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183화 (183/189)

결전 (2)

회의가 끝난 뒤 칼데릭으로 돌아오고, 대평원으로의 진군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총사령관은 물론 대군주로, 대군주령을 포함한 모든 군주령의 군사를 그녀가 통솔하였다. 

이번 전쟁에서 군주들이 각 군주령의 병력을 직접적으로 통솔할 권한은 없었다. 4군주 망자왕이나 8군주 흑해 여제의 언데드나 벌레 군대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목숨을 바쳐 싸워라.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와아아아······! 

7군주령의 수많은 군사들 앞에 선 나는 별 마음에도 없는 적당한 연설을 늘어놓았다. 

솔직히 나한테 앞에서 환호하는 이들의 수장이라는 자각심은 거의 없었다. 

뭐, 다른 군주들이라고 얼마나 다르겠냐만은. 

정작 대군주조차도 속마음은 전혀 모르겠고, 칼데릭에 대한 마음이 진심인 건 1군주 신퇴 정도뿐이 아닐까. 

내 머릿속은 그저 마왕을 어떻게 죽여야 할까와, 카앤에 대한 생각만으로 가득했다. 

칼데릭이 맡아야 할 건 평원 북쪽 방면의 마족군. 

칼데릭 북동쪽은 거대한 산맥으로 둘러싸여있다. 

칼데릭 동쪽에서 모든 군주령의 병력이 총집결한 뒤 출발하여 세인테아의 북쪽 경계를 타고 진군했다. 

"어이, 7군주. 네 생각엔 마왕이 어느 쪽에 있을 것 같냐?"

진군을 시작한 지 사흘 정도 지났을 때 광랑이 곁으로 다가와서 물어온 말이었다. 

나는 대충 대답했다. 

"중앙." 

"왜?" 

"그냥 느낌이다." 

북쪽, 중앙, 남쪽. 쉽게 생각하면 마왕이 위치는 중앙에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야 가운데니까. 

하지만 나는 웬만하면 마왕이 칼데릭과 조우할 북쪽 방면에 있기를 바랐다.

그래야 카앤이 나 없이 홀로 마왕을 상대하게 될 일이 없을 테니까. 

더군다나 용사를 제외한 최강의 전력인 대군주도 이쪽에 있다. 

그러니 북쪽 군대에 마왕이 있는 게 가장 좋은 전투 구도가 완성될 수 있었다. 

마왕의 정확한 전력을 파악할 수 없는 상황에서, 카앤이 도착할 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가 관건이기는 했지만. 

물론 그와 별개로 정말로 마왕이 북쪽 방면에 있으면 칼데릭은 엄청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건 내가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어차피 세인테아든 칼데릭이든 아데사든, 마왕과 조우하는 쪽의 세력은 엄청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그게 누구냐의 문제일 뿐이지. 

그리고 내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칼데릭의 전력 보전 따위가 아니다. 

마왕과의 결전을 최대한 유리한 조건으로 시작하는 것. 

비록 내가 칼데릭의 군주라고 해도, 그걸 위해서라면 이 전쟁의 가장 큰 피해 세력이 칼데릭이 되든 말든 그건 사소한 문제였다. 

나는 수많은 군사들 너머 저편에 보이는 대군주의 모습을 힐끗 쳐다봤다. 

그녀의 진의는 알 수 없더라도, 어쨌든 적어도 이 전쟁에선 아군으로서 최선을 다해 싸워주겠지. 

패배는 곧 칼데릭의 멸망을 의미하니까. 

'만약 중앙이나 남쪽에 마왕이 있다면······.' 

그때는 서둘러 이쪽을 정리하고 이동해야겠지. 아니면 나 혼자서라도 이동하거나. 

카앤이 만약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나는 칼데릭 진영에 있을 게 아니라, 녀석의 곁에 붙어있을 생각이었었다. 

용사의 요구라고 하면 대군주도 세인테아 쪽도 내가 용사의 곁에 붙어있든 말든 간섭할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카앤은 칼같이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니 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나저나 마왕은 포그위그 따위랑 비교도 안 되게 강하겠지?" 

광랑이 중얼거리다가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7군주, 이번 전쟁에서 네 목숨이 위험한 일이 있으면 한 번은 구해주마. 내 목숨이라도 걸고 말이야." 

"······무슨 소리냐?" 

"대수림에서의 빚을 아직 못 갚았잖아. 그 얘기다." 

딱히 빚으로 쳐둔 적은 없었는데. 아무래도 좋았기에 별다른 대꾸는 안 했다. 

"그보다 이 전쟁은 너한테도 기회가 아니냐, 백월족? 어쩌면 군주 자리가 비게 될 수도 있잖아." 

광랑이 씩 웃으며 옆에 있는 아셸의 등을 두드렸다. 

군주들 중 누구라도 죽어나가서 군주좌에 공석이 나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었다. 

아셸의 실력이면 충분히 군주가 될 만했으니까. 

"그런 생각한 적 없습니다."

"큭큭, 따분한 소리 집어치우고 한번 말해봐. 이왕이면 군주들 중에 누가 뒈지면 좋겠냐? 나?" 

아셸은 성가시다는 듯 광랑을 흘겨보고선 대답했다. 

"굳이 고르라면 8군주로 하겠습니다." 

"······오?" 

진짜로 대답한 건 의외였는지 광랑도 놀란 기색으로 다시 물었다. 

"왜 벌레 년인데? 내가 모르는 원한이라도 있었나?" 

"론 님께 가장 적대적인 군주일 테니까요.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예전에 가드팔크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는 건가? 

광랑도 모르는 사건은 아니기에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까닥거리다가, 아셸과 나를 번갈아 보고는 웃었다. 

"맨날 정중만 떨더니 솔직하게 남 씹을 줄도 아네? 상황이 이러니까 거리낄 것 없다 이거냐? 아니면 그새 무슨 일이 있었나?" 

"그만 돌아가서 자리를 지키시는 게 어떻습니까."

"킥, 이거 봐봐. 알았어. 간다." 

광랑이 마지막으로 내게 말했다. 

"이야기를 들었으니 하는 말인데, 전투 중에 8군주 조심하라고. 출생부터가 마수인 년인데 그년 속이 시커먼 건 알고 있을 거 아냐. 혼란한 틈을 타서 어떤 수작을 부릴지 모르잖아?" 

경고하지 않아도 알아서 조심할 거다. 광랑이 떠나가고, 나는 아셸에게 물었다. 

"아셸, 그런 걸 신경 쓰고 있었냐?" 

"예. 위험한 여자가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 

아셸이 확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최선을 다해 보좌하겠습니다. 부디 전쟁에서 무리해서 싸우지 말아주십시오."

"내 목숨 걸고 싸울 생각은 나도 없다. 난 걱정 말고 네 걱정이나 해라." 

"예. 그러겠습니다. 살아남아서 론 님의 진짜 이름을 들어야 하니까요." 

분위기에 휩쓸려 나오는 대로 했던 약속. 낯간지러운 말이었기에 나는 픽 웃었다. 

수백만에 달하는 대군은 계속해서 나아갔다. 

평원을 가로질러, 맞은편에서 다가오고 있을 적들을 향하여. 

그리고 진군을 시작한 지 일주일이 지났을 즈음, 드디어 그 끝에 다다랐다. 

'보이는군.'

멀리서부터 느껴졌다. 

평원 저편 전체를 뒤덮은 기분 나쁜 불길함이. 

지평선에 드러난 마족군의 선두를 확인하고 진군이 정지했다. 

대략 10km 정도의 거리였다. 

저쪽에서는 멈추지 않았기에 전투는 곧바로 시작될 듯 보였다. 

슈우우우.

그때 대군주가 돌연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군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모인 가운데, 대군주의 주위에 거대한 화염이 피어올랐다. 

마력의 양부터 어마무시했지만 단순한 화염 마법도 아니었다. 

검붉은 화염은 수십 개의 구체로 뭉쳐져, 길쭉한 꼬리를 그리며 메테오처럼 마족 진영으로 날아들었다. 

쿠구구구······! 

적진에서 연달아 솟아오르는 거대한 화염 기둥. 

그 위력이 얼마나 가공스러웠는지, 거리가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최전선의 군사들은 뒤늦게 밀려온 충격파에 조금 휘청거릴 정도였다. 

"자아, 개전이다! 패배하면 모조리 멸망할 것이고, 승리하면 생존할 것이다! 싸워라!" 

대군주의 확성 마법이 전군에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미사여구 하나 없었지만 찢어지는 함성이 군사들의 사기가 얼마나 높은지를 드러냈다. 대군주의 선제공격 퍼포먼스는 효과가 확실했다.

마족 진영에서 즉각적으로 돌아오는 반격은 없었다. 그저 계속해서 진격해올 뿐.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흐릿한 하늘. 대지를 울리는 수백만 군사의 발구름과, 함성. 

마족의 선두에 선 온갖 이형의 괴물들과, 칼데릭 군이 충돌했다. 

그 한순간에 수천의 생명은 절명한 듯했지만, 전쟁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칼데릭의 중앙 진형은 정규군이다. 

앞에는 창칼로 무장한 군사들이, 그리고 후열에는 마법사들이 마법으로 지원한다. 

기사들이 검기를 쏟아내며 마족들을 베어넘기고, 마법이 사방을 폭격했다. 

한편 진형의 좌우 양측에는 망자왕의 언데드 군단과, 흑해 여제의 벌레 군단이 정규군과 분리되어 싸우고 있다. 

인외의 군세이니만큼 그들은 기본적으로 괴물처럼 싸웠다. 

언데드 군단은 다 뜯겨나가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도 끝도 없이 일어나며 싸웠다. 

더 이상 움직이지 않게 될 때까지 날뛰며. 하늘에서는 뼈로 이루어진 언데드 와이번을 탄 망자왕이 전장을 주시하며 군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흑해 여제 쪽의 벌레 군단은 이전에 봤던 것과 같았다. 후미에 세워져있는 모탑에서 끊임없이 벌레들이 쏟아져나오며 마족들을 죽이고, 죽어나가는 만큼 병력을 보충했다.

모탑의 숫자는 스무 개가 조금 안되었는데, 나한테 한 차례 쓸린 뒤에 그동안 꽤 보충한 모양이었다. 

전쟁. 이전에 가드팔크에서 보았던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거대한 규모의 대전쟁이다. 

나는 하늘에서 띠용이를 타고 비행하며, 전세를 한눈에 지켜보았다. 

군주들은 곧바로 전투에 나서지 않는다. 대군주의 명령이었다. 

저쪽에도 원마가 있다. 

그리고 마왕의 존재 여부도 아직까지는 불확실했으니까. 

'그리고 확실히······.' 

한눈에 봐도 전체적인 병력은 칼데릭 쪽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마족은 병력을 셋으로 나눴고, 이쪽은 온전한 하나였으니까. 

아무리 올테로어가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다고 해도, 3분의 1에 불과한 전력이 칼데릭의 전체 전력에 비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그러니 이대로 밀리는 건 마족 쪽이었다. 원마들의 개입이 있기 전까지는,

이쪽에서도 군주들이 먼저 나설 이유는 없는 것이었다. 

특히 눈에 띄는 건 1군주령에서 보았던 전투 골렘들이었다. 

골렘들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전장으로 투입되기 시작했는데, 그 위력은 상당했다. 

웬만한 공격에도 끄떡 않고 전진하며, 마족들을 묵직하게 쓸어넘기고 짓밟았다. 

몸체 정중앙에 달린 마석에서 마력포를 쏘아내기도 했다. 

골렘 위에는 몇몇 마법사들이 올라타 꾸준히 마력을 보충하고 있었고, 근처에 있는 군사들은 자연스레 길을 터며 골렘을 호위하는 식으로 싸웠다. 

물론 마족들도 순순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마족의 가장 성가신 능력은 바로 권능이다. 

갑옷도 녹아내리는 독무를 뿌리거나, 마치 정령과 같은 괴물들을 소환하거나, 급이 있는 마족들은 자신의 권능을 부리며 전장을 휘저었다. 

콰아앙! 

하늘에서 날고 있는 나를 향해서도 공격이 날아들었다. 

톱니 형태로 회전하는 마력체였다. 

내가 막을 것도 없이 아셸이 검기를 날렸다. 순백의 검기는 톱니를 가르고, 그대로 공격이 날아든 방향의 지상까지 떨어져 폭발했다.

"엄호는 맡기마, 아셸." 

"예." 

나는 초감각을 끌어올려 탐지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 

아무리 초감각이라고 해도, 수백만의 군사들이 섞여 싸우는 전장에서는 그만큼 감각의 분산이 컸기 때문이다. 

탐지하는 대상은 물론 마왕이었다. 혹은 원마들이나. 

마왕의 것으로 느껴지는 유독 이질적이거나, 강대한 기운은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마왕이 존재감을 감추고 있을 수 있는 것이었기에 단정은 금물이었다. 

'찾았다.' 

그리고 이내 마왕은 아니지만 큰 존재감 하나를 찾아낼 수 있었다. 

전투 골렘을 상대하던 마족들 중 일부가 붉은 빛에 휩싸이더니, 미치광이처럼 골렘을 향해 돌진해서는 터져나갔다. 

그 자폭 공격에 골렘 세 대가 순식간에 파괴되었다. 정상적인 파괴력이 아니었다.

나는 그 현장에서 한참 뒤쪽으로 떨어진 어느 지점을 바라봤다. 

눈에 띄는 길쭉한 목을 가진 마족이 시야에 들어왔다. 

원마 서열 9위 파크큘리. 

방금의 자폭 공격은 놈의 권능이다. 

"내려가자, 띠용아." 

나는 띠용이의 목을 툭 두드렸다. 

만약 이곳에 마왕이 없다면 서둘러 전쟁을 끝내고 다른 쪽으로 합류해야 한다. 

원마가 모습을 드러냈으니, 이제 이쪽에서도 나설 차례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