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격 (2)
촤아악!
마지막으로 남은 마족을 단숨에 베어넘기고서 에인델은 성검을 거두었다.
그녀는 반쯤 폐허가 된 도시와, 주위에 널브러진 사람들의 시체를 바라보며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아카데미 건물 또한 마족들의 공격에 의해 반파된 상태였다. 돌무더기에 깔린 학생들의 시체가 보였다.
에인델이 급하게 회복을 중지하고 성동을 나온 건 이변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가 느낀 대로, 바깥은 이미 끔찍한 참변이 휩쓸고 간 상황이었다.
최대한 빠르게 왔지만 이미 수많은 이들이 죽어나갔다.
마족의 동시다발적인 침공. 놈들이 원마를 포함해 극소수의 강력한 전력만으로 세인테아 지역 곳곳을 급습했다.
수도를 포함해 가장 가까운 지역들부터 거치며, 곧바로 이곳에 온 게 현재 상황이었지만······.
'없어.'
아무리 찾아도 카앤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카데미 부지 내에도 없었고, 도시 내에 있는 그녀의 집을 찾아가도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7군주도. 애초에 7군주가 이곳에 있었다면 이런 참사가 일어날 때까지 가만히 있었을 리도 없다.
카앤의 곁에 항시 붙어있어야 할 7군주가 이 도시에 없다면, 카앤 또한 없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거란 말인가?
"······."
에인델은 일단 위급한 사람들부터 구하기 위해 움직이려다가, 고개를 돌렸다.
바닥을 구르고 있는, 방금 죽여버린 원마의 머리가 눈을 검은빛으로 물들이더니, 입을 움직였다.
- 확실히 약해졌구나, 용사.
에인델이 미간을 좁혔다. 지금 말하고 있는 건 놈이 아니었다. 놈의 몸을 빌린 다른 마족이었다.
저 너머 올테로어에서, 이번 습격을 꾸몄을 원마들의 우두머리.
"아즈켈이냐."
원마의 머리가 쿡쿡 웃었다.
-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분께서 부활하실 날이. 기다리고 있거라.
그 말만을 남기고 원마의 머리는 재로 부스러졌다.
에인델은 굳은 표정으로 머리가 사라진 자리를 응시하다가, 이내 몸을 움직였다.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이냐, 카앤. 7군주.'
***
상황이 정리된 뒤, 나는 곧장 카앤이 있는 곳으로 서둘러 돌아갈 생각이었다.
설마 무슨 일이 있겠냐만은, 카앤과 멀리 떨어져있는 시간이 길어져서 좋을 건 없었기 때문이다.
전투로 지친 몸만 얼추 회복한 다음 해가 중천에 떠올랐을 즈음, 나는 아데사의 대족장들과 짧게 작별 인사를 나눴다.
"정말로 큰 도움을 받았다. 아데사를 구해준 빚은 언젠가 반드시 갚겠다, 7군주."
내게 감사를 전한 수인 대족장이 광랑에게 시선을 옮겼다.
"뭐. 왜 쳐다봐?"
"너와도 언젠가 다시 제대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이그넬."
그 말에 광랑이 코웃음을 지었다.
"이제 여기에 남아있는 미련은 아무것도 없어. 니들 얼굴을 볼 일도 다시는 없을 거고."
대족장은 혀만 차고 뭐라 더 말하지 않았다. 그들과 인사가 끝나고, 출발할 준비를 했다.
참모장이나 뇌후도 곧장 귀환할 거라고 했기에 그들과는 대수림을 나갈 때까지만 동행 예정이었다.
"7군주, 넌 엔록으로 가는 거냐?"
그때 광랑이 말을 걸어왔다.
나는 짧게 대꾸했다.
"아니."
"그럼 어디로 가는데?"
"······왜 관심을 가지지? 신경 꺼라."
"하, 삭막하기는. 그냥 물어본 거다."
광랑이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묘하게 광랑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바뀐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그렐의 일로 나한테 호의를 품기라도 한 건가?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볼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무슨 변덕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내 띠용이의 등에 타고 하늘로 날아올라 출발했다.
한창 이동하는 중, 나는 마력을 느끼고 품에 있는 연락 마도구를 꺼내들었다.
아셸에게서 연락이 온 것이었다. 무슨 일이지?
"······!"
내용을 확인한 나는 와락 인상을 일그러뜨릴 수밖에 없었다.
- 도시에 마족들이 침공했습니다. 현재 파악한 숫자는 셋, 모두 굉장히 강력한 놈들입니다.
- 원마가 껴있는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이제부터 전투에 나설 것이니 바로 답장을 드리지 못할 수 있습니다. 서둘러 돌아와주십시오, 론 님.
마족이······ 침공했다고? 세인테아에? 아니, 설마 카앤을 노린 습격인가?
마족들이 계승자의 존재를 아는 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하지만 왜 하필 헤리윈의 영지를? 나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아니, 아니야.'
이내 냉정을 되찾았다. 그래, 이건 아마도 그거일 수 있다. 마족의 침공은 게임에서도 있던 이벤트였다.
놈들은 마왕의 부활이 가까워지자, 마지막까지 신중을 기하고자 세인테아 지역 곳곳을 소규모 전력으로 습격했었다.
용사가 혹시라도 올테로어에 단독으로 처들어오는 변수를 줄임과 동시에, 용사의 현재 상태가 어떤지 가늠해보는 것을 목적으로 말이다.
황제의 계획도 시간이 당겨져 지금 일어났다. 마족의 침공이라고 그러지 말란 법은 없었다.
용사도 마왕의 부활이 가까워졌다고 하지 않았던가.
'씨발.'
나는 아셸에게 연락을 보내봤지만 답장은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혹시라도 도시를 공격한 전력에 원마가 껴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가슴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지금 당장, 서둘러 카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하지만 이대로는 너무 느렸다. 아무리 와이번이라도 해도 쉬지 않고 전속력으로 가봐야 하루는 훌쩍 넘게 걸릴 거리였다.
어떡하지? 뭐라도 방법이 없나?
머리를 쥐어짜던 나는 한 가지 생각을 번뜩 떠올렸다.
"참모장!"
옆쪽에서 날던 참모장이 날 쳐다봤다. 나는 그를 부른 다음 아래로 내려갔다. 내가 지면에 내려서자 세 사람도 이동을 멈추고 따라서 내려왔다.
"왜 그러십니까? 7군주님."
그들의 의아해하는 시선이 모였다. 나는 참모장에게 말했다.
"세인테아에 마련해둔 텔레포트 지점이 있나?"
참모장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게임에서 스치듯 지나갔던 정보였다. 그걸 간신히 떠올렸다.
대군주성 지하처럼, 참모장이 세인테아에도 초장거리 텔레포트 지점을 하나 가지고 있다는 걸.
"예, 있습니다."
"지금 당장 그곳으로 이동이 가능하겠나?"
"가능합니다만······ 우선 무슨 일인지 설명을 먼저 해주시겠습니까?"
내가 잠시 머뭇거리자, 참모장이 말을 이었다.
"아시다시피 제 텔레포트는 거리가 거리인 만큼 엄청난 마력과 자원을 소모합니다. 특히 칼데릭 바깥에 은밀히 마련해둔 지점들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아무리 군주님께서 부탁하시는 일이라고 해도, 납득할 만한 이유가 없다면 죄송하지만 들어드릴 수 없습니다."
참모장은 대군주의 직속 수하. 군주와는 상하관계가 아니기에, 나는 그에게 명령할 권한이 없다.
별 수 없다고 생각한 나는 이유를 간략히 설명했다.
"방금 수하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마족들이 세인테아를 급습했다."
그 말에 참모장과 뇌후가 깜짝 놀랐다. 광랑은 눈썹을 까딱였다.
"그게 사실입니까?"
"그래. 그리고 세인테아에서 내 명령을 수행하던 수하가 위험한 모양이다."
"수하라면 혹시······."
"알고 있지 않나? 백월족의 유일한 후예."
당연히 카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대신 아셸로 이유를 만들었다.
참모장도 내가 아셸을 최측근으로서 소중히 여긴다는 건 알고 있을 테니, 납득 못할 이유는 아닐 거다.
"시간이 없다, 참모장. 내 부탁을 거절할 건가?"
나는 싸늘한 목소리로 은근히 그를 압박했다. 곧 참모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마족이 움직였다면 저도 서둘러 움직여 파악할 필요가 있으니. 그럼 지금 바로 이동하시겠습니까?"
"그래. 최대한 서둘러줬으면 좋겠군. 정확히 지점이 세인테아의 어디지?"
"칸테버 령 인근의 산맥입니다. 세인테아 동쪽에 위치한 곳입니다."
세인테아 동쪽이라면 다행히 바욘터 령과도 가까웠다.
"어이, 참모장. 나도 간다."
그때 갑자기 광랑이 끼어들어서 말했다. 참모장이 놀란 기색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5군주님께서도 동행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문제 있냐? 7군주가 많이 지쳤을 테니까 힘이 달리면 좀 도와주지, 뭐."
뇌후도 나서서 말했다.
"저도 동행하겠습니다."
"엉? 너는 왜."
"텔레포트할 거라면 굳이 저 혼자 시간 낭비하며 멀리 돌아갈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나는 굳이 그들을 말리지 않았다. 가서 어떤 적을 마주하게 될지 모르는데 강력한 전력들이 추가되면 나쁠 건 없었으니까.
"다 같이 이동하는 게 가능하겠나요, 참모장?"
"아슬아슬하게 가능하겠군요. 모두 제 주위로 모여주십시오."
나와 광랑, 뇌후가 참모장의 곁에 섰다.
와이번들도 최대한 가까이 그의 곁에 붙였다.
울렁! 곧 거대한 마력이 유동하며, 푸른빛과 함께 주위의 공간이 일그러졌다.
***
아셸은 미간을 좁힌 채 온 정신을 집중했다. 상대는 원마. 자신의 힘으로는 쓰러뜨릴 수 없을 것이다.
'탈출시켜야 한다.'
이 자리에서 죽더라도 어떻게든 계승자만큼은 살려야 했다. 그것이 그분이 내린 명령이니까.
그렇다면 당장 해야 하는 일은 명확했다.
"내가 놈을 상대하는 동안 모두 도망쳐라."
아셸의 말에 카앤, 리곤, 레아 세 사람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도망이라니, 가능할 리가 없지 않느냐."
원마, 옥시토데스가 조소를 흘리며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그들을 둘러싸고 반구 형태의 거대한 결계가 솟아올랐다.
장애물들은 모조리 잿가루가 되었다.
콰아앙! 결계가 완전히 생성되기 전에 아셸이 다급히 검기를 날렸으나, 조금의 타격도 주지 못하고 소멸했다.
탈출로까지 모조리 막혀버린 상황. 하지만 아셸은 곧장 다음 행동에 나섰다.
전력을 다해 힘을 끌어올리고 옥시토데스를 향해서 돌진했다.
어째서인지 흥미가 깃든 눈으로 리곤을 쳐다보고 있던 옥시토데스가 그제야 시선을 옮겼다.
"그런데, 넌 아무리 봐도 백월족으로 보이는데······."
옥시토데스는 제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손만 휘저으며 아셸의 공격을 모두 간단히 막아냈다.
"아마 칼데릭 7군주의 최측근이라고 했던가? 칼데릭 쪽의 벌레는 왜 또 세인테아에 있을까?"
아셸은 자신의 정체가 단번에 간파당한 것에 당황하지 않았다.
올테로어의 마족들도 바깥세상의 일에 눈과 귀를 닫고 있는 건 아니다.
7군주의 최측근이 백월족의 생존자라는 건 이미 유명한 사실이 됐으니, 충분히 유추가 가능할 테니까.
아셸은 오로지 공격에만 집중했다.
아주 조금이라도 틈을 만들어보기 위해서, 활로를 찾기 위해서. 그러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둘 사이의 힘의 격차는 거대했다.
옥시토데스가 반격에 나서자, 아셸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피를 흩뿌리며 날아가 땅에 처박혔다.
그 광경을 보며, 카앤은 검을 꽉 쥔 채 속으로 필사적으로 되뇌었다.
'제발, 제발!'
황금빛의 검기. 그때의 그 알 수 없는 힘을 다시 한 번만 사용할 수 있다면.
하지만 그 절박한 바람에도 그녀의 검이 황금빛으로 물드는 일은 없었다.
옥시토데스의 시선이 다시 리곤에게로 향했다.
"거기 어린 인간아. 그래, 너 말이다."
절망 섞인 얼굴을 하고 있던 리곤이 그를 쳐다봤다.
"네게 제안을 하나 하마. 나와 계약하고 내 힘을 받아들여라. 그리고 내게 복종해라."
"······무슨 소리를······."
"네게선 자질이 느껴지는구나. 너라면 내 힘을 꽤 많이 받아들일 수 있을 거다. 이깟 버러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강해질 수 있다, 너는."
옥시토데스가 목이 잘린 뱀 머리 마족의 시체를 향해 턱짓을 했다. 리곤이 더듬더듬 말을 내뱉었다.
"내가 그런 걸······ 받아들일 리 없잖아."
옥시토데스가 입꼬리를 올렸다.
"제안을 받아들이면, 이 자리에 있는 인간들 중 널 제외하고 한 명을 더 살려주마. 그렇다고 해도?"
악마의 속삭임에 리곤의 눈빛이 흔들렸다. 레아가 입술을 짓씹으며 리곤의 앞을 막아서고 소리쳤다.
"절대로 받아들이지 마, 리곤! 절대로······!"
푸슉. 파육음이 울렸다.
레아는 의식이 아찔해지는 걸 느끼며, 고개를 내렸다. 가슴팍에 구멍이 뚫려있었다.
"······아."
그녀의 몸이 순식간에 재가 되어 사라졌다.
리곤은 빈 허공을 넋이 나간 채 바라보다가 털썩 무릎을 꿇고 말았다.
"어, 어······?"
카앤도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레아가 죽었다. 다만 그 과정이 너무 허무해서, 너무 현실적이지가 않아서, 우두커니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이제 둘 남았구나. 선택하거라. 둘 중에 하나라도 살릴지, 아니면 전부 죽을지."
옥시토데스의 목소리가 정신을 일깨웠다. 카앤은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놈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 개자식아아아!"
포효하며 달려드는 카앤을 향해서 옥시토데스가 손을 휘저었다.
동시에 아셸이 뛰어들어 그녀를 감싸안고 바닥을 굴렀다. 간발의 차였다.
공격에 스친 아셸의 얼굴 반쪽이 재로 흩날려 근육이 다 드러났다.
"으윽······."
옥시토데스가 아셸을 향해서 다시금 손을 뻗었다. 리곤이 소리쳤다.
"안 돼! 제발!"
"자아, 선택해라. 다음으로는 저 백월족이다. 나와 계약하겠느냐?"
악마의 조소가 울려퍼졌다.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절망이 그림자를 드리웠다.
리곤이 비참한 얼굴로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쿠웅.
결계에 거대한 진동이 울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결계의 면에 푸른 뇌기가 번쩍였다.
콰아아앙!
산산히 박살난 결계 너머로 일련의 무리가 걸어들어왔다. 그들을 보며 옥시토데스가 눈매를 좁혔다.
"너희는······."
칼데릭의 5군주 광랑, 2군주 뇌후, 참모장. 그리고 7군주 론.
"원마인가? 거하게도 깽판을 쳐놨네, 마족 새끼."
광랑이 웃음을 흘리며 등의 대검을 뽑아들었다.
7군주가 쓰러져있는 세 사람을 둘러봤다.
"······옥시토데스."
그가 더없이 싸늘한 눈으로 입을 열었다.
"여기서 죽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