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전 (1)
세인테아와 올테로어의 경계를 나누는 다로 대평원. 인근의 가장 높은 언덕에서 평원을 주시하던 레인저들이 불현듯 불길한 기류를 느끼고 몸을 떤 것은 동시였다.
지평선 너머로 서서히 떠오르는 시커먼 파도.
레인저들은 잠시 넋을 놓고 그 광경을 바라봤다. 이내 굳은 얼굴로 누군가 말했다.
"서둘러 전령을 보내라."
때가 오고야 말았다.
마족의 침공이 시작되었다.
***
마족의 진군 소식이 전해진 건 용사가 떠난 뒤 일주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용사의 성명과 연합의 결성 이후, 세인테아와 올테로어 사이의 다로 대평원에는 상시 정찰 병력이 배치되어있었다.
평원의 중앙은 세인테아가, 북쪽은 칼데릭이, 그리고 남쪽은 아데사가.
연합이 이뤄지긴 했지만 굳이 정찰 병력까지 섞을 이유는 없었기에 각 세력은 지금껏 그렇게 경계를 나누어 마족의 움직임을 정찰했다.
그들에게서 신속하게 보고가 전해진 것이었다.
"자, 그럼 다들 모였으니 다녀와볼까!"
모든 군주들이 완전 무장한 채 대군주성의 회의실에 모인 가운데, 대군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군주는 지금부터 세인테아 수도로 향할 것이다.
칼데릭의 대표로 황제가 요청한 연합 회의에 참석하기 위함이었다.
대군주령과 아홉 군주령, 칼데릭의 모든 전력이 지금 당장이라도 평원으로 진군할 준비는 되어있다.
물론 다른 세력들도 마찬가지다.
다만, 이건 최종 논의였다.
세인테아, 그리고 아데사 쪽과 의견을 합치하고 돌아와 대기하고 있는 군주들에게 결론을 공지한 다음, 곧바로 전쟁을 시작할 것이다.
연합의 결성 때부터 그렇게 하기로 정해진 사안이었다.
"여유롭구려, 대군주. 혹시 본인만 소식을 잘못 전달받고 온 것인가? 아니면 마족이 갑자기 회군하고 있다는 추가 보고라도 들어왔는가."
낙천적이다 못해 쾌활하게까지 한 대군주의 태도가 어지간히 어이가 없었는지, 4군주 망자왕이 한마디 내뱉었다.
물론 그런 일은 없다.
대평원을 가로질러오고 있는 마족 놈들은 적어도 한 달 안에 세인테아의 국경에 다다를 것이다.
대군주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쓸데없이 심각해봐야 어쩌겠어? 다들 느긋하게 차라도 마시면서 기다리고 있어."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대군주의 반응이 어떨까 조금 궁금하긴 했었는데, 전혀 변함없었다.
설마 대군주는 전쟁의 승리를 확신하는 걸까, 아니면 결과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는 걸까.
이 전쟁이 마족의 패퇴로 끝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반대에 가까웠다.
그리고 대군주는 바보가 아니었기에 아무래도 전자보다는 후자에 가까워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한결같이 종잡을 수 없는 여자라 속으로 생각하며, 나는 입을 열었다.
"회의에 나도 동행하지."
군주들의 시선이 내게로 모였다. 대군주가 의아한 기색으로 물었다.
"굳이? 왜?"
"세인테아의 용사를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을 뿐이다. 별다른 이유는 없다."
회의에 다른 군주가 함께 참석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다만 번거롭게 여럿이서 움직일 이유도 없기에 대군주만 이동하려는 것일 뿐이지.
"그래? 그럼 좋을대로 해."
대군주는 예상대로 순순히 수락했다.
나는 그녀와 함께 회의장을 나서서 와이번에 올라탔다.
"용사에게 관심이 있어 보이네, 7군주. 혹시 내가 모르는 인연이라도 있는 건가?"
대군주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단순한 호기심이다."
"흐응, 그래? 전쟁이 코앞이니 그럴 만도 한가."
대군주가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은 언제나 그랬듯 묘하기 그지없는 느낌이었다.
나는 뭐라 더 말하지 않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카앤인가······.'
곧 수도에서 만나게 될 용사는 에인델이 아니라 카앤이겠지.
3년 만이다.
솔직히 카앤의 얼굴을 직접 보는 건 여전히 거북한 일이었다.
하지만 별 수 없었다.
전쟁이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이야기가 있었으니까.
***
라키로니아 대륙력 765년 1월 3일.
마족의 진군이 확실시된 뒤, 신속하게 세인테아 황궁에 각 세력의 대표들이 모두 모였다.
원탁에 둘러앉은 건 황제와, 세인테아 세력권 국가와 중립국의 왕들, 칼데릭의 대군주와 7군주, 아데사의 엘프 대족장, 그리고 용사와 나인베르크였다.
"현재의 진군 속도대로면, 한 달이 지나기 전에 마족군의 선두가 동쪽 국경에 다다를 것이오."
황제의 담담한 발언을 시작으로 회의가 시작되었다.
몇몇 이들이 침음을 흘렸다.
침공해오는 마족의 군세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다.
애당초 중요한 건 군세의 규모가 아니라 마왕의 존재.
그 부분을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이 전쟁이 처음부터 총력전의 양상으로 흘러갈 것도 모두가 예상했다.
마족들은 그저 전력으로 올테로어 바깥의 땅을 짓밟고, 유린할 것이다.
대전쟁 때 그러했듯이.
다만 마족의 움직임에 하나 의외인 부분이 있었다면······.
"또한 군대를 셋으로 나누어 진격해오고 있소. 이에 대해 의논이 필요하오."
연합은 처음부터 마족의 총공세를 예상하고, 최대한 그 방향으로 전력 배치를 구상해왔다.
하지만 그 예상은 조금 빗나갔다.
마족은 전군을 한 데에 뭉치지 않고 셋으로 나누었다.
평원 중앙, 북쪽, 남쪽에서 큰 규모 차이가 없는 군대가 나란히 진격해오고 있다.
그건 자연스럽게 모두에게 같은 생각을 떠올리게 했다.
마치 세인테아, 칼데릭, 아데사, 세 세력을 정직히 나눠 상대해주기라도 하겠다는 듯한 노골적인 의도가 느껴졌으니까.
물론 마족이 군대를 나누는 일도 상정해두지 않았던 건 아니다.
문제는 마왕의 위치였다.
셋 중 어느 쪽이 마왕이 있는 본대인지 알 방도가 없었다.
"혹시라도 마왕의 위치 정보를 파악한 건 아무도 없습니까?"
엘프 대족장의 물음에 대군주가 어깨를 으쓱였다.
"놈이 직접 대놓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이상에야 있을 리가."
마족은 무슨 목적으로 전력을 나누었는가.
단순히 연합에 혼란을 야기하려는 심리전인가?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나?
원탁에서 서로의 정보와 의견들이 오고갔지만 특별히 나오는 건 없었다. 황제가 말했다.
"선택지는 아무래도 둘이 전부일 것이오. 이쪽도 셋으로 나누거나, 반대로 한 데 전력을 집중하거나."
이건 복잡한 전쟁이 아니었다.
평원이라는 지형도, 서로를 절멸시키는 것이 전부인 목적도 단순하다.
순수한 힘으로 부딪힐 뿐인 정면전에 단 하나 고려할 수 있는 사항은 전력의 배분이었다.
"마족의 장단에 어울려줄 이유가 있습니까? 전력을 집중하는 편이 어떻게 봐도······."
조금 극단적으로, 아니, 한 치의 가감없이 말하자면 이건 용사와 마왕의 싸움이었다.
어느 한 쪽이 쓰러지면 그 순간 승패는 거의 기운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 면에서 보아도 전력을 집중하는 편이 더 나은 선택인 것은 맞았다.
용사에게 최대한 힘을 실어줄 수 있고, 먼저 상대하는 군대에 마왕이 없더라도 격퇴한 뒤 다음 군대를 향해서 이동하면 될 뿐이니까.
다만 모두가 이런 생각은 하고 있었다.
전력을 집중하더라도 과연 효율적으로 전력이 합쳐질지.
몇 년의 시간은 있었지만 지나온 대립의 역사에 비하면 사실상 급조된 연합일 뿐이다.
서로 다른 세력이 섞여 싸우는 건 그만큼 전투에 변수가 많아진다는 뜻이었다.
더해서 황제는 전쟁이 승리로 끝난 뒤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결국 마왕을 상대하는 건 용사다.
만약 용사가 마왕에게 승리했으나 치명상을 입는다면?
전세가 연합 쪽으로 확실히 기운 순간에 용사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면?
그 순간 다른 두 세력의 변심은 치명적이다.
칼데릭은 애초부터 항상 대립하던 세력이고, 아데사도 전대 황제가 벌인 일이 있었다.
그들이 애초부터 마왕과 용사의 양패구상을 노리고 행동할 수도 있는 노릇이다.
실제 전투의 양상이 어떻게 흘러갈지 예측할 방법은 없었다.
전력을 합쳐 싸우는 것도 그런 최악의 상황들을 가정하면 머리가 복잡했다.
그때 지금까지 조용히 있던 용사가 입을 열었다.
"전력을 나누는 편이 좋겠습니다."
이견은 받지 않겠다는 듯 단호하기 그지없는 어조였다.
대군주가 물었다.
"어째서지, 용사?"
"전력을 한 데에 집중하면, 나머지 군대들이 세인테아의 경계를 넘을 수 있으니까."
단순한 이유였다.
그리고 마족이 세인테아 땅에 발을 디딘다는 건, 곧 그들의 눈에 띄는 모든 생명의 학살을 의미했다.
무고한 민간인들이 수없이 죽어나갈 것이다.
감히 그녀 앞에서 대를 위한 소의 희생, 따위의 말을 입에 담을 수 있는 자도 없었기에 일순간 침묵만 흘렀다.
물론 칼데릭이나 아데사 쪽에서 용사 없이 마왕의 본대와 마주하면, 그건 정말 거대한 위기다.
즉각 전령을 보낸다고 해도 용사가 도착할 사이에 얼마나 큰 피해를 입을지는 알 수 없으니까.
하지만 그에 대해 불만을 토로할 수는 없었다.
그건 아무런 위험도 감수하기 싫고 용사에게만 모든 걸 떠맡으라는 것과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마왕을 상대할 인물은 용사고, 이 전쟁에서 가장 큰 부담을 짊어질 세력은 세인테아였다.
"마왕은 내가 확실하게 죽일 것입니다. 결론을 정하십시오."
황제가 나서서 어수선한 분위기를 정리했다.
"용사님의 뜻이 곧 세인테아의 뜻이오."
그렇지 않아도 선뜻 마음을 정하기 어려웠던 황제는 결론을 내렸다.
용사가 이리 강경하게 나온다면 굳이 거스를 이유는 없었으니까.
"그렇다면야 별 수 있나, 칼데릭도 따라야지. 마왕을 상대하는 건 용사인데."
대군주도 순순히 받아들였다.
마지막으로 엘프 대족장도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데사도 용사의 의견에 따르겠습니다."
그렇게 세 세력의 뜻이 수렴되었다.
***
회의가 끝난 다음, 나는 카앤에게 다가갔다.
"용사, 잠시 단둘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나?"
나인베르크와 함께 회의장을 나서던 카앤이 날 바라봤다.
에인델과 내가 협력 관계였다는 건 나인베르크도, 카앤도 안다.
그리고 나인베르크는 그녀가 에인델이 아니라 카앤이라는 걸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카앤에게 눈짓을 하고 순순히 자리를 비켜주었다.
"무슨 이야기인가."
외진 장소로 이동해서 소리를 차단하는 막을 펼친 뒤, 카앤이 딱딱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서 말했다.
"카앤."
"······!"
"네가 에인델이 아니라 카앤이라는 건 안다. 연기할 필요 없다."
카앤은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나인베르크에게 들었어요?"
"아니."
"······그러면 에인델에게 직접 들었어요?"
"그래. 올테로어로 향하기 전에 날 찾아왔지."
카앤이 실소를 흘리며 중얼거렸다.
"결국 나한테만······."
길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성검의 힘으로 진실 판별 능력까지 얻은 카앤이다.
금방이라도 들켜선 안 될 걸 들킬 것 같은 압박감이 있었다.
그래서 바로 본론을 꺼냈다.
"처음부터 나와 함께 행동하자, 카앤."
"무슨 소리예요?"
"말 그대로다. 내게는 마왕을 즉사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어. 네가 빈틈을 만들어준다면, 내가 마왕의 목숨을 확실히 끊겠다."
마왕의 상대를 카앤에게만 믿고 맡기는 것보다는 둘이 훨씬 나을 테니까.
어차피 마지막이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단독행동이라도 하면 그만이다.
이번에야말로 후회 없이 모든 것의 매듭을 짓고 싶었다.
하지만 카앤에게서 돌아온 것은 즉답이었다.
"거절할게요."
"······뭐?"
"거절한다고요. 당신은 칼데릭의 군주니까 그쪽이나 제대로 신경 써요."
그러고는 곧장 몸을 돌렸다.
나는 당황해서 카앤의 어깨를 붙잡았다.
하지만 녀석은 차갑게 내 손을 털어냈다.
"그렇게 대단한 능력이 있으면 에인델과 함께 싸우지 그랬어요?"
"그건······ 에인델의 뜻이었어."
"그렇겠죠. 그래서 난 에인델이 원망스러워요. 당신도, 나인베르크도 전부."
나는 할말을 잃고 말았다.
"마왕은 나 혼자 쓰러뜨릴 겁니다. 더 할말 없어요."
그저 멍하니 멀어지는 녀석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더 붙잡지 못한 채.
***
라키로니아 대륙력 765년 1월 4일.
세인테아 황제는 정식으로 전쟁을 선포.
황실과 귀족가, 교단 포함 3만 이상의 기사, 마탑 포함 2만 이상의 마법사, 100만 이상의 병사, 세인테아 소속 국가와 중립국들까지 합쳐 총 5만 이상의 기사, 3만 이상의 마법사, 200만 이상의 병사 전력 동원.
질적인 차이를 제하고 칼데릭이 동원한 총 전력은 대략 그 0.7배.
아데사 또한 전투 가능한 모든 부족 전력, 총 300만 이상의 전사와 정령술사를 동원.
라키로니아 대륙력 765년 1월 15일.
아데사 군이 대수림 동쪽 외곽에 완전 집결.
다로 대평원으로 진군 시작.
라키로니아 대륙력 765년 1월 17일.
세인테아 연합군이 제국 동쪽 국경에 완전 집결. 다로 대평원으로 진군 시작.
라키로니아 대륙력 765년 1월 18일.
칼데릭 군이 칼데릭 동쪽 경계에 완전 집결.
산맥을 돌아 다로 대평원으로 진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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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키로니아 대륙력 765년 1월 23일.
서쪽에서 대평원의 4분의 1을 넘어선 지점, 세인테아 연합군이 중앙 방향의 마족 군대와 최초 조우.
"적들이 보입니다."
최전선의 군사들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지평선 너머로 몰려오는 흑색의 파도를 응시했다.
마왕과 용사.
마족과 그를 제외한 전 종족 연합.
대륙의 명운을 건 2차 대전쟁.
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