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인델 (1)
에인델은 마왕성을 향해서 나아갔다. 과거의 대전쟁을 떠올리며.
마족들의 침공이 시작되었을 때, 가장 먼저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었던 건 세인테아였다.
지리상 세인테아는 올테로어와 맞닿아있는 땅이었기에 가장 필사적으로 싸워야만 했다.
에인델은 시골 마을의 평범한 소녀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퇴역 기사였고, 그녀가 익힌 검술은 아버지에게 조금 배운 호신용 검술 정도가 전부였다.
그리고 어느 날, 마을은 마족의 습격으로 파괴됐다. 사람들은 유린당하며 끔찍하게 죽었고, 에인델은 아버지의 희생으로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다.
가족을 모두 잃고 험한 산속에 홀로 내쳐져 절망하는 에인델의 앞에, 그것은 갑자기 나타났다.
신성한 황금빛을 뿜어내는 검은 자신을 성검이라고 소개했다.
또한 자신의 힘을 받아들이고, 마족들을 물리칠 것을 권했다.
어떠한 이유도, 까닭도 설명하지 않고.
하지만 달리 선택지가 없던 에인델은 성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그녀는 성검의 선택을 받았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백색의 공간에 갇혀,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건지 감각조차 완전히 무뎌질 정도로 검을 휘둘렀을 때, 그녀는 비로소 성검의 힘을 모두 받아들이고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바깥 세상의 시간은 백색 공간에 갇히기 시작했을 때부터 거의 흐르지 않았기에, 변한 것 또한 아무것도 없었다.
에인델은 우선 세인테아에 침공한 마족들부터 모조리 퇴치하기 시작했다.
마족들의 힘은 너무도 강대하여 인류는 바람 앞의 촛불과 다름없었지만, 에인델의 등장으로 간신히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전쟁은 좀처럼 끝나지 않고, 에인델은 그 지옥 속에서 온갖 참상들을 경험하고 지켜봤다.
그리고 모든 걸 끝내기 위해 올테로어로 진격했다.
동료들과, 결사대와,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떠안고 끝내 마왕을 봉인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그렇게 전쟁이 끝난 뒤 사람들은 그녀를 용사라 칭송했고, 신자들은 성검의 힘을 그들이 믿는 신께서 내려주신 힘이라 감격했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다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마치 그때처럼 에인델은 결전을 위해 나아가고 있었다.
식물 한 줄기 없는 메마르고 거친 땅을 지나 성의 입구에 다다랐을 때, 성문은 이미 활짝 열려있었다.
뿌열게 낀 잿빚 안개 너머로 수많은 마족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넘처흐르는 살의와 악의들도.
에인델은 멈추지 않고 그 복마전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그녀를 막는 마족들은 없었다.
목줄이 차인 맹수처럼, 단지 안개 속에서 모습을 숨긴 채 얌전히 안광만을 빚낼 뿐이었다.
"……."
마왕이 봉인되어있던 무너진 중앙탑에 다다르고, 에인델은 걸음을 멈추었다.
한 마족이 그곳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용사."
피부가 조금 창백한 걸 제외하고는, 외모도 목소리도 평범한 인간 남성과 별반 다를 게 없다.
하지만 놈은 최강의 원마이자 올테로어의 2인자였다.
"마왕은 어디에 있느냐, 아즈켈."
화아악!
에인델이 성검의 힘을 방출했다. 신성한 물결이 주위의 안개를 물리쳤다.
그제야 안개 속에 숨어있던,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마족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중엔 원마들도 있었다.
하지만 정작 마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기운이 멀지 않은 곳에서 느껴짐에도 불구하고.
아즈켈이 웃음을 흘렸다.
"조바심이 느껴지는구나. 마왕님께서 네 최후의 발악에 응해주지 않으실까 걱정되느냐?"
"……."
"오만한 용사야. 네가 올테로어에 흡로 찾아올 경우도 전부 상정하고 있었다. 넌 그분의 발끝도 눈에 담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게 될 것이다. 바로 내 손에 말이다."
마족들의 비웃음이 울려퍼졌다.
에인델의 표정에는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혀가 길구나, 아즈켈. 지난 3년간 올테로어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못한 너흐I다. 내가 그리도 두려웠더냐?"
"수십 년 세월을 기다렸는데 고작 몇 년을 더 못기다리겠느냐. 봐라, 결과적으로 궁지에 몰린 네가 스스로 묫자리에 찾아왔지 않느냐?"
아즈켈이 손을 뻗었다
"너의 패배다, 용사. 그리고 네 죽음을 시작으로 세상은 새롭게 바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에인델이 서있는 자리에 거대한 녹빛의 화염 기둥이 솟아올랐다.
앞쪽으로 도약해 공격을 피한 에인델은 그대로 아즈켈에게 날아들었다. 그리고 검을 휘둘렀다.
아즈켈이 입꼬리를 올리며 방어막을 펼쳤다. 황금빛 검기가 그를 둘러싼 육면체 형태의 방어막에 막혀 소열했다.
방어막이 폭발하며 에인델을 덮쳤다. 에인델 또한 방어막을 펼쳐 충격을 막았다.
이번엔 아즈켈 주위의 허공에 창들이 떠올라서 그녀가 펼친 방어막을 타격했다.
츠츠츠.
방어막을 타고 잠식하는 녹색의 기운에, 에인델은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성검의 힘을 조금 더 끌어올리자 그제야 잠식하는 기운은 모두 흩어졌다.
틈을 노리고 창들이 계속 날아들었다. 에인델은 그것들을 모두 쳐내고 다시 아즈켈에게 접근했다.
그녀는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방어막을 거둔 아즈켈도 손을 휘저으며 공격들을 막고 반격했다.
처음에는 거의 제자리에서만 싸우다가, 이내 전장은 탑 전체로 확장되었다.
두 신형이 어지럽게 얽히며 격돌에 휘말린 마족들의 몸이 찢겨나갔다. 주위에 있던 마족들이 기겁하며 더 거리를 벌렸다.
원마들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본격적으로 시작된 두 괴물의 전투를 관전했다.
대전쟁을 겪은 마족들은 용사 에인델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
성검의 신성력은 그들에게 단순히 강력하다고만 표현할 수 있는 종류의 힘이 아니었다.
두렵고, 마주한 것만으로 살이 떨리며, 영혼까지도 통째로 소멸시켜버리는 그야말로 신과 같은 힘.
마치 존재 자체가 마족을 이 세상에서 절멸시키기 위한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만 같은 힘이다.
하지만, 원마들 중에서도 격이 다른 존재. 마왕을 제외한 최강의 마족.
아즈켈의 힘 또한 강대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리 강한 마족이라고 해도, 과거의 대전쟁 때 용사와 맞설 수 있었던 마족은 마왕을 제외하고 없었다.
비록 용사의 힘이 크게 약화된 지금이라고 해도, 그녀와 비등해 보이는 전투를 펼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지켜보는 마족들에게는 경외감을 느끼게 했다.
"도대체 어디까지 추락한 거냐, 용사! 그때의 힘은 찾아볼 수가 없구나!"
아즈켈의 공세가 거칠어졌다. 맨손과 검이 부딪힐 때마다 가공할 충격파가 울려퍼졌다.
짧은 사이 수많은 공방이 펼쳐진 가운데, 아즈켈의 공격을 막은 에인델이 튕겨나갔다.
아즈켈이 조소를 흘리며 마력을 더욱 끌어올렸다.
드드드득!
그의 발 아래로 마치 나무 뿌리처럼 마력 줄기들이 뻗어나가더니. 반투명한 거신의 형상이 세워졌다.
에인델은 잠시 공격을 멈추고 그 광경을 응시했다.
마족들에게는 각자 저마다의 권능이 있다. 강력한 마족일수록 권능의 강함은 궤를 달리하거나, 종잡을 수 없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대전쟁 때도 아즈켈과 싸워본 적이 없는 에인델은 그의 권능을 알지 못했다.
아즈켈이 만들어낸 거신의 몸에는 수많은 눈이 달려있어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뒤룩거리던 눈들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
거신의 눈이 깜박거리자, 에인델의 주위에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에인델은 허공으로 날아올라서 폭발을 피했다. 폭발은 눈이 깜박일 때마다 연쇄적으로 일어나 그녀를 쫓아왔다.
에인델은 이리저리 움직이며 회피하다가 거신에게 접근하여 성검을 휘둘렀다.
좀 전보다 활씬 강력한 기운을 담은 검격이 거신을 타격했으나, 거신의 몸체에는 조금의 균열도 일지 않았다.
아즈켈이 팔을 휘둘렀다. 그러자 거신도 따라서 팔을 휘둘러 에인델을 쳐냈다. 튕겨나가는 그녀에게 다시 한 번 맹렬한 폭발이 따라붙었다.
멀찍이 물러서서 지면으로 내려선 그녀를 보며 아즈켈이 조금 실망스러운 눈으로 말했다.
"실로 기대 이하구나. 이렇게까지 약해진 줄 알았다면 정말 쓸데없는 기다림이었어."
아즈켈이 손을 들어올리자, 거신이 따라서 손을 들어올렸다.
손이 내려그어짐과 동시에 하늘에서 거대한 녹빛 창들이 신의 철퇴처럼 떨어졌다.
콰아아아앙!
공격이 집중된 자리에 바닥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구덩이가 생겼다. 그 안쪽에서는 희미한 황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에 아즈켈은 공격을 멈추지 않고 계속했다. 구덩이 안쪽으로 창들이 몇 차례나 폭우처럼 쏟아졌다.
쿠구구구구…….
아즈켈은 입꼬리를 올리며 구덩이를 쳐다보다가, 이내 인상을 굳혔다.
어느새 황금빚의 갑주를 전신에 두른 용사가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이 정도 되는 힘을 가지고 있었나. 생각했던 것 이상이긴 하다만……."
에인델이 성검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너로는 안 된다, 아즈켈."
찬란한 광채가 성검의 검날을 뒤덮고서 하늘 끝까지 솟아오르더니, 거대한 검처럼 변했다.
아즈켈이 거신의 양팔을 들어올려 방어했다.
에인델의 일검이 거신을 그대로 반으로 갈라버렸다. 강렬한 섬광이 일대를 뒤덮었다.
"……!"
간신히 직격은 피한 아즈켈은 에인델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그때 다시금 섬광이 번쩍였다. 에인델의 두 번째 검격이었다.
동시에 아즈켈의 몸에서 핏물이 튀어올랐다. 빗맞았음에도 영혼에까지 타격이 울려왔다.
"크으……!"
한 번 더 공격을 허용하면 소멸할 것이란 걸 직감한 아즈켈은 다급해졌다.
그제야 지켜보기만 하던 다른 원마들이 나섰다. 물론 그들의 참전은 잠깐의 시간 끌기에 지나지 않았다.
서열 5위의 원마 발라크가 에인델 주위의 공간을 왜곡시켜 몸을 붙잡았다. 에인델은 다시 한 번 검을 휘둘러 왜곡된 공간을 통째로 갈라버렸다.
곧바로 서열 9위의 원마 파크큘리가 권속인 마족들을 조종해 에인델에게 자폭 돌격시켰다. 에인델이 손을 한 번 쥐었다 펴자, 그들은 몇 걸음 움직이지도 못하고 제자리에서 모조리 폭발했다.
서열 4위의 원마 반다프모샨이 대지에서 거대한 식물 줄기들을 소환했다. 서열 6위의 원마 유케실과 서열 2위 원마 혼카가 줄기에 둘러싸인 에인델을 향해 혹한의 냉기와, 핏빛의 뇌기를 뿜어냈다.
쩌어억!
그리고 다시 한 번 황금의 섬광이 터지며, 원마들의 모든 공격이 소멸했다.
잡마족과 낮은 서열의 원마들은 그 일격에 모조리 소멸했고, 높은 서열의 원마들도 온전히 몸을 보전하지는 못했다.
아즈켈은 여전히 아무 피해도 없어 보이는 에인델을 바라보며 이를 깨물었다. 그녀의 전신에서는 신성한 기운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마왕이 나타날 생각이 없다면, 너희를 전부 죽이고 놈을 찾으면 될 뿐이다."
에인델이 다시금 성검을 치켜들었다.
이번엔 이 자리에 있는 대부분의 원마들을 확실히 소멸시키기 위한 일격을 날렸다.
그 순간이었다.
스으으으.
사방으로 넓게 퍼져나가던 성검의 신성력이 어둠에 잡아먹히듯 사라졌다.
요란스러운 폭발음도, 충격의 여파도 없었다. 그저 그렇게 소멸해버렸다.
동시에 아즈켈을 포함한 모든 원마들이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아직 전투가 끝나지 않은 상황에, 에인델을 바로 눈앞에 두고 무방비하게.
"……."
에인델은 검을 내리고 고개를 돌렸다.
일대에는 어느새 불길한 기운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수십 년 만에 다시금 느끼는 잊을 수 없는 존재감이었다.
"그쯤이면 되었다."
마왕.
무미건조한 음성과 함께, 어둠이 갈라지며 그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