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174화 (174/189)

카앤 (2)

올테로어의 마왕성, 파괴된 중앙탑. 

그곳은 과거 용사가 마왕을 봉인시켰던 위대한 결전의 장소다. 

마족들에게 있어선 그들의 신을 수십 년의 세월간 가둬둔 치욕의 흔적이기도 했다. 

마왕의 영혼 절반은 성검의 힘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나갔고, 완전한 소멸을 유예하기 위해 마왕은 최후의 순간 스스로를 봉인시켰다.

마치 세상을 받치듯 검보랏빛 하늘 높이 뻗어있는 거대한 결정 기둥. 

그 안에 잠들어있는 건, 한때 모든 이들의 공포이자 두려움이었던 마의 화신이다. 

"긴 시간이었다." 

그 앞에 선 남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기둥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세례를 받는 신자처럼 엄숙하면서도, 선물상자를 열어보는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공존할 수 없는 두 감정이 동시에 느껴지는 그 기괴한 표정을 누군가 정면에서 봤다면 경악했을 것이다. 

원마 서열 1위, 아즈켈. 

패전 후 분열된 마족들을 압도적인 힘으로 다시금 휘어잡은, 현 올테로어의 지배자. 

그의 진정한 힘을 목격한 마족들은 마왕을 부활시킬 필요 없이 그가 왕좌에 오르면 되리라 생각했다. 

마왕과의 전투에서 깊은 부상을 입은 용사의 몸은 정상이 아니다. 

아즈켈이 있다면, 마왕이 없는 지금의 전력으로도 세상을 집어삼키기엔 필시 충분할 것이었다.

그러나 아즈켈은 그러지 않았다. 

그런 불경한 소리를 조금이라도 지껄인 마족들은 모조리 숙청했다. 

은밀하게, 그리고 치밀하게 마의 씨앗들을 탐색하고 모으며 마왕의 부활만을 준비했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족이라는 종의 정점에 도달한, 진정한 천외의 힘이 무엇인지를. 

세상에 그들만의 낙원을 창조하고, 마족의 숙원을 이뤄줄 수 있는 신이 누구인지를 말이다. 

"시작한다. 마의 씨앗들을 개방해라." 

전 원마를 포함하여, 수많은 마족들이 모여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가운데. 

아즈켈의 명령이 떨어지자 몇몇 마족들이 움직였다. 

기둥 옆에는 흑색의 거대한 마석이 놓여있었다. 

마족들의 기운에 반응해 마석에서 검은 기운이 구슬처럼 하나둘씩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구슬들은 이내 저들끼리 얽히고 뭉쳐지며 기둥을 향해서 폭포수처럼 흡수되었다. 

쿠구구구구. 

천지가 개벽하는 진동과 함께, 기둥에서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 

'곧 다시 찾아오겠다, 7군주. 계승자를 부탁하고 있겠다.' 

용사는 그 말만을 남기고, 부상을 입은 몸으로 급하게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계속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을 수밖에 없었다. 

"야, 랜. 밥은 안 먹고 왜 그렇게 멍을 때려?" 

테이블 반대편에서 카앤이 내 눈앞에 스푼을 들이밀고 흔들었다. 

나는 녀석의 손을 밀어냈다.

"아니야, 아무것도."

······밥이 넘어갈 턱이 없었다. 마왕이 부활했다. 

그 사실만이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다. 

용사가 무언가를 착각했을 리는 없으니, 지금 올테로어에서는 정말로 마왕이 부활했다는 것이다. 

식사가 끝나고, 나는 다시 집 바깥으로 나서서 거리를 거닐었다. 

그냥 발이 가는 대로. 여전히 눈이 내리는 거리는 혼란 그 자체인 내 마음과 정반대로 새하얗고 평화로웠다. 

최악의 위기는 불현듯 찾아왔다. 아니, 불현듯은 아니다. 

언제 마왕이 부활하더라도 이상하지 않다고 용사는 분명히 언질했었다. 

그걸 내가 억지로 생각하려 들지 않으려고 했을 뿐이지. 

'이제 어쩌지.'

감이 제대로 안 왔다. 정확히는 가늠이 안 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마왕과의 결전은 게임에서도 섭종을 할 때까지도 결국 풀리지 않았던 최종 스토리다. 

그러니까 난 마왕이 얼마나 강한지도, 어떤 능력을 사용하는지 직접 겪어본 적도 없다. 

단지 성검의 힘만이 마왕을 쓰러뜨릴 수 있다는 사실이 스토리상에서 꾸준히 강조되었을 뿐.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에 떠오르고 가라앉기를 반복한다. 

'그대가 가진 힘은 마왕에게도 닿는다.' 

이전에 성검이 했던 말이다. 

내가 가진 즉살 능력으로는 설령 마왕일지라도 죽일 수 있다고 성검은 장담했었다. 

물론 그렇다고 마왕을 죽일 수 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즉살 능력이 마왕에게 통한다고 해도 결국 직접 닿아야 한다는 조건은 절대적이다.

게다가 마왕은 지금껏 상대한 그 어떤 적들과도, 어떤 원마들과도 비교되지 않게 강할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있을 턱이 없었다. 

놈과 싸우는 건 목숨을 완전히 내놓고 해야 되는 일이다. 애초에 나는 처음부터 생존이 목적이었다. 

스스로를 희생하면서까지 이 세계를 지키겠다는 생각? 해본 적도 없었다. 

제왕의 혼이 두려운 감정은 지워주더라도 죽기 싫다는 본능까지 지워주는 건 아니다. 

난 죽기 싫다. 아무런 확신도 없이 목숨 걸고 마왕과 싸우기는 싫다······. 

"······." 

그리고 카앤을 희생시키는 것도 싫었다. 녀석이 남은 계승의 조건들을 겪게 만들고 싶지 않다. 

그냥 지금처럼 행복하게 살게 내버려두고 싶었다. 

어차피 이제 와서 계승은 늦은 게 아닌가?

마왕이 부활한 이상 마족들의 침공은 코앞까지 다가온 미래다. 

차라리 용사에게 내 즉살 능력을 밝히고, 함께 마왕을 쓰러뜨릴 생각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 제안을 한다면 용사는 물론 받아들일 것이다. 

용사 역시 카앤에게 성검을 계승시키는 일을 쭉 내켜하지 않았었으니까. 

······하지만 정말 그래도 되나? 

내 목숨이 아까운 건 미뤄두더라도, 정말 계승을 진행하지 않아도 마왕을 쓰러뜨릴 수 있나? 

내가 지금까지 계승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건, 그게 게임에서 흘러온 흐름이었기 때문이다. 

그 흐름을 거스르고 이 세계관의 최종 보스를 쓰러뜨릴 수 있을지. 

복잡한 감정들이 교차하는 가운데, 결론은 쉽게 나올 리가 없었다.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걸음을 옮겼다. 

돌아가니 마당에서 카앤이 눈을 쌓아 작은 이글루 같은 걸 만들고 있었다. 

위태위태한 게 금방 무너질 것처럼 보였기에 한마디 던졌다.

"마법으로 얼리지그래. 무너지겠네." 

"마법 안 쓸 거야. 기다려봐." 

녀석을 내버려두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따뜻한 차나 한 잔 마시려고 물을 끓이려다가, 나는 익숙한 기척을 느끼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 

그러고 보니 아셸도 슬슬 찾아올 때가 됐었지? 

연락 마도구는 이전에 용사에게 돌려줬었기에 아셸이 찾아오는 건 사전에 연락을 못 받는다. 

나는 다시 밖으로 나갔다. 신중히 이글루를 쌓아올리고 있던 카앤이 말했다. 

"너 자꾸 어디 가냐? 뭘 그렇게 나갔다 들어왔다 해?" 

"금방 와."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이동한 나는 아셸과 만났다.

아셸이 로브에 쌓인 눈을 털어내고 후드를 내렸다. 

"오느라 고생했다. 오랜만이구나." 

"예, 론 님." 

아셸이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얼굴이 조금 어두워 보이십니다.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아무것도 아니다." 

날 오래 봐와서 그런가 아셸은 금세 내 기색을 눈치챘다. 나는 일단 마왕에 대한 건 말하지 않았다.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그녀에게 이런저런 근황을 전해들었다. 군주성에 별다른 일은 없었다. 

"그리고 암영이 추가 정보를 전달해왔습니다." 

"암영이?" 

"예. 목표의 행적을 쫓을 수 있는 데까진 쫓았는데, 더 조사를 진행하기엔 한계가 왔다고 합니다."

나는 아셸이 넘긴 정보지를 받아들고, 작별 인사를 나눈 뒤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이것도 신경 쓸 건 없나.' 

그동안 암영에게 조사를 맡겼던 빙의의 신비를 가진 인물의 행적. 

놈은 미래에 세인테아 수도를 테러할 빌런이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좋긴 했다. 

마왕이 부활하고 세상이 끝장날 마당에 더 이상 이딴 거에 신경 쓸 겨를은 없었으니까. 

그래도 일단 조사해왔으니 확인은 할까. 나는 의자에 앉아서 조사지를 펼쳤다. 

'보자.' 

이전에 암영이 조사해왔던 정보에 따르면, 놈은 세인테아 황실의 비밀 조직 출신이라고 했다. 

그리고 황실에 의해 토사구팽당하여 세인테아에 원한을 품게 된 것이고.

- 세인테아 북동쪽 샴피오 시에서 10년 전 과거 행적을 발견. 이곳을 시작점으로 본격적인 조사 시작. 

- 대상이 머물렀던 여관 주인에게서 비교적 신뢰도 높은 증언을 확인. 

- 대상의 성별은 남성, 당시 나이는 30, 40세로 추정. 추레한 행색에 얼굴이 몹시 초췌했다고 함. 

나는 지도를 꺼내다가 테이블 위에 펼쳐셔 서쪽의 샴피오 시를 찾았다. 

- 샴피오 시를 중심으로 주위 가까운 마을들을 조사 결과, 샴피오 동쪽의 휴터 마을이라는 곳에서 또 다른 정보를 확인. 

- 대상은 수도가 있는 방향으로 이동한 것으로 추정됨. 샴피오에서부터 수도로 향하는 경로에 위치한 마을들에서 주민들에게 대상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정보를 확인. 

- 수도에서 잠시 조사가 끊겼지만, 지금까지 대상이 이동한 경로로 보아 서쪽으로 이동한 것으로 추정. 서쪽으로 이동하며 조사를 계속 진행. 

- 서쪽의 볼도트 령에 위치한 나다리타 소도시에서 대상이 지나친 흔적을 다시 확인. 거기까지 읽은 나는 하나 묘한 걸 깨닫고 잠시 멈추었다. 

왜냐면, 조사지에 써있는 볼도트 령 인근은 아제타 마을이 위치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아제타 마을은 카앤이 예전에 내게 말했던 자신의 고향이었다는 마을이다. 

그나저나, 아무리 꼬리를 잡았다고 해도 10년 전 인물의 행적을 이렇게까지 잘도 조사했네.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암영의 솜씨에 새삼 놀라며 내용을 계속 읽었다. 

- 서쪽 변경에 위치한 캄렐 시에서 흔적을 확인. 대상에게 갑작스레 동행이 생긴 것으로 추정. 

- 동행은 5, 6세 정도로 추정되는 어린 여아. 동행 쪽에는 단서가 아무것도 없기에 조사 불가. 

계속 이동 경로만 추적하다가 새로운 내용이 튀어나왔다. 

'동행?' 

갑자기 웬 동행? 그것도 어린 여아? 

나는 의아했지만 이내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 있었다.

'아, 설마 빙의체를 구한 건가?' 

놈이 가진 빙의의 신비. 그 신비를 사용하기 위한 조건을 생각하면 그럴 가능성은 높았다. 

빙의의 신비에 대한 정보는 게임 스토리상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애초에 놈은 드러난 배경부터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 놈이었으니까. 

하지만 설정집에는 빙의의 신비에 대한 정보가 존재했기에 나는 알고 있었다. 

빙의의 신비를 사용하기 위해선 두 가지의 조건이 필요하다는 것을. 

첫 번째, 신비 소유자와 혼을 옮길 빙의체가 같은 종족일 것. 

두 번째, 빙의체가 신비 소유자에게 아주 높은 친밀감을 품고 있을 것. 

첫 번째 조건이야 어려울 게 없지만, 두 번째 조건 때문에 놈은 아무 사람에게나 신비를 사용해서 몸을 옮겨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 고아라도 구해서 빙의체로 키우려고 한 게 아닐까? 

어릴 때부터 부모처럼 돌봐준다면 친밀감이야 어렵지 않게 쌓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놈이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면서 빙의의 신비를 사용하려고 한 건지는 나도 모른다. 

본래 몸에 무슨 불치병이 걸린 거일 수도 있고, 혹은 심각한 부상을 입은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본래의 몸보다 훨씬 마력적 재능이 뛰어난 몸이 필요했던 거일 수도 있으려나. 

물론 그 이유야 뭐든 알 바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 

문득, 나는 공교로운 무언가를 느끼고서 지도를 들여다봤다. 

그도 그럴 게, 놈에게 갑자기 동행이 생겼다는 캄렐 시. 

그런 캄렐 시와 놈이 지나쳐온 볼도트 령 사이에 바로 아제타 마을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연인가? 설마 말도 안 되는······. 

- 대상은 다시 수도 쪽으로 이동. 이후로 계속 동쪽으로 나아간 것으로 추정됨. 

- 최종적으로 동쪽의 라몬 대산맥 인근의 마을에서 흔적이 완전히 끊김. 

라몬 대산맥. 

그곳은 카앤이 아버지와 함께 어렸을 적부터 살아온 산맥. 

"······." 

남은 내용을 모두 읽은 나는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만약, 만약에 말이다. 놈이 정말 빙의체로서 키울 한 어린아이를 구했고,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몸을 옮겨가지 않고 키워왔다면······. 

"······지금은 열다섯쯤 됐겠군."

벌컥. 방문이 요란스럽게 열렸다. 카앤이 들어와서 들뜬 목소리로 소리쳤다. 

"야, 랜! 빨리 나와서 봐봐! 진짜 끝장나는 눈 집을 만들었다고!" 

"······." 

"왜 멍하니 있어? 밍기적거리지 말고 빨리 나와보라니까! 흐하핫!" 

방에서 도로 뛰어나가는 녀석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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