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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177화 (177/189)

전운 (1)

"마력포는 요청했던 물량만큼 제작이 전부 끝났고, 전쟁 골렘도 300체 이상 마련되었소, 대군주." 

"역시 빠르네. 그거는?" 

"기간티시움도 사실상 제작은 끝났소. 검증하는 일만 남았지." 

대군주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1군주야. 수고해줘서 고마워."

세인테아의 용사가 마왕의 부활을 공표하고 3년이 흘렀다. 

세인테아 황실은 용사를 앞세워 마족의 침공에 대비해 반 마족 연합을 결성할 것을 강력하게 선언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세인테아 세력권의 국가들은 당연히도 그에 따라 참여 의사를 표명했고, 그동안 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던 중립국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데사의 수인과 엘프들도 연합에 참여했다. 

세인테아의 전대 황제 그란디오스가 대수림에서 벌였던 끔찍한 침공 행위에 대해서, 아직 그들 사이에 매듭은 조금도 지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데사는 그에 대한 일은 잠시 접어두고, 전대 황제가 마족의 힘을 이용했다는 사실에도 구태여 목소리를 높이지 않은 채 일단은 세인테아와의 동맹을 결성했다. 

그만큼 마왕은 두려운 존재였다. 

갑작스러운 마왕의 탄생과 마족들의 침공으로 시작됐던 수십 년 전의 대전쟁. 

제대로 된 대응도 하지 못한 채 전 대륙이 유린당했던 과거의 과오를 그들은 잊지 않았다.

용사의 등장으로 기적적으로 침공을 막아낼 수 있었지만, 그 기적이 다시 일어나리란 법은 어디에도 없다. 

멸망을 막기 위해선 이번에야말로 철저한 준비와 협력이 필요하다고 모두가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칼데릭 역시도 대군주의 뜻에 따라 별다른 반대 의사 없이 연합에 참여할 것을 선언했다. 

그것은 세인테아에게도 굉장히 의외였다. 

가장 설득이 까다로울 것이라 생각했던 인물이 오히려 중립국들보다도 순순한 태도로 나왔으니까. 

그렇게 올테로어를 제외한 대륙의 모든 세력들의 연합은 신속하게 결성되었다. 

하지만 정작 마족은 용사의 공표 이후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현재 대륙은 금방이라도 깨질 듯한 살얼음판과 같은 분위기 속, 각 세력들은 정보를 공유하며 언제 시작될지 모르는 전쟁에 각자 대비하고 있었다. 

"대군주. 마족이 어째서 아직까지 침공하지 않고 있다고 보시오?"

1군주, 신퇴가 물었다. 대군주는 턱을 괴고서 대답했다. 

"그야 용사 때문이겠지. 용사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잖아? 아마 갈수록 상태가 더 나빠지고 있는 것 같고, 그러면 시간이야 마족들 편이니까." 

"대신 연합 세력도 전력을 갖추고, 동맹 관계를 공고히 다질 시간을 충분히 확보하고 있지 않소." 

"마족들은 그보다도 용사의 존재를 더 거대한 변수로 여긴다는 뜻이겠지. 그리고 사실 그게 맞잖아? 용사가 없으면 아마 전쟁은 이쪽에 압도적으로 불리한 양상으로 흘러갈 테니까."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대군주를 신퇴가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대군주라면 내가 무엇을 가장 중요히 여기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오." 

"으음? 그렇지. 칼데릭의 역사를 처음부터 함께한, 누구보다도 이 칼데릭을 사랑하는 1군주잖아?" 

대군주가 눈웃음을 지으며 신퇴를 바라봤다. 신퇴는 조금도 웃지 않았다.

"전대 대군주가 칼데릭을 다스릴 때부터 군주로서 있던 나조차도, 대군주 당신이 속에 품고 있는 진심이 무엇인지는 단 한 번도 엿볼 수 없었소." 

"하하, 그런가?" 

"······대군주여. 용사가 마왕의 부활을 공표한 뒤부터, 대군주가 무언가 바뀌었다는 걸 느낀 건 내 기우일 뿐이오?" 

신퇴가 아는 대군주는 가끔 종잡을 수 없는 결정을 내리지만, 그럼에도 대체로 합리적이고 안정적으로 칼데릭을 다스려온 우두머리였다. 

한데 마왕이 부활하고 대륙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한 때부터, 그는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겉으로는 달라진 게 없다. 그저 직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신퇴는 대군주가 마치, 더 이상 아무것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직감이었다. 

"아무것도 바뀐 건 없어, 1군주. 쓸데없는 걱정이야." 

대군주는 그렇게 말하며 싱긋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신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보겠소." 

"그래. 배웅은 따로 안 할게." 

신퇴가 떠나고, 홀로 남은 대군주는 의자에 등을 파묻고 눈을 감았다. 

"······이제 곧이네." 

그녀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좀 전과 다르게 조금의 가식도 없는 천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 

콰앙! 콰아앙! 

검끼리 충돌에 충격파가 울려퍼질 때마다, 주위 땅에 금이 가고 수풀들이 날아간다. 

나는 멀찍이 거리를 둔 채 치열하게 맞붙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봤다. 

미칠듯이 몰아치는 광랑의 야수 같은 검격은 무자비했지만, 아셸은 조금도 휘둘리지 않고 단단한 방어를 이어가고 있었다.

"키핫, 제법이네! 어디 그럼 이것도 막아봐라!" 

광랑이 핏빛의 기운을 뿜어내며 더욱 속도를 높였다. 

그에 아셸도 특질을 사용하고 전신을 새하얗게 물들였다. 

붉은 기운과 순백의 기운이 쉬지 않고 충돌하며 숲을 점점 폐허로 만들었다. 

광랑도 이제 완전히 전력을 다하고 있음에도, 아셸은 좀처럼 쉽게 밀리진 않았다. 

콰아아앙! 

두 사람은 점점 위로 치솟더니 하늘에서 공방을 이어가다가, 결국 아셸이 광랑의 일격을 완전히 막아내지 못하고 지면에 요란하게 처박혔다. 

뒤따라 땅으로 내려선 광랑이 어깨에 대검을 걸치고서 킬킬 웃었다. 

"하루하루 성장이 빠르긴 하네. 그래도 아직 나한테는 안 되다고, 백월족 애송아." 

"······." 

"어쭈? 너 눈깔을 그렇게 치켜뜨는 게 맞냐?"

아셸이 말없이 일어나서 광랑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수고하셨습니다, 5군주님." 

"아니, 근데 이 새끼가." 

광랑의 심기가 불편해 보였기에, 나는 두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말했다. 

"그쯤 하지, 5군주." 

광랑이 코웃음을 쳤다. 

"내가 뭘 했다고? 맨날 지는 주제에 얘 태도가 영 건방지니까 그런 거 아니야." 

그야 네가 애 성질을 허구한 날 긁어대니까 그렇지. 오죽하면 아셸이 그럴까. 

광랑은 대수림에서 있었던 일 때문인지, 언젠가부터 군주성에 놀러오듯 찾아오고는 했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 아셸과도 이렇게 종종 벌이게 된 것이었다. 

아셸의 성장에 좋은 일이니, 나야 광랑의 방문을 굳이 막지 않은 거고. 

【Lv. 94】 

광랑과의 대련이 효과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셸의 레벨이 고작 몇 년 만에 94까지 올랐으니까. 

카볼리사 유적에서 시련도 끝냈으니 남은 벽은 없고, 본래 이 정도 레벨까지 도달할 재능이 그녀에게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예상보다 꽤 빠른 성장 속도였다. 

지금의 아셸이면 이제 군주급이라고 해도 크게 부족한 수준은 아니었다.

"아, 배고프네. 그만 돌아가서 밥이나 먹자고, 7군주. 밥 먹고 나랑 같이 대수림이나 가는 건 어때?" 

"아데사에는 왜?" 

"대군주가 나더러 그쪽에 연합군 구성 관련 건으로 전언 좀 전해달라고 했거든. 귀찮게 전령처럼 부려먹고 말이야." 

광랑이 그렇게 말하며 혀를 찼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는 걸 보면, 그녀가 황제의 일 이후로도 아데사에 완전히 신경을 꺼버린 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내가 뭐라 대답하기 전에 아셸이 곧장 끼어들어서 말했다. 

"론 님께선 이제 곧 다른 용무가 있으십니다." 

"엉? 뭔 놈의 용무야." 

"장비를 받으러 1군주령에 방문해야 돼서 말이지. 아데사에 동행하는 건 안 되겠군." 

1군주가 이전에 마경 옥테아에서 얻은 광석으로 제작해주기로 했던 아셸의 장비. 

그 제작이 끝났다고 얼마 전에 1군주에게서 연락이 왔기 때문이다. 

대륙 제일의 대장장이, 신퇴라 불리는 그가 최고의 재료로 제작했다는 장비다. 

그걸 받고 나면 아셸의 전력도 크게 증가할 것이었다. 

광랑은 아쉬운 기색으로 식사만 대접받고 돌아갔다. 

나는 아셸과 함께 1군주령으로 떠날 준비를 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아셸, 5군주가 싫으냐?"

"아닙니다. 매번 겨를을 내서 대련 상대를 해주시는데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런가?" 

"예. 단지 성에 방문할 때마다 론 님을 곤란하시게 만드는 것 같아서······." 

확실히 광랑이 군주성에 방문할 때마다 이것저것 하자고 해서 귀찮기는 하지. 

아셸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띠용이의 등 위에 먼저 올라탔다. 

"출발하자." 

"예." 

마왕이 부활하고, 3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많다면 많은 일들이 있었고, 별일이 없다면 별일은 없었다. 

마왕의 부활 이후 용사는 그 사실을 전 대륙에 공표하고 신속하게 반 마족 연합을 만들었으며, 마족의 침공을 대비했다. 

세인테아 세력권의 국가들을 끌어들이는 건 당연히 순조로웠고, 아데사도 연합에 참여했다. 

가장 걱정했던 건 내가 속한 칼데릭, 대군주가 어떻게 나올지였지만, 의외로 대군주도 별다른 반대나 조건 없이 순순히 연합에 참여했다. 

여전히 대군주가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 건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일단은 그렇게 마족을 제외한 대륙 전체의 반 마족 연합이 결성됐다고 봐도 될 것이다. 

'그런데 정작 마족은 아직까지도 조용하지.'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마족들은 아무 움직임 없이 올테로어에서 한 발 자국도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 이유는 물론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용사 때문이겠지.' 

마왕이 부활하자마자 마족이 전면적인 침공을 시작했어도 이상할 건 없지만, 놈들은 아무래도 좀 더 신중한 길을 택한 모양이었다. 

마왕이 부활하여 마족은 전성기의 힘을 되찾은 반면, 마왕의 유일한 대척점이라고 할 수 있는 용사는 갈수록 약해질 테니까. 

덕분에 연합 역시 그만큼 전쟁을 준비할 시간을 벌고는 있었지만, 뭐가 됐든 마족들에게 있어 가장 큰 위협은 용사였다.

지금의 상황이 지속되면 유리한 건 마족들일 것이었다. 

이쪽에서 먼저 올테로어를 치는 것도 방법이긴 했지만, 그건 마족들의 영역에서 싸워야 하는 것을 의미하니 불리함을 안는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조만간 결단을 내려야 할 거다, 용사.' 

그 일이 있은 이후로, 용사와는 지금도 주기적으로 연락하고 있었다. 

현재 용사는 카앤을 성장시키는 데에 집중하고 있는 상태다. 

성검을 계승시킬 조건은 진작 모두 만족했지만, 힘을 되도록 문제 없이 계승하려면 카앤이 조금이라도 더 강해질 필요가 있다고 해서였다. 

마족의 침공이 곧바로 시작됐다면 즉시 성검을 계승했겠지만, 시간이 주어진 상황에서는 굳이 리스크를 감수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지난 3년 동안 카앤을 찾아가서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물론 카앤은 랜과 7군주가 동일인이었다는 사실을 모르니 마주하더라도 문제는 없다. 

하지만 구태여 찾아가지 않았다. 그냥 그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지 용사에게 카앤에 대한 소식들을 전달받으며, 카앤이 잘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만 알았다.

언젠간 다시 만나게 될 때가 오겠지. 

그때 내가 어떻게 카앤을 마주하고 대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슈우우우. 

한나절 정도 걸려서 1군주령에 도착했다. 

저멀리 보이기 시작한 1군주성과 거대한 대장간을 향해서 서서히 고도를 낮추었다. 

"어서 오게, 7군주. 그리고 아셸 그론힐트. 오랜만이군." 

입구에서는 1군주 신퇴가 직접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연락했던 대로 장비는 모두 완성되었네. 안으로 들어가지." 

그와 인사를 나누고, 후끈한 열기가 피어오르는 대장간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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