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운 (2)
대장간 안으로 우리를 안내한 신퇴는 가장 안쪽에 있는 공간으로 이동했다.
몇몇 높은 레벨의 드워프들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는데, 신퇴의 개인 공간처럼 보이는 장소였다.
안으로 들어가자 제작대처럼 보이는 거대한 테이블 위에 한 자루 검과, 한 벌의 갑옷이 놓여있었다.
"저것인가?"
"그렇네."
대륙 최고의 대장장이가 마경 옥테아의 광물로 제작한 무구.
칠흑의 광채가 나는 검과 갑옷은 묘하게 빨려들어가는 듯한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신퇴가 그것들을 들고 와서 아셸에게 내밀었다. 아셸은 조금 긴장한 눈빛으로 받아들었다.
장비를 받아들고도 쭈뼛쭈뼛 서있길래 내가 말했다.
"여기서 바로 착용해봐도 되겠나?"
"물론이네. 그럼 제작한 대장장이에게 장비를 사용하는 모습은 보여주지도 않고 떠나려 했나?"
이내 아셸이 걸치고 있던 갑옷을 벗고 새 갑옷을 착용하기 시작했다.
신퇴가 제작한 갑옷은 그녀가 평소 착용하던 경갑과 다른, 전쟁에서나 착용할 법한 무거운 느낌의 갑옷이었다.
"어떠냐?"
내가 묻자 아셸이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보다가 대답했다.
"이런 중갑에는 익숙지 않아서 솔직히 불편한 느낌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신퇴가 웃음을 흘렸다.
"검도 한번 휘둘러보게."
아셸이 검을 양손으로 잡고 휘둘렀다.
몇 번 휘둘러보더니, 특질까지 활성화한 채로 마력을 흘려넣었다.
칠흑색의 검신에 아셸의 새하얀 마력이 피어올랐다.
나는 그 광경을 보고 속으로 작게 감탄했다.
처음 검과 갑옷을 봤을 때 검은색이라 아셸에게 외적으로는 별로 어울리지 않겠다고 얼핏 생각했었는데, 상반된 두 색의 조합은 생각보다 왜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셸이 놀란 기색으로 검신을 둘러싼 검기를 바라봤다.
"나도 제작하고서 놀랐다네. 기대는 했지만 설마 이 정도로 뛰어난 물건이 나올 줄은 몰랐거든. 굉장한 마력 전도율이지 않나?"
"예……."
뭔지는 몰라도 아셸의 반응을 보니 무기의 성능이 상상 이상으로 뛰어난 모양이었다.
"정말 제가 이것들을 받아도 되겠습니까?"
신퇴가 흡족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아셸에게 좋은 장비가 생겨서 잘됐다 싶었다.
"좋은 무구를 만들어줘서 고맙다, 1군주. 다시 한 번 감사를 전하지."
"다 7군주 자네가 광석에 깃든 사념을 없애준 덕분에 제작할 수 있었던 것이지. 나야말로 덕분에 좋은 재료를 얻었네."
그렇게 볼일이 다 끝난 다음에는 1군주가 다른 할일들로 바쁘다고 했기에 곧장 돌아가기로 했다.
나는 대장간에서 나서며 대장간 옆편에 줄지어 세워진 거대한 골렘들을 힐끗 바라봤다.
"대군주가 제작을 부탁한 전쟁 골렘들이네."
배웅을 위해 따라나온 신퇴도 골렘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4군주의 도움도 받아서 제작했네. 영혼 쪽은 그가 정통한 분야니까. 마족과의 전쟁이 시작된다면 쓰일 병기지."
"그렇군."
”7군주, 자네는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
뜬금없는 물음에 나는 신퇴에게로 시선을 옳겼다.
"마족들이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이 대륙은 마족들을 제외하고 그 어떤 종족도 남아있지 않은 땅이 될 걸세. 그들은 그런 존재니까. 그렇기에 군주들도 모두 순순히 명령에 따라서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고."
”……그렇지."
"그리고 7군주 자네 역시도 그런 세상을 원할 리는 없겠지.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거야. 그렇지 않은가?"
신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몰라서, 나는 그와 가만히 눈만 마주쳤다.
이내 신퇴가 한숨을 내쉬고서 고개를 저었다.
”……별 건 아니었네. 근래 이런저런 노파심이 들어서 말이야. 아무쪼록, 전쟁이 시작되면 7군주 자네도 자네의 최선을 다해주게. 칼데릭을 위한 게 아니더라도, 이 대륙을 위해서."
그건 너무도 당연한 말이었다.
"물론이지."
신퇴와 인사를 마치고, 나는 아셸과 함께 띠용이의 등 위에 올라탔다.
"가자. 띠용아."
칼데릭의 가장 깊은 뿌리와 다름없는 군주인 신퇴의 노파심이 무엇일까.
날아가며 생각해보다가 이내 관두었다.
다른 것들은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내가 온 신경을 집중해야 할 문제는 마왕과 성검뿐이었으니.
'마왕만 쓰러뜨릴 수 있다면…….'
그런데 만약 마왕을 무사히 쓰러뜨리고 나면, 그 다음에 남아있는 건 무엇일까.
그것만큼은 여전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 *
세인테아 엘산도 령, 나인베르크의 저택.
캉! 카앙!
두 여인이 연무장에서 검을 부딪히고 있다.
에인델이 검을 올려쳐 카앤의 검을 평겨냈다.
카앤은 그 반동을 그대로 이용해 몸을 회전시키며 옆구리를 노렸다.
에인델은 이번엔 검격을 흘려 자연스레 카앤의 검이 바닥을 내리치게 했다.
"아."
자신의 검날을 누르고 있는 에인델의 검날을 보며, 카앤은 짧은 탄식을 뱉었다.
에인델이 검을 거두며 말했다.
"수고했다. 아침 대련은 여기까지 하자.”
"네."
카앤이 땀으로 젖은 머리를 쓸어넘기며 숨을 골랐다.
훌쩍 자란 그녀의 모습에서 더 이상 과거의 앳된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나인베르크 씨, 오늘 아침은 뭐예요?"
카앤의 물음에 대련을 지켜보던 나인베르크가 대답했다.
"계란 스프를 만들 거다. 사제들이 달걀을 좀 가져와서 말이다."
"오, 맛있겠다. 그럼 전 가서 씻을게요."
정리를 마친 카앤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연무장 밖으로 나섰다.
나인베르크가 에인델에게 말했다.
"갈수록 너와 닮아가는 것 같군. 안 그런가, 에인델?"
"닮다니, 무엇이?"
"외모 말일세. 혹시 그것도 성검의 힘이 작용한 건 아닌가?"
"그럴 리가 있나."
에인델이 고개를 저었다.
3년이 흘렀다. 에인델이 카앤을 데리고 나인베르크의 저택으로 온 지도.
카앤의 존재를 숨기고 훈련시키기 위해선 은밀한 장소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산속으로 들어가는 대신 믿을 수 있는 동료의 거처를 고른 것이었다.
나인베르크도 이제 계승에 대한 것을 알기에 카앤의 성장을 전력으로 보조하는 중이었다.
이곳 넓은 저택에서 생활하는 건 그들 세 사람이 전부다.
잡일은 모두 나인베르크가 맡고 있었고, 누군가 방문하는 일은 마을의 촌장이나 교회의 사제들이 식자재를 가져오는 정도였다.
"마족은 아직까지도 잠잠한가요?"
식사 중, 카앤이 수프를 떠먹다가 나인베르크에게 물었다.
나인베르크가 냅킨으로 입을 닦고서 대답했다.
"그렇단다."
"이대로 계속 기다리고 있을 모양이죠? 에인델의 몸 상태가 더 나빠지기를."
"음, 아마 그런 거겠지. 놈들이 무슨 꿍꿍이를 품고 있는지야 누구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나인베르크가 에인델을 슬쩍 쳐다봤다. 그녀도 입을 열었다.
"카앤, 걱정 말거라. 너는 충분히 강해졌다. 성검은 언제라도 계승할 수 있어."
지난 몇 년 동안 에인델과 나인베르크의 지도 아래, 카앤은 엄청난 성장을 이룩했다.
이런 성장 속도라면 앞으로 10년 안에 오성의 경지에 다다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물론 성검을 계승한다면 그런 시간조차도 필요 없었지만 말이다.
"아직 부족해요."
하지만 카앤은 무언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곧바로
대꾸했다.
"내가 에인델에게 배워야 할 것들은 아직 한참 남았어요. 계승은 너무 이른 일 아니겠어요?"
"……."
"잘 먹었습니다. 먼저 일어날게요."
수프를 싹 비운 카앤이 식당에서 나섰다.
나인베르크와 에인델은 그 뒷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저 아이도 다 짐작하고 있을 게야. 성검을 계승하면 어떻게 될지."
"그렇겠지."
"쯧, 얄궂은 일이군. 성검은 대체 어째서……."
쿨럭!
식탁보 위에 시뻘건 선혈이 흘러내렸다.
나인베르크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인……!"
"쉿."
에인델이 파르르 떨리는 손을 들어올렸다.
"목소리를 낮춰라, 나인베르크."
그녀는 입가에 묻은 피를 닦고, 식탁과 바닥에 떨어진 핏물도 손짓으로 모두 지워냈다.
나인베르크가 조금 허망한 눈빛으로 그 광경을 지켜봤다.
"그런 얼굴 할 것 없다. 전부 알고 있었던 일 아닌가?"
”……얼마나 남았나?"
"길어야 반 년이겠군."
에인델이 호흡을 가다듬고 물었다.
"나인베르크, 무언가 보였다면 이제 그만 말해다오. 어차피 내 최후는 머지 않았으니."
* * *
방으로 돌아온 에인델은 탁자에 앉아 빈 허공을 바라봤다.
그저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이제 카앤은 성검을 무리 없이 계승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성검을 계승하면 과업은 그로써 끝이다. 남은 일은 카앤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다.
또한 성검을 계승한 뒤, 에인델의 죽음은 확정된 것이었다.
지금까지 성검의 힘으로 망가진 몸을, 마왕과의 결전 때 죽었을 목숨을 간신히 유지해왔을 뿐이다.
그 힘이 카앤에게 모두 전해진다면 에인델의 몸이 어떻게 될지는 정해진 일이었다.
카앤도 그 사실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기에 계승을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었고.
"……."
에인델은 어느새 새하얀 공간으로 변한 주위를 둘러봤다.
탁자 반대편에 누군가 앉아있었다.
흐릿하게 사람의 형체를 한 그 존재를 빤히 바라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성검의 계승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집니까."
성검이 대답했다.
- 현 주인인 네가 원한다면, 혹은 사망한다면 그 즉시 이루어질 것이다.
"좀 더 확실히 설명해주십시오."
- 계승자와 얼마나 멀리 떨어져있든, 네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든 관계없이 계승은 이루어진다.
그에 에인델은 조금 안도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결국 그것이 네 선택인가.
"……."
- 비참한 최후가 될 것이다. 마지막만큼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곁에서 눈을 감을 수 있다. 네게는 그럴 자격이 있다, 에인델.
에인델은 대답하지 않았다.
성검의 모습이 사라지고, 주위는 다시 그녀 혼자뿐인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동시에 노크 소리가 울렸다.
"들어오령, 카앤."
에인델이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방문이 열리고 카앤이 들어왔다.
"무슨 일이니?"
카앤이 머리를 긁적이며 머뭇거리다 말했다.
"그…… 죄송하다고 사과하고 싶어서요. 아까는 제가 너무 쏘아붙이듯 말한 것 같아요."
에인델이 부드럽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카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카앤도 웃다가 말했다.
"에인델.”
"……?"
"나는 계승을 서두르고 싶지 않아요. 적어도 마족들이 움직이기 전까진 그러지 않아도 괜찮잖아요."
"그렇구나."
”……갑자기 어디로 사라져버리는 건 아니죠? 그런 건 아니라고 약속해줘요."
에인델의 눈빛이 일순간 흔들렸다. 하지만 금세 평정을 되찾았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지 않단다. 약속하마."
* * *
아셸의 장비를 받고 군주성으로 돌아온 나는 갑작스러운 연락을 받았다.
용사가 중요하게 할 말이 있다며 내가 있는 곳으로 찾아오겠다고 연락해온 것이었다.
'무슨 일이지?'
띠용이를 타고 군주성과 가까운 숲으로 나갔다.
연락한 지 반나절도 안되어 도착한 용사가 숲의 한가운데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군, 7군주."
”……그래."
나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중요하게 할 말이라니, 무슨 일이냐. 카앤과 관련된 일인가?"
용사가 대답했다.
"나는 지금부터 올테로어로 향할 것이다."
"……!"
"떠나기 전에 그대에게 마지막 인사를 남기러 왔다. 그뿐이다."
나는 할말을 잃고 가만히 서있다가, 질끈 눈을 감고 말았다.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죽을 거다."
"그래. 죽기 위해서 가는 것이다."
"……."
"계승을 위한 카앤의 성장은 충분히 끝났다. 그리고 내 수명은 이제 반 년도 남지 않았다."
성검을 계승하면 어차피 용사는 모든 힘을 잃고 죽는다.
그렇다면 마지막 남은 생명은 전쟁이 시작하기 전 마족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데에 쓰겠다.
용사는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다시 말했다.
"차라리 연합을 이끌고 먼저 마족들을 치는 건 어떠냐."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지만, 그럴 수는 없다."
"어째서?"
"연합군이 놈들의 영역에서 싸워줄 필요는 없다. 어차피 내가 죽으면 마족은 곧장 침공을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는 편이 카앤이 성검의 힘에 적응할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벌 수 있다."
용사의 판단은 지극히 합리적이라서, 나는 뭐라 더 말할 수도 없었다.
"카앤에게는 이야기를 했나?”
"아니. 하지 않았다. 그 아이에게는 또다시 큰 상처를 입히게 되겠지."
”계승자의 존재는 여전히 누구도 모른다. 네가 죽은 뒤는 어떻게 할 셈이냐?"
계승에 대한 걸 지금까지도 숨겨온 이유는 당연히 마족 때문이었다.
놈들이 용사의 힘을 이어받을 존재가 있었다는 사실을, 용사가 더 약해지기를 기다리는 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알면 침공을 더 이상 끌지 않을 건 뻔했으니까.
다만 그로써 남은 문제는 있었다. 바로 용사를 중심으로 뭉쳤던 연합의 결속력.
용사가 죽고 갑자기 새로운 용사가 성검의 힘을 계승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많은 이들이 그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혼란이 찾아올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카앤이 성검의 힘으로 내 모습으로 변한다면 별다른 문제는 발생하지 않을 거다."
"……."
"물론 카앤이 그를 거부할 수도 있겠지. 그 경우에는 혼란이 찾아오더라도 어쩔 수 없지만, 계승에 대한 사실을 정식으로 공표할 것이다. 나인베르크와도 이미 이야기를 마쳤으니 그가 되도록 원만하게 처리해줄 것이다."
그런가.
카앤이 용사의 뜻을 꺾고 혼란을 초래할 짓을 할 리는 없을 테지만 말이다.
용사가 말을 이었다.
”7군주, 이전에 네가 미래를 알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말했을 때, 나는 정말 놀랐었다. 왜냐면 내 동료인 나인베르크에게도 그와 비슷한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혹시 그것도 알고 있었나?"
”……아니."
"나인베르크는 간혹, 뜻하지 않은 미래를 볼 수 있는 신비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신비로 보여진 미래는 결과를 바꿀 수 없다. 다만 결과에 다다르는 과정만은 바꾸는 게 가능하기에, 그 능력으로 과거의 대전쟁 때도 여러 피해들을 최대한 줄일 수 있었지."
"……."
"나인베르크는 내가 마왕에게 죽는 미래를 보았다. 그러니 그건 이제 확정된 일이다. 다만, 놈의 손에 죽기 전까지 내가 놈에게 얼마나 피해를 입힐 수 있을지, 마족 측의 전력을 얼마나 깎을 수 있을지는 나에게 달렸지. 그러니 나의 죽음이 무의미하진 않을 것이다."
알고 있다.
전부 알고 있다. 게임에서도 그랬으니까.
올테로어로 향한 용사는 그곳에서 많은 마족들을 죽이고, 홀로 쏠쏠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차라리 함께 가자.'
그 말이 하고 싶었다.
비록 용사 너는 마왕에게 죽더라도, 네 도움을 받으면 나는 마왕을 죽이는 게 가능할 수도 있다.
카앤에게 계승이라는 짐을 젊어지게 한 건 지금도 후회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게 가장 적은 희생으로 모든 걸 끝낼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올테로어는 나 혼자서 향할 것이다."
그런 기색이 내 얼굴에 드러났는지, 용사가 단호한 투로 말했다.
순간 머릿속에 어떤 장면이 스쳤다.
마왕의 앞에서 재가 되어 흩어지는 용사. 그리고 쓰러진 채 무력하게 그 광경을 지켜보는 나.
지금껏 선택의 순간마다 종종 기시감을 느낄 때가 있었다.
이번 건 폭왕에게서 리곤을 구했던 그때처럼 유독 선명하고 강렬했다.
"그러니 카앤을 부탁하겠다. 그 아이가 마왕을 쓰러뜨릴 수 있게 도와다오."
결국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에인델이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고맙다, 7군주. 그대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나는 그대를 항상 동료라고 생각해왔다."
용사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조출한 작별이었다.
나는 그 등에 대고 나지막이 이름을 불렀다.
"에인델,"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나 또한 그렇다. 마왕은 반드시 쓰러뜨리겠다."
에인델은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지면을 박차고 솟아오른 황금의 빛줄기가 하늘을 가르며 순식간에 멀어졌다.
* * *
올테로어, 마왕령.
마왕성의 입구로 향하는 길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던 원마 메테이스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슈우우우.
하늘 저편에서 마치 유성과 같은 빛줄기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직감한 메테우스는 섬짓 소름에 떨었다.
다음 순간, 태양이 폭발하는 듯한 섬광이 터졌다.
대지를 뒤덮은 거대한 광채에 수천의 마족들이 일시에 증발했다.
문자 그대로의 증발이었다. 한 줌의 재조차 남기지 못하고 그들은 그렇게 소멸했다.
"끄아아아아!"
겨우 목숨만 건진 메테이스는 전신을 불태우는 끔찍한 격통에 괴성을 내질렀다.
흐릿한 시야로 지면에 강림한 존재를 간신히 발견할 수 있었다.
"용사, 네노오오옴……!"
서걱.
그리고 그대로 반으로 갈라져 최후를 맞이했다.
에인델은 검을 거두고 저멀리 보이는 마왕성의 형체를 응시하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수십 년 동안 마왕이 봉인되어 있었던 하늘 높이 뻗은 결정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내가 왔다, 마족들아."
그에 화답하둣, 마왕성 쪽에서 거대한 기운이 피어올랐다.
"너희들이 그토록 두려워한 인간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