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즉사기 들고 게임 속으로-170화 (170/189)

습격 (1)

세인테아 바욘터 령, 헤리윈의 본성이 위치한 도시. 여느 때와 다름없이 도시의 성문 앞은 붐비는 사람들로 검문이 한창이었다.

"통행증이나 따로 신분을 증명할 물건을 보여주시오." 

신참 경비병인 펄스는 최선을 다해 꼼꼼한 검문을 진행하고 있었다. 

고참인 셀드는 옆에서 그런 그를 보며 혀를 굴렸다.

"인마, 기합 좀 빼고 적당히 해라. 그렇게 하다간 진빠져서 이 짓거리도 오래는 못 해먹어." 

"아, 옙! 알겠습니다!" 

"알긴 뭘 알아, 새끼야. 그래도 어리버리타는 놈들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넌 그 상태에서 요령만 얼른 익혀라." 

이번엔 한 마차가 줄을 서지 않고 성문으로 다가왔다. 보통 짐마차는 아니고 한눈에 봐도 귀족의 행차였다. 

이번엔 긴장한 펄스 대신 셀드가 나섰다. 

"실례합니다. 신분을 밝혀주시겠습니까?" 

"북쪽 라드리코 령을 다스리는 웜벨 가문의 행차요! 귀하신 분들이 타고 계시니 어서 통과시키시오." 

마부가 건넨 통행증을 확인한 셀드가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실례 많았습니다. 들어가십시오." 

성문을 통과하는 마차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펄스를 보며, 셀드가 피식 웃었다.

"재수없지? 지가 귀족인 것도 아닌데 씨발 존나 거만하게 굴고 있어." 

"예? 아, 아닙니다." 

"하다 보면 귀족 대접 받겠다고 어중간한 상인 새끼들이 줄 무시하고 오기도 하거든? 그런 새끼들한테는 얄짤없이 굴어도 돼. 모가지 빳빳하게 굴면 짐칸의 짐들도 창으로 다 찌르고. 그게 또 경비질하면서 즐길 수 있는 재미거든." 

그때 줄에서 소란이 일었다. 

"어이, 거기! 당신들 뭐야? 여기 줄 안 보여?!" 

줄을 선 사람들이 소리치는 게 들렸다. 시선을 돌린 셀드는 상황을 파악하고 눈쌀을 찌푸렸다. 

웬 놈들이 대놓고 줄을 무시한 채 성문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로브를 뒤집어쓴 여러 명의 사람이었다. 

"거기! 멈추시오. 차례를 지켜야지 뭘 하는 거요?" 

셀드의 호통에도 그들은 들은 채도 안 하고 계속해서 다가왔다.

셀드는 순간 귀족들인가 싶었으나, 행색이나 분위기나 아무리 봐도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다. 

그냥 미친놈들인가? 

"야, 신참. 창 들어라." 

"예, 예!" 

이내 코앞까지 다가온 그들을 향해 셀드가 창을 내민 순간이었다. 

"말이 말 같지들 않나? 순서를 지키라니······." 

쩍! 선혈이 튀어오르며 셀드의 몸이 반으로 쩍 갈라졌다. 

옆에 서있던 펄스는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사고가 정지했다가, 얼굴에 튄 핏물의 뜨끈한 온기를 느끼고서 비명을 질렀다. 

"으, 으아아악!" 

그 비명은 얼마 이어지지 못하고 펄스의 목도 땅바닥에 툭 떨어졌다.

성문 앞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줄을 서있던 사람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흩어졌다. 

"뭐, 뭐야? 저 새끼는!" 

성벽 위에서 병사들이 다급히 공격을 준비했다. 시위를 당긴 활을 겨누고, 마법을 전개했다. 

"쏴라! 바로 쏴버려!" 

경비대장이 잔뜩 분노한 채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화살비와 마법 폭격이 로브의 인물들을 향해 쏟아졌다. 

병사들의 대응은 나름 신속했으나, 그것은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했다. 

로브 중 한 명이 허공에 대고 손을 휘젓자, 회색빛이 번쩍이더니 날아들던 화살과 마법들이 모조리 소멸했다. 

후두둑······. 

그와 동시에 성벽 위에 있던 병력들 또한 일시에 잿더미처럼 부스러졌다. 잿가루가 성벽을 타고 수북히 흘러내렸다.

시선을 돌린 괴인이 도망치는 사람들을 향해서도 손을 휘저었다. 

그들 또한 병사들처럼 모조리 잿가루로 흩날렸다. 

"하등해. 너무도 하등해." 

주위의 모든 인간들을 전부 먼지로 만들어버린 괴인이, 로브의 후드를 내렸다. 

그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으며, 4개의 눈을 가지고 있었다. 명백히 인간의 모습은 아니었다. 

"새삼 우습구나. 이런 하등한 것들에게 패전해, 그 긴 세월을 올테로어에만 웅크리고 있었다는 사실이." 

괴인, 마족이 두 팔을 활짝 펼치며 웃었다. 

"오랜만에 밟는 세인테아 땅이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전부 죽여라." 

***

랜이 헤리윈의 성에서 혼자 급하게 떠나고, 카앤과 리곤과 레아는 나름 저들끼리 잘 놀았다. 

"레아, 저기 있는 나무에 열린 과일 따먹어도 돼?" 

"멍청아, 한눈에 봐도 덜 익었잖아. 얼마나 떫은지 궁금하면 먹어보든가." 

세 사람은 성 내부의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기어코 나무 위로 올라가 설익은 과일을 먹고 인상을 찌푸리는 카앤을 보며, 레아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쟨 대체 왜 저러는 거야?" 

"호기심이 많아서 그래. 그냥 그러려니 하는 게 편해." 

리곤이 카앤이 올라간 나무 그늘 아래 자리를 잡고 앉았다. 

레아는 나무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은 리곤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옆에 슬며시 앉았다. 

"일주일 성에서 지내니까 어때. 불편한 건 없어?" 

"응? 당연히 없지. 매일 진수성찬만 먹고 신나게 놀고 있는데." 

"그러면 다행이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며 리곤과 레아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붙어 앉아서, 위에서 나뭇가지를 헤집고 다니는 카앤을 구경했다. 

"레아, 너는 어때. 나뿐만 아니라 다른 녀석들도 데려오기를 잘했지?" 

"랜은 갔지만 말이야." 

"하하, 아무튼 한 명이라도 더 사람이 많아지니까 훨씬 즐겁지 않아?" 

레아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런 그녀를 보며 리곤도 웃었다. 

"어이, 얘들아! 여기 잘 익은 거 드디어 발견했다! 너희도 맛 좀 봐봐!" 

카앤이 한 입 크게 베어문 과일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리곤이 그걸 받아들었다. 그리고 한 입 베어물어서 먹고는, 레아에게 내밀었다. 

"맛있다. 너도 먹어봐."

레아는 머뭇거리다가 과일을 받아들고, 작게 야금 씹어먹었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레아 또한 그들과 붙어지내며 낯선 경험들을 했다. 

친구들을 집에 초대한 것도, 성을 둘러보며 뭐가 있는지 하나하나 소개해준 것도, 도시에서 열리는 축제를 함께 즐긴 것도, 과일 하나를 허물없이 셋이 나눠먹는 것도. 

'······즐겁네.' 

전부 묘하게 마음이 들뜨고, 즐거운 일들이었다. 

레아는 더 이상 스스로를 속이려고 하지 않았다. 친구를 만드는 건 두려운 일이 아니었다. 

함께하는 건 즐겁다. 새삼 지난 시간들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왜 다른 사람들을 피하고 밀어냈을까? 

이런 녀석들과 좀 더 일찍 친구가 됐었다면······. 

콰아아앙!

그때, 거대한 폭음이 울려퍼졌다. 리곤과 레아, 그리고 카앤의 시선이 동시에 돌아갔다. 

소리의 근원지는 성 바깥이었다. 

"······뭔가 엄청난 게 터지는 소리가 울렸는데? 뭐야?" 

세 사람은 일단 서둘러 성 안으로 들어갔다. 어째서인지 성 내부의 병력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기사들도 완전히 무장한 채였다. 

"아가씨!" 

1층 홀에서 마주친 유즈가 다급히 레아를 불렀다. 레아는 그에게 물었다. 

"유즈, 이게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도시가 공격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직 정확한 건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뭐? 감히 누가······." 

그 순간 다시 한 번 폭음이 울려퍼졌다. 이번엔 바깥이 아니라 성 내부였다.

성 입구에서 무언가와 전투를 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끔찍한 비명들도. 헤

리윈의 본성이 공격받고 있는 초유의 사태였다. 

대체 누가? 어떻게? 의문을 품을 틈도 없었다. 유즈는 심각한 표정으로 일단 레아를 이끌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아가씨. 어서 서두르시······!" 

콰아아아앙! 

입구의 대문이 폭발하며, 근처에 있던 이들이 충격파에 휘말려 날아갔다. 

입구를 부수고 들어온 침입자는 몸은 인간, 머리는 뱀의 머리를 하고 있는 괴물이었다. 

괴물이 손에 들고 있는 한 기사의 목을 휙 내던졌다. 

그게 기사단장인 로왈트의 목이라는 걸 알아본 유즈는 저도 모르게 침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괴물이 혀를 날름거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마침 우글우글 몰려있구나, 벌레 놈들. 전부 죽어라." 

마족. 유즈와 카앤, 리곤, 레아 네 사람은 놈이 마족이라는 걸 곧바로 눈치챘다. 

저번에 마주한 적이 있던 그 마족 특유의 이질적인 기운을 풀풀 풍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죽여라!" 

홀에 나와있는 기사와 마법사들이 곧장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마족은 가공할 속도로 홀을 휘젓고 다니며 손쉽게 기사와 마법사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놈의 몸을 뒤덮은 비늘은, 성의 고위 마법사들의 살상 마법에도 타격이 아예 없다시피했다. 

"유즈! 어서 레아 아가씨를 데리고 빠져나가라!" 

그사이, 고위 마법사들을 더 이끌고 와서 전투에 합류한 헤리윈 가의 마법사장이 유즈에게 소리쳤다. 

전열을 갖춘 마법사들이 작정하고 마족을 향해 마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폭음과 섬광이 진동했다.

"아가씨, 오십시오! 후문으로 빠져나가야 합니다!" 

"하, 하지만······!" 

콰아앙! 

레아와 리곤, 카앤 세 사람을 데리고 일단 빠져나가려던 유즈는 순간 두 눈을 의심했다. 

마족이 사방으로 폭발시킨 기운에 마법사들이 한순간에 모조리 폭사했다. 

마법사장은 간신히 버텼으나 이내 마족에게 붙잡혀 반으로 찢어졌다. 

헤리윈 가의 최고 전력이나 다름없는 마법사들이, 잠깐의 시간 벌이조차 안 된다니. 말이 되는가? 

뱀 머리 마족의 힘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적어도 가주까지 자리를 비운 현재 본성에 있는 전력으로는 저 괴물을 막을 수 없어 보였다. 

"······아가씨, 움직이십시오. 어서."

유즈가 그렇게 말하며 검을 뽑아들었다. 동시에 섬전처럼 유즈의 근처로 다가온 마족이 꼬리를 휘둘러쳤다. 

유즈는 제대로 반응조차 하지 못한 채 꼬리에 얻어맞고 벽면에 날아가서 처박혔다. 

"안 돼! 유즈!" 

레아가 마법을 펼쳤고, 리곤과 카앤도 검을 뽑아들었다. 그러나 그것이 의미가 있을 리 없었다. 

마족이 벌레 쫓듯 손을 휘저어 그들의 몸을 통째로 터뜨려버리려던 순간이었다. 

쩌어엉! 

어디선가 날아든 순백의 검기가 마족의 팔을 반쯤 잘라버렸다. 

"끄아아악······!" 

처음으로 타격을 입은 놈이 고통에 찬 괴성을 내지르며 물러섰다. 

성 바깥에서 하나의 신형이 날아들었다. 그 광경을 보고 리곤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아셸!" 

난입한 인물의 정체는 아셸이었다. 

이미 전신을 새하얗게 물들이고 있는 아셸은 잠깐의 틈도 주지 않고 마족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사나운 검격이 몰아치며 마족의 비늘과 살을 베어냈다. 

마족은 제법 버텼지만 이미 기습부터 당하고 시작한 불리한 형세에, 곧 순식간에 목이 날아가버렸다. 

쿠웅. 목을 잃은 마족의 몸이 바닥에 허물어졌다. 

아셸은 검을 거두고서 멍하니 서있는 세 사람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카앤, 계승자가 무사하다는 걸 확인하고 속으로 안도했다. 

"아셸 경이 어떻게 여기에······?"

"설명은 나중에 해주마, 리곤. 우선 나를 따라와라. 두 사람도." 

지금은 서둘러서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는 게 우선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도시가 마족들에게 공격받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때였다. 

"······!" 

등골에 소름이 끼칠 정도의 섬뜩한 기운. 아셸은 무너진 입구 쪽으로 홱 고개를 돌렸다. 

차마 기척을 느끼지도 못했다. 그곳에는 어느새 또 다른 마족이 서있었다. 

다만, 방금 죽여버린 놈과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의 강력한 괴물이. 

"제법 큰 벌레가 하나 껴있었군. 바깥에서 내 권속들을 죽인 게 너로구나."

4개의 눈을 달고 있는 창백한 피부의 마족이 입을 열었다. 

아셸은 바로 직감했다. 놈의 정체를. 

이 정도로 강대한 기운을 품은 마족이라면 원마밖에는 없었으니까.

원마 서열 8위, 옥시토데스. 

감히 대항할 수 없는 재앙이 그들의 눈앞에 강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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