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173화 (173/189)

카앤 (1)

갑작스러운 방문이었지만 카앤은 날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어서 와라, 랜. 오랜만에 보는구나." 

테이블에서 차를 마시고 있던 벤도 마찬가지로 반겨주었다. 

"식사는 좀 전에 마친 참인데. 뭐 먹을거리라도 만들어줄까?" 

"아뇨, 괜찮습니다."

"그래. 그럼 이야기들 나누거라. 나는 낮잠 좀 자야겠다. 마실 건 네가 대접해주든가 해라, 카앤." 

벤은 차를 들고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아셸이 머리를 긁적이다가 내게 물었다. 

"차 마실래?" 

"아니." 

"그래. 그럼 물이나 마셔." 

카앤과 나는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았다. 녀석은 겉으로 보기엔 딱히 변한 건 없어 보였다. 

"와서 놀랐겠다. 도시 꼴이 말이 아니지? 아카데미 건물도 다 무너졌고." 

"어. 그렇지." 

"마족들이 갑자기 침공해서 이렇게 된 거래." 

"응. 이야기 들었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

카앤이 아무런 말도 없이 테이블 위의 찻잎을 담아둔 통만 만지작거렸다. 

내가 입을 열려고 할 때, 카앤이 먼저 말했다. 

"저기, 랜. 레아가 죽었어." 

난 순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그냥 놀란 표정만 지었다. 카앤이 말을 이었다. 

"헤리윈 성에도 마족들이 처들어왔거든. 레아는 리곤을 감싸다가 죽었어." 

"······괜찮아?" 

"나? 나야 보시다시피 괜찮지. 리곤도 무사하니까 걱정 마. 걔는 아마 칼데릭으로 돌아간 것 같더라." 

카앤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레아는 ······." 

"카앤, 더 얘기 안 해도 돼." 

얘기를 듣지 않더라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야 나도 전부 알고 있다.

그보다 녀석의 정신 상태가 걱정이었다. 레아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하게 할 필요는 없었다. 

카앤이 물끄러미 날 쳐다보다가 물었다. 

"그래. 그보다 너 급한 일이 있다는 건 어떻게 됐어?" 

"잘 해결했어." 

"그렇구나. 음······ 차라도 타줄까?" 

좀 전에 됐다고 했는데.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빈 찻잔을 집어들었다. 

"한 잔 마실게. 물 끓여올까?" 

"아냐. 내가 끓여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그 뒤로 별다른 이야기는 나누지 않고 차만 나눠 마셨다. 

평소에 카앤과 있으면 대화가 끊기는 틈이 없었기에 그건 제법 어색한 분위기였다. 

유야무야 시간이 흐르니 어느새 저녁이 다 됐다. 나는 자연스레 저녁 식사까지 얻어먹었다.

식사가 끝나고 카앤이 내게 말했다. 

"랜, 바로 돌아갈 건 아니지? 하루 묵고 가." 

"그럴까." 

계속 카앤 근처에 붙어있어야 하니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주섬주섬 식기를 정리해서 들고 가는 녀석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 

카앤은 평소 꿈을 잘 꾸지 않았다. 

하지만 레아가 눈앞에서 죽는 걸 목격한 그날 이후로, 매일 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 

폐허가 된 마을 한가운데에 홀로 서있는 자신. 

눈앞에는 끔찍하게 죽은 사람들의 시체가 있다. 그들을 보며 어째서인지 자신은 울고 있었다.

그리고 곧 시야가 변한다. 리곤을 감싸다가 재가 되어 흩날리는 레아의 모습이 이어졌다. 

"······!" 

꿈에서 깨어난 카앤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마에 흥건한 땀을 닦아내고서 몸을 일으켰다. 

쿵쿵거리는 심장이 진정되기를 한참이나 기다리다가, 결국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으으, 흑······." 

그녀는 결국 잊어버렸던 것들을 떠올리고 말았다. 

*** 

일주일이 흘렀다. 

어쩌다 보니 나는 계속 카앤의 집에서 머물게 됐다.

카앤이 내가 언제 떠나는지 조금도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억지로 꺼내려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벤도 딱히 얼마나 머물든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고, 그래서 그냥 지냈다. 

"아셸." 

바깥으로 나온 나는 라피드 시로 찾아온 아셸과 만났다. 

"몸은 좀 어떠냐." 

"예, 완전히 회복됐습니다." 

"다행이구나. 리곤은?" 

"괜찮습니다. 리프가 잘 보살펴주고 있습니다." 

나는 마음에 조금 쌓아두었던 시름을 내려놓았다. 

"이걸 봐다오." 

그리고 품에서 물건을 꺼내 아셸에게 건네주었다. 황제의 시체에서 거두었던 순백색의 보석. 

보석을 받아든 아셸은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이건······?!" 

반응을 보니 역시 맞나 보군. 

백월족의 보물. 

황제가 과거에 백월족을 공격했던 목적 중 하나. 

그 어떤 마석보다도 순수한 마력을 담을 수 있는, 그들의 종족 특질과 닮은 마전석. 

아셸의 마력과 기운이 비슷했기에, 이 마석을 발견했을 때 이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나는 아셸에게 겨를이 없어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했다. 

아데사 숲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황제가 무슨 짓을 벌였는지, 그리고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황제는 내 손에, 그리고 창성은 2군주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다." 

"······그렇습니까." 

"미안하다, 아셸. 언젠가 네 손으로 직접 매듭을 지었어야 할 일이었는데." 

아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는 론 님이라면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무슨 의미지? 아셸이 무안한 기색으로 헛기침을 하고는, 마석을 조심스레 품에 챙겼다. 

"일족의 유산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 

"그래." 

"이제부터는 어쩌실 예정입니까?" 

나는 아셸의 물음에 대답했다. 

"지금까지와 같다. 나는 계속 계승자의 곁에 있을 거다. 네게는 군주성을 부탁한다." 

"알겠습니다." 

아셸을 배웅하고 다시 카앤의 집으로 돌아갔다. 

카앤은 앞마당에 우두커니 서서 나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뭐 하냐?" 

"······엉? 아무것도 아냐." 

카앤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야, 랜. 심심한데 사냥이나 나갈까? 어제 보니까 검문도 이제 빡빡하게 안 하는 것 같던데." 

"뜬금없이 뭔 사냥이야?" 

"에이, 그러지 말고 나가자고. 내가 이쪽은 완전히 전문가거든. 잘 가르쳐줄게." 

녀석의 기분이 가라앉아 보였던 것도 처음 며칠뿐이었다. 

카앤은 금세 평소의 활기를 완전히 되찾은 것처럼 행동했다. 

마당에서 가볍게 대련을 하거나, 도시 밖 숲으로 나가서 사냥을 하거나. 

벤이 가지고 있는 낡아빠진 체스판으로 체스를 두거나, 아니면 요리를 직접 만들어서 먹거나. 

카앤과 함께 지낸 지도 어느새 한 달이 훌쩍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렇게 지내는 동안 이런저런 것들을 하며 심심할 겨를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모르지 않았다. 

카앤이 아직 어떤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걸. 

밤마다 녀석은 종종 잠을 설치는 것처럼 보였다. 

그 사실을 초감각으로 알 수 있었다. 

악몽이라도 꾼 건지 자다 깨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고, 어떤 때는 흐느껴 울기도 했다. 

"오, 큰 놈 많이 걸렸다!" 

카앤이 강가에 설치해둔 그물을 들고서 소리쳤다. 

"여기서 몇 마리 구워먹고 가자." 

"날 다 저물었잖아. 벤 씨는?" 

"늦으면 혼자 알아서 해먹겠지. 빨리 장작이나 모아와봐." 

아버지는 신경도 안 쓰고 저녁을 먹자는, 참으로 불효스러운 말을 하는 카앤이었다. 

사실 벤의 성격을 보면 전부 그에게서 배운 것 같기도 했다. 꼭 닮은 두 부녀였다.

"이야, 죽인다. 살 야들야들한 것 좀 봐." 

카앤이 우걱우걱 물고기를 뜯어먹었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카앤. 나한테 뭐 하고 싶은 이야기 없어?" 

"응? 뜬금없이 뭔 소리야, 그게." 

"아니, 그냥. 친구잖아. 힘든 일이 있으면 서로 털어놓을 수도 있는 거니까." 

카앤의 멘탈을 케어하는 것도 내 역할이라면 역할이다. 

넌지시 꺼낸 얘기에 녀석이 동요하는 게 한눈에 보였다. 

"······혹시 티가 났나?" 

"조금은." 

카앤이 씹고 있던 걸 꿀꺽 삼키고,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모닥불 타는 소리만 울려퍼졌다. 카앤이 입을 열었다.

"랜, 내가 전에 한번 얘기한 적 있었지. 난 어릴 적의 기억이 아예 없다고. 기억나?" 

"어. 그랬었지." 

"요즘 악몽을 자주 꿨어. 꿈에서 내가 폐허가 된 마을에 혼자 서있어. 주위의 집들도 다 부서져있고, 사람들도 죽어있어. 난 그런 끔찍한 장소에 계속 움직이지도 못하고 서있다가, 어느 순간 풍경이 바뀌어. 마족이 레아를 죽였던 그때의 풍경이 눈앞에서 펼쳐져." 

"······." 

"처음에는 그냥 악몽인 줄 알았어. 근데······ 그게 아니었던 거야. 그건 내 어릴 적 기억이었어." 

어릴 적 기억? 카앤이 말을 이었다. 

"세인테아 서쪽 끝의 아제타 마을, 그 작은 마을이 내가 원래 살았던 고향이야. 그런데 어느 날 미친 마법사가 마을을 습격했어.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전부 죽었어. 내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 미친 마법사를 죽이고, 목숨이 위태로웠던 날 구해준 건 지금의 아버지였어." 

카앤이 무릎을 감싸안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게 악몽을 꾸면서 전부 다 생각났어. 내 바로 눈앞에서 죽었던 아버지하고 어머니가, 레아가 죽던 모습하고 꿈에서 자꾸 겹쳐 보였거든. 왜 지금껏 잊고 살았던 건지." 

나는 카앤의 이야기를 잠자코 경청했다. 카앤에게 이런 과거가 있었는지는 몰랐다. 

그건 게임에서도 나온 적이 없던 정보였으니까. 

'그러니까······.' 

벤은 카앤의 친아버지가 아니었고, 카앤은 어렸을 적에 그에게 구해지고 거두어졌다는 건가. 

그리고 가족을 잃은 충격으로 기억 상실이 왔다가 레아의 죽음을 계기로 기억을 떠올린 거고. 

"랜." 

"어." 

"이제 곧 집으로 돌아가야 돼? 나랑 계속 같이 있을 수는 없는 거야?"

"······."

"레아는 죽고, 리곤은 떠나버렸어. 에스카도 보고 싶어. 그러니까 너까지 떠나지 마. 다시 외로워지는 건 싫어······." 

카앤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나왔다. 눈가에는 눈물이 고였다. 나는 그런 녀석에게 말했다. 

"카앤, 걱정하지 말고 고기나 먹어." 

"······." 

"난 집으로 안 돌아가. 아니, 사실 못 돌아가. 나 가출했거든. 계속 네 집에 눌러살 수 있게 해준다면야 나야 좋지." 

카앤이 시뻘개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그치만 너 예전에는 집에 급한 볼일이 있다고······." 

"거짓말이야. 집에 볼일이 있는 게 아니라 다른 급한 일이었어." 

녀석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나는 능청스레 고기를 흔들어 보이고 한 입 먹었다. 

"······에이씨, 쪽팔리게."

카앤도 눈물을 닦고 피식거리며 먹던 고기를 마저 먹었다. 

녀석의 얼굴에 미묘하게 드리워있던 그늘이 한결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 

퍼억! 나는 도끼를 내려놓고 팬 장작들을 정리하다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침부터 눈이 펑펑 내리더니 마당에도 수북히 쌓였다. 

입에서 하얀 입김이 뿜어져나왔다. 이 세계에 떨어진 지는 몇 년이었지만 눈을 본 건 처음이었다. 

한마디로 내게는 이 세계에서의 첫눈이었다. 카앤과 함께 지낸 지도 반 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도시는 마족의 습격으로 입은 피해를 완전히 복구하고, 이전의 활기를 되찾았다. 

카앤도 더 이상 악몽을 꾸지 않게 되었다.

그냥 그렇게 별다른 일 없이 흘러가듯이 지냈다. 

퍽. 

장작을 옮기던 나는 시선을 돌렸다. 카앤이 저쪽에서 뭉친 눈덩이를 들고 짓궂게 웃고 있었다. 

"하지 마. 귀찮게." 

"하지 말아주세요, 해봐." 

"하지 마." 

얼굴로 다시 날아드는 눈덩이를 고개를 틀어 피했다. 나는 결국 장작을 내팽개치고 눈을 뭉쳤다. 

서로 한참을 신나게 던지고 있자니 벤이 문을 열고 나왔다. 동시에 그의 얼굴에 눈덩이가 꽂혔다. 

"아자!" 

놀리듯 팔을 휘적거리는 카앤을 보며, 벤이 눈을 털어내고 허허 웃었다.

"딸아, 해보자는 거냐?" 

그렇게 시작된 두 부녀의 눈싸움은 일방적이었다. 벤의 움직임은 특별히 빠르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기가 막히게 틈을 찾아서 카앤에게 눈을 맞혔다. 

"아으, 진짜!" 

결국 약이 오를 대로 오른 카앤이 마력까지 사용하기 시작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벤도 눈덩이에 담긴 카앤의 마력을 흡수해다가 똑같이 마력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 광경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신기하단 말이지.' 

벤은 아주 신기하게도 남의 마력을 제 마력처럼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대신 몸이 망가져서 스스로는 마력을 못 쌓는다는 얘기를 이전에 얼핏 들었지만, 그가 마력을 제어하는 방식을 보면 몸이 정상이었을 때는 얼마나 뛰어난 실력자였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벤의 과거에 대해 딱히 물어본 적은 없었기에, 어쩌다 마력을 쌓지 못하게 될 정도로 몸이 다친 건지는 알지 못했지만. 

치열한 눈싸움 끝에 혼자만 꼴이 엉망이 된 카앤이 헛웃음을 흘렸다. 

"아버지, 그렇게 딸을 이겨먹고 싶어?" 

"카앤아, 내가 언제 널 딸이라고 봐준 적이 있었냐?" 

나는 피식 웃고는 바닥에 떨어뜨린 장작을 주웠다. 그러다 시선을 느끼고 집 바깥을 슬쩍 쳐다봤다. 

장작을 전부 정리한 뒤 벤에게 말했다. 

"오늘은 제가 나가서 장 봐올게요." 

"나도 같이 갈까?" 

"됐어. 넌 머리에 묻은 눈 좀 털어라." 

밖으로 나선 나는 인적 없는 골목으로 들어갔다.

가만히 서서 기다리고 있자니 곧 누군가 모습을 드러내고 다가왔다. 

용사였다. 

"오랜만이다, 7군주." 

"그래. 왔군. 왜 굳이 바깥으로 불렀나?" 

"직접 찾아가면 카앤이 매달려서 잠시도 놔주지를 않을 테니까. 이따가 따로 방문하겠다." 

용사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보다 카앤과는 잘 어울려 지내고 있는 것 같더군."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게 말이다.' 

한편으로는 카앤과 필요 이상으로 가깝게 지내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왜냐면 랜은 녀석의 곁에 붙어있기 위해 만들어낸 인물일 뿐이니까. 

그래서 아카데미 생활을 했을 때도 항상 일정 거리를 두려고 했었다. 

근데 그 거리감이 한집에서 지내며 자꾸 무뎌지고 있었다.

······솔직히, 요즘은 그냥 다 신경 안 쓰고 편하고 즐겁게 지냈던 것 같다. 

계승이니, 성검이니, 남은 계승의 조건들을 생각하면 머리만 답답했으니까.

주어진 시간이 무한하지 않다는 건 잘 알고 있지만 말이다. 

"황실은 좀 어떻지?" 

"확실히 안정되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듣기로, 황제의 죽음이 공식화된 다음 황실은 별다른 잡음과 다툼 없이 1황자가 황위를 이었다고 한다. 

알고 보니 황제가 승계에 대한 유서를 확실히 남겨놨었기 때문이다. 

놈은 그동안 승계 문제를 포함해 이런저런 것들을 빌미로 미꾸라지처럼 용사의 응징을 피해왔지만, 결국 모든 걸 끝내러 나서기 전에는 사후 정리를 마쳐두었던 모양이다. 

"그보다 몸 상태는 어떤가?" 

"많이 회복되었다. 한동안은 잠잠하더군." 

전에 말했던 것처럼 용사의 몸에는 마왕의 힘의 잔재가 남아있다. 

그리고 부활이 가까워질수록 그것은 크게 반응한다.

한동안은 잠잠했다면, 당분간은 마왕에 대해서 걱정을 덜어도 되는 건가······. 

아, 젠장. 이러면 안 되는데. 또 마음이 느슨해진다. 

이번에는 꼭 용사와 계승에 대한 얘기를 제대로 나눠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또 미루고 말았다. 

서로의 근황에 대해서만 주고받고 이야기를 마쳤다. 

"왜 그러나?" 

"······아무것도 아니다. 난 이만 가봐야겠다." 

"그래. 그럼 조금 이따가 집으로 찾아가지." 

인사를 나누고 용사와 헤어지려는 순간이었다. 

스오오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섬뜩한 기운에,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커흑!"

용사가 피를 토하며 주저앉았다. 

그녀의 몸에서 시커먼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용사는 성검까지 소환하고서 신성력으로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기 시작했다. 

끈질기게 요동치는 기운을 겨우 가라앉힌 뒤, 용사가 참았던 숨을 뱉어내며 호흡을 골랐다. 

나는 넋을 놓고 있다가 물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 

용사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마왕이······ 방금 부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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