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인델 (2)
회백색 피부. 보통 인간에 비해 조금 큰 체구. 이마에 달린 거대한 뿔. 보랏빛 눈동자.
마왕의 외관은 평범하다면 평범했다. 하지만 그의 등장과 함께 아즈켈을 포함한 모든 원마들의 존재감은 자리에서 지워졌다. 그것은 원마들이 스스로 기운을 거두어들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한없이 고요하고도, 전율적인 존재감이었다.
에인델은 성검을 휘둘렀다. 다시금 신성력이 넘실거리는 검기가 마왕을 향해서 날아들었으나……,
파스스.
그 또한 마왕에게 닿기 전에 허공에서 바스러지듯 사라졌다.
"한계가 왔다는 건 알고 있다. 마지막 남은 여력은 아껴 두어라."
마왕의 말과 함께, 에인델의 입가에서 핏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한순간 흐릿해진 시야로 마왕의 모습이 둘로 나뉘었다가 다시 하나로 합쳐졌다. 에인델은 눈두덩이를 꾹 눌렀다.
마왕이 바로 공격에 나설 기색이 없자, 이내 그녀도 천천히 검을 거두었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마따나 놈의 앞에서 쓸데없는 위세를 부려봐야 힘 낭비일 뿐이라는 걸.
아즈켈과 원마들을 상대하느라 이미 대부분의 힘을 소진했다. 잠깐이라도 회복할 시간이 주어졌다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될 뿐이었다.
마왕성 한가운데, 어둑한 자색 하늘 아래 적막이 감돌았다.
채 매듭지어지지 않았던 과거의 일전은,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 고스란히 같은 무대에서 재현되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용사는 너무도 약해졌고, 부활한 마왕은 과거의 힘을 완전히 되찾았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결말이 정해져있던 싸움. 에인델이 슬슬 최후의 전투를 준비할 때였다.
"이해하기가 힘들구나."
마왕이 입을 열었다.
"왜 이런 선택을 내렸나? 연합군을 이끌고 왔다면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었을 터인데.”
"……."
"수십 년 전, 내가 보았던 용사라는 인간은 남을 희생시키는 걸 끔찍이 싫어해도 사리분별은 할 줄 알았지. 누구보다 네가 가장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네가 이곳에서 홀로 나를 죽일 수 있는 경우는 처음부터 없었다. 성검의 힘을 가진 네가 죽고, 남은 떨거지들의 협공이 내게 위협이 될 거라고 보느냐?"
에인델을 바라보는 마왕의 눈매가 미약하게 휘어졌다.
"대체 무엇을 생각했을까. 자포자기의 심정일 리는 없으니, 믿고 있는 무언가가 있는 건가. 아니면……."
말을 끊나기 전에 에인델의 신형이 움직였다.
성검의 검날이 섬전처럼 마왕의 목을 노렸다. 마왕이 손을 뻗었다. 신성력이 가득 담긴 검격이 손바닥에 가로막히고, 그를 감싼 어둠에 밀려나 더 나아가지 못했다.
꾸물거리던 어둠이 마왕의 주위에 한 자루 검의 형태로 뭉쳐졌다. 에인델은 검을 거두고 물러섰다.
어둠의 검이 그녀를 노리고 쏘아졌다. 검은 한두 자루씩 늘어나더니 금세 수십 자루가 되어 몰아쳤다.
에인델은 잠시 검들을 피하고 튕겨내며 씨름하다가, 멈추지 않고 증식하는 검의 숫자에 결국 사방으로 기운을 터뜨렸다.
대해와 같은 신성력이 마왕의 힘을 밀어냈다. 황금의 광구에 마치 고슴도치 가시처럼 검들이 박힌 채 힘겨루기가 이어지다가, 결국 검진은 우수수 파괴되었다.
쿨럭!
다시금 피를 토해낸 에인델이 휘청거렸다.
입술은 새파래서 핏기가 없고, 이제는 피눈물마저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좀처럼 초점이 잡히지 않는 시야 너머로, 마왕의 모습이 다시 한 번 여럿으로 나뉘었다가 합쳐졌다.
"용사, 기억하느냐? 너와 내가 처음 마주했을 때 나누었던 대화를."
에인델은 턱에 방울진 핏물을 닦아내고, 다시금 마왕을 향해서 날아들었다.
이번엔 마왕의 주위에 늪지대처럼 꿈틀거리던 어둠에서 팔들이 뻗어나왔다.
바닥에서, 벽면에서, 그리고 허공에서, 마구잡이로 뻗어나온 그것들은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망자들의 손아귀와 같았다. 쭉 길게 늘어져서 에인델의 발목을 붙잡고, 달는 대로 할퀴고 찢으려 들었다.
에인델의 몸을 두른, 아즈켈의 필살의 일격도 막아냈던 신성력의 갑옷에 조금씩 균열이 일어났다.
갑옷이 끝내 박살난 다음은 몸에 상처들이 새겨졌다. 살이 쩍쩍 갈라지며 핏물이 튀어올랐다. 에인델은 개의치 않고 전진했다. 지옥의 틈새를 지나, 다시 한 번 마왕의 목에 검을 휘둘렀다.
마왕의 손이 성검의 검날을 움켜잡았다. 에인델은 그 상태에서 마지막 남은 힘을 모조리 끌어올렸다. 마왕 또한 그 기운을 맞받아쳤다.
쿠구구구구!
지축이 울리고, 대기가 격동했다.
세상이 반으로 갈라진 듯 경계를 나눈 빛과 어둠이 넘실거리며, 서로를 밀어내고 밀리기를 반복했다.
"……!"
에인델의 입에서 처음으로 기합성이 흘러나왔다.
그만큼 필사적이었다. 한쪽 팔이라도, 하다못해 자그마한 내상이라도 좋다. 그것을 위하여 시작한 일이고, 마지막이라 정한 장소였다.
콰드득.
잠시나마 밀려나는 듯 보이던 어듬이 한순간에 기운을 부풀렸다.
그리고 에인델의 왼팔이 어등에 잡아먹혀 사라졌다. 성검의 신성력은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맥없이 튕겨나간 에인델이 땅바닥을 뒹굴었다.
"아아……!"
아즈켈이 감격에 찬 눈으로 탄성을 흘렸다.
이 얼마나 고대했던 순간인가?
위대한 신을 감히 의심한 적 따윈 없다. 다만, 아주 자그마한 불안과 염려 한 조각조차 마음 한편에 없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
수십 년 전의 그날도 그랬었으니까. 결과가 명백했던 전쟁, 하찮은 미물들 사이에서 한 자루 검을 쥐고 등장한 용사는, 이 세상의 것과 동떨어진 힘으로 기적을 일으켰었으니까.
하지만 보아라. 마치 날개 잘린 벌레처럼 바닥을 기고 있는 저 꼴사나운 모습을.
오랜 기다림이었다. 아즈켈을 포함한 원마들은 비로소 과거에서 벗어나, 완전한 확신을 가지게 될 수 있었다. 이 세계가 머지않아서 그들의 낙원이 될 것을.
"너는 내게 그리 물었었다. 어째서 전쟁을 일으키고, 많은 인간들을 죽이고, 끔찍한 짓을 자행하는지."
마왕이 쓰러진 용사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나 또한 네게 물었었다. 너는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이냐고. 평화를 위해서, 정의를 위해서, 그런 따분한 말들을 했었지. 여전히 그 생각에 변함이 없는지가 궁금하구나. 내가 잠들어있던 수십 년의 시간 동안 세상은 어떻더냐. 바라던 평화가 찾아왔던가?”
마왕이 한 걸음 내딛었다.
"성검의 힘에 나뉘어진 영혼으로, 여러 몸들에 갇혀 그동안 올테로어 바깥의 세상을 지켜봤다. 너처럼 되찾은 평화를 지키기 위해 헌신하는 자들이 있었지. 그보다 더 많이 권력을 쥐고 제멋대로 흔드는 자들도 있었다. 그렇게 침략하고, 죽이고, 방관하고, 전쟁이 끝났어도 새로운 전쟁은 금세 시작되지. 너희는 그렇더구나. 이기심, 동정심, 권욕, 공리, 살의, 박애. 가지고 있는 감정과 욕망이 제각각 너무나도 다르니 갈등이 끊이지가 않는다. 참으로 모순되고 혼잡스러운 종이 아니더냐."
"……."
"반면 마족은 어떤가. 우리의 욕망은 오로지 죽이고, 짓밟고, 유린하며, 지배하는 것뿐이다. 그 본능에서 벗어나 태어난 존재 따윈 없다. 만약 이 땅에 마족들만이 남는다면, 그때는 끊이지 않는 전투와 살육만이 곧 세상의 정의다. 그 낙원에 불만을 가지는 이는 누구도 없다."
마왕은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용사여, 네가 말했던 정의는 이제 와서 무엇이냐? 무엇을 위해서 여전히 싸우고 있지?"
에인델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마왕을 응시했다.
처음, 성검이 눈앞에 찾아왔을 때.
에인델은 검을 휘둘렀다. 그저 강해져서 세상을 구하겠다는 일념뿐이었다.
그렇게 누구보다 강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 보이는 족족 마족들을 쓰러뜨리고 사람들을 구했다.
그러다 보니 에인델은 머지않아 깨달았다. 자신은 그저 거대한 칼을 쥔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았단 걸.
아무리 강한 힘을 가져도 구할 수 없는 사람들은 많았고, 그렇지 않아도 피폐해진 마음을 시도 때도 없이 흔드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들도 많았다.
자기 목숨 하나 보전하려 군사들을 사지로 내모는 권력자들, 마족의 편에 붙어먹으려는 배신자들. 전쟁통에 아무렇지 않게 민간인들에게 끔찍한 악행을 저지르는 병사들.
왜 이딴 인간들을 구하겠다고 이토록 분투하고 있지? 무엇을 위해서?
수십 번은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에인델은 전쟁이 지속되는 내내 마족뿐만 아니라 자신의 내면과도 싸워야 했다.
그럼에도 버티고 끝까지 싸울 수 있었던 것은 동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모험가였고, 누군가는 마탑의 마법사였으며, 누군가는 명문가의 귀족이었다. 성검의 힘 같은 건 있지도 않으면서, 그 누구보다 최전선에서 죽음을 불사하며 용맹히 싸웠던 그들.
마왕이 봉인되고 전쟁이 어영부영 끝난 뒤, 에인델의 곁에 남아있는 동료들은 거의 없었다.
에인델 역시 큰 후유증을 입어 시한부 신세가 되었고, 마왕은 완전히 죽지 않아 언제 다시 부활할지도 알 수 없었다.
에인델은 전쟁 피해의 복구에 힘을 다했다. 어느 정도 안정이 찾아온 다음은 성검의 계시에 따라, 마왕의 싹들을 제거하고 계승자를 찾기 위해 세상에서 잠적했다.
전쟁이 끝나고 바라던 평화가 찾아왔냐고?
마족의 침공은 더 이상 없었으나, 세인테아의 황제는 이제 이종족을 배척하고 학살하며 음험한 계획을 꾸였다.
세인테아와 칼데릭 사이에서 중립국들의 다툼은 끝이 없었고, 그 모든 분쟁을 더 큰 혼란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 아래 적극적으로 해결하지 않은 그녀 자신도 있었다.
마왕의 말대로 갈등은 끝이 없다. 마족들이 이 세상에서 완전히 절멸하더라도, 그 사실에 변함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에인델은 어느 순간부터 더는 그런 것들에 고뇌하지 않았다.
무엇이 됐든, 결국 하나의 이유면 충분하다는 걸 깨달았기에. 처참한 몰골과 상반된 평온한 목소리로, 에인델은 대답했다.
"나 또한 인간이니까."
마족은 절대악. 어떻게도 공존할 수 없는 존재.
인간에게, 아니, 마족을 제외한 모든 종에게 단 하나의 확실한 정의가 있다면 그뿐이다.
원하는 대답을 들었다는 뜻, 마왕의 입가에 처음으로 미소가 걸렸다.
"그래. 그리고 내가 마족이기에 너희의 세계는 멸망할 것이다."
에인델이 남은 한 팔로 성검을 들어올렸다. 그에 응하여 마왕도 손을 들어올렸다.
용사로서 지나온 생에 미련도, 후회도 없다. 다만 한 소녀가 조금 마음에 걸릴 뿐이었다.
그렇게 카앤을 시작으로 머릿속의 스쳐가는 주마등 끝에 떠오른 건, 기이하게도 7군주의 모습이었다.
"……부탁한다."
황금의 광휘를 두른 성검이 아래로 내리그어졌다.
섬광이 번쩍였고, 그 빚은 어둠에 잡아먹혀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파스스스.
검을 내린 채 우두커니 서있던 에인델의 모습이 서서히 재가 되어 흩어졌다.
원마들은 자그마한 숨소리도 내지 못한 채 그 광경을 지켜봤다.
"……."
다만 성검은 용사와 함께 소멸하지 않았다.
그녀가 사라진 뒤에도 미약한 빛을 뿜어내며 고고하게 허공에 떠있을 뿐이었다.
마왕은 그것을 지켜보다가, 이내 발걸음을 옮겨 성검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뻗어 성검의 검자루를 쥔 순간이었다.
- 꺼져라.
번쩍!
목소리와 함께 성검에서 강렬한 빚이 뿜어져나왔다.
"마왕님!"
거대한 신성력의 파장에 아즈켈이 기겁했다. 하지만 그 기운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빛이 사라지고 난 자리에 성검은 더 이상 없었다.
마왕은 살이 타들어 연기가 피어오르는 손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고 선언했다.
"전군을 모아라."
결국 용사가 무엇을 믿었든, 부질없는 희망에 불과할 것이다.
세인테아로 진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