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181화 (181/189)

마음

카앤은 저택 내를 서성거리며 에인델을 기다렸다. 

황궁에 용무가 생겨 날이 저물 즈음에 돌아온다고 했는데, 해가 완전히 떨어진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늦네······." 

문득 영문 모를 불길한 예감이 스쳤으나, 카앤은 고개를 저었다. 

오늘 아침까지 본 에인델의 분위기야 언제나와 같지 않았는가? 시간이 됐으니 이제 곧 돌아올 것이다. 

그때 위층에서 나인베르크가 내려왔다. 카앤은 그에게 물었다. 

"에인델이 늦네요, 나인베르크 씨. 황제 폐하와 잠깐 이야기만 나누고 돌아온다더니." 

"······." 

나인베르크는 아무런 대답 없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 이상한 낌새를 느낀 카앤의 표정 또한 서서히 굳어갈 때였다.

"카앤, 에인델은······." 

화아아악! 

눈부신 빛과 함께, 카앤의 바로 앞의 허공에 성검이 나타났다. 

동시에 주위가 온통 순백색으로 물들었다. 카앤은 흠칫 놀라서 눈앞에 나타난 거대한 형상을 바라봤다. 

- 계승을 시작하겠다. 나와 에인델의 힘을 받아들여라.

그리고 다음 순간,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 전신에 휘몰아쳤다. 

동시에 머릿속에도 무언가가 끊임없이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그것은 에인델의 유산이었다. 그녀가 평생에 익히고 사용한 검술, 체술, 무예, 마력 운용법, 카앤은 아직 닿지 못한 아득한 경지의 묘리들. 

그 영겁과도 같던 순간은 현실에선 눈 한 번 깜빡일 시간에 지나지 않았다.

계승이 끝나고, 카앤이 정신을 차렸을 때 주위는 다시 저택의 홀로 돌아와있었다. 

한참을 멍하니 서있던 카앤은 눈앞의 성검을 쥐었다. 

일변한 분위기에 나인베르크는 계승이 완벽히 성공했음을 직감했다. 

"뭔데, 이게······." 

이내 성검이 빛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직감한 카앤의 얼굴에서 눈물이 흘려내렸다. 

"이게 뭐냐고요, 나인베르크. 에인델은 지금 어디에 있어요?" 

나인베르크가 입을 열었다.

"에인델은······ 마왕과 싸우러 홀로 올테로어로 향했다." 

"뭐라고요?" 

"너도 알다시피, 에인델의 수명은 얼마 남지 않았었다. 그래서 계승을 마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죽는 대신, 선택을 내린 거다." 

뭐라고 더 말할 수 있을까.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요? 왜?!" 

분노와 허망함이 섞인 눈으로 노려보는 카앤에게, 나인베르크는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미안하다, 카앤." 

*** 

카앤, 이렇게 편지로 마지막 인사를 남기는 걸 용서해주렴.

나는 올테로어에서 마왕의 손에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어째서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는 나인베르크에게 모두 들었을 거다. 그건 정해진 운명이었지만, 오롯이 내 선택이었음에는 변함이 없다. 

성검을 성공적으로 계승했다면, 성검의 힘뿐 아니라 내가 쌓아온 모든 것들도 고스란히 네게 전해졌을 것이다. 지난 몇 년 동안의 훈련은 모두 네가 그 힘들을 무리 없이 전해받기 위한 것이었다. 부디 별다른 문제 없이 무사히 계승이 끝났기를 바란다.

마족의 침공은 아마 곧바로 시작될 것이다. 내 부재가 알려지면 연합에 큰 혼란이 일어나겠지. 그러니 카앤 네가 성검의 힘으로 나의 모습을 하고, 용사로서 싸워주었으면 한다. 

솔직히 무슨 말을 적어야 할지 모르겠구나.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정말 많은데, 무엇 하나 말하기가 조심스럽다. 카앤 너도 궁금하지만 그동안 묻지 않았던 것들이 많다는 걸 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구구절절한 이야기들을 늘어놓고 싶지는 않다. 

카앤, 나는 네가 성검을 계승하지 않기를 한편으로 바랐었다.

너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야. 계승이 무사히 끝났다면 너는 나보다도 훨씬 뛰어난 용사가 될 테니까. 다만 네가 나를 생각하는 것처럼, 내게 있어 카앤 너 또한 너무나 소중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나는 일평생을 전장 속에서 살았다. 내 가족은 마족이 일으킨 전쟁으로 죽었고, 홀로 살아남은 나는 성검의 힘을 얻게 되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마족들을 죽이고 끝내 마왕을 봉인시켰지만 여전히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내가 짊어진 과업 또한 끝나지 않았다. 부활할 마왕을 다시 막기 위해서는 성검을 계승할 새로운 용사가 필요했지.

비록 시작은 계승 때문이었지만, 지난 몇 년은 나에게 잠시나마 그런 전장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더없이 소중한 시간이었다. 삶의 마지막 기로에서 내가 미련과 후회를 느끼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다른 무엇도 아니라 카앤 네 덕이 가장 컸다. 진심이란다.

카앤, 정말로 미안하다. 

마지막까지도 내가 직접 말할 수 없는 진실이 있다. 그래서 더더욱 미안한 마음뿐이다. 

설령 네가 그것을 후에 알게 된다면, 그건 그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만은 알아줬으면 한다. 네게 큰 상처를 입힐 수밖에 없었지만, 너에 대한 마음만큼은 모두 진심이었다. 그것에 거짓은 조금도 없다.

그리고, 이건 좀 더 먼 미래의 이야기다. 

카앤 네가 반드시 마왕을 쓰러뜨릴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다만, 그 이후에도 세상에는 결코 끝나지 않는 갈등의 고리가 있을 거다. 마족을 완전히 절멸시킨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겠지. 

그것에 크게 실망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동안 나와 나눴던 대화들을 기억해주렴. 내가 계속해서 싸울 수 있었던 이유를 너만큼은 이해해줬으면 한다.

쓰고 보니, 작별도 제대로 남기지 않고 도망치듯 떠나버린 주제에 네게 바라는 일들이 너무 많구나. 

전부 잊더라도 조금도 원망하지 않을 거다. 이런 말을 할 자격은 없지만, 정말로 바라는 건 카앤 네 행복뿐이다. 

마왕을 쓰러뜨리고 너도 반드시 너의 행복을 찾아야 한다. 

잘 있어라, 카앤.

카앤은 나인베르크에게 전해받은 에인델의 편지를 모두 읽고, 내려놓았다. 

머리가 어지러워서 편지의 내용은 좀처럼 머릿속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행복하기를 바란다고? 마왕을 쓰러뜨리고 행복을 찾으라고? 

카앤은 에인델에게 원망감을 느꼈다. 

작별 한마디 직접 남기지 않고 떠나버리고선, 그런 무책임한 말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제 그녀의 곁에 남은 건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에인델도, 아버지도, 랜도, 친구들도 없다. 전부 다 떠나고, 배신하고, 마족의 손에 죽었다. 

단지 타오르는 복수심과, 성검을 물려받은 용사로서 해내야 할 과업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난 이제 조금도 행복할 수 없어요, 에인델." 

카앤은 편지를 곱게 접어 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아아. 

허공에 소환된 성검이 카앤의 전신을 빛으로 휘감았다. 

빛이 사라진 뒤, 그 자리에는 카앤이 아니라 에인델이 서있었다.

방을 나서 저택의 홀로 내려가자, 여전히 그곳에 서있던 나인베르크가 그녀의 모습을 보고 흠칫했다. 

"······카앤이냐." 

카앤이 말했다. 

"황제에게 소식을 전해야죠. 수도로 갑니다." 

***

용사가 작별을 고하고 떠난 뒤, 나는 한참을 방에서 창밖만 내다봤다. 

주홍색 석양이 성내에 내려앉았다가 시간이 더 흘러 어둠으로 덮였다. 날이 다 저문 뒤에야 창가에서 시선을 뗐다. 

끝났을까? 

지금쯤이면 결판이 났을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책상에 걸터앉은 나는 서랍에 들어있던 작은 노트를 꺼내들었다. 

어찌어찌 7군주가 되고, 잠시 대군주성에서 머물렀을 당시 내가 아는 정보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 모조리 한글로 옮겨적어놨던 것이다.

그때는 뭐 하나 안심할 수 있는게 없었다. 용케도 죽지 않고 살아남아 여기까지 왔다 싶었다. 

- 최우선 목적은 생존. 얻을 수 있을 만한 신비들을 얻고 몸을 지킬 최소한의 능력을 갖춰야 한다. 

- 언제 대군주가 내게 일을 지시할지 모른다. 대군주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동안 스펙을 끌어올려야 된다. 저번처럼 제왕의 혼에 휘둘리지 말고 군주들과의 충돌은 최대한 피하자.

- 어느 정도 안전이 확보되면 용사를 찾는다. 지금쯤 용사는 성검의 계승자를 애타게 찾고 있을 시기다. 내가 알고 있는 정보를 공유하고 협력을 제안하면, 용사도 날 배척하지는 못할 것이다. 

노트 맨 뒤쪽 페이지에는 갓 군주가 됐던 내가 계획을 엉성하게 정리해놓은 메모들이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훑어보다가 이내 노트를 덮었다. 방 바깥 복도를 서성거리는 기척. 

"들어와라, 아셸." 

잠시 뒤, 방문이 열리고 아셸이 들어왔다. 

그녀가 방을 둘러보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녁이 한참 지났는데도 나오지 않으시길래······."

나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셸이 날 빤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낮에 용사를 만나지 않으셨습니까.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재가 되어 흩어지는 용사. 기시감과 함께 머릿속에 스쳤던 그녀의 최후가 다시 떠올랐다. 

용사가 죽었다면, 이후의 일은 그녀가 말했던 대로 흘러가겠지. 

곧 마족의 침공이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카앤은 에인델의 모습을 하고 용사로서 싸우겠지.

"론 님." 

아셸의 부름에 짧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괜찮으십니까?" 

나는 아셸을 쳐다봤다. 

날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엔 염려가 가득했다. 

왜 저렇게 쳐다보는 걸까. 아직 용사에 관한 건 말하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티가 났나.

"괜찮다." 

나는 언제나처럼 그렇게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우두커니 제자리에 서있다가, 도로 주저앉아서 고개를 푹 숙였다. 

"론 님?" 

아셸이 곁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그런 아셸의 손을 붙잡았다. 당황했는지 그녀가 작게 헛숨을 들이켰다.

"솔직히 안 괜찮아." 

"······." 

"아셸, 나는 사실 전혀 강하지 않다. 몸도 정신도 모두. 약한 게 들키지 않을까, 항상 조마조마해하며 주위에 폼만 잡아왔을 뿐이야. 칼데릭의 군주가 되고 싶지도 않았고, 원마나 다른 군주들과 목숨을 걸고 싸우고 싶지도 않았다. 실상은 그저 평범한 인간일 뿐인데······."

죽음을 가까이 마주하는 것도, 누군가의 죽음을 수없이 지켜보는 것도 고통스러운 일이다. 

제왕의 혼은 정신에 오는 충격을 방어하는 능력일 뿐이다. 감정을 죽이는 능력이 아니라. 

그걸로 지금껏 미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뿐이었다. 

난 기어코 마음의 응어리를 주절주절 다 뱉어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뒤늦게 얼빠진 소리를 지껄였다는 게 실감이 나서 손을 놓으려는 순간이었다.

아셸이 내 머리를 끌어안았다. 

상상도 못한 갑작스러운 행동에, 나는 놀라서 품에 안긴 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렴풋이 알고 있었습니다." 

"······." 

"곁에서 몇 년을 모셔왔으니까요. 론 님이 어떤 분인지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아셸의 목소리는 더없이 부드럽고 차분했다. 

반면에 심장은 쿵쿵 뛰고 있는 게 머리를 타고 느껴졌다. 나는 그만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항상 함께했던 건 아셸뿐이다. 

새삼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그녀였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셸이 내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는 알고 있다. 

말마따나 몇 년을 봐왔는데 여태 눈치 못 챘을 리가. 

그리고 지금 와서는 나도 별반 다르지 않다.

나는 아셸의 품에서 천천히 머리를 뗐다. 

"아셸." 

"예······." 

"용사는 마지막 남은 생명을 불태우러 홀로 올테로어로 향했다. 곧 마족의 침공이 시작될 거다." 

내가 알고 있는 미래는 이제 끝에 다다랐다. 

만약 그 다음이 있다면······.

"모든 게 끝나면, 그때는 내 이야기를 들려주마. 내가 누구인지, 진짜 이름은 무엇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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