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앤 (4)
카앤의 사고가 멈췄다. 피를 흘리며 쓰러져있는 벤과, 그 옆에 앉아있는 랜.
"아, 아버지!"
퍼뜩 정신을 차린 카앤이 벤을 향해 다가갔다. 엎어진 그의 몸을 뒤집고 다급히 상태를 살폈다.
하지만 숨은 이미 끊어져 싸늘한 주검이 된 채였다. 목이 갈라진 채.
카앤은 회복 마법을 사용했다.
물론 이미 죽은 몸의 상처가 회복되는 일은 없었다.
그녀는 마력을 있는 대로 퍼부으며 계속 회복 마법을 사용하다가, 결국 그만두었다.
"······아버지."
카앤은 미동도 하지 않는 벤의 몸을 흔들었다.
그의 고개가 푹 떨구어졌다.
이건 꿈인가? 악몽을 꾸고 있는 건가?
죽은 벤의 모습은 현실감이 없었다.
말이 안 되지 않은가.
랜이 부탁한 머핀을 사서 집으로 돌아왔을 뿐인데, 왜 이런······.
카앤은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시선을 돌렸다.
랜은 무표정한 얼굴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래, 랜.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아버지가 왜······?"
카앤은 뒤늦게 발견했다.
랜의 손에 들린 피 묻은 검을. 랜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카앤. 내가 한 거야."
"······무슨 소리야, 그게." "보면 모르겠어? 네 아버지는 내가 죽였다고."
카앤은 랜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 외마디의 물음만 간신히 내뱉을 수 있었다. 랜이 대답했다.
"난 사실 마족이다."
"······."
"너한테 처음 접근한 건 네가 마왕님의 부활에 중요하게 쓰일 수 있는 재료이기 때문이었어. 마의 씨앗이라고 하지. 말해봤자 모르겠지만."
"······대체 무슨 소리를······."
"그래서, 지금까지 네 곁에 붙어서 널 지켜보면서 마의 씨앗이 개화하길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근데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졌어. 왜냐면 마왕님께서 부활하셨거든."
랜이 피 묻은 검을 바닥에 툭 떨구고서 일어났다.
"원래는 너희 둘 다 죽이고 떠나려고 했었는데, 이러는 편이 더 재밌을 것 같아서 말이지. 카앤, 넌 특별히 죽이지 않을게. 그럼 잘 지내."
랜이 방 밖으로 걸어나갔다.
카앤은 넋을 놓고 주저앉아있다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방을 나섰다.
하지만 랜의 모습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카앤은 다리가 풀려서 도로 주저앉았다.
비릿한 혈향만이 멤도는 집에, 그녀는 그렇게 홀로 남겨졌다.
***
라피드 시로 되돌아가는 중, 에인델은 이변을 느끼고 성검을 소환했다.
파아앗!
성검에서 네 줄기의 찬란한 빛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에인델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성검을 바라봤다.
"어째서······?"
어째서 성검의 조건이 전부 충족되었지? 그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끼며 속력을 높였다.
······설마 마족이? 7군주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원마가?
잠깐 떠나있던 사이에 대체 카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그렇게 도착한 카앤의 집에는 상상도 못한 광경이 펼쳐져있었다.
집 안으로 들어간 에인델은 카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죽은 벤을 붙들고서 넋이 나간 채 내려다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카앤······."
이름을 부르자 카앤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눈빛이 죽은 사람의 그것처럼 공허했다.
에인델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서 천천히 그녀의 곁에 주저앉았다.
목에 검상을 입은 벤은 이미 숨을 진 지 제법 시간이 지난 상태로 보였다.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면 성검의 능력으로 살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늦었다.
카앤이 입을 열었다.
"······랜이 죽였어요."
"뭐······?"
"랜이 아버지를 죽였어요. 자기가 마족이라면서, 전부 날 속이고 있었던 거라고······."
에인델의 머릿속이 혼란으로 가득 찼다.
7군주가 카앤의 아버지를 죽였다니······
게다가 마족은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7군주는 절대로 마족이 아니다. 그리고 분명한 아군이다.
그 사실에 거짓은 없다.
에인델은 이내 한 가지 가정을 떠올릴 수 있었다.
어째서 7군주가 카앤의 아버지를 죽인 것인지.
'설마.'
에인델이 이를 꽉 깨물었다.
그녀는 우선 위태로워 보이는 카앤부터 챙겼다.
카앤의 이마 위에 손을 올렸다.
"카앤, 잠시 쉬고 있어라."
성검의 힘이 카앤의 몸을 감쌌다. 그녀는 잠에 들듯 의식을 잃었다.
에인델은 카앤을 다른 방에 있는 침대로 옮겨놓고, 곧장 집을 나섰다.
"······."
집 밖으로 나서자마자 기척 하나가 느껴졌다. 7군주가 부르고 있는 것이었다.
에인델은 7군주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집과 가까운 곳의 골목길, 그곳에서 7군주가 기다리고 있었다.
"······7군주."
에인델의 표정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
해는 조금 저물어서 서서히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바깥으로 나온 나는 인적 드문 골목길로 들어가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
머리가 조금 어지럽다. 카앤의 얼굴을 더 보고 있기가 힘들어서 도망치듯 떠나버렸다.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
피비린내 가득한 집에서 나와 찬 바람을 맞고 있자니, 무슨 일을 벌였는지 실감이 점점 선명해졌다.
'······어떻게 했어야 됐지?'
대체 어떻게 했어야 됐을까. 그 상황에서. 벤을 카앤에게 접근시키는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다.
모든 사실을 터놓은 이상, 벤은 그 자리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처리했어야만 했다.
카앤에게 진실을 밝힐 수도 없었다.
애당초 빙의의 신비니 뭐니 설명해봤자 녀석이 그 말을 믿을 리가 있을까.
마왕이 부활했다.
계승을 포기하든, 어떻게든 계승을 완수하든, 결정을 서둘러야 했다.
그런 와중 벤이 죽었고······ 모든 조건을 충족시킬 적절한 상황이 만들어졌다.
그 모든 생각들이 얽혀서, 결국 이런 선택을 했다.
후회는 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최선이었다.
카앤의 표정이 다시금 머릿속에 스친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남은 조건들이 전부 충족되었을까.'
이걸로 성검의 조건이 전부 충족됐다면, 곧 용사가 돌아오겠지.
시간이 흐르자 카앤의 집 쪽으로 돌아온 용사의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마력을 흘려 용사를 불렀다.
이내 내가 있는 곳으로 온 그녀가 싸늘한 눈길로 날 바라봤다.
"······7군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용사가 내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왔다.
"설명해라."
살갗이 저며질 것 같은 날카로운 목소리. 나는 우선 물었다.
"······계승의 조건은 전부 충족되었나?"
용사가 아무 말 없이 성검을 소환했다.
성검에서는 네 줄기 빛이 희미하게 일렁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걸 보고 정말로 계승의 조건이 전부 충족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결국, 카앤에게 나는 조건이 충족될 정도로 믿었던 사람이라는 뜻이다.
"정말로 계승을 위해 이런 짓을 벌였나?"
"그래."
"카앤과 한집에서, 그동안 가깝게 지냈던 것도 전부 이를 위해서였나?"
"그렇지는 않아. 하지만 이렇게 됐군."
"7군주, 넌 대체······!"
용사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용사, 들어라."
나는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그녀가 자리를 비우고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가 이전부터 쫓고 있었던 빙의의 신비를 가진 인물에 대해서, 그의 목적에 대해서.
아셸이 가져온 정보에서 벤과 놈이 동일인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 벤과 대화를 나눈 것,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린 것, 그리고 그런 가운데 계승의 조건을 모두 충족시킬 방법을 떠올린 것까지, 그 모든 진실을.
설명을 모두 들은 용사는 한참을 우두커니 서있었다.
그녀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다가, 결국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7군주, 네가 감추고 있는 비밀은 도대체 무엇이냐?"
"······."
"네가 계승에 대해 알고 있었을 때도, 성검과 따로 대화를 나누었을 때도, 난 아무것도 캐묻지 않았다. 네 비밀에 대해 파고들려 하지 않았다. 그건 네가 나를 더 신뢰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때 언젠가는 모든 걸 말해주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
"너는 언제나 내게 진실만을 말했지. 하지만 이제 더는 납득하기가 힘들다. 카앤의 아버지가 빙의의 신비를 가지고 있다느니, 카앤의 몸을 빼앗으려 한다느니, 넌 그 모든 것들을 어떻게······."
나는 그녀의 말을 끊고 대답했다.
"내가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부분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뭐라고?"
"계승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도, 빙의의 신비라는 것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도 모두 그 때문이야. 그것이 내가 줄곧 감추고 있었던 비밀이다."
용사는 멍하니 날 쳐다보다가 다시 물었다.
"정말로 이게 최선이었나?"
"······."
"그 아이를 배신하고, 아버지를 잃게 만들고, 그런 절망을 겪게 하는 게······."
"알고 있다."
여전히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동시에 최악의 방법이었다고도 생각했다.
"내가 그 아이의 삶을 완전히 망가뜨렸다. 하지만 이제 돌이킬 수 없어."
나는 용사와 눈을 마주치고 말했다.
"성검을 계승해라, 용사."
용사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몸을 돌렸다.
"······미안하다, 7군주. 내 우유부단함이 그대를 그렇게 몰아붙였구나."
용사는 마지막으로 그 말만을 남기고 떠나버렸다.
홀로 남은 나는 그녀가 떠난 자리만 하염없이 바라봤다.
***
카앤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여전히 잠들어있었다.
에인델은 억지로 깨우지 않고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곧 카앤이 깨어났다. 몸을 일으킨 카앤이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다가, 옆에 앉아있는 에인델을 바라봤다.
"······델, 나 꿈꾼 게 맞죠?"
카앤이 창백한 눈으로 물었다.
"꿈이 맞죠? 그런 일이 일어났을 리가 없잖아요. 랜이 아버지를 죽였을 리가······."
"카앤."
"······대답해요. 꿈이 맞다고 해줘요, 제발."
에인델은 아무말 없이 고개를 저었다.
카앤이 거친 숨을 몰아쉬다가, 침대에서 일어나 벤의 방으로 걸어갔다.
깨끗하게 정돈된 방 침대 위에 벤이 누워있었다.
에인델이 핏자국을 지우고, 벤의 시체가 부패하지 않도록 처치를 해둔 것이었다.
"으, 으윽······."
카앤은 그의 곁에 쓰러지듯 주저앉아서 오열했다. 한참 동안이나.
에인델은 방문 앞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
며칠이 지났다.
에인델은 카앤과 함께 라몬 대산맥으로 이동했다.
그들 부녀가 지냈던 산속의 오두막으로. 그 오두막의 뒷마당에 벤의 시체를 묻고 무덤을 만들어주었다.
모두 카앤이 원한 일이었다.
"델, 마의 씨앗이 뭐죠?"
물끄러미 벤의 무덤을 바라보던 카앤이 물었다.
"그놈이 말했어요. 내가 마왕의 부활을 위한 중요한 재료였다고. 그래서 곁에서 계속 지켜보다가, 마왕이 부활했으니 쓸모없어진 거라고."
에인델은 작게 침음을 흘렸다.
7군주가 카앤을 속이기 위해서 한 거짓말이었다.
"마의 씨앗은······."
에인델은 마의 씨앗에 대해 카앤에게 설명해주었다. 설명을 모두 들은 카앤이 중얼거렸다.
"결국, 나 때문에 아버지가 죽어버린 거네요."
"아니다, 카앤. 그건······."
"레아가 죽고, 아버지도 죽고. 마족들은 어째서 그런 짓을 하는 거죠? 왜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만들지 못해서 안달난 것처럼 끔찍한 짓을 벌이는 거죠?"
에인델이 대답했다.
"이유는 없다. 그들이 본질적으로 그런 존재이기 때문이야."
"본질······."
침묵하던 카앤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델, 나 마족들을 전부 죽여버리고 싶어요."
"······."
"그놈들의 본질이 그렇다면, 전부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마땅한 존재인 거잖아요."
에인델은 대답하지 않았다. 카앤이 그녀를 쳐다봤다.
"그러니까 난 더 강해져야 돼요. 나한테 검을 계승해주세요."
에인델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떴다.
"카앤."
"네."
"나의 진짜 이름은 에인델, 성검을 가진 용사다."
결국 모든 것은 자신의 망설임으로 벌어진 일.
7군주의 말대로,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다.
'······미안하다.'
정말로 미안하다, 카앤.
"너는 성검을 계승하고, 나를 잇는 용사가 되거라. 그리고 마왕을 쓰러뜨려다오."
허공에 소환된 성검이 찬란한 빛을 뿜어냈다.
카앤은 그 빛을 홀린 듯 쳐다봤다.
3년의 시간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