이라도 성검을 휘두르고 싶었지만 카앤은 그러지 휘두르지 않았다.
그녀 역시 물어야 할 게 있었으니까.
"올테로어에서 에인델은 어떻게 죽었지?"
마왕이 대답했다.
"자신의 생명을 모두 불태운 뒤 재로 사라졌지. 대단한 죽음이 아니었다."
카앤은 눈을 감고 한 번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물었다.
"대단한 죽음. 너한테 대단한 죽음이 뭔데."
마왕은 카앤의 물음이 조금 의외라고 생각했다.
새로운 용사가 전대 용사의 죽음이 숭고했을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할 거라 여겨 적당히 던진 대답이었는데, 다른 부분에서 말꼬리를 잡고 있었다.
"죽음은 죽음일 뿐이지. 어떤 말로 치장해도 의미는 없다."
"그걸 알면서도 어떻게 세상을 멸망시키려 들 수 있는 거지?"
그 말대로다. 죽은 생명은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팔다리를 움직일 수도,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도, 다른 누군가와 이야기할 수도 없다.
이들은 수억, 수십억이 넘는 생명을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자신들의 생존을 위한 것도 아니다. 그저 파멸시키고자 하는 본능만이 있는 괴물들.
분노를 제쳐두고, 카앤은 마족이란 종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묻고 싶었다.
"너는 에인델보다 따분한 인간이구나."
마왕은 더 이상 대화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카앤이 어떤 인간인지 파악했기에 흥미가 식었다.
그들은 완벽하게 평행선에 선 존재였다.
카앤 또한 마찬가지의 생각을 하고 다른 질문을 했다.
"마지막으로 묻자. 내가 품은 마의 씨앗 때문에 날 감시했던 마족은 누구냐?"
아버지를 죽인 원수.
그녀를 용사의 길로 이끈 계기. 카앤은 아직까지도 놈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건 마왕 또한 마찬가지였다.
마왕은 카앤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었다.
마의 씨앗은 그의 찢어졌던 영혼.
봉인되어있던 긴 세월 동안 바깥세상을 지켜봤던 창.
눈앞의 인간 여자의 육신에 잠들어있던 기억은 없었으니까.
마왕은 대답하지 않고 손을 뻗었다. 어둠이 카앤을 덮쳤다.
그와 동시에 성검의 신성력이 폭발했다.
쿠구구구!
충돌한 두 기운이 물결치듯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됐어, 그럼······."
카앤은 입술을 꽉 짓씹은 채 성검을 양손으로 쥐었다.
"우선 네 팔다리를 전부 잘라낸 다음, 그때 다시 물어봐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